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호

려명黎明

5장 청천벽력

  • 이원호

    입력2014-06-19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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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기철로부터 롤렉스시계를 선물 받고 행복해하던 정순미는 어느 날 밤 부모와 함께 보위부에 끌려간다.
    • 인민군 중장으로 호위총국 소속 사단장인 백부 정일호가 체포된 직후다. 혼자 풀려나온 정순미는 윤기철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이는데….
    려명黎明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저건 전성일 선생한테 전해줘.”

    윤기철이 알루미늄 가방을 눈으로 가리키고 나서 종이백을 집어 정순미에게 내밀었다.

    “이건 내가 정순미 씨한테 주는 선물이야, 받아.”

    그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정순미가 방그레 웃었던 것이다. 얼굴이 굳어지거나 빨개진 것도 아니다. 웃었다. 정순미가 종이백을 받으면서 묻기까지 했다.

    “뭔데요?”



    김이 빠졌다기보다 변화에 적응 못해서 당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윤기철은 말까지 더듬었다.

    “어, 시, 시계.”

    종이백에서 시계 상자를 꺼낸 정순미가 뚜껑을 열더니 활짝 웃었다.

    “세상에, 롤렉스네.”

    나머지 하나도 열어본 정순미가 눈을 크게 뜨고 윤기철을 보았다.

    “두 개나.”

    “하나는 정순미 씨 어머님한테 드리려고 샀어.”

    아무리 북한 상류층이라고 해도 롤렉스를 함부로 차고 다니지는 않겠지. 언젠가 김정일 생전에 군 장성, 당 간부에게 롤렉스를 선물로 줬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정말 이거 받아도 돼요?”

    이제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정순미가 물었으므로 윤기철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아, 당연히 받아야지. 드리려고 산 건데.”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것 보니까 나도 기뻐.”

    “저기.”

    정순미가 의자 밑에서 포장지로 싼 얇은 꾸러미를 윤기철에게 건넸다.

    “이건 제 선물요.”

    “어?”

    놀란 윤기철이 꾸러미를 받더니 다시 웃었다.

    “이것, 참, 내가 선물 받으려고 그런 건 아닌데.”

    포장지를 뜯자 화려한 색깔의 실크 스카프가 드러났다.

    “이야.”

    윤기철이 감탄하자 정순미가 설명했다.

    “평양 백화점에서 구해온 스카프예요. 과장님 어머님 갖다드리세요.”

    정순미의 선물도 전성일 측에서 공급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기철이 감동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야.”

    “그런데요.”

    시계 상자를 다시 종이백에 넣으면서 정순미가 말했다.

    “법인장님께 말씀드려서 오늘 중으로 근로자 충원 요청을 하시지요.”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눈웃음을 쳤다.

    “제가 대표 동지한테 이야기해놓을 테니까 요청서만 주시면 바로 총국에 제출하라고 할게요.”

    윤기철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가 되어가고 있다.

    “알았어. 오늘 중으로 대표한테 넘기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선 윤기철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만일 된다면 내가 과장 진급이 될 거야. 난 과장대리거든.”

    “뭐? 지금?”

    윤기철의 말을 들은 김양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법인장실 안이다.

    “그야 충원 적어서 주는 건 10분도 안 걸리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지난번에 오 국장이 저한테 말했거든요.”

    정순미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김양규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이번 달 초순에 충원 신청을 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랬어?”

    “지금 써주시면 제가 조 대표한테 갖다주겠습니다.”

    “좋아, 기다려.”

    김양규가 서랍을 열면서 말했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3년 동안 끌었는데 하루아침에 될까?”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서류를 꺼내놓은 김양규가 길게 숨을 뱉었다.

    “내가 이놈의 서류 열 번도 더 썼다.”

    펜을 쥔 김양규가 앞에 선 윤기철을 보았다.

    “몇 명을 요청할까? 50명? 50명만 충원되어도 춤을 추겠다.”

    “100명으로 하지요.”

    “그럼 넌 대번에 법인장으로 승진할 거다.”

    “되나 안 되나 그렇게 해보세요.”

    “에라 모르겠다.”

    김양규가 쓰기 시작했으므로 윤기철은 길게 숨을 뱉았다.

    대표실로 들어선 윤기철을 향해 조경필이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잘 오셨습니까?”

    “예, 덕분에.”

    윤기철이 두 손으로 든 제품 박스를 탁자 위에 놓았다. 현재 공장에서 사용하는 제품 박스다. 윤기철이 박스 안에서 화장품 박스를 꺼내 조경필에게 내밀었다. 지난번에 정순미한테 사다준 박스와 같다. 이번에도 오는 길에 두 개를 사왔는데 그중 하나를 제품 박스에 넣어온 것이다.

    “이거, 한국산 화장품인데 중국 관광객들한테 아주 인기지요.”

    시선만 주고 있는 조경필의 옆에 박스를 내려놓은 윤기철이 벙긋 웃었다.

    “조 대표님 생각이 나서 사왔습니다. 사모님께 갖다드리시지요.”

    “아니, 윤 과장님.”

    정색한 조경필이 손까지 들었을 때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근로자 충원 신청서 가져왔습니다. 오늘 중으로 총국에 전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신청서야 지금 갖고 가지요. 하지만….”

    “잘 부탁합니다.”

    박스는 탁자 위에 둔 채 윤기철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다시 웃었다.

    “이젠 제 호의도 받아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오후 10시 30분, 정순미가 다가서자 어둠 속에 묻혀 서 있던 강호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2층 복도 끝 쪽, 계단 아래는 빈 공간이어서 눈에 띄지 않는 데다 으슥하다. 폐품만 쌓여 있는 곳이어서 출입하는 사람이 드물다. 정순미의 시선을 받은 강호성이 말했다.

    “알아봤어.”

    정순미는 침만 삼켰다.

    “두 분은 체포된 그다음 날에 함경북도 제2정치범수용소로 가셨어.”

    “…”

    “요즘은 정치범수용소에 번호를 붙여서 제2호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 길주군 목성 근처에 있다고도 하고 명천군에 있다고도 해.”

    “…”

    “어쨌든.”

    그러고 나서 강호성이 길게 숨을 뱉었다.

    “두 분은 나오시기가 힘들겠어. 백부님 가족은 총살당하셨다고 들었어.”

    “…”

    “다른 곳에서 연락 온 곳 없지? 어머니 친척들 말야.”

    “없는데요.”

    “끌려가지 않았으면 조사받고 숨을 죽이고 있겠지. 연락하는 것이 발각되면 받은 사람까지 연루되는 상황이야.”

    “…”

    “내가 듣기로는 이 아파트도 정리된다고 하던데. 알고 있나?”

    “통보받았습니다. 이달 말까지….”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강호성이 탄식한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으므로 정순미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다. 그러자 한 걸음 다가선 강호성이 오늘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밥하고 찬을 넣었어. 아침이라도 든든하게 먹고 공장에 나가거라.”

    “아저씨.”

    “지금 말하지만 네 부친은 내 선배시다. 개성중학 4년 선배가 되신다.”

    비닐봉지를 쥐여준 강호성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경우를 여럿 보았어. 네가 개성공단에서 일하지만 가만두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야 돼.”

    “…”

    “이달 말에 아파트를 접수하고 널 어디로 보낼지도 몰라. 새 집을 얻어줄 만큼 여유 있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런 전례도 없다.”

    그러더니 강호성이 다시 길게 숨을 뱉었다.

    ”어디, 이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있단 말이냐?”

    “내가 봐도 분위기가 야릇해.”

    비품 창고로 들어서면서 윤기철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니 연애한다는 소문이 날밖에.”

    기다리고 있던 정순미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오늘은 천장의 등까지 켜놓아서 창고 안이 환하다. 소파에 앉은 윤기철에게 정순미가 알루미늄 가방을 내밀었다. 지난번에 윤기철이 들고 있던 가방이다.

    “뭐가 들었지?”

    가져왔을 때보다 가벼워진 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윤기철이 지그시 정순미를 보았다.

    “이번에는 뭘 사올까?”

    “…”

    “참 스카프를 어머니한테 갖다드려야겠다. 잊어먹지 말아야지.”

    정순미가 시선을 주고 있었지만 초점이 멀다. 말을 멈춘 윤기철이 물끄러미 정순미를 보았다.

    “뭐, 생각해? 혹시 집에서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거 아냐?”

    정순미의 시선에 초점이 잡혔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부모하고 다투는 거 아냐? 맞지?”

    그때 정순미가 입을 열었다.

    “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억양 없는 목소리가 떨렸고 눈에 금방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원호

    려명黎明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아파트로 들어선 정순미가 이쪽에 등을 보인 채 주방에 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선물.”

    어머니가 머리만 돌렸으므로 정순미는 봉투를 흔들었다.

    “윤기철이 선물 가져왔어!”

    그제야 정순미는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춤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오후 10시 반이다. 특근을 했기 때문에 늦게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집 안을 둘러본 정순미가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직 퇴근하시지 않았어?”

    “순미야.”

    어머니가 정순미의 팔을 끌어 소파에 앉히더니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TV도 꺼져 있다. 이제는 긴장한 정순미가 어머니를 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보위부에 가셨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

    “글쎄, 지난주에 네 큰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구나.”

    “뭐야?”

    놀란 정순미의 입에서 외마디 외침이 터졌다. 큰아버지라면 아버지의 형 정일호다.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된 정일호는 인민군 중장으로 호위총국 소속 사단장이다. 정일호는 집안의 기둥이며 배경이었다. 정순미가 연락원이 된 것도 집안이 좋았기 때문이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정순미의 입에서 혼잣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해, 어떡하면 좋아….”

    그날 밤 12시가 조금 넘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모녀는 소스라치며 일어섰다. 둘은 소파에 앉아서 11시가 넘으면 자주 소등이 되는 바람에 촛불 한 자루를 켜놓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참이다. 서둘러 현관으로 나간 어머니가 문을 열더니 억눌린 비명을 뱉었다. 그와 함께 사내 셋이 집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사복 차림이었지만 촛불 빛에 비친 사내들은 보위부원이다.

    “아, 둘이 다 있구먼.”

    앞장선 사내가 말하더니 털썩 앞쪽 소파에 앉았다. 비틀거리며 물러선 어머니가 소파 모서리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정순미는 일어선 채 몸을 굳히고만 있다. 사내가 둘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같이 가야겠어. 10분 시간을 줄 테니까 옷 단단히 입어.”

    “어, 어디로 말입니까?”

    어머니가 겨우 묻자 사내는 입술 끝만 비틀고 웃었다.

    “어디긴? 보위부지.”

    사내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면서 집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잘사는군, 반역자들을 보면 인민들의 고혈을 빼먹어서 대부분이 잘살아.”

    “동지.”

    어머니가 사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필사적인 모습이다.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쟤, 내 딸은 개성공단에서 일을 합니다.”

    “알고 있어.”

    사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정순미를 힐끗 보았다.

    “우리가 그것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나?”

    “아닙니다. 쟤는 공단에서 중요한 과업을 수행 중입니다. 동지.”

    “무슨 말야?”

    이맛살을 찌푸린 사내가 응접실과 안방을 서성대는 동료 둘을 보았다. 셋은 모두 신발을 신은 채로 집 안에 들어와 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저애는 남조선과의 연락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확인하시면 됩니다.”

    어머니의 시선이 정순미에게 옮겨졌다. 눈을 크게 뜬 어머니가 정순미를 노려보았다. 이런 표정은 처음이다.

    “뭐하는 거냐? 지도총국장과 당조직 비서실 동지의 이름을 대지 않고?”

    허겁지겁 숙소로 들어선 김양규가 점심을 먹는 윤기철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이런 웃음은 본 적이 없었으므로 멍한 표정을 짓는 윤기철에게 김양규가 다가와 섰다.

    “이봐, 금방 조경필이한테 들었어. 다음 달 초에 100명이 충원된다네.”

    식탁에 두 손을 짚은 김양규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세상에, 난 자네가 100명 충원 신청을 하라고 했을 때 그냥 로또 사는 셈치고 총국에 써낸 거야.”

    마침 식탁에는 둘뿐이었지만 김양규가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 자네가 총국 오 국장한테 잘 보인 모양이야. 이거, 본사에 보고하면 난리 나겠다. 3년 숙원이 풀린 거야.”

    허리를 편 김양규가 몸을 돌렸으므로 윤기철이 등에 대고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본사에 보고.”

    걸음을 멈춘 김양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한테 먼저 보고한 셈이네.”

    김양규가 식당을 나가자 윤기철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따지고 보면 정순미의 공이 제일 크다. 정순미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오늘도 특근이었기 때문에 선적량을 체크하던 윤기철이 문득 머리를 들었다. 오후 3시 반, 사무실 안에는 여직원 둘뿐이었고 모두 현장에 나가 있다. 법인장 김양규는 100명 충원 통보를 받고나서 들떠 사방에다 연락을 하더니 내일 본사로 출장을 간다. 본사로 가면 생색은 혼자 다 낼 것이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내린 윤기철이 문득 오늘은 정순미하고 두어 마디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심을 먹고 근로자 충원이 확정되었다는 빅 뉴스를 전해주려고 정순미를 찾았더니 그때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순미 씨 어디 간지 알아요?”

    앞쪽에 대고 윤기철이 묻자 자재과 보조사원 김현주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머리가 좀 아프다고 휴게실에 누워 있어요.”

    “많이 아픈가?”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둥근 얼굴을 편 김현주가 배시시 웃었다.

    “걱정되세요?”

    “그래, 많이.”

    그때 생산과 보조사원 손선정이 거들었다.

    “순미는 눈이 높으니까 과장님이 열심히 노력해야 될 겁니다.”

    “그런가? 어떻게 열심히 하라는 거지?”

    “아프면 약 사들고 가야죠.”

    “지금 갈까?”

    “여자 휴게소에 가려고요?”

    손선정과 김현주가 깔깔 웃었다. 다른 과장들하고는 이런 대화가 어림도 없다. 모두 윤기철이 총국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 것이다. 역시 자재과장 장원석이 사무실로 들어온 순간 직원들은 몸을 돌리더니 다시 일을 시작했다.

    “부르셨어요?”

    대표실로 들어선 정순미가 묻자 조경필이 웃음 띤 얼굴로 끄덕였다.

    “그래, 근데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피곤해서 좀….”

    휴게실에서 누워 있던 정순미를 조경필이 불러낸 것이다. 조경필이 눈썹을 모으고 정순미를 보았다.

    “얼굴이 핼쑥하네. 약은 먹었어?”

    “약 먹을 만큼은 아닙니다.”

    “어쨌든 총국에서 하루 만에 충원 승인을 해주다니 나도 놀랐어.”

    자리에서 일어선 조경필이 머리까지 내저었다.

    “더구나 100명이나 말야. 어제 윤 과장이 100명 충원 요청서를 가져왔을 때 반신반의했거든.”

    “…”

    “이게 다 정순미 동무 덕분인지를 법인장이나 윤 과장이 알기나 하나?”

    “…”

    “그런데 참.”

    잊었다는 얼굴로 조경필이 정순미를 보았다.

    “오 국장 동지가 5시쯤 총국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어.”

    머리를 든 정순미를 향해 조경필이 말을 이었다.

    “국장 동지를 뵈면 내 안부 말씀도 전해줘.”

    대표실을 나온 정순미가 이제는 업무과 비품 창고로 들어가 낡은 의자에 앉았다. 안에서 문을 잠갔으므로 문을 열 때까지는 자유다. 의자에 등을 붙인 정순미가 길게 숨을 뱉었다. 어젯밤 어머니와 함께 보위부로 끌려갔던 정순미는 새벽 5시가 다 되었을 때 풀려나왔다. 평양의 전성일에게 연락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하 유치장에서 1층 사무실로 끌려온 정순미에게 보위부 담당 군관이 말했다.

    “집에 돌아가, 그리고 아침에 정상적으로 출근하라우.”

    군관은 언짢은지 정순미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것이 동무한테 이로울 거야.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알았나?”

    “예.”

    대답한 정순미가 기를 쓰고 물었다.

    “저, 제 어머니, 아버지는요?”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자르듯 말한 군관이 처음으로 머리를 들고 정순미를 똑바로 보았다. 흐린 눈이다. 눈이 마치 죽은 생선의 눈 같다.

    “네 몸 걱정이나 하라우.”

    아파트로 돌아온 정순미는 문이 열려 있는 것에 놀라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부모가 돌아와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순미는 현관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가구는 다 없어졌고 TV도 사라졌다. 옷장은 부서진 채 넘어져 있었는데 헌옷만 남았다. 주방의 그릇도 쓸만한 것은 다 가져갔다. 피아노도 보이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돌아온 정순미는 냉장고까지 실어간 것을 그제야 알았다. 벽에 걸린 시계도 없고 사진 몇 장만 비틀려서 매달려 있다. 지도자, 장군님의 사진을 떼어간 것은 당연했다. 가장 먼저 모셔갔을 것이다. 보위부에서 청소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흉가가 되어버린 집에서 두 시간을 지낸 다음 정순미는 개성으로 출근했던 것이다.

    포장반에 서 있던 자재과장 장원석이 지나가던 윤기철을 불렀다.

    “이봐, 윤 과장, 같이 나가자.”

    멈춰 선 윤기철의 팔을 끈 장원석이 공장 밖으로 나왔다. 4시 40분, 맑은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오면서 정신이 났다. 심호흡을 하고나서 윤기철이 장원석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까 내가 자재과 창고에서 마악 나오다가 정순미를 보았는데….”

    힐끗 윤기철을 살핀 장원석이 바짝 다가섰다.

    “정순미한테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라뇨?”

    “우리 자재과 창고 옆에서 업무과 창고가 보이지 않아? 이렇게 대각선으로.”

    장원석이 손으로 대각선을 만들어 보이더니 말을 잇는다.

    “정순미가 업무과 창고를 나오더라고. 근데 눈물을 닦는 게 아니겠어? 눈물을. 그러고는 문을 잠그고 가던데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

    “…”

    “문을 잠그기 전까지 난 자네하고 정순미가 안에서 무슨 짓을 한 줄 알았어. 자네가 정순미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단 말야.”

    “나아 참, 이 양반이.”

    “문을 잠그는걸 보니까 아아, 아니구나 했지. 근데 왜 울었을까?”

    “울긴 왜 울어요? 잘못 보았겠지.”

    “오늘같이 경사가 난 날에 말야.”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루 종일 못 보았네.”

    “참, 조금 전에 회사 차 타고 총국에 갔어. 국장 호출이야.”

    “…”

    “이젠 끗발이 조 대표보다 높아서 조 대표가 차 수배를 해주더라니까. 근데 왜 울었지?”

    “아, 글쎄, 잘못 보았다니까 그러네.”

    “아니라니까? 눈물 닦는 거 똑똑히 보았다니까 그러네.”

    눈까지 치켜뜬 장원석이 곧 머리를 다른 쪽으로 기울였다.

    “시발, 그럼 우는 게 아니면 뭐야?”

    방으로 들어선 정순미는 책상에 앉아 있는 오영환을 보았다. 오영환은 서류를 읽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들었을 텐데도 머리를 들지 않는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먼저 웃고 반겼으며 오히려 정순미의 말을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책상 앞으로 다가선 정순미는 오영환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통 중앙에 지름이 5cm 정도로 탈모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5초쯤 지났는데 정순미는 5분도 더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영환이 머리를 들었을 때 멍한 표정이 되어서 바라만 보았다. 몸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영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생긴 그대로만 펼쳐져 있다.

    “긴 이야기 않겠어.”

    오영환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부장 동지께서 당분간은 그대로 과업을 수행하라는 지시야.”

    정순미가 입을 열었지만 숨만 들이켰다. 배에 힘이 풀려서 소리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오영환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동무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달았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정순미는 자신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는 것을 들었다. 남 같다.

    “분발하라고. 그리고, 참.”

    어깨를 치켜세웠다가 내린 오영환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부부장께서 동무가 집안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셨어. 이건 기본적인 일이니까 잘 알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됐어, 가봐.”

    그러고는 오영환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는데 정순미를 놔둔 것이 불쾌하다는 기색이었다. 정순미에게는 보위부원보다 더 지독한 종자로 느껴졌다.

    저녁 식사 후 휴식시간이 되었을 때에서야 윤기철은 정순미를 찾아내었다. 4시 반쯤 정순미가 지도총국에 들어갔다는 말만 들었고 돌아왔는지도 몰랐던 윤기철이다. 오후에 장원석이 정순미를 발견했다는 업무과 비품 창고로 가보았더니 과연 자물쇠가 풀려 있다. 안에 누가 있다는 표시였다. 열쇠는 윤기철과 정순미 둘만 갖고 있었으니 뻔했다. 문을 당겨본 윤기철은 안에서 잠겨 있는 것을 알았다.

    “이봐, 정순미 씨, 문 열어.”

    문을 두드리며 불렀더니 대답이 없다. 다시 한 번 두드리면서 윤기철이 말했다.

    “안에서 뭘 해? 남자 있는 거야?”

    그러고 나서 10초쯤 더 있었을 때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무슨 남자가 있다고 그래요?”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면서 정순미가 비켜섰는데 웃음 띤 얼굴이다.

    “아니, 왜 이렇게 어두워?”

    안으로 들어선 윤기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순미는 안쪽의 벽에 붙은 전등 하나만 켜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잠을 좀 잤어요.”

    “하긴 여기가 농땡이 치기는 좋지.”

    안을 둘러본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정순미는 전등을 등지고 서 있어서 얼굴은 윤곽만 드러났다.

    “여기서 연애하기 좋겠다.”

    숨을 들이쉰 윤기철이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뭐가요?”

    여전히 전등을 등진 정순미가 소파 끝 쪽에 앉아서 되물었다. 오후 6시 반이 되어가고 있다. 이쪽은 현장 건너편으로 입구도 반대쪽으로 나 있어서 조용하다. 근로자들의 통행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도총국에 다녀왔다면서? 충원 이야기한 거야?”

    “충원은 되겠죠.”

    “다른 일 있어?”

    “없어요.”

    “회사는 축제 분위기야. 근로자들도 좋아하고, 그런데….”

    윤기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순미를 보았다.

    “오늘의 주역이 피곤하다면서 이런 구석에 처박혀 빌빌거리다니.”

    윤기철은 장원석이 오후에 창고 앞에서 우는 것 같은 모습을 보았다고 이야기하려다가 참았다. 갑자기 윤기철이 손을 뻗어 정순미의 팔목을 쥐었다. 놀란 정순미가 손을 뽑으려고 했지만 윤기철은 놓지 않았다.

    려명黎明
    “아니, 시계 안 찼어?”

    정순미의 팔목에는 차고 다니던 일제 시계가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집에 뒀어요.”

    다시 정순미가 손을 당겼으므로 윤기철이 손을 놓았다. 창고 안은 어둡다. 그래서 잠깐 정적이 덮였을 때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윤기철은 창고 안의 공기가 점점 끈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밀도는 높고 습기를 띠고 있다. 둘의 숨소리도 들린다. 이런 상황이 싫으면 일어나서 나가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윤기철은 일어날 생각이 없다. 소파 끝 쪽에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단정히 앉아 있는 정순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때 윤기철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좋구먼.”

    윤기철이 갈라진 제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어깨를 펴고 똑바로 정순미를 보았다.

    “내가 정신 나간 놈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분위기가 좋아.”

    정순미는 등에 빛을 받아서 몸의 윤곽이 선명한 대신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서로 조건이 맞아야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게 아니겠어?”

    “…”

    “내 친구는 첫눈에 반해서 죽자 살자 하고 1년 연애하다가 결혼했는데 1년 만에 이혼했어.”

    “…”

    “그 자식이 결혼 석 달 만에 실직자가 되었거든. 왜 헤어졌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한 줄 알아?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졌대. 조까튼 소리지.”

    “…”

    “또 어떤 놈은 뭐, 저렇게 생긴 놈이 다 있나, 할 정도로 성격 더럽고 별 볼일 없게 생긴 놈이었는데 게임기 개발을 해서 수백억을 벌었지. 근데 공주 같은 기집애 하고 결혼해서 잘만 살아.”

    “…”

    “내 말은 남녀관계가 별 것 아니라는 거야. 서로 몇 개씩 상처나 혹 같은 걸 갖고 다니는 거지. 중요한 건 본성이야.”

    그러고는 윤기철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정순미를 보았다. 한마디가 입 안에서 맴돌고 있지만 참았다.

    “아이구, 이젠 가야겠다.”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면서 윤기철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직 꼼짝도 않고 있는 정순미에게 말했다.

    “오늘 진도는 여기까지.”

    윤기철한테 받은 롤렉스시계 두 개는 집 안 가구와 함께 약탈당했다. 모두 수용소로 끌려갈 상황이니 집 안 가구는 당연히 압류되어야만 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순미가 석방되는 바람에 집만 남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날 밤, 오늘도 특근이어서 10시 반에 집에 돌아온 정순미가 그제야 집 안 정리를 했다. 빈집처럼 만들어놓아서 청소하기는 쉬웠는데 기운이 떨어져서 자주 쉬었다. 자꾸 눈물이 흘렀기 때문에 아예 수건을 들고 다녔다. 이웃집에서는 내막을 알 것이다. 밤중에 가구를 실어내는 대소동이 일어났으니 지금쯤은 전 주민에게 알려져 있겠다.

    이윽고 안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정순미가 무릎 위에 머리를 얹었다. 방에는 촛불 한 자루를 켜놓았는데 불꽃이 흔들리고 있다. 어느덧 11시 반이 되어 있었으므로 주위는 조용하다.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쯤 보위부에서 교화소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큰아버지가 무슨 죄로 체포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빈 방 구석에는 조금 전 회사에서 가져온 봉투가 놓여 있다.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초코파이 3개를 넣어온 것이다. 어제 아침만 해도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고 출근했지만 어젯밤에 냉장고까지 다 실어가는 바람에 집에는 먹을 것이 없다. 그때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으므로 정순미는 소스라쳤다. 휴대전화를 거실의 낡은 의자 위에 놓았는데도 벨 소리가 안방까지 크게 울렸다. 솟구쳐 일어선 정순미가 허겁지겁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보위부는 휴대전화는 가져가게 놔두었다. 개성공단 출입증, 용성사원증까지, 가방에 든 창고 열쇠도 돌려주었다.

    “여보세요.”

    정순미가 응답하자 곧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도 특근이라고 했지?”

    정순미는 숨을 죽였고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보위부 담당자야. 동무, 지금 집에 있지?”

    “네.”

    엉겁결에 대답한 정순미가 문 쪽을 보았다. 문은 잠겨져 있다. 사내가 다시 물었다.

    “내일은 몇 시에 퇴근이야?”

    “내일도 특근입니다.”

    “10시 반쯤 집에 오지?”

    “네.”

    “알았어.”

    사내가 입맛 다시는 소리를 냈다.

    “내가 매일 확인할 테니까 퇴근하면 집에 붙어 있으라고, 알았지?”

    “네.”

    전화가 끊겼지만 정순미는 한동안 전원을 끄지 못했다. 멍한 상태로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린(吉林)성의 중국 공장에서 북한 근로자들이 받는 임금이 1500원 정도라는군.”

    시설과장 오석준이 아침 식사 자리에서 말했다. 오늘은 오석준과 자재과장 장원석, 생산과장 고형민과 윤기철까지 넷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다. 오전 7시 40분, 법인장 김양규는 충원 보고를 하려고 본사로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정보기술 분야 고급인력은 5000원도 받는다는 거야.”

    원(元)은 위안을 말한다. 즉 1500원은 한국 돈으로 약 30만 원, 5000원은 100만 원이다. 개성공단의 근로자 평균 임금이 기업부담금까지 합쳐 평균 170달러 정도이니 중국 공장은 10만 원 정도를 더 주는 셈이다. 그때 고형민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거긴 기숙사에다 가둬놓고 일 시키니까 본전을 빼고도 남아. 중국 놈들이 우리처럼 일 시킬 것 같아? 교육 훈련도 못 시키고 작업장 배치도 우리 마음대로 못하는 우리하고 같나? 천만에 말씀야.”

    “이 양반이 오늘 아침은 왜이래? 왜 나한테 인상을 써.”

    오석준이 투덜거리자 장원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 충원될 인원 배치 문제로 조 대표한테 깨졌거든.”

    “내가 왜 깨져?”

    고형민이 이제는 장원석에게 대들었다.

    “그 새끼가 뭔데 나를 깨?

    “어허, 이 양반이 왜 나한테 화풀이야?”

    장원석이 이맛살을 찌푸렸을 때 오석준의 시선이 윤기철에게로 옮겨졌다.

    “조 대표는 윤 과장한테 맡기면 되잖아? 고 과장은 도무지 융통성이 없어.”

    “그렇지.”

    장원석이 거들었고 밥을 삼킨 윤기철이 물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나하고 조 대표하고 싸움 붙일 일 있어요?”

    하지만 오석준의 말이 맞다. 그쯤은 윤기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완제품 박스가 쌓인 창고는 넓고 환풍이 잘되었다. 오후 8시 반, 창고 안으로 들어선 윤기철이 박스를 세고 있는 정순미에게 다가갔다.

    “2차분 박스가 225개야, 맞지?”

    “네 맞아요.”

    뒷모습을 보인 채 정순미가 대답했다. 정순미는 박스 두 개 위에 올라가 있어서 윤기철 앞에 날씬한 종아리가 펼쳐져 있다. 이윽고 박스를 확인한 정순미가 머리를 돌려 윤기철을 내려다보았다. 천장의 형광등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으므로 정순미의 머리 위가 반짝였다. 마치 성자가 머리 위에 관을 쓴 것 같다. 정순미를 올려다보던 윤기철이 머리를 기울이며 말했다.

    “여위었어.”

    “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윤기철이 한 걸음 다가서자 정순미가 옆쪽 박스로 내려섰다. 그래서 박스 하나 높이에 선 셈이 되었다.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없는데요.”

    “날 좀 봐.”

    “왜요?”

    되묻기까지 했지만 정순미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땅바닥으로 내려왔다. 넓은 창고 안에는 둘뿐이다. 윤기철이 정순미의 옆모습에 대고 물었다.

    “그래. 내가 서울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야. 슬슬 나를 피하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비품 창고에나 들어가 있고, 그리고….”

    윤기철이 한 걸음 다가서자 정순미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여전히 얼굴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철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벌써 나흘째야. 그러고 보니 직원들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못 보았어.”

    “못 보셨겠죠.”

    낮게 말한 정순미가 발을 떼었을 때 윤기철이 다시 물었다.

    “내가 도와줄 일 있어?”

    주춤 멈춰 섰던 정순미가 다시 발을 떼었고 등을 향해 윤기철이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하다 만 이야기가 있어. 우리 입장이야 어떻든 간에 정순미 씨 첫인상은 깊게 박혔다고.”

    윤기철이 손으로 제 가슴을 치려다가 말았다. 정순미가 본다면 쳤을 것이다.

    아파트 2층 6호실의 강호성은 개성시당 건설부 소속의 정비과장이니 당의 하급간부다. 같은 40평대 아파트에 살면서 안면만 있는 사이였는데 이틀에 한 번쯤은 만났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만난 강호성은 서둘러 외면하더니 스치고 지나갔다.

    아파트 현관 앞이었다. 5층 아파트는 40평형대로 각층에 6가구씩 30가구가 산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입주민은 거의 대부분이 7, 8년씩은 살아온 터라 몇 층 몇 호에 누가 사는지는 다 알고 있다. 3층 4호에서 10년째 살아온 정순미네는 교육자와 간호사 집안이어서 사귀기에 무난한 가족이었다. 정순미 어머니한테서 약 얻어가지 않은 가구가 없을 정도였고 그중 두 가구의 가장은 정순미 아버지의 제자였다.

    오후 10시 40분, 통근버스에서 내린 정순미가 아파트로 들어섰다. 오늘도 10시 전후로 전력 공급이 끊겼기 때문에 아파트 계단은 어둡다. 이 시간에는 모두 집 안에 들어와 있어서 통행자도 없다. 계단을 오른 정순미가 3층 계단을 향해 발을 떼었을 때다. 2층 복도 끝 쪽에서 인기척이 보이더니 어둠 속에서 사람이 드러났다.

    “잠깐만.”

    다가선 사내는 2층 6호의 강호성이다. 다가선 강호성의 얼굴은 굳어 있다. 주위를 둘러본 강호성이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정순미에게 내밀었다.

    “냉장고까지 다 들고 가는 것 보았어. 여기 떡 가져왔으니 먹어.”

    정순미가 괜찮다고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 대신 눈물이 떨어졌다. 떡보다 말을 걸어준 것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때 강호성이 말했다.

    “공단 다니는 덕분에 빠졌다고 들었어. 정말 다행이야.”

    “고맙습니다.”

    정순미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을 때 강호성이 길게 숨을 뱉었다.

    “기운 내. 이렇게 살아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야. 아파트는 남았지 않아?”

    “아저씨.”

    정순미가 50대 초반의 강호성에게 바짝 다가가 섰다. 어둠 속이었지만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보였다. 방음장치가 제대로 안 된 아파트여서 복도로 희미한 소음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강호성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무도 저한테 연락해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주지 않아요.”

    “…”

    “제 부모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요.”

    “…”

    “그것만 알면 돼요. 아저씨.”

    “내가 내일 밤 이 시간에 알려주지.”

    주위를 둘러본 강호성이 길게 숨을 뱉더니 물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 퇴근인가?”

    “네.”

    “보위부에 연줄이 있으니까 알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강호성이 뒷걸음을 치더니 어둠 속에 묻혔다.

    오늘밤은 11시 15분에 전화가 왔다. 술에 취한 듯 사내의 목소리는 느렸고 억양도 없다. 사내가 대뜸 말했다.

    “이달 말까지 아파트를 비워야 할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사내의 목소리는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짐은 별로 없겠지만 말야.”

    “저기.”

    정순미가 호흡을 골랐다. 당국에서 40평짜리 아파트에 혼자 살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더구나 숙청당한 집안의 가족이다. 이달 말까지면 15일이 남았다.

    “제가 옮겨질 곳은 어디인가요?”

    “그것도 우리가 해줘야 한단 말인가?”

    사내가 빈정거렸다.

    “왜? 큰 아파트에서 호의호식하고 살다가 옮기라니 불만이냐?”

    “아닙니다. 불만 없습니다.”

    “잠잘 곳은 찾아줄 테니까 기다려.”

    “감사합니다. 동지.”

    “이렇게 전화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너는 당의 은혜를 입은 거다.”

    “알고 있습니다. 동지.”

    전화가 끊겼으므로 정순미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었다.

    근로자대표 조경필이 불렀을 때는 오전 10시경이다. 정순미가 대표실로 들어섰더니 조경필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어,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었지?”

    놀란 듯 그렇게 조경필이 물은 순간 정순미는 숨을 들이쉬었다. 목이 메었고 눈이 뜨거워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조경필한테까지는 전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상부에서는 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시간 문제다. 눈을 크게 뜬 정순미가 대답했다.

    “요즘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식사를 잘 못했어요.”

    “약은 먹었어?”

    “어머니가 간호사니까요.”

    그 순간 정순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 조경필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물었구먼. 그건 그렇고, 총국에서 연락이 왔어. 11시까지 오 국장 동지한테 오라는군.”

    “…”

    “오 국장 동지를 만나면 근로자 사기가 충천하다는 말씀도 전해줘. 당과 장군님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말씀도.”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여 보인 정순미가 조경필의 시선을 외면한 채 몸을 돌렸다. 만일 요즘 사건을 알게 되면 조경필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났다. 그래서 얼굴 보기도 두려워졌다.

    “나는 조 대표가 총국에 가는 줄 알았더니 정순미 씨를 보냈군.”

    시설과장 오석준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점심시간이어서 오석준과 장원석, 윤기철은 숙소 식당에 둘러앉아 있다. 이제는 모두 정순미가 총국에 자주 드나들며 근로자대표 조경필도 함부로 못하는 신분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때 김치찌개를 떠먹고 난 장원석이 윤기철에게 물었다.

    “별일 없는 거야?”

    “뭐가 말입니까?”

    윤기철이 건성으로 묻자 장원석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순미 말야. 안 건드렸어?”

    “이 양반이 정말.”

    오석준은 벙글벙글 웃었지만 장원석이 그 표정 그대로 다시 물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둘이 비품 창고, 선적 창고로 돌아다니는 걸 말야.”

    “이 양반이 실성했군.”

    “그래, 미쳤다. 어쩔래?”

    장원석이 수저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으므로 주방에 서 있던 아줌마까지 이쪽을 보았다.

    “내가 이혼하고 나서 남들 연애하는 꼴을 보면 미친다. 어쩔 테냐?”

    “아니 그게 내 잘못이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윤기철이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을 때 오석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어이, 쌈 나겠다. 장난이 쌈 되겠구먼. 윤 과장이 참아.”

    “저 양반은 괜히 나만 잡고….”

    벌떡 일어선 윤기철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문득 정순미의 수심에 잠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품 창고의 어둠 속에 잠긴 듯 떠 있던 얼굴이다.

    그 영향인지 오후에 정순미가 다가왔을 때 윤기철은 외면한 채 맞았다. 이곳도 완제품 박스 창고 안이다.

    “과장님, 제가 총국에 다녀왔는데요.”

    정순미가 윤기철의 옆얼굴에 대고 말했다.

    “가방 하나 가져왔습니다. 서울에 가져가시라는데요.”

    머리를 돌린 윤기철은 정순미의 두 눈이 유난히 번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오후 5시 반이다. 창고 안은 불을 환하게 켜놓았는데 정순미가 불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가방은 비품 창고 안에 두었습니다.”

    “오늘 출장 신청하기에는 늦었는데.”

    윤기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더니 정순미가 머리를 내저었다.

    “지금 신청하시면 조 대표가 총국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그럼 내일 오후에는 허가증이 나올 겁니다.”

    “알았어.”

    주위를 둘러본 윤기철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떠올랐다.

    “근데 요즘 왜 그렇게 심각해?”

    다시 시선을 내린 정순미를 보자 윤기철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말이 막 나갔다.

    “남들이 보면 우리 둘이 연애하는 줄로 알아. 둘이 창고를 들락거린다고.”

    “…”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옆에 있으면 마치 이루지 못할 사랑에 애간장이 녹는 남녀를 연상하게 될 거라고.”

    “…”

    “그렇게 된다면야 오죽 좋겠냐? 한번 시도해보는 거지. 그럴 가치도 있고.”

    그때 정순미가 몸을 돌렸으므로 윤기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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