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언니 거짓말 때문에 4년간 보위부 감옥살이 금성정치대·탈북자 색출·북한 잠입…다 거짓말”

‘간첩 공범’ 여동생 김희영(가명) 중국 현지 인터뷰

  • 한상진 기자 | greenfish@donga.com

    입력2014-07-23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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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정화 사건 직후 보위부에 체포, 2012년 출소해 최근 탈북
    • 난 여권도 없는 사람…언니와 중국에서 북한 드나든 적 없어
    • 탈북자 색출? 노래방·다방에 살면서 그럴 정신이 어딨나
    • 언니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거짓말했다고 이해
    • 원정화, 최근 인터뷰서 주요 간첩 혐의(2006년 5월) 뒤집어
    “언니 거짓말 때문에 4년간 보위부 감옥살이 금성정치대·탈북자 색출·북한 잠입…다 거짓말”
    3월과 4월, ‘신동아’는 탈북위장 여간첩 1호 원정화(40) 씨를 둘러싼 의혹을 두 번에 걸쳐 보도했다. 원씨가 수사기관에서 주장한 내용과 판결문에 적시된 그의 주장을 철저히 검증했다. 그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다른 내용이 많이 확인됐다.

    ‘신동아’는 원씨가 올해 초 자신의 계부 김동순(70) 씨를 찾아가 밝힌 새로운 증언도 공개했다. 원씨는 김씨에게 ▲특수훈련을 받은 보위부 남파간첩 ▲요인 암살·군사정보 탐지 등 지령 수령 ▲중국에서 탈북자·남한 사업가 등 100여 명 체포 후 북송 등 자신의 주요 간첩 행위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원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엄마와 여동생)이 보고 싶고, 문어장사를 하기 위해 중국에서 북한 사람(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과 접촉했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부탁을 받고 정보를 넘긴 게 전부다”라고 털어놨다.(신동아 4월호, 5월호 참조)

    ‘신동아’는 최근 중국 모처에서 원씨의 여동생인 김희영(가명·35) 씨를 만나 3박 4일간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씨는 원씨의 친모인 최모(현재 북한 거주) 씨와 계부인 김동순 씨 사이에서 1979년 태어났다. 원씨가 그동안 “내가 살아온 과정은 여동생이 제일 잘 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동생이다.

    북한에 거주하던 김씨는 2008년 원정화 간첩 사건이 터진 직후 북한 보위부에 체포됐다고 한다. 불법으로 국경을 출입해 원씨를 15차례 만나고 국정원 간첩인 원씨를 도와 북한에 피해를 끼쳤다는 혐의였다. 김씨는 보위부 감옥에 수감돼 4년 4개월간 조사를 받았다. 2012년 말 출소한 김씨는 지난해 12월 탈북했다.

    ‘신동아’가 김씨를 만난 이유는 원씨의 간첩혐의 중 상당 부분이 김씨와 관련됐기 때문이다. 판결문에는 원씨 가족 대부분이 보위부와 관련돼 있고, 원씨가 탈북 이후 3회에 걸쳐 북한에 드나들 때마다 여동생과 동행했으며, 여동생 소개로 만난 보위부 간부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원씨는 수사과정에서 “동생 희영이는 1999년부터 보위부에 들어가 외화벌이 요원으로 활동했다. 청진시 보위부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만난 김씨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언니가 주장한 내용, 남조선 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대부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기자는 김씨에게 원씨의 경찰·검찰 진술조서, 재판기록 등을 일일이 보여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김씨의 북한 사투리와 북한식 표현을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표준어로 바꾸었음을 밝힌다. 괄호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자가 써 넣은 것이다.)

    “언니 거짓말 때문에 4년간 보위부 감옥살이 금성정치대·탈북자 색출·북한 잠입…다 거짓말”
    “언니 거짓말 때문에 4년간 보위부 감옥살이 금성정치대·탈북자 색출·북한 잠입…다 거짓말”


    1_ 원정화 사건으로 가정 파괴

    ▼ 언제 중국으로 나왔나. 현재 안전한가.

    “지난해 12월 말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고 줄곧 중국에 있었다.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다.”

    ▼ 원정화 간첩 사건 이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체포됐던 걸로 아는데.

    “2008년 9월 3일 청진의 한 상점 앞에서 체포됐다. 영문도 모른 채 청진시 보위부 구금소로 끌려갔다. 4년 4개월간 조사를 받고 옥살이했다. 난 언니 문제가 아니라면 중국에 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북한에서 장사해 한 달에 6000~7000위안을 벌며 잘살았다. 그런데 (출소한 뒤) ‘언니 문제로 뭘 또 확인한다, 조사한다’ 그럴 것이 걱정돼 (북한을) 떠났다. 엄마가 ‘너라도 편하게 나가서 살라’고 해서 나왔다.”

    ▼ 원씨 사건 때문에 체포됐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나.

    “체포되고 1년쯤 지나 알았다. 처음에는 살아온 과정, 특히 중국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쓰라고만 했다. 매일 조사할 때도 있었지만, 취급원(보위부 수사관)이 마음에 안 들면 석 달씩 부르지도 않고 가둬놨다, ‘특별히 할 말이 있으면 하라’면서. 정말 힘들었다. 하루 종일 정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휴식시간은 2~3시간에 10분, 자세가 흐트러지면 벌을 세웠다. 하루 3번 반찬 없이 강냉이밥과 시래깃국을 줬다.”

    ▼ 어떤 벌을 받았나.

    “뒷짐을 지고 앉았다 일어나기 500회, 엎드려뻗쳐 같은 것이다. 제대로 못하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은 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했다.”

    ▼ 4년 넘게 조사가 진행된 이유는.

    “첫 취급원이 중간에 죽었다. 이후 평양에서 보위부 요원을 키우는 대학 선생이 직접 내려와 조사했다. 난 특수대상자였다. 그 사람이 ‘원정화가 남한에서 간첩죄로 체포됐는데, 그 과정에서 네 이름이 나왔다. 세계적인 사건이다’라고 말해 줬다. 남한에서 보도된 내용을 일일이 보여줬다. 언니가 ‘보위부 요원인 여동생이 조선(북한)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남편은 보위부 소좌고 남동생도 보위부 운전수다’라고 말한 걸 그래서 알았다. 그 말을 듣고 당돌하던 기분이 툭 주저앉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취급원은 ‘중국에서 원정화를 15번 만나 뭘 넘겨줬냐’‘왜 보위부를 흔들고(팔고) 다녔냐’ 같은 걸 물었다. 난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보위부 간첩이라고 주장한 언니 때문에 나는 남조선 간첩이 돼버렸다.”

    ▼ 남동생은 보위부 운전수가 아닌가.

    “아니다. 언젠가 언니에게 ‘동생을 보위부에 운전수로 취직시켜볼까’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가공해서 말한 것 같다. 북한에서 한때 당구장·목욕탕을 운영했다.”

    ▼ 보위부에 체포된 후 가족은 어떻게 됐나.

    “내가 잡혀간 뒤 엄마가 쓰러졌다. 출소해서 보니 엄마는 목 혈관이 다 터져서 죽기 직전이었다. 집이 완전히 망해 있었다.”

    ▼ 체포되기 전 정부의 허가를 받고 장사를 했나.

    “북한 회사에 해마다 1만 달러를 바치고 그 회사 이름을 빌려서 하는 장사다. 북한에서는 개인이 다 그렇게 장사를 한다.”

    ▼ 거래를 했던 북한 회사 이름은.

    “북성무역, 승리판매소, 38무역회사….”

    ▼ 북한에서 보위부 외화벌이 요원으로 일한 적 있나?

    “그런 적 없다. 시끄럽게 왜 그런 일을 하나. 그리고 우리 집은 출신성분이 좋지 않아 보위부에 들어갈 수도 없다.”

    ▼ 남편이 보위부 소좌 아닌가.

    “2005년쯤 조선에서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보위부 소좌가 아니고 교통경찰이다. 내가 그 말을 언니에게도 했었다.”

    ▼ 보위부에서는 실형을 받았나.

    “보위부 사람들이 중국까지 나가 내 진술을 검증했다. 간첩 혐의가 없다는 게 확인되자 비법국경출입죄만 적용해 내보내줬다. 보위부 감옥에서 내내 눈물만 흘리며 살았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난 오갈 데가 없는 신세다. 원정화 때문에 별난 인생이 됐다.”

    2_ 원정화의 4년 10개월 중국 행적

    ▼ 원정화는 언제, 어떻게 중국으로 나갔나.

    “1996년 12월쯤 언니가 중국에 갔다. 무산(함경북도)에 있는 맏언니 원OO의 집에 놀러 간다고 한 뒤 오지 않았다. 중국에 갔다는 말은 엄마한테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막 울었다.”

    ▼ 언니를 다시 만난 건 언제인가.

    “중국에 가서 두 달쯤 지나 언니가 조선(북한)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도움을 줄 테니 중국으로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1997년 3월경 딸을 임신한 상태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언니가 살던 곳은 하얼빈 근처의 아성이었다. 내가 갔을 때 언니는 정신지체가 있는 김OO이란 남자와 살고 있었다. 내가 그 집에 있는 동안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보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김OO 집에서 내게 미화 500달러를 줬다.”

    ▼ 그 뒤에 다시 만난 건 언제인가.

    “조선에 들어가 딸 OO(1997년 6월 14일생)이를 낳고 100일쯤 됐을 때 다시 중국에 나왔다. 그때도 언니는 김OO과 살고 있었고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 아이는 나중에 유산됐다. 보름 정도 언니 집에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갔다. 나는 18세(1996년)에 결혼한 남편과 1999년 12월 헤어진 뒤 딸을 부모님에게 맡기고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나갔다.”

    ▼ 1998년 초 원정화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원씨는 자신이 1998년 12월 청진시 수남구역 안전부 정치부장이자 외가친척인 방광철에 의해 보위부 공작원이 됐다고 주장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원씨는 중국에 머물다 1998년 1월 북한으로 돌아갔고 그해 12월 보위부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이후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 연길과 훈춘 등지에서 100명이 넘는 탈북자와 남한 사업가를 납치해 북송시켰다.)

    “중국에 나간 뒤 언니가 조선으로 돌아온 적은 없다. 왔으면 나를 만났을 거다. 그리고 방광철은 친척이 아니고 우리 엄마와 친하게 지내는 집의 아들이고 보안서에서 경찰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특수훈련을 시키나? 훈련은 보위부가 하고 군사학교에서 한다. (언니가) 완전히 돌았다. 그 사람(방광철)이 들으면 펄쩍 날았겠다.”

    ▼ 1999년 12월 중국에 온 뒤 원씨를 다시 만났나.

    “중국에 온 뒤 한동안 훈춘에서 지냈다. 그러다 언니를 찾아 아성으로 갔더니 이미 김OO은 죽고 언니도 그 집을 떠난 뒤였다. 언니가 목단강(무단장)의 어느 식당에서 일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는데 거기도 없었다. 식당에 연락처를 남기고 왔는데, 한두 달 지나 언니가 연락을 해 왔다. 연길에서 언니를 만났다.”

    ▼ 연길에서는 같이 지냈나.

    “2000년 초쯤 언니를 만난 뒤부터는 한 1년간 같이 살았다. 언니와 노래방에서 한 달 정도 일했는데 술 마시는 게 힘들어 그만뒀다. 그 뒤엔 언니와 함께 다방에서 일했다.”

    ▼ 집은 어디에 구했나.

    “집은 없었고 노래방에 딸린 방, 다방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그러다 2000년 4월경 내가 한족 남자(이OO)를 만나 살림을 차리면서 그 집에서 언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이OO에게 생활비를 받아 썼다. 언니가 집안일을 주로 했다.”

    “남조선은 거짓말하면 돈 주나?”

    ▼ 북한에 있는 가족이 2001년 초 중국으로 모두 왔는데, 왜 온 것인가.

    “내가 이OO과 살던 중 딸과 가족을 보기 위해 조선에 들어간 적이 있다. 2000년 말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국경지대에서 이OO과 전화를 하다가 ‘언니가 집을 떠났고 한국으로 가려고 준비 중이다’라는 말을 듣게 됐다.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가족에게 연락을 해 중국으로 나오게 했다. 그때만 해도 가족 중에 누군가 한국에 가면 조선에 남아 있는 가족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다. 2001년 1월쯤 가족이 회령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왔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이후 탈북자의 월경(越境)이 급격히 늘었다. 국경경비대에 200~300달러만 주면 누구나 중국을 넘나들 수 있었다. 애초엔 단속이 심했으나 그 수가 워낙 많아지자 북한 당국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게 다수 탈북자의 증언이다.)

    ▼ 그럼 당시 원정화는 어디에 있었나.

    “내가 조선에 들어갔다 왔을 때, 언니는 훈춘으로 떠나 남한 사람인 조OO을 만나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잘 모른다. 가족이 중국으로 온 뒤 언니는 남동생과 북경에서 옻을 사서 북한산으로 원산지를 속여 팔아 2배 이득을 보는 식으로 돈도 좀 벌었다. 언니가 그럴 때는 붕붕 날았다. 그 돈을 투자해 조OO과 가게를 열기도 했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그 가게에 가서 일을 하다 왔다. 당시 우리 가족은 조OO이 총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OO의 처가 중국에 들어와 난리를 치는 바람에 시끄러워졌다. 조OO이 언니 돈을 떼먹고 한국으로 도망가려 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1만 달러를 받아내기도 했다.”

    “언니 거짓말 때문에 4년간 보위부 감옥살이 금성정치대·탈북자 색출·북한 잠입…다 거짓말”

    중국 모처에서 만난 여간첩 원정화의 여동생 김희영(가명).

    ▼ 원정화와 조OO 사이에 딸(원OO)이 있는데.

    (검찰은 2008년 수사 결과를 발표할 당시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 원정화가 남한에 쉽게 잠입하기 위해 일부러 임신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임신 6개월쯤 됐을 때, 엄마와 내가 언니를 데리고 연길에 있는 부인병원에 가서 낙태수술을 시키려 했다. 그런데 언니는 ‘무서워서 죽어도 못하겠다’며 도망쳤다. 그래서 결국 (낙태를) 포기했다.”

    ▼ 남한에 손쉽게 들어가려고 일부러 임신을 한 것은 아니었나.

    “듣기만 해도 골이 아프다.”

    ▼ 원정화는 중국에서 한국 사업가, 탈북자들을 붙잡아 북송시키는 일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탈북자를) 색출할 새가 있나, 살기 바빠 죽겠는데. 주머니에 쓸 돈이 하나도 없었다. 색출도 무슨 여유가 있어야 하지. 다방에서 일해서 500달러 정도 벌어 겨우 살았다. 그리고 중국에 있을 때 언니는 몸이 아파서 내내 집에만 있었다.”

    ▼ 원씨는 보위부에서 공작금을 받아서 생활했다고 주장한다.

    “그랬으면 우리가 노래방에서 숙식했겠나. 다방으로 옮긴 뒤에도 다방 위층에서 살았다.”

    ▼ 2001년 10월 언니가 한국에 가는 걸 알고 있었나.

    “알았다. 다른 가족에게는 정확히 말을 안 했지만 나에게는 말하고 떠났다.”

    3_ 원정화의 남한 정착 후 행적·간첩 주장

    (원씨는 2001년 10월 한국에 들어온 뒤 2008년 7월 간첩혐의로 체포될 때까지 14번 중국에 드나들었다. 마지막으로 중국을 다녀온 건 2006년 12월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원씨는 대부분의 중국 방문을 자신의 간첩 혐의와 연결시킨다. 북한 단동 무역대표부 김교학 부대표를 만나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남한에서 취득한 군사정보 등을 전달했다는 식이다. 원씨는 또 한국에 정착한 이후 3번(2002년 1차례, 2006년 2차례) 북한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했고, 그때마다 보위부 요원인 여동생과 동행했다고 주장해 왔다.)

    ▼ 2001년 10월 원씨가 한국에 들어간 뒤 연락은 하고 지냈나.

    “내가 중국에 오면 한 번씩 전화를 했다. 2004년과 2006년에는 중국 연길에서 만났다.”

    ▼ 2002년 10월 중국 도문에서 원씨를 만나 북한에 들어간 적이 있나.

    (판결문에 따르면, 원씨는 2002년 10월 중국 연길에서 동생 김희영으로부터 “청진시 보위부장이 언니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국경경비대의 안내로 북한에 들어가 청진 보위부장을 만난 뒤 “남조선에 있는 청진 출신 탈북자 명단을 파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또 김희영에게 청진 외화상점 투자금 명목으로 미화 2만 달러를 교부했다.)

    “거짓말이다.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하나). 난 몇 년이나 연길서 살았지만 도문에는 가본 적도 없다.”

    ▼ 원정화가 한국에 간 뒤로 북한에 들어간 적이 있나.

    “그런 적 없다. 내가 알기로 언니는 1996년 탈북한 이후 한 번도 조선에 들어간 적이 없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라고 묻고 싶다.”

    ▼ 원씨가 한국에 간 뒤 중국에 있던 가족이 모두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2008년 검찰은 원씨의 가족이 원씨를 안전하게 남한에 보내기 위해 중국으로 나왔고 원씨가 남한에 정착한 사실을 확인한 뒤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원씨 가족이 보위부 간첩인 원씨의 활동을 돕기 위해 그랬다는 게 당시 검찰의 판단이었다. 이것은 원씨 가족이 원씨가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가족 전체가 보위부 관계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내가 아들을 낳은 뒤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심하게 체해 먹지를 못해 죽을 지경이 됐다. 엄마도 답답하다며 조선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중국말도 모르고 공기도 안 좋다고. 죽어도 조선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죽어도 안 간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뺀 나머지 가족만 조선으로 돌아갔다. 난 조선에 돌아가 침을 맞고 살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영양제를 맞고 기운을 차렸다.”

    ▼ 한국에 갈 생각은 안 했나.

    “한족 남자를 만나 아들을 낳고 살 때였고, 조선에서 장사나 좀 하며 살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한국에 갈 생각은 안 했다.”

    ▼ 2002년 초 북한에 들어간 뒤로는 가족이 어떻게 살았나.

    “2003년부터 내가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장사를 시작했다. 이OO(한족 남편)이 도와줬고, 중국에서 알던 사업가 김OO 회장이 28만 위안(약 5000만 원) 정도를 빌려줬다.”

    ▼ 한국에 있던 원씨와 한때 문어 장사를 한 걸로 아는데.

    “2004년쯤 잠시 했다. 2004년 5월경 장사 물건을 살 목적으로 엄마와 중국 연길에 나와 언니를 만났는데, 그때 언니가 여성 동업자(여OO)를 데리고 왔다. 그때부터 내가 청진에서 문어를 사서 라진으로 보내면 남편 이OO이 그걸 받아 한국으로 보내줬다. 언니와 동업자(여OO)가 한국에서 물건을 받았다.”

    ▼ 왜 그만뒀나.

    “힘들고 재미없어서 그만뒀다. 문어를 걷어 들이는데, 무게와 단가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개인들한테 수소문해서 문어를 모아서 포장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만둔 뒤 라진에 있는 김OO이란 사람이 대신했다.”

    ▼ 조선족인 김현수(가명)를 아나.

    “내 장사를 도와주라며 언니가 소개한 사람이다. 2006년 5월경 연길에 왔을 때 언니와 처음 만났다. 언니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의 아들이라고 했다. 당시 언니는 딸 OO이를 데리고 연길공항으로 들어왔었다.”

    ▼ 연길공항 맞나? 심양공항 아닌가?

    “아니다. 내가 연길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 원정화를 도문에서 만난 것 아닌가?

    “아니다. 도문에는 가본 적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수사기록과 판결문에 따르면, 원씨는 2006년 5월 15일 중국 심양공항에 도착해 조선족 김현수를 만난 뒤 다음 날 단동으로 이동,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을 만났다. 그리고 “황장엽 등의 거처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날 원씨는 김교학에게 “북한에 돌아가고 싶다. 내 뜻을 상부에 전달해달라”고 말했다. 원씨는 같은 달 19일 중국 도문에서 여동생을 만나 청진 외화상점 투자금 명목으로 미화 1만 달러를 주었고, 여동생의 차로 도문다리를 건너 북한 온성(남양)으로 들어가 여동생이 보위부로부터 가짜달러를 받는 데 동행했다. 같은 달 21일에도 여동생과 북한에 들어가 마약을 받아왔다. 원씨의 주장은 당시 원씨와 동행했던 조선족 김현수의 진술과도 일치했다.)

    심양공항이 아니라 연길공항

    2006년 5월의 행적은 원씨 사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씨 외에 증인(조선족 김현수)이 등장하는 몇 안 되는 간첩 혐의 중 하나이며 북한으로부터 지령·공작금 수령, 북한 잠입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기이기 때문. 그러나 김씨의 주장은 원씨의 그간 주장과 달랐다. 일단 원씨가 중국에 들어간 공항부터 다르다. 기자는 김씨와 인터뷰하면서 이때의 일을 집중적으로 확인했다. 원씨도 7월 12일 한 ‘신동아’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판결문 내용을 완전히 뒤집는 증언을 했다.(상자기사 참조)

    ▼ 중국에서 원씨를 만난 날짜를 기억하나.

    “대략 기억이 난다. 2006년 5월 말에 남동생의 목욕탕이 문을 열었다. 그 직전에 중국에 왔으니까 5월 17~19일쯤이다. 난 중국에 나오면 일주일 정도 머문다. 중국에 오기 전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언니가 ‘나도 내일 연길에 들어간다’고 했다. 내가 ‘연길에는 왜 오느냐’고 물었더니 ‘OO이를 누구에게 맡기려고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이를 맡기면 돈이 많이 든다면서.”

    ▼ 공항에서 언니를 만나 어디로 이동했나.

    “언니 딸 OO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바로 건공소학교 근처에 있는 김현수 집으로 갔다. 이후 내내 김씨 집에 머물렀다. 언니도 김현수 집에 머물다 한국으로 들어갔다. 연길에 머무는 동안 나는 김현수에게 (북한으로 가져갈) 물건 사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 원정화는 연길에서 뭘 하며 지냈나.

    “별로 한 것은 없다. (연길) 서시장에 가서 한약을 지어왔고, 하루는 잠이 안 온다며 김현수와 나가서 마사지를 받고 왔다. ‘몸이 아픈데 연길 음식을 먹으면 좋아진다’고 했다.”

    ▼ 김현수도 내내 연길에만 머물렀나.

    “김현수 집에서 다 같이 지냈다.”

    ▼ 원정화와 김현수가 단동이나 심양에 갔다 온다는 말은 못 들었나.

    “그런 말은 없었다.”

    ▼ 원정화는 왜 딸을 김현수에게 맡기려 했나.

    “자기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도저히 볼 수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 맡기면 한 달에 2000위안이면 되는데, 한국에서는 5000위안을 줘야 한다고 했다.”

    ▼ 원씨가 딸을 김현수에게 맡겼나.

    “김현수 집이 너무 지저분해서 맡기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데리고 한국으로 나갔다.”

    ▼ 당시 원씨에게 외화상점 투자금을 받았나.

    “언니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은 적이 없다. 언니에게 그동안 받은 건 자신의 정착금 중 일부(한화 100만 원), 2004년 중국에 오면서 사다준 오메가 시계가 전부다. 그것 말고는 내가 언니에게 정산을 해줘야 할 돈이 조금 있다. 돈만 받고 문어를 못 보낸 적이 있는데, 한 6000달러 정도 된다.”

    ▼ 그 당시 희영 씨는 차를 가지고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왔나.

    “내가 어떻게 차를 가지고 넘어오나. 무역국 국장 정도 돼야 승인을 받아 차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외국인 화교도 자기 차를 가지고 중국에 마음대로 못 들어온다. 난 10여 번 중국을 드나들면서 한 번도 승인을 받아 넘어온 적이 없다. 북한에서 여권을 만든 적도 없다.”

    ▼ 그럼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에 들어왔나.

    “고무바지 입고 밤에 넘어왔다.”

    ▼ 원씨와 북한 온성(남양)에 들어가 보위부에서 준 가짜 달러와 마약을 들여온 적은 있나.

    “내가 (원정화의) 그 말 때문에 신경질이 나서 올해 초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다 지어내냐’고. ‘내가 언제 너하고 도문에 가고 조선에 갔냐’고. ‘언제 내가 너하고 위조달러와 얼음(마약)을 받았냐’고. 언니가 나에게 ‘미안하다’며 한마디도 못했다. 그 뒤로는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그런데 남한에선) 거짓말하면 돈 주나?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가. 그리고 난 위조달러나 마약을 본 적도 없다.”

    ▼ 원씨가 한국으로 나갈 때도 공항에 같이 갔나.

    “배웅했다. OO이(원씨 딸)와 사진도 찍고 중국돈 1000위안을 용돈으로 줬다. 김현수도 같이 나갔다. 언니가 한국에 가고 2~3일 있다가 나도 북한으로 돌아갔다.”

    ▼ 원씨가 북한 단동 무역대표부 사람을 만난다는 말을 한 적은 있나.

    “2006년 5월 만났을 때 들었다. 그때 언니가 가지고 다니던 사진기에 어떤 남자 사진이 있었는데, 김일성 초상화 밑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래서 ‘북한사람을 만나고 다녀도 되냐’고 내가 물었다. 그랬더니 ‘남한 여자인 척한다’고 했다. 그때 언니가 ‘요즘은 단동 무역대표부 사람하고 무역을 한다’고 말해줬다.”

    ▼ 문어 장사를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한국에 있는 박OO 사장한테 돈을 빌려서 하고, 단동 무역대표부 사람이 북한 쪽을 연결한다고 했다. 자기가 돈을 보내면 그 사람이 조선에 연락해 문어를 보내준다고, 그런 계약을 했다고 했다.”

    4_ 원정화의 북한 행적

    (판결문에 따르면, 1974년 아버지 원석희, 어머니 최OO 사이에서 태어난 원씨는 청진시에 소재한 남향고등중학교를 다니던 중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에 선발, 사로청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금성정치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6세이던 1989년 공작원 양성소인 특수부대에 입대했고 1992년 머리를 다쳐 감정제대(의가사제대)했다. 이후 평양시 락원백화점에서 물건을 빼내 팔다가 적발되어 국가재산탐오죄로 6년형을 선고받고 평남 개천교화소에서 복역 중 1995년 김정일 특사로 출소했다. 청진화학섬유공장에서 아연을 훔친 것이 문제가 되자 1996년 12월 중국으로 탈북했다.)

    원씨의 여동생 김희영 씨는 인터뷰에서 원씨 주장 중 상당 부분을 부정했다. 교화소 수감 이유, 특수부대 훈련, 금성정치대학 재학 등 원씨가 밝힌 주요 경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김씨는 “언니는 중학교를 그만둔 뒤 1년 정도 집에서 놀다가 속도전청년돌격대(건설전담 청년단체, 이하 돌격대)를 거쳐 시멘트 공장에 다녔다. 밖으로만 떠도는 여자의 몸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 북한에서 언니는 어떻게 살았나.

    “언니가 사고를 많이 쳐서 엄마와 아빠가 많이 싸웠다. 이불장 밑에 넣어둔 돈을 몰래 갖다 써버리고, 집에 있던 일본제 라디오를 팔아먹어 혼나기도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빚을 져 시도 때도 없이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왔다. 우리 집이 언니 때문에 얼마나 복잡했는지 모른다. 19~20살부터는 집에서 쫓겨나 밖에서 살았다.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언니가 엄마를 보겠다고 집 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혼날까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럴 때마다 눈물이 많이 났다. 엄마는 부엌에서 울고. 내가 아빠 눈치를 보며 먹을 것을 챙겨서 언니에게 갖다 주곤 했다.”

    ▼ 원씨의 학력은 어떻게 되나.

    “중학교 졸업을 못했다. 고무산고등중학교를 5학년까지만 다니고 아파서 집에 있었다. 한 1년간 집에 있으면서 엄마 장사도 돕고 동생들을 챙겼다. 사고도 많이 쳤지만 좋은 언니였다. 당시 아버지 직장이 청진이어서 주말에만 집(부령군 고무산)에 오셨다.”

    ▼ 원씨가 사로청에 선발된 적은 있나.

    “사로청에서 일한 적은 없다. 아버지 조카가 김영남 위원장의 며느리로 들어갔는데 언니가 평양까지 찾아가서 일을 시켜 달라고 조른 적은 있다. 아빠가 알고는 화를 내며 데려왔다. 그리고 사로청은 중학교 4학년(15세) 이상 청년은 누구나 들어가는 단체다. 나도 사로청에 들어갔다.”

    ▼ 원씨는 1989~1990년 금성정치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때 언니는 돌격대에 있었다. 그리고 금성정치대학은 군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다. 토대가 좋고 집안 내력이 좋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그런데 자기가 무슨 토대가 되나. 아버지 엄마가 재혼한 사람들인데, 집안에 군부 출신도 하나 없고. 북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그런 말을 남한 사람들은 믿나.”

    ▼ 원씨가 남향고등중학교를 다닌 것은 맞나.

    “거기는 나와 남동생이 다닌 학교다. 언니가 다닌 학교는 고무산여자고등중학교다.”

    ▼ 돌격대는 왜 들어갔나.

    “청진에 있던 아버지가 고무산으로 내려오니까, 단칸방에 부엌이 하나 딸린 집에서 아버지, 엄마, 언니, 나, 남동생이 같이 살기는 힘들었다. 돌격대에서 한 1년 정도 있다 돌아와선 시멘트 공장에 다녔다. 시멘트 공장 다닐 때도 김OO 라는 사람 집에 얹혀살았다. 그런데 그 집에서 조선돈 5만 원을 빌려 장사를 하다가 못 갚아 재판을 받고 교화소에 간 것이다. 그때쯤 언니가 나를 데리고 평양에도 놀러가고 그랬다. 하여튼 돌격대에서 돌아온 뒤로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우리 언니, 중학교 졸업도 못해”

    ▼ 평양의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쳐 교화소에 간 것이 아닌가.

    “아니다. 김OO라는 여자한테 돈을 빌려 옹진에서 해삼을 샀는데, 보안원에 단속돼 다 빼앗겼다. 그 돈을 물어주지 못해 교화소에 간 것이다. 당시 1만 원은 큰돈이었다. 조선돈 1만 원당 1년씩 교화형을 받았다.”

    ▼ 1995년 김정일 특사로 출소했나.

    “교화소에서 언니가 일을 잘해서 나왔다고 들었다. 그때는 언니가 좀 깨끗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다. 일 잘한다고 감방에서 소문이 나서 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맞춰 출소했다. 언제 출소한다는 통지가 집으로 와서 내가 데리러 갔다. 출소하기 전에 면회도 내가 갔다. 펑펑이가루(옥수수가루) 10kg을 어깨에 지고 갔다. 그 펑펑이가루는 지금도 언니가 잊지 못할 것이다.”

    ▼ 1995년 교화소를 출소한 뒤 원씨는 어떤 일을 했나.

    “청진화학섬유공장, 화장품공장 등을 다녔다. 그러다 중국으로 건너갔다.”

    ▼ 1995년 12월 언니에게 200달러를 빌려준 적이 있나?

    (원정화는 검찰 조사에서 1995년 12월 동생 김희영에서 200달러, 어머니 최OO에서 북한돈 6만 원을 빌려 1996년 6월부터 장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내가 그때 17살이다. 무슨 그런 돈이 있었겠나.”

    ▼ 이제 북한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텐데, 어디로 갈 계획인가.

    “한국에 가서 아빠를 모시고 살고 싶다. 내가 딸과 함께 (북한에서) 나왔는데, 딸에게는 미국으로 가라고 했다. 딸에게 내가 말했다. ‘이제 엄마를 잊고 혼자 살아라. 니 힘으로 살아라. 엄마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열심히 살라’고.”

    ▼ 마지막으로 언니 원정화 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니 때문에 감옥살이를 할 때는 정말 괘씸한 마음이 컸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이다. 나는 언니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난 항상 언니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보고 싶다. 이제라도 언니가 좋은 사람으로 살면 좋겠다. 북한과 중국에서처럼 다시 힘을 모아 잘살면 좋겠다.”

    원정화, 간첩 행적 스스로 부인

    2006년 5월, 원정화는 단동에 가지 않았다


    원정화 씨의 여동생 김희영(가명) 씨와 인터뷰를 마친 뒤인 7월 12일, 기자는 원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3월과 4월, 두 번에 걸쳐 ‘신동아’를 통해 공개된 바 있는 원씨의 간첩 주장 번복 녹취록, 여동생 김씨의 증언에 대한 생각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씨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정식 인터뷰를 거부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선지 2004년과 2006년 중국 연길에서 여동생과 어머니를 만난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원씨의 설명은 자신의 주장이 담긴 수사기록·판결문 내용과 완전히 배치됐다. 원씨는 스스로 간첩 행적을 부인했다. 원씨의 설명은 오히려 원씨의 간첩 주장을 부정한 여동생 김씨의 증언과 거의 같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원씨는 2006년 5월 15일 중국 심양공항으로 들어가 조선족 김현수를 만나 단동으로 이동한 뒤, 김교학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를 만나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고, 두 번에 걸쳐 여동생과 중국 도문을 거쳐 북한에 들어가 위조지폐와 마약을 가지고 나왔다. 판결문 내용은 원씨와 조선족 김현수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원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2006년 5월 중국에 10일간 머문 사실을 증언하면서 “연길에만 있다 귀국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원씨 발언의 주요 내용.

    “2006년 5월 딸과 함께 중국 연길공항에 들어갔다. 김현수를 만나 김씨 집으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인가 여동생(김희영)이 김씨 집으로 왔다. 나는 연길에 머무는 내내 김씨의 집에서 지냈다. 여동생은 하룻밤만 자고 집이 더럽다며 호텔로 옮겼다. 10일간 연길에 머물면서 류경호텔 북한식당에서 밥을 먹고, 한약을 사고, 마사지도 받았다. 원래는 딸을 김씨 집에 맡길 생각이었는데 집이 너무 더럽고 좁아 맡기지 않고 데리고 나왔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동생은 굉장히 바빴다. 나는 다른 곳에는 가지 않고 내내 연길 김현수 집에만 있었다. 연길에 들어간 다음 날쯤 여동생과 목욕탕에 갔는데, 우리 딸이 ‘엄마와 이모는 형젠데 왜 성(姓)이 달라’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원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큰 문제다. 원씨의 간첩 혐의 중 거의 유일하게 원씨 이외의 증인이 등장한 주요 혐의가 깨진 것이기 때문. 그동안 확인된 원씨 사건의 조작 혐의와는 또 다른 의혹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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