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호

“압록강 인민군대는 軍이 아니다, 밀수·인신매매 장사꾼일 뿐”

국경경비대 출신 탈북자 수기

  • 구술 = 박철용 북한이탈주민 정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4-06-20 0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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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벌어 매달 200달러씩 고향집에 송금
    • 밀수하는 집서 오입질… 명절 때마다 선물 받아
    • 국경 넘어가 쌀 낚아채거나 여자 강간하기도
    • 송곳 박은 부비트랩 설치… 철책엔 개구멍 숭숭
    • 한국 생활 3개월… 두렵지만 최선 다할 것
    “압록강 인민군대는 軍이 아니다, 밀수·인신매매 장사꾼일 뿐”

    북한 양강도 혜산의 국경경비대에서 근무하는 여군.(촬영일시 미상)

    나는 평안남도 평성에서 나고 자랐다. 31세다. 양강도 혜산이 두 번째 고향 격이다. 그곳에서 군인으로 살았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압록강변에서 10년 넘게 국경을 지켰다. 올해 한국에 정착했다. 경기도 안산에 산다.

    오늘(5월 30일) 자동차 운전면허 주행시험을 치렀다. 필기시험은 탈북자 교육기관 하나원에서 100점을 맞고 통과했다. 도로주행은 어렵다. 북한에서 운전해본 적이 없어서다. 강사와 주행연습을 할 때 드는 비용이 시간당 4만3000원. 지금껏 17시간을 탔다. 70만 원 넘는 돈을 들였는데, 아깝지 않다. 실력이 느는 게 느껴져서다. 다음 시험 때는 합격할 것 같다.

    나는 압록강을 건너 한국에 왔다. 48m. 혜산과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현을 가로지르는 압록강의 최단 폭이다. 수많은 탈북자가 이곳에서 북한을 버렸다. 48m는 둑과 둑 사이 거리를 가리키는 것.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은 15m 안팎이다.

    “나는 공화국의 국경경비대”

    내가 도강할 때 강물은 무릎 높이로 낮았다. 강이 얼어붙은 한겨울엔 건너기가 더 쉽다. 물론 운이 나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언 강물 위에서 개를 쫓다가 강을 건너는 것으로 오인돼 총을 맞은 아이도 봤다. 국경경비대가 탈북자를 발견하면 먼저 공포탄을 쏜다. 서지 않으면 공포탄 한 발을 더 쏜 다음 실탄을 장전한다. 탈북자가 총알을 맞지 않으면 강을 따라 건너 잡아와야 한다. 탈북하다 붙잡히는 일은 별로 없다. 내가 탈북할 때만 해도 경계가 허술했다.



    인신매매와 밀수, 탈북이 내가 얼마 전까지 거주한 혜산의 오늘을 상징하는 낱말이다. 여자들을 중국 유흥업소에 넘기려는 남자가 득실거린다. 어린 여동생을 중국에 팔아넘기려는 오빠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군인들도 밀수, 인신매매, 마약범죄에 나선다.

    한국 사람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인민군은 군대도 아니다. 국경경비대 전사는 국경을 지키는 일보다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다. 각종 밀수 물건을 배달하거나 뇌물을 받고 도강 편의를 봐주는 것은 소소한 돈벌이다. 큰돈이 되는 것은 직접 밀수에 뛰어드는 것이다. 나도 한국에 오기 전 밀수 일을 했다.

    나는 공화국의 국경경비대였다. 장사꾼이 돼버린 군인들은 고향집에 돈을 부쳐주면서 군사복무를 한다. 한국 물가로 환산하면 매달 200만 원씩 고향에 보내주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국 돈 10만 원이면 북한에서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200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나도 매달 200달러씩 고향집에 보냈다.

    사단장, 여단장부터 사관, 전사까지 모두가 밀수 관련 일로 돈을 번다. 밀무역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기도 하고, 직접 뛰어들어 큰돈을 벌기도 한다. 계급이 높은 사람만 직접 하고 졸병은 뒷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반대의 경우도 꽤 있다. 국경경비대가 밀수 현장을 적발하면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주도한 것이다. 소속 부대 여단장이 주도한 밀수를 부하가 적발해 멋쩍어하는 일도 벌어진다. 중국 내 밀수거점까지 확보해놓고 활동하는 군인도 있다.

    통이 작은 녀석들은 한 탕에 북한 돈 100원 정도로 작게 한다. 공산품 같은 것을 거래하는 것이다. 제대로 하는 놈들은 t에 얼마 하는 식으로 사업을 크게 벌인다. 한 번에 500달러, 1000달러를 번다. 한국에서도 1시간에 50만 원, 100만 원을 버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국경경비대 사관, 전사들은 변경무역을 하는 북한 사람, 중국 사람에게 각각 뇌물을 받는다. 명절이나 생일 같은 좋은 날엔 중국 사람들이 선물도 챙겨준다.

    전연지대(前緣地帶)에서 근무하는 인민군은 돈을 벌 기회가 없다. 전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근무지는 단연 강원도다. 국경에서 근무하려면 밑 작업이 필요하다. 나도 이런저런 사업을 벌여 국경으로 갔다. 사람 관계에 서투르거나 머리가 나쁘면 국경에서도 돈 못 버는 곳으로 밀려난다. 돈 되는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10을 벌면 5~6을 뇌물로 갖다 바친다.

    군복도 사비로 제작해 입어

    중국산 공산품 따위나 밀수하는 것 아니냐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런 것도 거래한다. 고기 넘기고, 술 넘기는 녀석도 있다. 큰돈 되는 밀수 상품은 북한 지하자원이다. 마그네사이트 아연 희토류 철광석 홍보석 금강석 니켈 같은 것 말이다. 칼슘부터 염산까지 별의별 것을 다 거래한다. 북한산 마약을 밀거래하는 녀석도 적지 않다. 적발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단속하는 놈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닌가. 돈 주고 나오면 그만이다. 밀수상품 액수의 절반을 내놓는 게 관례다.

    중국 국경경비대 녀석들은 잘 먹고 잘 살아선지 북한 사람들이 밀수를 하든 뭐를 하든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인민이 빨래하러 나가는 것까지 통제한다. 겨울에 공동작업 할 때는 중국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도 감시해야 한다.

    중국 녀석들은 살인, 마약, 국가범죄 같은 큰 건을 통보받기 전엔 국경에 나오지 않는다. 먹고사는 것과 관련한 짓엔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우리 애들이 국경을 넘어가 쌀 낚아채오고, 여자 강간하고 그런 게 있다. 그럴 때는 중국 녀석들도 무장(武裝)을 쓴다.

    “압록강 인민군대는 軍이 아니다, 밀수·인신매매 장사꾼일 뿐”

    북한 신의주 국경경비대 막사가 압록강 너머로 보인다. 2013년 2월 촬영한 사진이다.

    국경 부대는 음식도 중국에서 넘어온 좋은 것만 골라 먹는다. 소 족발, 돼지 족발을 포장한 게 인기다. 중국 라면도 넉넉하게 쌓아둔다. 한국 라면? 중국 것보다 비싸다. TV도 삼성전자 게 고급이다. 모든 게 중국산보다 한국산이 비싸다.

    돈을 잘 벌다보니 국경경비대 전사들은 군복도 부대에서 내주는 것은 촌스럽다고 여겨 사비로 직접 옷을 제작해 입는다. 혜산의 국경경비대 여전사들은 군복바지 안에 높은 굽 구두를 신는다. 구(舊)대원들은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오입하는 집이 있다. 오래될 ‘구’자를 쓰는, 그러니까 군 생활을 오래한 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밀수일하는 집마다 아가씨들이 다 있다. 그 집에서 고정적으로 여자 맛을 본다.

    북한 여자는 오입질하기 편하다. 아니, 여기와 똑같다. 한국의 클럽에서 눈 맞는 것과 비슷하다. 와서 보니 경제 상황과 사회·정치 시스템이 다를 뿐 사람 사는 것은 똑같더라. 서로 깎아내리기 하고, 권력 두고 파벌을 나눠 다투고 하는 게.

    2006년께 김정일이 군기 확립을 지시해 조금 팍팍했던 적이 잠시 있기는 했지만, 다시 한 번 밝히건대 북한 군대는 군기가 서 있는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다. 마음대로 밖에 나다니면서 돈벌이도 하고, 오입도 한다. 농번기에 농사짓고, 현장서 건물 짓는 것도 다 군인이다.

    대(代)를 이어 군에 복무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인민군 군관은 농촌 출신 일색이다. 그렇다보니 농촌엔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또한 사람들이 협동농장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사하는 게 돈벌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2년 정도 복무하면 군기가 확립될 텐데, 10년씩 군 생활을 하니 그게 어렵다. 10년 동안 복무하다보면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연대장과도 서로 잘 통하고, 그냥 사회에서처럼 지내는 것이다. 한국 군인은 주둔지 밖을 못 돌아다닌다고 들었다. 자본주의 군대가 더 군대다운 모양이다.

    지난해 말부터 경비 강화돼

    국경지역에서는 중국 휴대전화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중국 게 터진다. 오늘도 혜산에 있는 친구와 통화했다. 서울에서 통화하려면 중국 식별번호를 누르고 국제전화를 걸면 그만이다. 1분당 1500원가량이어서 자주 연락하지는 못한다. 북한 당국이 전파 감지기를 많이 설치해놓아 5분 넘게 통화하면 탐지기에 적발될 수 있다. 그래서 통화를 짧게 한다.

    카카오톡 같은 것도 할 수 있느냐고?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설치하는 방법을 모른다. 중국에서 SNS를 설치해 북한에 들여온 것도 있는데, 그것은 간첩 잡는 기관에 적발될 사안이다. 국가정보원 같은 곳에서 그런 것을 해서 들여보내는 것으로 안다.

    평성 같은 내륙지역에선 중국 휴대전화가 당연히 터지지 않는다. 북한 휴대전화로는 국제전화를 할 수 없다. 중국 휴대전화를 가져와 개조해 ‘조선에서 만든 것’이라고 거짓말하고 판다. 중국돈으로 100~300위안(한국 돈 1만6000~4만8000원) 하는 폴더형 휴대전화를 300~400달러(한국 돈 30만~40만 원)를 받고 주민에게 판다. 휴대전화를 인민의 돈을 빨아들이는 수단으로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폴더형 휴대전화를 무료로 주더라.

    북한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다. 나도 여러 편을 봤다. 남자들도 많이 본다. 과거에는 CD알(CD의 북한식 표현)로 주로 들어왔는데, 요즘엔 노트북 컴퓨터를 활용한다. USB에 담긴 형태로 북한에서 유통된다. 노트북은 대부분 중국산이다. 노트북이 없으면 가난한 집이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 정보당국이 신의주와 온성을 통해 한국 드라마가 담긴 대량의 CD알을 공작 차원에서 북한에 들여보내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종국엔 혜산을 통해 CD알을 북한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고 들었다. 북한 인민에게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그런 일을 한 것 같다.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돈 많은 이는 엄청 부자다. 한국 사업가처럼 돈이 많지는 않지만 40만~50만 달러를 소유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국경은 2008년까지는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008년 이후 경비가 강화됐지만 지난해 말까지는 강을 건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엔 경계가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나무에 송곳을 박은 부비트랩도 설치해놓았다고 한다. 시력 상실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탈북자와 밀수꾼 일을 돕는 행위를 철저히 봉쇄하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4대 범죄 처단 특별지시도 내려졌다고 혜산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국경경비대가 국경여단 산하에 독자적으로 있었는데,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으로 넘어갔다고도 한다.

    북한 지역 국경에는 철책이 없다. 중국 쪽은 철책을 쳐놓았다. 나는 솔직히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왔다는 사람들의 얘기가 잘 와 닿지 않는다. 중국 국경경비대는 도강을 막는 일에 관심이 없다. 중국 쪽 철책에 개구멍이 곳곳에 있다. 밀수꾼들이 만들어놓은 통로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해 국경을 밥 먹듯 오갔다.

    이 간나 새끼들아!

    “압록강 인민군대는 軍이 아니다, 밀수·인신매매 장사꾼일 뿐”

    압록강 위화도 국경경비대원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보낸다. 2012년 10월 촬영한 사진.

    나도 철책 아래 개구멍을 통해 중국 창바이(長白)에 도착했다. 창바이에서 건너다본 혜산은 한심했다. 기와가 없어 나무로 지붕을 얹은 집이 늘어선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에는 딱 1주일 머물렀다. 창바이에서 두 시간가량 쏘다니다 중국돈으로 버스표를 끊어서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를 거쳐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갔다.

    쿤밍에서 제3국(탈북 루트가 공개될 수 있어 나라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으로 넘었다. 동남아 A국에 한국이 경제 지원을 많이 한다고 알고 있다. 협정이 맺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나라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쉽다고 한다. 혜산을 떠나 제3국을 거쳐 A국 수도에 도착하는 데까지 딱 9일이 걸렸다. 고생해서 한국에 왔다는 사람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A국에서 한 달간 머무르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창바이에서 만난, 서울행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700만 원가량의 돈을 줬다. 한국에 와 들어보니 나는 돈을 많이 준 편이다. 혼자 힘으로 탈북한 사람을 중국에서 제3국으로 안내하는 경우는 브로커 비용이 300만 원가량이라고 한다. 브로커가 국경 통과까지 책임질 때는 국경경비대에 주는 뇌물이 포함돼 500만~600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 와 후불로 브로커 비용을 내는 사람은 정착지원금 통장이 깡통이 되기도 한다.

    북중 국경에서 생활한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평성에서 계속 살았다면 더 큰 세상을 몰랐을 것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의 거의 대부분이 국경지방 출신인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탈북이 많을 때는 한국행을 결행할 생각을 못했다. 부모님이 혹시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요즘엔 한국에서 중국을 거쳐 부쳐주는 돈으로 북한의 가족이 잘사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 처음 와서 놀란 것은 건물이 늘어선 모양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북한 건설은 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반면 한국은 자본가가 각자 돈을 대서 짓기에 그런 것 같다. 북한 건축은 겉으로 보이는 곳은 멀쩡하지만 뒤쪽 동네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전기가 아예 안 들어간 지역이 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썼을 것 같은데 ‘돌가스’ 같은 것에 의지해 사는 것이다.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는 힘들었다. 석 달을 그곳에 머물렀는데, 신원보증이 잘 안돼 독방에 1개월간 있었다. 사람을 걸러내고 심사하는 게 그곳의 일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국정원 사람들과는 앞으로도 얽히기 싫다. 독방에는 TV도 없고, 책도 주지 않는다. 마지막엔 악이 나서 “이 간나 새끼들아! 맘대로 하라”고 고함도 쳤다.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기로 돼 있다. 문서에 서명을 한 터라 더는 밝히지 않으려 한다. 탈북자들이 그 안에서 겪은 일을 말하면 국정원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다.

    원래는 서울에 정착하려 했는데, 월세가 비싸 안산을 선택했다. 경기도는 서울보다 월세가 저렴하다. 먼저 온 친구들이 서울에는 오지 말라고 하더라. 탈북자 이미지가 나쁘다고 했다. 여자들이 물을 흐려놓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유흥업소 나가는 탈북자의 상당수가 인신매매로 중국에 팔려갔다 도망쳐 한국에 들어온 경우다. 중국으로 팔려가는 북한 여성이 나날이 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보증금 350만 원 주택에 정착

    안산 집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집이 너무 작아 실망했다. 평성 고향집보다 훨씬 나빴다. ‘우리가 한국에서 뭐 한 게 있나, 삶을 시작할 수 있게끔 도와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살아보니 집은 작지만 동네가 조용해 서울보다 살기 좋은 것 같다. 지금 사는 집은 보증금 350만 원, 월세 4만 원이다. 정부에서 탈북자에게 지원하는 전세 보증금은 1200만 원이다. 850만 원을 손해 본 게 아니냐고? 저축해놓은 돈이다. 5년 동안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이곳에서 살면 나머지 돈을 현금으로 준다.

    처음 한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막막했다. 내가 있는 곳의 위치도 몰랐다. 마음 약해지면 쓰러진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로지 내일 할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휴대전화는 ‘팀장’이라는 사람이 개통하는 것을 도와줬다. 수고비를 10만원씩 받아먹더라. 속으로 ‘10만 원 갖고 잘 살아라’ 하면서 그이에게 돈을 줬다. 북한에서 일반인은 한국에서 사용하는 고급 휴대전화를 쓰지 못한다.

    내가 관찰해보니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정착한 친구들은 망탕망탕 사는 경우가 많았다. 부산, 대구에 다녀왔는데 우리 아이들은 하나같이 산비탈 구석진 곳에서 살았다. 반면 수도권에 사는 아이들은 삶이 대체로 정리돼 있다.

    북한 경제가 과거보다 좋아졌다는 기사가 나오던데, 당최 무슨 얘기인지,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부분이 좋아졌다는 것인가? 인민 경제가 좋아졌다는 것인가? 국가에 돈이 많아졌다는 것인가? 북한에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건설자, 기술자를 만나 공부하면서 북한의 미래를 나름대로 내다봤다. 전망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려 한국에 온 것이다.

    “압록강 인민군대는 軍이 아니다, 밀수·인신매매 장사꾼일 뿐”
    나는 노동당원이었다. 입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당에 들어가야 사람 구실하면서 살 수 있다. 당원이 돼야 비로소 떳떳한 존재가 되는 곳이 북한이다. 여자들은 몸을 주면서까지 입당하려고 한다. 군대에 간다고 입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똘똘하거나 대외관계를 잘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착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나는 군 생활을 괜찮게 했다. 북한에서 한자리 해보자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다.

    북한은 ‘총화’의 나라다. 노동당 조직이 체제 유지의 근간이다. 김정은이 노인은 당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평양에 깨인 늙은 사람은 귀찮은 일 이제는 안 해도 된다면서 좋아했다. 지방의 노인은 당증 외엔 우리가 볼 게 뭐가 있느냐면서 한탄했다. 우둔하다고 하겠다. 허울뿐인 당증을 갖고 당원 행세를 하면서 안분지족하는 것이다.

    나는 노동자의 아들이다. 농민과 함께 북한에서 가장 좋은 출신성분이다. 노동자, 농민이 성분이 좋다는 것은 선전 포스터용일 뿐이다. 열심히 하면 나도 뭔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 농민의 아들 중 한 명이 선전 포스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멋진 상표를 붙인 시제품 맥주를 하나 만들어놓고 그런 맥주를 도처에서 구할 수 있는 것처럼 광고하는 꼴이다. 사람들의 충성을 그런 식으로 유도한다. 한국에 온 탈북자 중 일부는 그런 원리를 파악하고 강을 건넌 것이다.

    TV 같은 곳에 출연해 북한 권력의 내막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탈북자가 있던데 북한 내에서도 핵심인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실체를 알 것이다. 김정은이 고모부까지 죽이는 것을 보면 뒤에 누군가 있지 않나 싶다는 생각은 한다. 장성택이 김경희의 남편인 것을 사람들이 다 안다. 북한에서 장성택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의식이 없는 사람, 상식이 없는 사람이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무식쟁이나 왜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만 장성택이 누군지 모른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사위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과연 김정은의 선택일까.

    폭압의 정치

    나에게는 자본주의가 맞는 것 같다. 뭘 하든 누가 참견 않고 일한 만큼 보상받는 것 아닌가. 일자리를 얻으면 자유가 제한받는다는 것도 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다. 막노동부터 시작해서는 미래가 담보되지 않을 것 같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면 이런저런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한국에 적응 못하고 영국, 노르웨이, 캐나다로 이주한 친구가 많더라. 나도 캐나다에 가라는 권고를 들었다. 영국, 노르웨이, 캐나다 같은 나라는 복지가 잘 돼 있어 먹고살 걱정이 없다고 한다. 내 생각엔 한국도 복지가 잘 돼 있는 것 같다. 살아보니 30만~40만 원으로도 한 달을 살 수 있더라. 국가에서 저소득층에게 매달 지원해주는 돈만으로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어쨌거나 탈북자가 한국에서 살기란 힘든 것 같다. 오죽했으면 말도 안 통하는 나라로 떠났을까 싶다. ‘제 땅에서도 성공 못하면 어디 가서 성공하겠느냐’고 마음을 다잡을 뿐이다.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게 애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 사는 게 애국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상한 애가 많다. 머리가 나쁘게 굴러간다. 유흥업소에 맨 우리 아이다. 안 그러면 좋겠다.

    김일성은 폭압의 정치를 했다. 세계적으로 논평할 때도 독재자 아닌가. 사회주의라는 구호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북한 사회·정치시스템을 만들어놓은 것이 김일성 부자다. 사회주의 모순을 알면서도 잘못된 시스템을 지금껏 유지한다. 수십만 명이 정치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생명을 잃었다. 지금도 특권층이나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을 빼놓고는 생지옥에 사는 게 북한의 현실이다.

    북한 인민의 고단한 삶은 누구의 잘못인가? 거기서 태어난 게 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축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도 북한에서 났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고 그런 존재로 살았을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나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조금씩 이해해간다. 한국식 대인관계는 아직 숙달이 안 됐다. 웃으면서 연락 준다 해놓고 답 없는 사람이 많다. 친구들은 하나원에서 배운 것 중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북한 때를 지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더 바꿔야 한다. 북한식으로 행동하면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을 잘 안다.

    오늘 아침 나를 담당하는 경찰 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왜 학원에 빠졌느냐”고 묻더라. 아직까지 온전한 자유는 누리지 못하지만, 내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아직은 두려운 게 사실이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구술자의 신원 보호와 관련한 요청으로 편집자가 개인정보 중 일부를 실제와 다르게 바꿨습니다. 박철용이라는 이름이 가명이라는 점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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