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하도급계약서는 ‘乙死조약’ 노예문서 상생 위한 표준하도급계약서 의무화 절실”

전문건설공제조합 이종상 이사장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14-05-21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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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토지공사 사장 등 40여 년 경력 ‘건설 전문가’
    • 금융기관 역할 넘어, 전문건설업계 동반자 되는 게 제1목표
    • 무조건 전액보상 ‘위약벌’ → ‘실손보상’으로 바꿔
    • 수직적·종속적인 발주 체계, 수평적·협력적 체계로 바꿔야
    “하도급계약서는 ‘乙死조약’ 노예문서 상생 위한 표준하도급계약서 의무화 절실”
    6월 18일은 ‘건설의 날’이다. 건설업계는 전체 취업 인구의 7% 이상, 국내총생산(GDP)의 15% 이상을 책임지는 등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큰 기둥이다. 건설을 담당하는 업체는 크게 대형 종합건설업체와 이들로부터 하도급을 받아 실제 시공을 하는 전문건설업체가 있다. 대형 종합건설업체와 전문건설업체는 공존·상생해야 하는 관계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박근혜 정부가 주창한 경제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해소해야 할 대표적 ‘갑을관계’ 사례로 손꼽힌다.

    전문건설업계의 현황과 어려움을 듣기 위해 전문건설공제조합 이종상(64) 이사장을 만났다. 공제조합은 1988년 건설산업기본법에 의해 설립된 건설전문 금융기관이다. 2013년 말 기준 4만5000여 전문건설업체가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자산 규모가 약 4조4000억 원에 달한다. 연간 11조 원의 보증과 2조 원의 융자를 조합원에게 제공한다. 전국 34개 지점, 450명의 직원이 전문건설업체를 도우려 일한다.

    ▼ 공제조합에 대한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건설은 공사기간이 길고,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얽히는 산업이어서 공사 발주부터 계약 체결, 공사 실행, 완공, 완공 후 유지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보증이 필수 불가결합니다. 또한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자금 공급과 보험 등 금융서비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문건설업체는 대부분 중소기업이라 문턱이 높은 일반 금융기관에서 이런 금융서비스를 제공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제조합은 건설공사에 필요한 보증과 융자, 공제 등을 전문건설업체에 제공하는 일을 합니다.”

    너무나 열악한 실상에 놀라



    ▼ 2011년 말에 취임하셨죠.

    “2011년은 세계금융위기 후폭풍이 본격적으로 건설시장에 불어닥친 시기로, 공제조합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건설시장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조합원 부실이 급증해 연간 1000억 원대였던 보증금 청구 금액이 6000억 원을 넘어섰고, 연간 200억 원대였던 보증지급금도 10배 이상 폭증했습니다. 그야말로 태풍의 중심을 지나는 상황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입니다.”

    ▼ 건설 분야 전문가인데, 취임해서 보니 전문건설업계 실정이 어떻던가요.

    “건설 관련 분야에서 공직생활을 30년 했고, 현대건설과 도로공사에도 있었고, 한국토지공사 사장도 지냈습니다. 건설 현장을 잘 아는 전문가라 자부했는데, 와서 보니 너무나 열악한 실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건설 현장의 최일선에서 직접 시공을 담당하며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절반 이상을 든든히 지키는 전문건설업계가 소위 ‘을’이라는 이유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부동산 경기침체 장기화로 건설 물량이 줄어드는 등 건설산업 전체가 위기인 상황이다. 또한 최저가낙찰제와 실적공사비 같은 제도가 공사예정 가격 하락을 부추겨 건설공사 채산성이 날로 악화된다. 원도급사인 종합건설업체, 하도급사인 전문건설업체 할 것 없이 건설업계 전체가 총체적 난국인 셈인데, 전문건설업계가 더 아우성인 것은 왜일까.

    “원도급사들은 ‘갑’이란 지위를 악용해 하도급업체를 쥐어짜고 있어요. 저가수주를 하더라도 자기 이윤은 챙기고, 손해를 하도급업체에 떠넘기는 것이죠. 건설업계 전체가 이중고를 겪는다면, 전문건설업계는 삼중고, 사중고를 겪는 셈입니다. 하도급사와 상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원도급사도 많이 있지만, 일부는 하도급사들을 소모품처럼 갈아치우는 게 현실입니다. 갑을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나 다름없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게 문제인가요.

    “공정하고 투명하지 못한 하도급 입찰시스템부터 문제입니다. 원도급사가 내부적으로 정한 실행공사비를 제시하는 업체가 나올 때까지 고의로 유찰을 시켜 하도급 금액을 후려치고, 낙찰이 되더라도 수의계약을 통해 금액을 더 낮출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도급사로서는 원도급사의 눈 밖에 나면 앞으로 입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도급업체는 입찰 단계부터 일한 만큼 제값을 받지 못하게 돼 공사비 부족에 허덕이는 거죠.”

    외담대 제도의 맹점

    “하도급계약서는 ‘乙死조약’ 노예문서 상생 위한 표준하도급계약서 의무화 절실”

    전남전문건설회관 준공식에서 식사를 하는 이종상 이사장(위). 2012년 우리은행과 공사선급금의 효율적 공동관리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 계약 조건도 문제가 많다고 하더군요.

    “보증사고가 발생해 우리 공제조합이 원도급사에 보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하도급계약서를 보게 되면 ‘이런 계약서에 왜 도장을 찍었나’ 싶을 정도로 불리한 조항으로 가득 찬 계약서가 많습니다. 노예문서, 을사(乙死)조약이라 할 정도입니다. 원-하도급 간 관계의 시작이자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하도급계약이 이렇게 맺어지니 그 실상은 불 보듯 뻔하지요.”

    ▼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공정한 계약을 유도하기 위해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을 권장하지 않나요.

    “공정거래위원회가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홍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권장’ 사항일 뿐이어서 실제 현장계약서에는 불공정한 조항이 담겨 있어요. 하도급업체가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현실에서 표준하도급계약서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공정 하도급은 공정한 계약관계에서 시작되는 만큼 반드시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을 의무화해야 합니다. 그게 공정 하도급 거래 질서 확립을 위한 가장 효율적 방안입니다.”

    ▼ 또 어떤 문제가 있나요.

    “외담대 제도도 문제입니다. 하도급업체가 원도급사로부터 받아야 할 공사대금(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공사대금을 조기에 현금으로 확보하고, 원도급사는 상환일에 대출금을 갚아주면서 채권을 회수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원도급사가 대금을 결제하지 못하면 하도급사가 그 돈을 대신 갚아야 합니다. 원도급사는 대금을 결제하지 않아도 부도처리가 안 돼 자금난을 해소할 수 있지만, 원도급사의 채무를 떠안은 하도급사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힘 있는 기업 하나 살리자고 힘없는 기업 여럿을 죽이는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대금지급 방법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파트 건설에 참여한 하도급업체에 공사대금을 돈으로 안 주고 아파트를 주기도 합니다. 알아서 팔아 현금화하라는 거죠. 심지어 일본 원전사고 난 지역의 골프장 회원권을 준 경우도 있어요. 그렇다고 항의하면 앞으로 그 회사 공사를 수주할 수 없으니까 속앓이만 하는 거죠.”

    ▼ 왜 이런 잘못된 관행이 이어진 건가요.

    “건설 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실상을 몰랐으니까요. 관료, 정치인이 전문건설업체 관계자를 만나서 보고 듣고 해야 관심을 가질 수 있는데, ‘갑’인 대형 종합건설사 관계자들만 만나지 이쪽은 만나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러니 ‘을’의 어려움을 모를 수밖에요.”

    위약벌 제도

    ▼ 취임 후 해야 할 일이 많았겠습니다.

    “건설산업 전체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서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조합원의 권익신장과 사업여건 개선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하도급사와 원도급사가 동반성장, 공생 발전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 및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대한전문건설협회와 공조해 정부와 국회 등에 지속적인 건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현 정부가 출범할 때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건설업계 경제민주화를 위한 10대 정책’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 성과가 있었다면?

    “하도급계약서를 쓸 때 위약벌이라고 해서 일을 하다 부도가 나면 보증사가 계약보증금(총공사비의 10%)을 물어주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사하다가 초반에 부도가 날 때도 있고 공사 마지막에 부도가 날 때도 있는 법인데, 공사를 99% 완료했어도 공정에 상관없이 다 물어줘야 합니다. 이를 악용해 공사비 보전용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이건 상생에 어긋난다며 실손보상으로 바꿨습니다. 지금은 90% 이상이 사라졌습니다.”

    분리발주 공동도급제 필요

    ▼ 관료에게 전문건설업체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겠습니다.

    “국토교통부 장관, 공정거래위원장 등 건설과 관련된 분을 만날 때마다 전문건설업계의 어려운 현실을 전했습니다. 특히 서울시에는 강하게 요구해서 공사비를 원청사를 거치지 않고 발주처에서 바로 하도급사에 지불할 수 있도록 해 전문건설사의 자금 운영에 숨통이 트이도록 했습니다.”

    ▼ 이젠 국민도 전문건설업체의 어려움을 어렴풋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전문건설업계의 위상과 국민적 신뢰를 제고하고, 건설업계 경제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홍보 활동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전문건설업계에 대한 인지도 상승과 건설업계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 및 공감대 형성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현 정부 출범과 함께 경제민주화가 핵심 국정과제로 부각되면서, 건설업계의 공정 하도급과 관련해 많은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회에서는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이 속속 마련됐고,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종합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건설업계의 상생과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먼저, 수직적·종속적인 발주 체계를 수평적·협력적 체계로 바꿔야 합니다. 단순 공사조차 종합-원도급, 전문-하도급으로 이어지는 현행 다단계 생산구조는 새로운 갑을관계를 만들어내 불공정 거래나 부조리를 양산하고, 불필요한 거래비용을 발생시킬 뿐입니다. 분리발주와 주계약자 공동도급제와 같은 수평적 발주생산체계를 활성화해 우리 건설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강화해나가야 합니다.”

    ▼ 그중에서도 하도급 입찰 제도 개선이 가장 필요하겠군요.

    “불투명하고 공정치 못한 현행 하도급 입찰 관행은 건설공사의 첫 단추부터 공사원가에도 못 미치는 저가수주를 초래하고, 하도급업체 간의 공정경쟁 시장질서를 훼손해 하도급 전문건설업체의 경영난과 부실공사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도급자도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합니다. 하도급 입찰 종료 후 즉시 입찰 참가자에게 하도급 공사의 예정가격, 최저가 입찰금액, 낙찰가격 및 낙찰자를 공개토록 함으로써, 하도급 입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원청사와 공정한 거래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위기의 전문건설업계를 살리기는 힘들다. 국내 건설경기가 워낙 침체됐기 때문이다. 전문건설업계도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대형 종합건설사는 국내 건설시장 침체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 건설에서 활로를 찾습니다. 우리 전문건설업체도 해외로 눈을 돌릴 때가 되었습니다. 대형 건설업체가 하기엔 규모가 작은, 해외 틈새시장이 있습니다. 공제조합에서는 우리은행, 외환은행, 수출입은행 등과 손잡고 해외건설 전용 보증상품을 내놓는 한편 해외건설에 대한 보증한도를 상향 조정하고, 조합원이 출자한 해외현지법인도 조합의 보증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주한미군 발주공사에 조합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조합원에 대한 설명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합니다.”

    기술교육원 운영

    ▼ 건설 기술인력 양성에도 힘쓰는 것으로 압니다.

    “충북 음성에 기술교육원을 설립해 운영합니다. 고3 학생을 대상으로 연간 300명씩 1년 동안 숙식 제공은 물론 월 30만 원씩 교육비를 별도 지급하며 교육을 합니다. 졸업생의 건설업체 취업률이 100%에 육박할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습니다. 또한 대학생을 대상으로 ‘해외플랜트건설 양성과정’을 무료로 운영해 지금까지 500여 명의 해외건설 전문인력을 길러냈습니다. 기술교육원을 통해 건설업계에는 실력 있는 건설인력을 공급해 경쟁력을 높이고, 청년계층에는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전문건설업계가 원도급사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게 아닙니다. 균형을 맞춰 함께 발전하자는 것이죠. 건설산업의 두 수레바퀴는 원도급사인 종합건설업계와 하도급사인 전문건설업계입니다. 한쪽 바퀴가 아무리 크고 튼튼해도 다른 바퀴가 망가지면 그 수레는 굴러갈 수 없습니다. 두 수레바퀴가 함께 크고 튼튼해져야 수레는 더 빨리 더 멀리 굴러갈 수 있습니다. 우리 건설업계가 상생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전문건설업체 사례를 통해 본 ‘을(乙)’의 애환

    15년째 철근콘크리트 전문건설업체를 운영하는 김 사장은 공기업에서 발주한 아파트 건설공사의 하도급 공사 입찰을 위해 현장설명회에 참석했다. 현장설명회는 입찰에 앞서 원청사가 입찰에 참여할 하도급업체들에 건설공사 관련 제반사항을 설명하는 자리다. 원청사의 설명 중에는 하도급업체에 불리한 각종 불공정 사항이 포함돼 있다. 물론 이런 내용은 구두로만 전달될 뿐 배포된 현장설명서엔 빠졌다.

    며칠 후 입찰 당일, 김 사장은 PC 앞에 앉아 원청사의 전자입찰 시스템에 접속했다. 김 사장과 직원들이 며칠 동안 견적을 산출한 결과 최소 75억 원은 돼야 자재·장비대와 인건비, 부대비용을 충당하고 조금의 이익이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찰한 금액은 71억 원. 애당초 원청사가 발주처로부터 수주한 총공사비 자체가 최저가낙찰제와 실적공사비 제도로 인해 이익을 남기기 어려운 수준인 데다, 지금 같은 불경기에 직원들 월급이라도 주려면 이익은 고사하고 일단 공사를 수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찰 결과는 언제나 그랬듯 유찰이다. 왜 유찰이 됐는지, 어느 업체가 가장 낮은 금액을 써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원청사가 계획한 실행가격 이내에 투찰을 한 하도급업체가 없어 원도급사가 고의로 유찰을 하는 건 관행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이틀 후 재입찰이다. 이번엔 좀 더 낮춰 써냈다. 이러기를 서너 번. 66억 원을 써내자 낙찰자로 선정됐다. 적정 공사비로 산출했던 75억 원에서 10% 넘게 줄어든 액수다. 공사를 수주해 다행이긴 하지만 이익은커녕 손실이 날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런데 원청사에서 연락이 왔다. 63억 원으로 낮춰 계약을 체결하잔다. 이렇게 할 거면 왜 입찰을 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두 눈 질끈 감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다. 원청사 눈 밖에 나면 다음 일감은 없는 거니까.

    하도급계약서를 보니 더 답답하다. 분명 표지는 표준하도급계약서(공정거래위원회 제정 권장)지만, 내용은 원청사 입맛대로 수정되고, 맨 뒤에는 여러 특약사항이 붙는다. 물가변동에 따른 공사대금 증액은 없고, 공사현장 관련 민원이 발생해도 모두 ‘을(乙)’의 책임이다. 추가공사나 설계변경에 따른 공사금액 증액 조항도 삭제되고, 하자보수 책임도 법에서 정한 것보다 과도하게 져야 한다. 무늬만 표준하도급계약서다. 하지만 계약조건에 대한 협상이나 조율은 어림도 없다.

    계약 체결과 동시에 하도급계약을 이행하겠다는 계약이행보증서를 원청사에 제출한다. 하지만 원청사가 하도급대금 지급을 보증하는 하도급대금지급보증서는 이번에도 못 받았다. 하도급업체로선 유일한 안전장치지만 원청사 눈치에 보증서를 요구하지도 못한다.

    공사가 시작됐다. 손실이라도 보지 말자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공사원가를 절감할 여지는 없는지 공사 현장 구석구석 확인해보지만 마른 수건 쥐어짜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런데 공사 시작부터 차질이 빚어진다. 선행 공정인 토공사가 지연되면서 예정된 날짜에 공사에 착수하지 못한다. 현장 작업로 확보도 지연된다. 현장과 전체 공정을 관리 감독하는 원청사에 문의해보지만 그냥 기다리란다. 공사 진척은 없어도 현장에 투입된 장비 임차료와 현장 근로자 인건비는 꼬박꼬박 나가는데 말이다.

    비로소 공사가 시작됐지만 이번엔 원청사에서 지급되는 자재가 말썽이다. 철근과 레미콘이 제때 안 들어온다. 원청사 잘못으로 공사 시작도 늦어지고 공사일정도 지체돼 여러 부대비용이 발생하지만 공사비 증액은 언감생심. 되레 기한 내에 공기를 맞추란다. 원청사 현장소장에게 하소연을 해보지만 못하면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 아닌 협박만 돌아온다. 피가 마른다.

    어쩔 수 없다. 장비와 인원을 더 투입하고, 야간작업까지 해서 어떻게든 공기를 맞춰야 한다. 공사가 지체되며 각종 자재값도 올랐다. 공사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원청사에서 준 설계도면 잘못으로 추가 보강공사도 했지만, 이 역시 김 사장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진척된 공사에 대한 기성금을 받기로 한 날이 지났지만, 대금 지급은 차일피일 미뤄진다. 여기저기 외상으로 가져다 쓴 자재와 장비대를 지급해야 할 날은 다가오는데 속이 탄다. 기성금을 받아도 문제다. 원청사는 발주처로부터 받은 현금 비율대로 하도급대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그러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자기네가 받은 것보다 어음 비율이 더 높다. 어음할인료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지만 당장 자재·장비대와 현장 근로자 노무비를 현금으로 지급해야 하니 도리가 없다. 하도급대금 지연 지급에 따른 지연이자와 어음할인료도 원청사에서 지급하도록 돼 있지만 남의 나라 얘기다.

    이리 계산하고 저리 계산해봐도 도무지 수지가 안 맞는다. 일감이 부족하고 건설공사의 수익성이 땅에 떨어진 건 업계 전체가 겪는 어려움이라 치부하겠지만, 이렇게 억울하게 이리저리 뜯기고 건설 현장의 열악한 상황을 모두 떠안아야 하는 전문건설업계의 실상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 판에 발을 담근 내가 잘못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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