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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김옥균·광개토태왕비 그리는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

  • 김영림 | 일본 통신원, 군사평론가 c45acp@naver.com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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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운동권 학생에서 만화가로 변신, 그리고 역사를 보다
  • ● 한일관계사에서 김옥균과 안중근의 비중은?
  • ● 정치를 위해 역사를 꾸민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
  • ● “동북공정? 중국은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선각자란 찬사와 친일파란 비판을 동시에 받는 김옥균과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이 숨은 광개토태왕비를 소재로 만화를 그린 일본 작가가 있다. 만화왕국 일본을 뜻하는 ‘자파니메이션(Japan+Animation)’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원로 만화가 중 하나인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67)가 바로 그 사람.

‘기동전사 건담’을 만든 이 중의 한 명이라고 하면 우리 젊은이들도 “아, 그 작가!”라고 할 정도로 한국 팬도 많은 편이다. 1947년 홋카이도(北海道)에서 태어난 그가 역사를 소재로 한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66년 아오모리(靑森)현의 히로사키(弘前)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과격 운동권 학생에서 만화가로

일본에서‘전공투(全共鬪)’를 대표로 한 대학가 투쟁이 한창이던 1968년 그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베트남의 평화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이끌다 1970년 대학에서 제적됐다.

그 후 도쿄로 상경한 그는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만화영화 ‘철완(鐵腕) 아톰’(한국에서는 ‘우주소년 아톰’으로 소개됨)제작사로 유명한 ‘무시(?)프로덕션’의 2기생이 된 그는 애니메이션의 제작과 연출에 참여하면서 경험을 쌓아가다, 1979년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아리온’을 내놓으며 만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그리고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만화 제작에 집중해, 1990년 일본만화가협회 우수상을 받게 되는 ‘나무지’를 내놓았다.

일본 고대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오쿠니누시(大國主)’라는 일본 창세기의 신이 한 명 나오는데, 그 신의 별명이 바로 ‘나무지’다. 일본 고대 사서에선 일본을 만든 3대 신 중 하나로 ‘전투의 신’이자 ‘폭풍의 신’인 스사노를 꼽는다. 오쿠니누시의 장인이 바로 스사노다.

그는 이 만화(나무지)에서 스사노를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일본을 만든 신은 일본에서 나왔다는’ 전통적인 시각을 부정하는 것이라 주목을 받았다.

이렇듯 금기시하는 근·현대사로도 영역을 넓혀, 1996년에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군상(群像)을 다룬 ‘무지갯빛 트로츠키’, 2000년에는 조선 출신의 풍운아 김옥균의 최후를 소재로 한 ‘왕도의 개(王道の狗)’를 출간하고 지금은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을 소재로 러일전쟁기를 다룬 ‘하늘의 혈맥(天の血脈)’을 ‘월간 애프터눈’에 연재한다. 터부를 건드린 이 세 작품은 ‘야스히코의 근대 3부작’으로 꼽힌다.

일본은 일본인과 한족, 조선인, 만주족, 몽골인의 다섯 민족이 협동하자는 ‘5족협화(五族協和)’와 맹자의 왕도(王道)정치를 실현한 ‘왕도낙토’를 만들자며 만주국을 세웠다. 그러나 만주국의 실체는 ‘일본의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구호들이 현실 세계에서 굴절되고 왜곡돼가는 것을 ‘무지갯빛 트로츠키’에 담담히 그려 넣었다.

근대 일본이 겪은 굴절과 오욕의 근원을 밝히는 데에 집중한 그는 한중일 3국 연대를 주장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김옥균에 주목했다. 김옥균을 주인공으로 한 ‘왕도의 개’ 취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체 일본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메이지(明治)유신 시대에 이룩한 성과는 언제부터 일그러져 일본을 패권주의 국가로, 온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는가. ‘왕도의 개’에서 다루는 테마는 바로 그 점이라고 할 수 있다.”(‘왕도의 개’ 4권 후기에서)

한국은 김옥균을 갑신정변을 통해 민씨(閔氏) 일족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꾀했으나 그 과정에서 일본을 끌어들인 ‘원조 친일파’라는 복잡한 시각으로 본다. 일본은 다르다.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 한 그를 처치 곤란한 식객으로 냉대했지만,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를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혁명가이자 우국지사로 추앙했다.

김옥균은 일본 근대사상의 거물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일본 근대민주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의 아버지인 나카에 초민(中江兆民), 전전(戰前) 일본 우익의 거두이자 국수주의자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며, 일본의 정책과 대외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파란만장했던 김옥균의 생애가 근대 일본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 작품이 바로 ‘왕도의 개’다.

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

메이지유신 10여 년 뒤인 1880년대 일본에서는 서구 침략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지를 놓고 2개 노선이 대립했다. 한중일 3국이 공동 근대화를 통한 연대를 해 대항하자는 ‘흥아론(興亞論)’과 일본은 아시아와의 관계를 끊고 적극적인 서구화를 추진해 서구의 일원이 되자는 ‘탈아론(脫亞論)’이 그것이다. 탈아론은 훗날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로 연결돼 근대 일본이 보여준 선민(選民)의식과 아시아 멸시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후쿠자와도 처음에는 아시아와의 연대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계기는 김옥균과의 만남이었다. 갑신정변 3년 전인 1881년 첫 만남에서부터 이들은 서로에게 강렬히 끌렸다. 조선의 근대화를 꿈꾸는 김옥균을 위해 후쿠자와는 물심양면으로 협력했다. 개화파가 주도한 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발간이 준비되자, 그는 심복을 기술고문으로 파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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