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호

“상처 받은 이들 재도전 돕는 게 내 사명”

‘너클볼 인생’ 허민 고양 원더스 구단주

  •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dhp1225@naver.com

    입력2014-09-22 1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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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美독립리그 투수
    • “KBO가 원더스 존중 안 해 해체”
    • “내년부터 100억씩 투자하려 했는데…”
    • “50세까지 메이저리그 도전할 것”
    “상처 받은 이들 재도전 돕는 게 내 사명”
    “너클볼은 스테로이드 먹은 나비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전 보스턴 레드삭스 포수 제이슨 베리택이 한 말이다. 정확한 표현이다. 너클볼은 마구다. 제대로 제구되면 어느 타자도 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너클볼은 스테로이드보다 더 강력하다. 하지만 나비처럼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너클볼은 예측불허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클볼 투수들은 공을 던질 때마다 신에게 기도한다. 신만이 낙구 지점을 알기 때문이다.

    야구계와 IT 업계가 원더홀딩스(위메프 지주회사) 대표이사 겸 고양 원더스 구단주 허민(38)을 가리켜 ‘너클볼 인생’이라 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늘 예측불허의 승부수를 띄웠고, 그 승부수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9월 11일 야구계는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국내 최초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가 KBO(한국야구위원회)와의 재계약을 포기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원더스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3년간 구단을 이끌면서 애초 창단을 제의했던 KBO와 구단 운영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반복해 확인했다”며 “아쉽지만 한국 최초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는 2014년 시즌을 끝으로 도전을 멈추고자 한다”고 밝혔다.

    2011년 9월 15일 원더스는 KBO와 3년 계약을 맺었다. 2012시즌부터 2014시즌까지 프로 2군리그 팀들과 경기를 치렀고, 프로에서 방출됐거나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선수를 영입해 육성해왔다. 그런데 KBO의 잦은 말 바꾸기와 기존 구단들의 비협조로 창단 때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원더스 핵심 관계자는 “애초 KBO가 우리 측에 독립구단 창단을 제안했을 땐 2012년부터 바로 정식 2군리그에 편입시켜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막상 독립구단을 창단하자 ‘2013년부터 2군리그에 편입시켜주겠다’고 말을 바꿨다”며 “이마저 다시 말을 바꿔 올 시즌엔 아예 ‘2군리그 편입이 어려울 것 같다’고 통보해왔다”고 털어놨다.

    기존 구단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독립구단이 창단했을 때 기존 구단들은 “해마다 수백 명의 아마추어 선수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채 야구 실업자가 되고, 프로에서도 시즌 종료 후 수십 명의 실업자가 쏟아지는 게 우리 야구의 현실”이라며 “이 선수들에게 마지막 패자부활전의 무대이자 재취업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원더스의 탄생은 야구계가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할 낭보 중의 낭보”라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원더스가 2012년 데뷔 첫해 2군리그 팀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연일 화제가 되자 구단들은 “독립구단이면 독립리그에서 활동해야지 왜 프로팀들과 같이 놀려는지 모르겠다”며 KBO에 “원더스의 정식 2군리그 편입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3년간 150억 원을 투자하며 야구선수들의 프로 재도전을 조건 없이 도왔던 원더스는 환영과 존중보다는 냉대와 견제를 일삼는 야구계에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급기야 3년 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재계약은 없다’고 발표하며 해체를 선언했다. 원더스는 “이렇듯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재계약을 한들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원체 실망감이 컸던 것일까. 원더스는 “마음을 돌려 다시 독립구단을 운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이미 버스는 떠났다”고 선언했다.

    ‘야구’하려고 서울대 진학

    이용철 KBS 야구해설가는 “슈퍼스타 선수나 감독도 아니고, 독립구단 구단주가 이처럼 높은 신망과 인기를 구가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주변 지인들로부터 ‘도대체 허민이 누구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민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유명 사업가이자 독립구단 구단주임에도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 흔한 인터뷰 기사도 찾기 어렵다. IT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자는 허민을 “너무나 유명한 무명 사업가”라며 “모든 이가 그의 이름을 알지만, 아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세간의 화제인 허민은 누구일까. 그는 어째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것일까.

    인터넷 검색란에 ‘허민’을 치면 꼭 따라붙는 연관 검색어가 있다. ‘천재’ ‘야구’ ‘서울대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장’ ‘괴짜 사업가’ ‘위메프’ ‘너클볼’ 등이다.

    허민은 197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산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던 그는 부산 대동고 1학년 때까지 서울대 전자공학과 진학이 확실한 모범생이었다. 허민의 대동고 동기 김영환 세무사는 허민에 대해 “학교 밖에선 어땠을지 모르지만, 학교 안에선 친구들과 장난도 잘 치고, 잘 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며 “그런데도 시험만 보면 성적이 전교 1, 2위를 다퉈 친구들 사이에서 천재로 불렸다”고 기억했다.

    그즈음 ‘천재 소년’ 허민에게 찾아온 불청객이 있었으니 바로 야구였다. 허민은 고2 때부터 공부보다 야구에 몰입했다. 당시 허민은 친구들을 불러 모아 야구팀을 조직하고 인근 고교 야구클럽팀들과 주말이면 야구경기를 했다. 이 때문인지 전교 1, 2등을 다투던 학업 성적은 전교 7등으로 떨어졌고, 결국 허민은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다.

    허민은 “한 번 등판할 때마다 200구씩 던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며 “아침에 일어나면 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아파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야구 때문에 서울대 진학이 좌절되고, 심각한 어깨 부상까지 당했지만,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되레 인생 첫 번째 너클볼을 던졌다. 야구를 위해 다시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를 택한 것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부터 야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엘리트 야구 코스를 밟지 않았기에 현실적으로 내가 야구선수로 크는 건 불가능했다. 대학에 진학해도 날 야구선수로 받아줄 곳은 없었다. 궁리 끝에 알아본 게 서울대 야구부였다. 서울대 야구부는 엘리트 야구 출신이 아니어도 입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재수 끝에 허민은 서울대 응용화학부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길로 서울대 야구부에 입회했다. 허민의 서울대 야구부 선배인 이알참 베이스볼아카데미 사무국장은 “엘리트 투수 못지않게 빠른 공을 던지는 새내기가 야구부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3학년생들에게 ‘걔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부산에서 온 허민’이란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허민은 고교 시절 시쳇말로 ‘동네야구 투수’임에도 시속 130㎞대의 빠른 공을 던졌다. 부산고, 경남고 야구부 지도자들이 허민의 빠른 공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만년 약체’ 서울대 야구부가 새내기 투수 허민을 크게 반긴 건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허민의 대학 야구 기록은 전무하다. 고교 시절 부상으로 말미암은 어깨통증이 재발한 까닭이다. 허민은 서울대를 졸업할 때까지 정식 마운드를 한 번도 밟지 못했고,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꿈도 접어야 했다.

    非운동권 총학생회장의 좌절

    어깨 부상으로 야구를 잠시 그만둔 허민은 1999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했다. 풍부한 자금과 탄탄한 조직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허민은 NL(민족민주), PD(민중민주) 같은 학생운동 그룹과도 가깝지 않았다. 무엇보다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한 건 즉흥적 결정이었다. 허민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당구를 쳤다. 그때 갑자기 내가 ‘야, 나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거야’라고 했다. 친구들이 ‘야, 저거 또 뭐라고 씨부리쌌노. 당구나 쳐라’ 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난 당선될 자신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와 기숙사 룸메이트, 고교 동문 후배 3명 등 총 5명이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당선될 자신이 있다고 말했지만, 선거운동은 그런 자신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허민은 흔한 학내 연설도, 학우들을 찾아다니며 한 표를 읍소하지도 않았다. 대신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학생이 많이 모이는 곳에 틀었고, 홈페이지를 제작해 그걸 통해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결국 허민은 7명의 후보자 가운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자에 올랐고, 2차 결선투표에서도 쟁쟁한 운동권 연합 후보를 7표 차로 꺾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두 번째 ‘인생 너클볼’이 성공을 거둔 순간이었다.

    당시 언론은 허민의 당선을 ‘서울대 사상 첫 비운동권 총학생회장 선출’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모든 학우가 참여하는 열린 총학생회’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표방한 허민은 그러나 재수와 어깨 부상에 이어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상처 받은 이들 재도전 돕는 게 내 사명”


    “총학생회장이 되고 나서 소위 ‘정치’란 걸 해봤다. 1년 ‘딱’ 하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정치로 사회를 바꾸는 건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운동권 그룹은 허민의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뭔가를 시도할 때마다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다. 투명한 예산 집행과 학내 복지 향상을 위해 대안을 제시해도 오히려 조직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허민에게 좌절은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허민은 이때 세 번째 너클볼을 던졌다. 바로 사업이었다.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창업을 준비했다. ‘좋은 회사, 좋은 조직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잘해주자. 그래서 사람들이 다니고 싶은 회사로 키우고, 더 좋은 성과를 내자. 그러면 다른 회사들이 분명히 우리 회사를 벤치마킹할 것이고, 그런 회사가 늘어날수록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의 행복 총량도 증가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2001년 허민은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통해 데이트 상대를 만나는 ‘캔디바’라는 인터넷 게임을 만들었다. 반응은 괜찮았다.

    허민은 ‘캔디바’에서 얻은 자신감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게임 제작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건 깊은 좌절이었다. 출시하는 게임마다 흥행 부진에 시달렸고, 거듭된 실패로 20억 원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았다. 그때 허민이 던진 네 번째 너클볼이 온라인 게임 ‘던전 앤 파이터’였다.

    허민은 쪽방에서 친동생,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마지막 게임 제작에 매달렸고, 2005년 던전 앤 파이터를 출시했다. 3D 게임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2D로 제작된 던전 앤 파이터는 고전이 예상됐다. 그러나 결과는 대박이었다. 던전 앤 파이터는 한국 PC방을 휩쓸고서 중국에까지 알려지며 2억 명에 가까운 이용자를 끌어모았다. 한국 IT 업계에 새로운 청년 재벌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청년 재벌’의 꿈

    허민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한 건 2008년이었다.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릴 즈음 그는 갑자기 다섯 번째 너클볼을 던졌다. 승승장구하던 게임사를 갑자기 매각한 것이다. 허민은 매각 대금으로 1000억 원을 손에 쥐었다.

    더 놀라운 건 그가 매각 대금 가운데 상당액을 자신과 동고동락한 게임사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홀연히 미국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허민은 버클리 음대에서 작곡 공부를 시작하며 음악에 빠졌다. 허민 뒤에 ‘괴짜’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렇다면 허민은 왜 잘나가는 회사를 팔고, 미국으로 작곡 공부를 하러 떠난 것일까. 지난해 9월 뉴욕에서 만난 허민은 “처음부터 돈과 명예엔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허민은 “고교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온 세 가지 꿈을 이루려 미국행을 택한 것”이라며 그 세 가지 꿈을 “훌륭한 기업가, 가수, 프로야구 선수”라고 소개했다.

    훌륭한 기업가가 된 그는 버클리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오랜 꿈이던 싱어송라이터의 준비를 마친 터였다. 이제 남은 건 프로야구 선수였다.

    허민은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여덟 번째 너클볼을 던졌다. 바로 직접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사실 허민은 게임사를 운영하면서도 틈틈이 야구 훈련에 매달렸다. 특히나 너클볼 연마에 애썼다. 허민은 너클볼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다시 투수로 마운드에 서려고 노력했지만, 한번 어깨를 다치고 나니 직구 구속이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너클볼이었다”며 “너클볼은 원래 공이 느리기에 어깨 부담이 거의 없고, 체력적 부담도 덜해 나이 많은 투수도 던지기 쉬운 구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독학의 한계는 명확했다. 결국 허민은 버클리 음대 유학 시절 ‘너클볼의 대가’인 전직 메이저리거 필 니크로를 찾아가 너클볼 투구법을 배웠다. 허민은 “니크로 선생으로부터 3개월간 너클볼을 배운 뒤 ‘이 정도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평을 들었다”며 “‘던전 앤 파이터’가 대박을 칠 때만큼이나 벅찬 감동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2010년,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상대로 연습 투구를 하며 허민은 너클볼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허민과 상대한 마이너리그 선수들은 “공이 마치 술 취한 나비처럼 상·하·좌·우로 요동치면서 날아온다”며 “스윙을 해도 빗맞은 타구는 고사하고, 헛스윙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라고 호평했다.

    결국 허민은 오랜 꿈을 이뤘다. 37세의 늦은 나이로 정식 프로야구 선수가 된 것이다. 지난해 허민은 미국 독립리그 락랜드 볼더스에 입단했고, 올 시즌 5월 28일 드디어 프로 데뷔 첫 승의 감격을 누렸다.

    ‘뉴욕타임스’와 ‘뉴욕데일리’ 등 미국 유수의 언론은 허민의 승리를 ‘기적’이라고 표현하며 “100년이 넘은 미국야구 역사상 비야구인 출신의 38세 선수가 프로 무대에서 승리를 따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비중 있게 보도했다.

    “상처 받은 이들 재도전 돕는 게 내 사명”

    허민 구단주는 ‘아홉 번째 너클볼’을 준비한다.

    무관심의 리더십

    앞서 허민의 프로 선수 도전을 여덟 번째 너클볼이라 표현한 덴 이유가 있다. 그 사이에 여섯, 일곱 번째 도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에 던진 여섯 번째 너클볼은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이크프라이스닷컴(위메프)’ 창업이다.

    2010년 10월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당시로선 생소한 소셜커머스에 뛰어들었다. 일정 수가 모여야 거래가 성사되는 소셜커머스의 판매 방식은 과거의 공동구매 사이트와 흡사했다. 그러나 소셜커머스 사이트는 소비자가 직접 찾아가야 하는 음식점, 공연 등의 서비스 상품을 주력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산품을 위주로 한 기존 공동구매와 달랐다.

    당연히 생소한 판매 방식이었기에 재계는 소셜커머스의 성공 가능성을 낮게 봤다. 가뜩이나 위메프는 후발업체라 더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2012년 중반까지 허민은 위메프 운영으로 500억 원의 적자를 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허민은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삼았고, 강도 높은 조직 혁신으로 침체 일로의 위메프를 회생시켰다. 특히나 허민은 경영을 박은상 영업본부장에게 맡기는 깜짝 카드를 들었다.

    소셜커머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시 박 본부장은 위메프 내부에서도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며 “허 대표가 위메프에 입사한 지 1년밖에 안 된 박 본부장을 신임 대표로 선임하자 업계 전체가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허민이 박 본부장을 신임 대표로 선임한 배경은 확신이었다. 허민은 “박 대표가 본부장 시절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걸 보고 ‘인물이다’ 싶었다”며 “영업력이나 기획력, 그리고 소통 능력에서 대표감이라 생각해 주변의 이견에도 나 대신 위메프를 이끌 최적의 인물로 박 대표를 뽑았다”고 설명했다.

    허민은 박 대표에게 경영권을 맡긴 이후 한 번도 경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업계에선 이를 ‘허민 리더십’이라 한다.

    위메프의 라이벌 소셜커머스 업체의 중견 간부는 “허민 리더십은 ‘능력 위주로 최고의 전문가를 중용한다’와 ‘한번 중용하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로 집약된다”며 “실제로 허 대표는 박은상 신임 대표의 공격적인 경영과 투자가 업계에서 ‘위험하다’는 평을 들을 때도 전혀 개입하지 않고, 뒤에서 후원만 했다”고 귀띔했다.

    쿠팡, 티몬, 그루폰 등 경쟁업체에 밀려 업계 4위였던 위메프는 지난해 12월 업계 1위에 올랐다. 2월엔 소셜커머스 업계 최초로 PC·모바일 순 방문자 수 13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래서일까. 소셜커머스 업계에선 “이제 위메프의 경쟁 상대는 같은 소셜커머스가 아니라 롯데마트, 이마트와 같은 대형 유통업체”라는 평이 주류를 이룬다.

    ‘허민 리더십’이 빛을 낸 건 사업뿐만이 아니다. 원더스가 초대 감독으로 김성근 전 SK 감독을 선임했을 때 야구계는 “프런트와 갈등이 많았던 김 감독을 과연 초보 야구단 원더스가 감당해낼 수 있겠느냐”며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허민은 그 모든 부정적 시선을 단번에 사라지게 했다.

    허민은 “우리 선수들이 프로팀에 가려면 무엇보다 실력이 좋아져야 한다”며 “그러려면 최고의 지도자를 모셔오는 길밖에 없다”고 선언하고서 김 감독을 거액을 투자해 영입했고, 김 감독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심지어는 프런트가 결정할 세세한 부분까지 현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김 감독이 직접 결정하도록 배려했다. 김 감독이 “내 야구인생 가운데 지금처럼 마음 놓고 팀을 지휘하긴 처음”이라고 감격한 게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결국 원더스는 독립구단임에도 데뷔 시즌부터 프로 2군팀들과 어깨를 겨룰 만큼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고, 많은 선수가 프로구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원더스 해체 원하지 않았다”

    허민이 던진 일곱 번째 너클볼은 모두 잘 아는 고양 원더스 창단이다. 2011년 9월 허민은 KBO 유영구 전 총재와 허구연 MBC 해설위원의 제안으로 독립구단을 창단했다.

    “2011년 KBO에서 독립구단 제안서를 보냈다. ‘10억 원 정도 투자하면 적자는 보지 않을 수 있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처음부터 내 관심 밖이었다. 생각해보라. 1년에 1억 원, 아니 10억 원을 번들 내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KBO에 ‘도네이션 차원이면 구단을 만들고, 그렇지 않으면 관두겠다’고 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원더스를 바라보는 내 시각엔 변함이 없다. ‘내가 사회로부터 큰 혜택을 받았고, 덕분에 수많은 실패 끝에 성공을 거뒀으니 이젠 내가 재도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허민은 원더스에 3년 동안 150억 원 가까이 지원했다. 프로야구 2군팀 운영비를 훌쩍 뛰어넘는 거금이었다. 그럼에도 허민은 바라는 게 없었다. 창단 때부터 감독, 코치, 선수, 프런트 누구 할 것 없이 프로야구팀에서 좋은 제의가 오면 조건 없이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첫 시즌인 2012년 이희성을 시작으로 2012년 5명, 2013년 12명, 2014년 5명 등 모두 22명의 선수를 프로구단으로 보내면서도 허민은 이적료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 되레 떠나는 선수에게 격려금 1000만 원씩을 줬다.

    원더스가 좌절한 이들의 재도전 기회가 되길 바랐던 허민의 꿈은 망상이 아닌 현실이 됐다. 그런 허민이었기에 원더스 해체를 결정할 때까지 고민이 많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허민은 KBO와 야구계가 원더스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했다면 한 해 100억 원 이상도 투자할 용의가 있었다. 원더스 해체를 한 달여 앞두고도 같은 구상을 했다. 그러나 재계약 시점을 앞두고도 야구계의 냉대와 무관심이 이어지며 허민은 ‘가장 선택하기 싫은 결정’을 요구받았다.

    허민은 원더스 재계약 종료를 결정하며 원더스에 “KBO와 기존 구단 등 야구계와 얼굴 붉히지 말고, 한 분 한 분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라”며 “처음부터 기부 활동으로 시작한 만큼 어느 한 분 마음 상하지 않도록 사려 깊게 마무리해달라”는 뜻을 전달했다.

    할 말 많은 원더스가 해체와 관련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도 허민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불가능의 반대말은 도전”

    변화무쌍한 너클볼을 던지며 살아온 허민은 원더스 해체 결정 이후 상심이 크지만, 기부가 여기서 끝날 것 같진 않다. 원더스에 ‘통 큰 기부’를 할 때도 허민은 “지금은 야구를 통해 기부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영역에서 상처 받은 이들의 재도전을 돕고 싶다”는 뜻을 나타냈다.

    원더스를 통해 못다 이룬 기적은 허민 자신이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올 시즌 미국 독립리그에서 2년째 활약한 허민은 너클볼 구위가 날로 좋아져 내년 시즌 마이너리그 진입을 꿈꾼다. 만약 허민이 마이너리그에 진출한다면 세계 야구계가 깜짝 놀랄 기적이 될 게 분명하다.

    허민의 꿈은 더 크고 장엄하다. 허민은 “사람들은 ‘이벤트다, 쇼다’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다짐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너클볼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라며 “50세가 될 때까지 메이저리그 진출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허민은 기자에게 “불가능의 반대말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가능”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허민은 “불가능의 반대말은 가능이 아니라 도전”이라며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도전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들려줬다.

    ‘청년 재벌’ ‘괴짜’ ‘너클볼러’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지만, 허민이 우리 사회에 던진 가장 가치 있는 메시지는 하나다. 바로 도전이다.

    허민은 이제 아홉 번째 너클볼을 던질 준비를 한다. 그 공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설령 그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아도 허민은 열 번째 너클볼을 던질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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