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

서울은 맨해튼급 재물 명당 향후 100년 수도 지위 굳건

  • 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서울은 맨해튼급 재물 명당 향후 100년 수도 지위 굳건

3/4
서울은 맨해튼급 재물 명당 향후 100년 수도 지위 굳건

18세기에 그려진 한양도성도. 사진 맨 위 동그라미가 서울의 조산(祖山)인 삼각산이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북악산(주산), 인왕산(백호), 남산(안산),낙타산(청룡)이 있다.

우리나라에 험난한 사건이 발생한 때도 목의 기운이 꺾이는 때였다. 금극목(金克木)의 이치에 의해 목은 금(金, 천간으로는 庚)의 기운이 닥치는 시기에 해로움을 입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장동순 충남대 교수는 경금(庚金)의 해에는 우리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많이 발생했다고 풀이한 바 있다. 최근부터 풀이해보면 2010년 경인년(庚寅年)에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고, 1980년 경신년(庚申年)엔 5·18민주화운동이, 1950년(庚寅年)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생했다. 또 1910년(庚戌年)은 우리 민족에게 치욕적인 경술국치의 해였다. 이처럼 ‘경(庚)’자가 들어간 해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렇다면 목의 상징 숫자인 3과 8은 조선의 국운에 어떻게 드러날까. 1394년 조선이 한양에 정도한 이후 약 300년 후(정확히는 242년 후)인 1636년 조선은 건국 후 최대의 굴욕적 사건인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조선이 인조 임금 때에 이르러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임금이 청 태종에게 직접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물론 300(3×100)년이라는 수치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지만, 궁궐지로서의 한양의 지기가 발동한 시기까지를 고려해볼 때 30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원래 한양 땅은 고려 충선왕 때 남경에서 한양부로 격하된 이후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에 이르러 본격적인 수도 터로 주목받아 천도 시도가 이뤄졌고, 우왕과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까지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속적으로 천도를 도모했던 곳이다. 특히 우왕은 실제로 한양으로 천도를 감행했다가 6개월 만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기도 했다. 즉, 한양 땅은 이성계가 도읍지로 최종 낙점하기 이전인 공민왕 때부터 궁궐을 조성하는 등 수도로서의 기운이 꿈틀거렸던 셈이다. 이를 기점으로 치면 한양 기운 300년이라는 하나의 국운 분기점이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은 맨해튼급 재물 명당 향후 100년 수도 지위 굳건

서울의 4대문 안은 명당 기운과 함께 권력의 기운도 강하다. 그림은 ‘한양도’.

서울(한양) 이전론 등장

3이라는 숫자를 더 큰 범주로 묶어 살펴보자. 100년을 한 세기로 볼 때 14세기에 조선이 건국된 후 그 3세기 후인 17세기에 이르러 한양의 터 기운에 대한 본격적인 회의론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처음은 선조(재위 1567~1608) 임금이었다. 자신의 치세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한양 명당론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임진왜란 당시 한양 도성이 왜군에 함락되고 피란을 해야 했던 선조는 한양 터를 잡은 조선의 풍수가들을 매우 불신하는 태도를 보였다. 왕으로서의 무능함을 자책하기에 앞서 조선 풍수가들의 실력을 의심했다. 그들에 의해 풍수적으로 대명당지라고 하는 한양 도성이 들어섰고 왕족들의 음택지가 모두 명당 길지에 모셔졌다고 하는데, 발복은커녕 흉한 꼴만 당하였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선조는 조선 풍수가들을 불신하는 대신 명나라에서 온 중국 풍수가들을 믿고 그들에게 의지하려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재위 1608∼1623) 때에는 조선 최초로 수도 이전론이 불거져 나왔다. 풍수지리가인 이의신(李懿信)이 교하(파주)로 옮길 것을 제기해 광해군의 깊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이의신은 서울의 땅심이 이제 다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임진왜란, 여러 차례의 모반 사건, 심화된 신하들 간 당쟁, 그리고 서울 근처 산림의 황폐 등을 들었다. 그 대신 교하를 새 도읍지로 건의했다. 광해군은 이에 솔깃해 교하 지역을 답사케 하는 등 적극적 행보를 취했으나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로 교하 천도론은 무산되고 말았다.

교하 천도론 이후 한양 지기 쇠퇴설과 도읍지 이전설은 꾸준히 제기됐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아예 조선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예언하는 도참서가 유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조와 정조 시기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것으로 알려진 ‘정감록’이다. 영조와 정조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역모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 배후엔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예언하는 ‘정감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조와 정조 시기를 거친 이후 조선은 계속되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결국 1910년 ‘조선’이라는 간판을 내리게 된다. 500여 년의 조선 역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여기에도 3이라는 숫자 코드가 개입된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 이후 순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27(3×9)명의 왕을 배출했다. 3이 아홉 번 반복된 결과인 것이다.

어떻든 한양으로 일컬어졌던 서울은 조선이 망한 후 대한민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히 수도 기능을 한다. 한 도시가 600년 넘게 수도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은 세계 역사상 흔치 않은 일이다.

이는 3이라는 고비 숫자를 넘어, 목의 또 다른 고비 숫자인 ‘8’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조선이 전국을 8도로 나눠 통치한 것도 8의 목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조선 건국 후 8세기가 지난 22세기에 이르러 서울의 수도 기능은 완전히 소멸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21세기에 남북통일이 될 경우 서울은 예전과 같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수도 기능 대신 경제 수도 같은 특정 분야의 중심지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 특정한 수도 기능도 100년쯤 후 되면 완전히 약발이 끝날 것이란 게 필자의 추정이다.

이처럼 숫자의 도참적 예언에 입각해 앞으로도 100년간 서울이 어떤 식으로든 수도 기능을 잃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은 풍수론에 의해서도 해석이 가능하다. 과연 서울의 터는 풍수적으로 어떠할까. 이 부분은 ‘서울 명당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서울 터, 좁게 말하면 조선의 궁궐터가 과연 명당인지를 두고 풍수학인들 사이에 적잖은 논쟁이 벌어졌다.

3/4
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목록 닫기

서울은 맨해튼급 재물 명당 향후 100년 수도 지위 굳건

댓글 창 닫기

2019/07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