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호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전주 한옥마을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08-21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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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전주는 옛것을 안은 아늑한 도시다.

    “도시는 젊어야 한다. 아니, 젊어져야 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 같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연령대가 젊어져야 한다. 젊은 사람이 많이 찾아와서 구경도 하고 밥도 먹고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 도시 문화가 창조된다. 우리같이 늙어가는 사람만 있으면 도시가 죽어버린다.”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사람은 전주, 그 풍취 있는 도시의 게스트하우스 ‘귀거래사’의 주인 이병천(58) 씨다. 얼마 전까지 전주 문화방송의 능란한 프로듀서로 일하다가 올봄에 정년을 맞아 새로운 삶, 새로운 공간,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역 방송국의 프로듀서였고 지금은 게스트하우스 ‘귀거래사’의 주인장인 그의 본령은 그러나 소설이다. 지금보다 아주 젊었을 때는 시인이었다. 음풍농월로 취미 삼아 매끄러운 시어를 골라 쓰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1980년대 초반, 그 뜨거웠던 시대의 뜨거운 시인이었다. 그러다가 프로듀서로 밥벌이를 했고 그 틈에 시 대신 소설을 더 많이 썼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한옥 체험 숙박업소의 주인이 아니라 당대의 마음을 일상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소설가의 관점에서 전주를 말하는 중이다.

    내가 물었다. 전주 하면 고대 문화에서 조선 왕조, 그리고 한옥마을이 금세 연상되는데, 왜 이런 도시에 여행자, 특히 젊은 여성 여행자가 많은가. 이병천 씨는 즉각적으로 말했다.

    “여행의 트렌드가 바뀐다. 적어도 이곳 전주만 놓고 보면 그렇다. 과거에 여행이라 하면 집안 가장이 행선지 정하고 운전하고 가서 고기 구워 먹는 것이었다. 아니면 젊은 남녀들이 해수욕장에서 눈이라도 맞춰보려 했는데, 요즘 많이 달라졌다. 전주만 해도 젊은 여성 천국이다. 곳곳이 젊은 여성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오고 혼자서도 오고.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아예 여란(女亂)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젊은 여성으로 가득 찬다. 그다음이 가족이고 연인인데 그래도 절반이 못 된다. 젊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왜 그런가, 이를 여러모로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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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전주는 들어가는 풍경부터 남다른 곳이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든 기차를 이용하든, 그 관문은 한옥 형상이다. 물론 시멘트로 구축한 톨게이트에 전주역이지만, 그 형상만큼은 기본적으로 한옥이다. 조선 시대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통의 도시라는 전주의 정체성이 이로써 확인된다.

    백제 시대에는 완산이었고 삼국 통일 이후 경덕왕 때 순수하고 온전하다는 뜻의 ‘전(全)’이 붙어 전주가 됐다. 고려 시대 대학자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전주를 두고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며 백성의 성품이 질박하지 않고 선비는 행동이 신중하다”고 썼는데, 나는 무려 1000년 전쯤의 이 기록을 개인적 체험을 통해 여러 번 확인한 적 있다.

    내가 겪은 사람들 중에 목소리가 신중하되 유머가 있고 눈매가 잔잔하되 한없이 그윽하며 행동이 느린 듯하되 우직하게 걷고 또 걷는 이들의 행로를 살펴보면, 결국 전주와 연결된다. 이를테면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해직된 이후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아침’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민주언론운동을 한눈팔지 않고 해온 정동익 선생은 내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을 때도 특유의 온화한 웃음과 기품 있는 유머를 보여줬다. 서울시의 문화 정책을 십수 년째 연구하는 서울연구원의 라도삼 박사 또한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우직함과 여유로운 웃음으로 인상 깊다.

    “전주가 쫌 그렇다. 대구나 부산 쪽하고는 완연히 다르고, 같은 호남이라고 하지만 광주하고도 다르다. 그렇다고 앞에서 웃고 돌아서서 뒤통수를 치느냐 하면, 그건 전주와 무관한 일이다. 견디고 버티고 끝내 마음먹은 일을 은근히 밀어붙인다 하면, 그게 전주와 가깝다.”

    완주 용진면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를 거쳐 전주문화방송에서 삶의 절반을 다 보낸 이병천 씨의 말은 신뢰할 만하다. 어쩌다 전주에 들어와 몇 해 살아본 소감이 아니다. 이 도시와 지역에 대한 애증이 뒤엉킨 말이다.

    이렇다 할 산업시설도 적고 인재는 하나같이 호남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버리는 20세기 후엽의 역사에서 전주는 부산, 인천, 광주, 대구, 대전 같은 지역 거점 도시 중에서 이른바 발전과 개발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뒤처져왔다. 그러다가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전주한옥마을이 서울의 홍대 앞, 서촌,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면서 전국구로서의 명성을 갖게 됐다.

    풍남문의 동쪽, 풍남동. 원래부터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풍남문 서쪽으로 일본인이 많이 살게 되고 상권도 이동하자 풍남문 동쪽의 실핏줄 같은 골목으로 들어온 조선인들이 한옥을 지으며 형성된 곳이 한옥마을이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전주를 찾는 여행자의 다수는 여성이다.

    이를 한눈에 완상할 수 있는 곳이 작은 둔덕, 오목대다. 고려 말, 왜구의 주력 부대가 경상도 상주 지역을 완파하고 함양에 집결한 후 남원 땅으로 밀려들어올 때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 이성계가 운봉 넘어 황산 서북에서 적을 섬멸한 일이 있었으니, 황산대첩이라 한다. 대첩을 이룬 이성계가 전주에 와서 여러 종친이며 신하들과 승전고를 울리며 자축한 곳이 오목대다. 이곳에 올라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완만하게 펼쳐진 전주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올해 3월, 정년퇴직한 이병천 씨가 한옥 게스트하우스 ‘귀거래사’를 마련한 곳은 오목대 바로 아래. 단아한 2층 구조로 정성껏 빚은 이 집에서 고개를 조금만 올려다보면 오목대를 포함해 전주의 수려한 풍광을 엿볼 수 있다.

    “왕조 문화를 빼놓고 전주를 말하기는 어렵다. 전주 이씨, 이성계, 경기전 같은 정통 왕조 문화에 종택 가옥인 학인당이며 전주향교, 한벽루 같은 선비 문화가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나타나는 전통적인 도시다. 그러나….”

    이병천 씨는 이 대목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나 왕조 문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왕조 문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요즘 문화콘텐츠다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말이 유행인데, 재해석이란 그런 ‘상품화’를 넘어서는 작업이다. 단순히 옛것을 구경거리로 맵시 있게 재현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그 원형의 재현과 정신의 재창조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전주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을 거점으로 해 근대 문화유산의 백미로 꼽히는 전동성당, 옛것의 우아함을 간직한 한벽루, 전주 정신의 외형적 상징에 가까운 학인당, 그리고 가람 이병기 같은 근세기 큰 인물의 단정한 집들을 둘러보면 이병천 씨가 말하는 무한한 가능성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여봐란 듯이 남을 압도하는 그런 구경거리가 아니라 단단하면서도 우아한, 고즈넉하면서도 기품 있는 그런 문향이 전주의 골목마다 흐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번잡한 도시로 급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1977년 한옥마을보존지구로 지정된 후 전통한옥지구, 전통문화지역, 전통문화구역, 전통문화특구 등의 명칭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가 2002년 10월 전주한옥마을이라는 명칭으로 결정된 곳이다. 교동(校洞), 풍남동(豊南洞) 일대 약 25만1856㎡(7만6320평)에 700채가량의 전통 가옥이 몰려 있어 결정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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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을 연간 500만 명 이상이 찾는다. 어떤 점에서 보면, 2010년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지만, 자칫하다가는 매우 빠르고 조급한 패스트시티로 변질될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2014년 8월 현재, 한옥마을 구역 내의 상업시설이 무려 366곳을 넘어섰을 정도다. 한 집 걸러 하나씩 카페, 음식점, 찻집, 공예품점, 선물가게 등이 들어서는 중이다. 그나마 전주시가 건축물 높이와 층수를 하향 조정하고 담, 대문 간판 등에 관한 기준 규격을 마련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서울의 홍대 앞이나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전주상업마을’이 되기 십상인 곳이다.

    “그런 점이 있다. 벌써부터 한옥마을 복판 땅값이 평당 수천만 원이다, 이런 풍문이 집주인과 세입자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다. 전통이니 한옥이니 문화니 하는 얘기는 뒷전이고 일단 가게를 얻어 젊은이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조잡한 액세서리 내다 팔고 뜨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 바람에 집주인들은 세를 올려 받는 중이고. 그렇기는 해도….”

    이 대목에서 이병천 씨는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근데, 문화가 어디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라는 게, 아무리 상업 시설이 들어선다 해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사람 발걸음 소리가 줄어들 것이다. 무성하던 나뭇잎이 시들어도 나무의 가지와 줄기는 사계절을 버티는 법이니, 지금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것뿐이다. 전주의 문화와 정신, 그 줄기가 어디 딴 데로 가기야 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왕조 문화? 왜 21세기 대명 천지에 왕조 문화를 그토록 칭송하는가. 기본적으로 이 한반도에 남은 모든 유무형의 문화유산은 어떤 의미로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기에 보존하고 연구하고 재해석해야 한다. 전곡리의 구석기 문화에서 서울 경복궁의 왕조 문화, 경북 영주의 선비 문화, 산하 도처의 건축 문화, 광주광역시 시민항쟁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소중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전주는 경기전이나 오목대 같은 조선 시대의 왕조 문화만이 아니라 근대 문화유산도 풍부하다. 이에 대한 재해석 혹은 특히 근대 문화유산의 민중적 요소를 더욱이 강조해야 할 곳이 전주 아닌가, 그런 물음이었다. 이병천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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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으로 변한 전주의 한 건물 벽면.

    “바로 그렇다. 전주가 그런 곳이다. 전주성 또한 그런 곳 아닌가. 전주성 하면 우선 녹두장군 전봉준이다. 100여 년 전에 호남 일대에서 동학운동이 크게 일어나서 곳곳마다 그 유적과 흔적이 많다. 이미 전주의 많은 문화예술인이 이를 연극으로도 올리고 축제도 벌인다.”

    전주 인근의 부안군 백산면은 동학군이 흰옷의 의병복을 갖춰 입고 죽창을 들고 집결한 곳이다. 가까운 정읍시의 고부면은 동학군이 봉기를 일으킨 곳이다. 또 태인에서 고부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에 황토현이라고 있다. 황토가 덮인 언덕이라고 하지만 해발 고도는 35.5m로 야트막하다. 이를 통해 태인, 부안, 흥덕, 고창, 장성은 물론 저 멀리 영광, 나주, 함평 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지방을 휩쓴 동학군이 결국 어디로 몰려들었는가. 전주성이다. 동학군을 이끌고 전주성에 들어선 전봉준은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전주화약’을 성공시키게 된다. 이 며칠 동안 전주는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자유 도시였다.

    이병천 씨는 전주 지역 예술인들과 오랫동안 이 사건을 주목하며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올여름에도 작품 하나를 올릴 예정이다.

    “총체극이다. 제목은 ‘가보세 갑오년, 전주성’인데, 총감독을 맡았다. 동학농민혁명의 가치와 의미를 오늘날 생생한 울림으로 되살리려 준비한 작품이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날로 시작해 녹두장군, 농민군들이 저마다의 무용담과 애끓는 사연을 풀어놓는 이야기다. 8월 중순까지 한옥마을 공예품전시관 주차장 특설무대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낼 게 아니다. 공연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일회적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과 도모하는 일이 있다. 전주에 동학의 이미지 조형물을 제대로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위인상, 기념비상 이런 거 거창하게 만들려는 계획은 아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 같은 작품을 구상 중이다. 한양으로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을 실물 크기 정도로, 누구나 걸어가다 마주칠 수 있는 정도로,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사건처럼 그렇게 만들어볼 계획이다. 시를 비롯한 기관과 지역의 뜻있는 분들을 두루 만난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가.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1914년 준공된 전동성당.

    “젊어져야 한다. 전주는 젊은 도시가 돼야 한다.”

    그가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간밤에 보았던 심야의 전주 풍경을 되새겨 보았다. 휴가철이라 사람이 반이요 자동차가 반이었다. 몇 해 전에는, 주말에도 한적하던 전주였는데 이제는 평일 밤에도 불빛과 소음이 압도적이다. 20~30대 여성이 많이 찾는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요즘의 여행, 특히 도시 여행의 풍경이다.

    그들은 경기전 바로 앞 상가에서 ‘지팡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는다. 임실치즈가 들어간 아이스크림, 임실치즈와 다크초코를 버무린 다임 아이스크림 등을 먹는다. ‘길거리야 바게트’도 먹는다. 바게트 속에 토마토소스와 채소, 고기를 다져 넣었다. 떡갈비 완자꼬치도 유행이다. 구운 문어에 소스를 바른 ‘문꼬치’도 문전성시고 수제 추러스 ‘츄남’도 유행이고 전동호떡도 인기 폭발이다.

    이런 풍경은, 남자 혹은 가장인 아버지가 주도하는 여행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남자 또는 아버지가 주도하는 여행은 거창한 역사적 서사와 압도적인 자연 풍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거대한 랜드마크를 쉼 없이 뒤쫓아 가는 여행이다.

    반면 여성끼리 떠나는 여행은 사뭇 다르다. 작은 가게에 들어가고 들꽃의 향기를 맡는다. 빨리빨리 움직이기보다는 가만 가만히 걷는데, 그렇게 하다가 그냥 앉아 있기도 한다. 거대 역사에 밀려난 일상의 작은 것에 주목한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본다. 가족이어도 좋고 남자친구여도 좋은데, 대체로는 여자친구다. 그렇게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를 정겹게 하려고 ‘길거리야 바게트’를 먹고 ‘문꼬치’도 먹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은 필수 아이템!

    남성들이 보면, 또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떤다고 할 텐데, 아니다. 그게 아니다.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우고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전주한옥마을의 풍경은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것이다.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臨淸流而賦詩

    그렇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깊은 밤을 전주에서 보낸 이들이 하나둘씩 짐을 싸서 이 게스트하우스를 떠난다. 이병천 씨는 가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까지 챙겨준다. 아침밥을 나누고, 인사를 나누고 또 한옥의 처마와 담장의 유려한 선을 배경으로 삼아 사진도 함께 찍는다.

    그제야 다시 보니, 이곳의 이름이 뜻깊다. ‘귀거래사’, 원래 도연명의 한자로 한다면 마지막 한자는 ‘辭’가 돼야 하는데, 그 마지막 한자를 집을 뜻하는 ‘舍’로 바꾸어 옥호로 삼았다. 도연명은 그의 나이 41세가 되던 405년 마지막 관직인 팽택의 현감을 끝으로 낙향한다. 고향 마을로 돌아가면서 겪은 착잡하면서도 결기 있는 심경을 읊은 시가 ‘귀거래사(歸去來辭)’다.

    누이동생의 죽음 탓에 관직을 버렸다는 설도 있으나 중앙에서 내려온 감독관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의전을 해야 하는 관례를 참을 수 없어 여지없이 사직했다는 설도 있다. 아마도 두 설 모두 근거가 있을 것인 바, 오늘날의 ‘관료 의전 문화’를 생각하면 선비다운 기개가 여실히 드러나는 후자의 설이 더 기품 있다. 귀거래사는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선비 정신의 한 표상으로 칭송한 작품이다.

    내 어릴 적 기억에도 생생히 남아 있다. 고교 1학년 때, 젊은 한문 선생님이 칠판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그러니까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팔을 거의 뒤로 꺾다시피 해 귀거래사 전문을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칠판 가득히 쓰고는, 한 구절씩 읽고 해석해주던 기억, 생생하다. 특히 그 선생님이 첫 구절을 쓰고는, 한숨 한 번 쉬고, “자, 돌아가자~” 하고 읊던 첫 대목을 나는 잊지 못한다.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其未遠



    귀거래혜(歸去來兮)에서 兮(혜)는 감탄사 역할을 하는 어조사다.

    이병천 씨는 오래전에 시인이었다. 1980년대 초 그 뜨거웠던 시절에 뜨거운 시인들이 뜨거운 시인 집단을 형성해 일약 문단을 들끓게 했다. 김정환 박노해 김사인 같은 시인이 ‘시와 경제’를 주도했고, 김진경 박몽구 곽재구 등이 ‘오월시’로 오월과 그 이후의 슬픔을 노래했으며, 고운기 안도현 정일근 등이 ‘시힘’ 동인으로 시의 힘을 길러냈는데, 그때 ‘시운동’이 있었다. 하재봉 안재찬 박덕규 남진우 이문재 등이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초월의 지평을 열고, 장정일 황인숙 기형도 등이 가담하는, 1980년대의 가장 ‘핫’한 아방가르드 동인지였다. 이병천 씨는 초창기에 가담해 열렬히 활동했다. 그러다가 소설을 썼고 방송국 프로듀서를 했으며 지금은 은퇴해 ‘귀거래사’의 주인장이 됐다.

    도연명의 시에 보면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양양해하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는 구절이 있는데, 물론 이 게스트하우스는 무릎 하나 들일 만한 크기보다는 훨씬 크지만, 하늘 아래의 전주 어느 집이나 그렇듯이 압도적인 위용으로 찾는 이를 윽박지르는 형상은 아니다. 마당은 따스하고 방들은 격조 있다. 이철수 안도현 같은 도반이 집터를 잡고 형태를 빚고 마무리 단장을 하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의미 있는 ‘참견(參見)’을 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품을 만한 인생의 로망을 이병천 씨는 어느 정도 일궈낸 셈이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아름다운 욕망을 품고 있다면, 전주에 한번 가볼 일이다.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풍경을 진실로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말이다.



    돌아왔노라.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주니,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자, 돌아가자

    이병천 씨가 전주의 문화유산을 설명한다.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於西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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