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강물처럼 흘러간 청춘의 도전과 낭만

막 내린 대학가요제 36년 결산

  •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입력2014-07-22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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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시대를 풍미하며 음악 문화의 한 축을 이루던 대학가요제가 사라진다.
    • 1990년대 들어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이 떨어지면서 정체성과 진정성 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폐지된 것. 대학가요제 36년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살폈다.
    강물처럼 흘러간 청춘의 도전과 낭만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

    50대 후반인 한 사업가는 말한다. “오늘날의 MBC를 MBC답게 만든 것은 대학가요제다. 모두 숨죽이던 군사정부 시절, MBC가 기획한 대학가요제는 신선한 충격과 도발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 MBC는 시대를 앞서가는 방송사라는 환상을 우리 세대에게 심어줬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대학가요제에 채무가 있는 사람들이고 MBC는 우리에게 빚진 방송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MBC 대학가요제가 열린 그해 대학에 입학했다. 유서 깊은 ‘77학번’이다. 그의 주장은 “대학가요제를 폐지하면서 시청률과 트렌드 변화를 들먹이는 건 궁색하다. 방송사가 역사를 같이하며 자사를 먹여 살리고 키워준 고마운 프로그램 하나 못 지킨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MBC의 고충

    대학가요제 폐지를 둘러싼 논란은 오래전부터 뜨거웠다. 엄연히 광고로 먹고사는 방송사 처지에서 투자한 제작비에 비해 광고와 시청률로 나타나는 실적이 저조할 경우 존속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이런 고비용 저효율 상황은 1990년대 중반 뚜렷하게 나타났고 IMF 외환위기 한파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폐지설이 왕왕 불거져 나왔다.

    MBC는 그래도 대학가요제라는 상징성 하나로 버텼다. 대학생 음악경연대회의 또 다른 산맥을 형성한 강변가요제가 2001년 22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 것과 비교하면 할 만큼은 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가요매니저와 일부 방송 관계자들은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졌음에도 방송사가 연례행사를 계속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해 마침내 잠정 중단 발표가 났고 2013년 대학가요제는 열리지 않았다. ‘폐지’라는 말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MBC가 폐지할 것으로 예단했다. 대학가요제 출신, 특히 수상자 출신 가수들과 출전을 준비해온 대학생들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앞서 의견을 낸 사업가를 포함해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후반 학번의 일반인도 가세했다.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은 대학가요제 폐지를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0월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2013 대학가요제 포에버’라는 항의성 공연까지 열었다.

    MBC는 한발 물러서 연말에 대학가요제의 부활을 약속하며 폐지 결정을 번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이건 무리라는 생각으로 끙끙 앓았을 것이다. 비용을 들여 방송국 아닌 바깥으로 나가 대학캠퍼스에서 오랫동안 행사를 강행해왔지만 2012년에는 상대적으로 조촐하게 일산 소재의 자사 방송센터에서 대학가요제를 개최했다.

    결국 마지막이 된 이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의 느낌은 “반드시 대학가요제를 살리겠다!”는 제작진의 넘치는 의욕이 무색하게도 ‘앞으로 어렵겠구나!’였다.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만 결국은 상업적, 경제적 논리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장구한 역사가 무서운 자본 논리에 패한 셈이라고 할까. MBC는 6월 말 공식적으로 대학가요제 폐지를 결정하면서 이 프로그램의 36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간의 논란에 조금은 익숙해진 탓일까. 폐지가 결정된 후 언론과 대중은 “아쉽다!”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비교적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폐지설이 등장할 때마다 격해지던 반론의 수위가 확실히 낮아졌다. MBC는 “적절한 기회가 오면 새로운 트렌드와 참신한 형식의 가요제 기획을 모색하도록 하겠다”고 전했지만 수년간 가요제(오디션) 형식의 프로가 누린 열기가 식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속한 시기에 대학가요제가 부활할 것 같지는 않다. 몇몇 음악관계자는 가요제 형식이 설령 부활하더라도 대학생 중심의 프로그램이 기획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대학가요제는 이제 끝!”이라고 단언한다.

    프로그램이 끝나도 추억은 끝일 수 없다. 대학가요제가 음악계와 문화 전반에 남긴 36년의 궤적은 워낙 뚜렷하기에 대학가요제 세대라고 할 현재 40~50대(7080)의 기억에서 쉽사리 퇴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대학가요제가 쏟아낸 엄청난 히트곡과 더불어 젊은 시절을 보냈다.

    우선 폭풍과도 같았던 1977년 1회 대학가요제의 대상 수상곡인 샌드페블스(서울대)의 ‘나 어떡해’를 잊을 수 없다. 젊음의 혈기와 아우성을 담은 이 노래는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움츠린 청춘 정서와 젊은이의 음악 록을 되살리면서 기성의 틀에 묶여 있던 음악계에 충격을 가했다.

    7080 우상들과 주옥같은 명곡들

    때마침 3형제 밴드인 ‘산울림’의 출현과 맞물리면서 록의 함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실제로 ‘나 어떡해’를 작곡한 인물이 산울림의 둘째인 김창훈이다. 샌드페블스를 기폭제로 무수한 록 밴드, 당시 표현으로 ‘그룹사운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1회 대학가요제에서는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 이스라엘 민요와 고려가요 청산별곡을 혼합한 이명우의 ‘가시리’도 널리 애창됐다.

    배철수가 이끈 ‘활주로’(항공대)의 ‘탈춤’과 노사연(단국대)의 ‘돌고 돌아가는 길’이 수상한 1978년 2회 대학가요제에서는 입상조차 하지 못한 심민경의 ‘그때 그 사람’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록과 포크가 대세이던 시절 뜻밖에 트로트 곡을 들고 나와 수상자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음반 녹음의 기회를 잡았다. 그의 이름은 곧 심수봉으로 바뀌었다.

    대상이 발표되는 순간 좋아 어쩔 줄 모르며 뛰어나온 김학래가 임철우(명지대)가 호흡을 맞춘 1979년 3회 대상 곡 ‘내가’, 가장 대학가요제 음악답다는 평가를 받은 이범용 한명훈(연세대)의 포크 록 ‘꿈의 대화’는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걸작으로 꼽힌다. 오랫동안 라디오 리퀘스트를 받은 1982년 대상 곡 조정희(홍익공전)의 ‘참새와 허수아비’, 한 편의 시를 방불케 한 ‘높은음자리’(부산 동의대)의 1985년 대상 곡 ‘바다에 누워’, 이듬해 그랑프리를 수상한 유열(한국외대)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1988년 대상을 탄 밴드 무한궤도(서강대, 연대, 서울대)의 ‘그대에게’도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무한궤도의 리더였다가 나중에 솔로 활동에 나선 신해철은 지금도 대학가요제 출전을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모멘트로 꼽는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그대에게’ 관련 일화다.

    “한번은 ‘그대에게’를 공연장에서 안 부르려고 했어요. ‘우려먹기 그만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요. 그래서 앙코르 무대에서 ‘그대에게’를 안 부르고 공연을 끝냈어요. 그랬더니 관객들이 또 앙코르를 하더라고요. 심지어 세 번이나요. 그러다 지쳐서 ‘아, 나도 집에는 가야겠다’ 싶어 ‘그대에게’를 불렀죠. 그렇게 앙코르를 외치던 사람들이 그제야 집에 가더라고요.”

    비록 대상을 타지 못했어도 그 못지않게 사랑받은 곡도 부지기수. ‘마그마’(서울대 연세대)의 ‘해야’, 우순실(한양대)의 ‘잃어버린 우산’, 이정석(피어선신학대)의 ‘첫눈이 온다구요’가 대표적이다. 이후 1993년 대상을 탄 남자듀엣 ‘전람회’(연세대)의 ‘꿈속에서’, 2005년 대상을 수상한 그룹 ‘익스’(경북대 대구대 영남대)의 ‘잘 부탁드립니다’, 2009년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대 나온 여자’(이화여대)의 ‘군계무학’은 잠깐 주목을 받았지만 전국적 히트로 번지지는 못했다. 1990년대 들어 뚜렷해진 대학가요제의 인기 부진과 쇠퇴는 히트곡 부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전람회는 근래 영화 ‘건축학 개론’을 통해 재조명된 곡 ‘기억의 습작’이 대상 수상 후 곧바로 히트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고, 멤버 김동률은 솔로 활동을 통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성장했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이름을 얻은 가수는 그 외에도 많다. 심수봉, 노사연, 배철수, 김학래, 조하문, 유열, 이정석, 신해철은 대학가요제를 발판으로 기성 음악계에 우뚝 섰다. 노사연의 한마디. “대학가요제가 없었다면 ‘만남’의 노사연, 지금의 노사연도 없다!”

    히트곡과 인기 가수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것은 신인 가수의 등용문을 넘어 스타의 산실이 됐다는 얘기다. 이러니 가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중·고교 때부터 대학가요제 입상을 벼르고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김학래는 언제가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로지 대학가요제에 나가려고 대학에 가야 했지요. 하기 싫은 입시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학가요제였죠.”

    대항 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대회 입상이 삶의 절대적인 목표가 되고, 수상자들이 곧 청춘의 아이콘이던 황홀한 전성기를 누린 대학가요제가 왜 1990년대 이후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화된 것일까? 일각의 분석처럼 시대가 바뀌면서 ‘군사독재 시절 젊은이들의 아픔과 울분을 토해내는 해방구’ 구실을 하지 못해서일까? 분명 대학가요제의 노래는 간접적으로나마 대학생의 건강한 정서를 표출한 측면이 있다.

    1981년 5회 대상곡인 정오차(한양대)의 ‘바윗돌’이 증명한다.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픔만 달래는 바윗돌/ 세상만사 야속 타고/주저앉아 있을쏘냐…’ 정오차는 바윗돌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죽은 친구의 묘비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이 곡은 얼마 후 방송과 판매가 전면 금지됐다.

    그러나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대학가요제의 출전 곡 대부분은 기성 노래와 별 다를 게 없이 꿈과 사랑, 이별 등의 감상적 기조를 노래했다. 검열이 있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답답한 시대를 직시하고 아픈 현실을 드러내는 비판 성향의 노래는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대학가요제는 당대에 이미 “폭발하는 청춘 정서의 부활이 아니라 단지 캠퍼스 낭만의 부활일 따름”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1979년 3회에 지극히 시적이고 감성적인 노래 ‘영랑과 강진’을 가지고 참가, 은상을 수상한 김종률(전남대)의 사례를 보자. 이듬해 터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일대 충격을 받은 김종률은 즉각 낭만과 작별하고 얼마 후 운동가요의 새 장을 연 기념비적인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다. 대학가요제를 관통한 지배적 표현 정서는 틀을 박차고 나오지 못한 채 일정 수위에 머물러 있었음을 반증한다.

    차라리 대학 문화의 성격 변화 측면에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군사독재 시절인 1980년대까지 대학 문화는 기성, 기존의 양식을 거부하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종의 ‘대항 문화’성격을 지녔다. 여기서 캠퍼스송들이 기성곡들과의 차별적 가치를 획득했다. 사회적 저항성을 담보하지는 않았더라도 정형화한 사고, 익히 알고 있던 접근, 설령 상업적 성공을 가져올지라도 진부한 스타일과는 대항했다.

    하지만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선풍이 전국을 뒤집으면서 대중문화의 파괴력이 캠퍼스를 강타하게 되자 대학문화의 기반은 대항 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빠르게 이동했다. 어른 지향의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판치던 시절에 초창기 대학가요제 참가자들은 밴드 록과 포크를 동원했던 반면 이 시기의 참가자들은 랩, 알앤비, 코믹 송, 일렉트로닉 등 주류를 점령한 스타일을 답습했다.

    총학생회 주최의 행사나 대학축제에 출연한 가수들이 이전에는 대중가수 아닌 언더그라운드 계열의 음악가들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류의 인기가수들로 채워졌다. TV 스타들이 대학축제의 공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999년 한 유수의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올해 축제에서 가장 보고 싶은 가수’를 묻는 학내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때 학생들이 꼽은 1위는 뜻밖에도 당시 최고 인기의 걸 그룹인 에스이에스(SES)였다. 정태춘, 안치환, 윤도현밴드가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가 대학가요제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초창기에 대중의 호응을 불러 모은 ‘나 어떡해’ ‘탈춤’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바윗돌’ ‘꿈의 대화’ 등의 노래는 이전 주류 미디어에서 접하지 못했던 신선함으로 가득했다. 곡조가 그랬고 가사가 그랬고, 출전자들의 창법도 기성가수들과는 분리선을 그었다.

    강물처럼 흘러간 청춘의 도전과 낭만

    1 배철수가 이끈 그룹사운드 활주로. 2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샌드 페블스. 이들이 부른 ‘나 어떡해’`는 역대 대학가요제 최고 인기곡으로 조사됐다. 3 1980년 대학가요제에서 이범용(왼쪽) 한명훈 듀엣이 통기타를 치며 ‘꿈의 대화’를 부르고 있다.



    “미련하게 왜 대학가요제를 나가?”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대학가요제의 노래는 정반대로 대중가수의 스타일을 닮아갔고 따라갔다. 대중적 흐름을 앞서가야 할 대학 문화가 오히려 대중문화를 허겁지겁 뒤쫓는 배반의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남달라야 할 대학생의 음악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기 가요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거기서 대학생만의 참신함과 순수를 얘기하기는 어렵다.

    근래 들어 대학은 다시금 변화의 몸살을 앓는다. 대학의 현실은 취업의 높은 벽에 막혀 대항 문화와 멀어졌고 대중문화에도 지친 채 학점, 과제, 스펙 쌓기에 내몰린다. 요즘 대학생들의 이데올로기는 시대정신이 아니라 엄연히 취직이다. 일자리를 얻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학생들의 영혼을 잠식한 상황이다. 대학 캠퍼스를 향한 동경과 선망은 자취를 감췄다. 방송평론가 정덕현의 지적은 뼈아프다.

    “과거 대학가요제가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은 대학에 대한 선망이 한몫을 차지하고, 그런 지성인들이 벌이는 음악의 향연이라는 점이 어떤 특별한 정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을 보라. 대학이 과연 선망의 대상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치열한 전쟁터가 돼버렸다. 대학이 사회의 변화에 선봉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도 이미 지나버렸다. 청춘의 도전과 낭만? 그런 게 지금 대학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가.”

    심지어 대학가요제가 스타 탄생의 산실로서의 위상을 구가하게 되자 어느 순간, 초창기와 달리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가요기획사에 소속되어 전문가의 지도 아래 면밀히 출연을 준비한 학생들도 있었다. 대학가요제가 기획사의 공략지로 전락했다고 할까. 소속사는커녕 연습실도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힘들여 만든 곡 하나 달랑 들고 나와 푸릇푸릇하고 영롱한 젊음의 스피릿으로 들이댄 순수 시대의 종말! 대학가요제의 자랑이던 청춘의 독립 정신과 저돌성이 실종된 것이다.

    대학가요제 출신의 선배 가수들은 무대 성격이 변질되어버린 것도 이미지 탈색의 요인으로 지적한다. 생생한 라이브만을 들려주던 경연장이 어느 순간에 미리 반주를 녹음해온, 이른바 MR 테이프를 틀고 노래하면서 대학가요제 정신이 훼손됐다는 것이다. 아마추어의 작품으로 비록 조야하고 서툴지언정 음악을 자기 손으로 철저히 관장한 일종의 청춘 자주(自主)정신이 흔들리면서 매력이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옛날처럼 당대의 실력 있는 가수가 대회에 나오지 않은 점도 사실이다. 노래든 춤이든 미래를 꿈꾸며 실력을 쌓아온 젊은이들이 상대적으로 확실한 성공을 기약해주는 큰 음악기획사로 가서 음원을 내놓으려고 하지 ‘미련하게’ 대학가요제를 노리며 맹훈을 하지 않는다.

    SM이나 YG와 같은 거대 기획사에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몰려가고 이 회사들의 신인 육성 시스템은 견고하다. 이게 싫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는 음악지망생들은 인디 음악 쪽으로 선회, 서울 홍대앞과 신촌의 클럽 공연을 꿈꾼다. 대학가요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운데 낀 것도 아닌 어정쩡한 미약한 존재가 돼버렸다.

    실력파 뮤지션 이한철의 행보는 초라해진 대학가요제의 위상을 단적으로 웅변한다. 1994년 영남대 대표였던 그는 ‘껍질을 깨고’라는 노래로 영예의 대상 트로피를 안았다. 단지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려고 대학을 간 그였다. 예전 같으면 대상 수상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류 진입의 가능성을 확보했겠지만 비주류에 매료된 그는 거꾸로 인디 음악계로 자진해 ‘내려’가는 용단을 취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공습

    비주류에서 주류로 점프한 ‘말달리자’의 크라잉넛과 반대의 길을 걸었음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1999년에는 인디 밴드 ‘불독맨션’을 결성해 인디의 수확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2007년에는 ‘슈퍼스타’라는 힐링 성향의 곡으로 한국대중음악상의 ‘올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하며 성가를 높였다. 이한철이 예시하는 바는 지금 시대는 대학가요제보다 차라리 인디 활동이 더 전망이 밝다는 것이다.

    3~4년 TV매체를 장악한 오디션 프로 붐은 대학가요제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선두주자가 된 유선방송 엠넷의 ‘슈퍼스타K’를 위시해 ‘위대한 탄생’ ‘케이팝 스타’ 등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오디션 프로는 과거 대학가요제가 그랬듯 단기간에 많은 톱 가수를 배출했다. 허각, 존박, 울랄라세션, 버스커버스커, 이하이, 정준영, 로이킴, 악동뮤지션이 모두 오디션 프로를 통해 이름을 얻었다. 이리로 가야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데 굳이 대학가요제로 향할 이유가 없다. MBC도 보도자료를 통해 존속 유지가 힘든 이유 중 하나로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을 꼽았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이미 그로기 상태였는데 오디션 프로의 범람과 득세로 대학가요제는 KO를 당했다. 사정이 이러한데 시청률과 트렌드 추수로 방송사의 초심이 바뀌었다며 존속을 요구하는 것은 MBC에 대해 너무나 부담스럽고 가혹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수년 전에 없어졌어야 할 대학가요제가 이제야 폐지됐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다. 대학가요제와 같이 역사성을 지닌 프로그램의 경우 인기, 시청률, 제작비, 광고매출 등 여러 가지가 불리해도 분명한 한 가지를 잡고 있다면, 예를 들면 EBS의 ‘스페이스 공감- 헬로 루키’처럼 음악계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존속의 가능성을 담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다.

    대학가요제 시대는 저물었다. 현실적으로 시장 지분도 사라졌고 정서 지분도 없다. 오로지 기성세대에게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만이 남았다. 대학가요제 폐지가 이 추억마저 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추억은 때로 막강한 화력을 발할 수 있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로 복고 흐름이 거세질수록 대학가요제는 결코 화석화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현실에 지속적으로 출몰해 매 시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설파하지 않을까. 순수와 참신함을 추구하는 청춘 문화만이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미래에 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때로 과거시제가 바른 현재진행형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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