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호

단신 유학, ‘알바’ 자립, 벤처 창업 “군복 잘 어울릴 열혈 모험가”

해군장교 입대, SK 최태원 회장 딸 최민정

  • 김유림 기자 | rim@donga.com

    입력2014-09-16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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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이징대 유학 시절 한중 교류 모임 결성
    • 탐험가 섀클턴의 남극 도전에 감동해 해군 지원
    • 해군 측 “훈련 마치면 전방 전투함에 배치”
    단신 유학, ‘알바’ 자립, 벤처 창업 “군복 잘 어울릴 열혈 모험가”

    2012년 7월 연세대에서 열린 ‘상생 영 리더십 포럼’에 참석한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딸 최민정 씨.

    ‘정략결혼’‘해외유학’‘상속’‘명품’ ‘사치’‘사모님’‘외제차’….

    기자가 최근 지인들에게 ‘카카오톡’으로 “재벌 3세 하면 떠오르는 것은?”하고 묻자 돌아온 답변은 비슷비슷했다. 재벌 3세가 부러움의 대상이긴 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라는 게 공통적 의견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가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풍족한 후원 아래 최고급 교육을 받은 후 공식처럼 그룹 계열사 대표직을 꿰차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특히 ‘맨땅’에 ‘맨주먹’으로 굴지의 그룹을 일으킨 창업주나 그런 기업을 세계적인 규모로 키운 2세들과 달리, 3~4세는 ‘황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행운아’로 인식되곤 한다.

    지난 8월 말,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둘째딸 최민정(23) 씨가 해군 사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했다는 뉴스가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됐다. 유학, 질병 등을 사유로 한 국내 재벌가 자식의 병역면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현실에서 여성인 최씨가 해군 입대를 자원했고, 그것도 가장 힘들다는 항해 병과를 선택했다는 뉴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병역 의무가 없는 민정 씨가 굳이 군에 지원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횡령 혐의로 법정 구속된 아버지 최 회장에 대한 여론 반전을 노린 것” “투병 중인 외할아버지(노태우 전 대통령)가 국립현충원 안장을 원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오랜 기간 민정 씨와 알고 지냈으며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이종식 판다코리아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최씨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을 동경해왔다. 오래전부터 군 입대를 희망했다”고 밝혔다. SK그룹 고위간부는 SK 측의 언론 플레이라는 일부의 시각에 대해 “상식적으로 판단할 일”이라며 “민정 씨의 입대가 회장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언론 플레이를 하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오히려 입대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후 몹시 곤혹스러워한다”고 전했다.

    중국 유학 간 SK 두 딸

    사실 민정 씨의 ‘남다른 행보’는 그간 몇 차례 언론에 공개됐다. 그는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혼자 중국 유학길에 올라 베이징 런민대부속고를 나온 후 2010년 베이징대 광화관리학원(경영학과)에 입학해 올 초 졸업했다. 최근 들어 재벌가 자녀의 중국 유학이 늘기는 했지만 민정 씨가 유학을 떠난 7년 전만 해도 드문 사례였다. 민정 씨의 언니 윤정(25) 씨도 중국 베이징국제학교(ISB)를 졸업했다.

    최태원 회장이 두 딸을 모두 중국으로 유학 보낸 데는 SK그룹의 미래 전략, 장인과 부인의 국제 정세 인식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최씨의 외할아버지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1988년 7월,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에 처음 빗장을 열었다. 또한 SK는 국내 대기업 중 중국 사업 진출에 가장 적극적이다. 노소영 관장은 2012년 동생 노재헌 변호사와 함께 ‘한중문화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중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병상의 아버지에게 ‘왜 북방정책을 폈는가’라고 물었더니 ‘통일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북한이 거부감 없이 빗장을 풀려면 그만한 환경이 조성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주변국과의 관계 강화가 필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근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로 부상하면서 재벌가 자녀의 중국 유학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일례로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의 딸들은 상하이의 홍콩계 국제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재벌가 자녀는 대개 학비는 비싸지만 시설이 좋고 영어와 중국어로 함께 수업하는 홍콩, 싱가포르계 국제학교를 선호한다.

    편의점, 와인바 아르바이트

    하지만 민정 씨는 국제학교 대신 현지인이 다니는 공립학교를 선택했다. 또한 중국 최고 명문대인 베이징대 입시 준비를 할 때 고가의 과외 대신 한국 유학생이 많이 다니는 현지 한인 대상 입시학원에 다녔다. 민정 씨는 베이징대 합격 후 다른 합격자들과 함께 학원 공식 ‘합격자 포스터’에 이름과 얼굴을 올렸고, 이후 이 학원이 주최한 홈커밍데이 파티에도 적극 참여했다.

    정신적 독립의 선행 조건은 경제적 독립이다. 어머니 노 관장은 한 인터뷰에서 “민정이는 대학에 입학한 후 집에서 한 푼도 안 가져갔다. 그 부작용으로 어떤 말도 안 듣는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심지어 “교회에 가서도 민정이는 고개를 푹 꺾고 잠만 잔다”는 것. 실제 민정 씨는 경제적 독립을 위해 고등학생 때는 방학마다 한국 편의점, 와인바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베이징 현지 입시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대학 시절은 어땠을까. 올 초 베이징대 한인유학생회 웹진에는 졸업생 최민정 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당시 오고 간 문답을 요약했다.

    ▼ 중국에 유학 온 이유는.

    “제가 7년 전 중국에 왔는데 당시만 해도 ‘중국은 도피유학’이라는 인식이 컸어요. 하지만 한국의 교육이 서양에 편향됐다고 생각했어요. 언어를 알면 내가 속한 세계가 넓어져요. 나의 세계를 더 넓히고 앞으로의 무대를 넓히려면 영어권을 제외한 새로운 세계가 필요할 거라 생각했어요. 게다가 제가 어릴 적부터 워낙 중국 문화, 고전, 역사 등에 관심이 많았어요.”

    ▼ 중국에 와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

    “1학년 2학기 때 ‘손에손잡고(handinhand)’라는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멤버는 중국인 반, 한국인 반으로. 당시 ‘혐한(嫌韓)’이 화두가 됐는데, 혐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의식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후 ‘한중 Intercultural Union’, 즉 ICU라는 단체를 만들게 됐어요. 혐한뿐 아니라 국제교류를 위해 시야를 넓혔죠.”

    단신 유학, ‘알바’ 자립, 벤처 창업 “군복 잘 어울릴 열혈 모험가”

    최민정 씨가 창업한 벤처 ‘판다코리아닷컴’사이트 화면.현재 최씨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 졸업한 유학생으로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수업할 때 중국인들에게 도움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주도적으로 해야 해요. 중국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싱가포르나 화교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면 중국말을 쓰게 되고, 그 친구들도 저희랑 비슷한 고민이 많기 때문에 굉장히 빨리 친해질 수 있죠.”

    동아리 ICU는 현재 NGO로 성장했다. 약 2000명의 다국적 학생이 모여 중국의 인권 신장에 힘을 보탠다. 지진 피해를 당한 중국 쓰촨성에 도서관을 짓고, 중국 내 소수민족의 생활 정착을 위해 일자리 카페를 준비하는 등 ‘작지만 큰 행동’을 실천하는 모임이다.

    2012년 7월 중순, 14박15일간 ICU 소속 학생 20명이 한국과 중국에서 학술포럼을 열었다. ‘상생 영 리더십 포럼’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 이들 한중 학생들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등 석학들의 강연을 듣고 토론에 참여했으며, 함께 문화유적지를 답사했다. 이날 노소영 관장은 민정 씨의 손을 잡고 행사장을 찾아 눈길을 끌었다. 베이징대 유학생회와의 인터뷰에서 민정 씨는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어 공개하기가 꺼려지지만 두달 전 창업을 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그 스스로 설명한 사업 내용이다.

    “한중 간 무역의 중간역할을 하는 플랫폼이에요. 한국에는 자사의 제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려는 중소기업이 많은데 중소기업은 인프라가 없어서 판로는 고사하고 관리할 사람도, 마케팅 전략도 없어요. 하물며 시장조사도 안 돼 있죠. 배송 통관 문제도 있고요. 그런 걸 한번에 묶어서 해결할 플랫폼에 대한 수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또 중국에서 한국 중소기업 제품의 정품을 사기가 어려워요. 대부분 인터넷 거래가 되는데 정식 수출이 아닌 대리구매이고, 보따리상이 불법으로 가져와서 파는 구조죠. 한쪽에는 안전하고 믿을 만한 한국 제품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 상황이고 다른 한쪽에는 중국이라는 엄청나게 큰 시장에 상품을 팔아보자는 상황에서, 제가 구상한 이 플랫폼이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해요.”

    민정 씨가 창업한 벤처는 ‘판다코리아닷컴’으로 회사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다. 주변에 5층 이상 건물이 손에 꼽힐 정도로 가게, 식당이 많은 시장가다. 학원, 식당 등이 들어선 5층 건물 중간층을 임차해 쓰는데, 사무실이 오밀조밀하고 아담하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 마포구 상암동 등지에 으리으리하고 세련된 사무실을 가진 요즘 벤처와 대비된다.

    민정 씨와 함께 사업을 시작한 이 회사 이종식 대표는 “현재 민정이가 회사를 떠났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조심스러워한다”며 정식 인터뷰를 고사했다. 이 대표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민정 씨와의 친분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그저 “이전부터 알던 사이”라며 말을 아꼈다.

    “한 언론사가 ‘엠바고(보도금지 약속)’를 깨는 바람에 민정이의 입대 소식이 공개됐지만, 사실 아주 조용하게 입대하려 했다. 민정이는 언론 보도가 향후 군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취재 과정에서 민정 씨의 대학 친구, 지인들과 접촉했다. 그들이 말한 ‘친구 최민정’의 면모는 이랬다. “소탈하고 매사 긍정적이다” “재벌가 자녀라는 것이 알려져도 숨기거나 잘난 척하지 않았다” “누가 도움을 청하면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리더십이 뛰어나다” “키가 173cm쯤 될 것이다. ‘엄마를 닮아 키가 크다’는 얘기를 종종 했는데, 아마 해군복을 입으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

    탐험가 정신으로

    민정 씨의 입대 소식이 전해지면서, 남다른 행보를 걷는 재벌가 자녀들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중에서도 5대 국제광고제를 석권한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아들), 동화작가로 데뷔한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딸),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원조 격인 영화 ‘바람’을 찍은 이성한 감독(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아들) 등이 눈길을 끈다. ‘재벌가 앙팡테리블’의 대표 격인 박서원 대표는 방송 강연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 국제광고제에서 수상했을 때 인터뷰를 하자 ‘공부도 못하던 한국 사람이 이렇게 성공했다’고 칭찬이 쏟아졌다. 이듬해 수상한 후에야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인터넷 댓글 80%가 욕이었다. ‘돈 있으면 누가 못하냐’ ‘너는 배신자다’라는 소리까지 하더라. 그런데 그 다음해 또 상을 받자 확실히 욕하는 사람이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대학, 기업 강연에 많이 초청된다. 재벌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사실 ‘왜 가업을 잇지 않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왜 꼭 그래야 하냐고.”

    9월 중순 해군사관후보생(OCS) 117기로 입대한 민정 씨는 경남 창원(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11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12월 초 소위로 임관할 예정이다. 민정 씨의 동기생은 156명으로 이 중 13명이 여성이다. 해병 동기생 30명은 중간에 포항으로 이동해 별도의 훈련을 받고 돌아와 해군 동기생들과 함께 임관한다. 복종-극기-단결-명예 4단계 과정으로 이뤄지는 해군 사관후보생 훈련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현재 해군 전체 장교에서 여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6.6%. 고속정 정장(소령)까지 나올 만큼 금녀의 영역은 거의 사라졌다.

    해군 관계자에 따르면, 민정 씨는 면접시험 때 “남극을 탐험한 섀클턴의 도전 정신과 좌초 위기를 돌파한 리더십에 감동을 받아 해군에 지원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영국의 극지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1914년 대원 27명과 함께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 횡단에 도전했다. 탐험팀은 배가 떠다니는 빙산에 갇히는 바람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섀클턴의 훌륭한 리더십 덕분에 난파된 지 2년 만에 기적적으로 모든 대원이 구출됐다.

    민정 씨는 시험 성적이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 관계자는 “민정 씨에 대한 특별대우는 없을 것이며, 다른 동기생들과 똑같이 훈련받을 것이다. 훈련을 잘 마치면 전방 전투함에 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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