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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칸딘스키 천재성 알아본 아방가르드 후견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칸딘스키 천재성 알아본 아방가르드 후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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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천재성 알아본 아방가르드 후견자

이탈리아 베니스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한 페기 구겐하임. 솔로몬 구겐하임의 질녀다.

구겐하임과 리베이 사이엔 무슨 일이?

1847년 마이어 구겐하임(Meyer Guggenheim·1828~1905)이라는 스위스의 한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광산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이어 제련업에도 진출해 ‘19세기 세계 최대 부자 중 한 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벌이 됐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광산을 소유했다.

마이어는 7남3녀를 뒀는데, 네 번째 아들이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스위스에서 학업을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와 아버지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그림 수집에 열성이었는데, 30대이던 1890년대부터 유명한 유럽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19년 은퇴한 후에는 더욱 열심히 그림 수집에 몰두했다. 그림에 대한 이런 열정은 리베이를 만나면서 황금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1949년 솔로몬이 타계한 후 리베이는 미술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구겐하임 가족들은 리베이를 재단 이사직에서도 축출하고 미술관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미술관 건물 신축도 리베이의 아이디어였으나 준공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리베이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40년이 지나고, 미술관 건물이 완공된 지 50년이 훨씬 넘은 2005년에 와서야 구겐하임 미술관은 리베이의 공로와 예술 세계를 기념하는 특별전 ‘Art of Tomorrow : Hilla Rebay and Solomon R. Guggenheim’을 열어주었다. 이 전시회는 예술 애호가들의 큰 관심에 힘입어 뉴욕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이어졌다. 리베이와 구겐하임 가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논할 때 이탈리아 베니스에 있는 미술관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Peggy Guggenheim Collection)을 빼놓을 수 없다. 솔로몬의 질녀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 만든 미술관인데, 그녀는 삼촌이 만든 구겐하임 재단에 이 미술관을 기증해 현재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자매 미술관이 됐다.



페기의 아버지는 마이어 구겐하임의 여섯 번째 아들 벤저민이고, 페기는 그의 둘째딸이다. 벤저민은 안타깝게도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때 사망하고 만다. 이때 페기는 14세였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페기는 사촌들만큼 큰 재산을 상속받진 못했다. 페기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마르셀 뒤샹, 브랑쿠시 등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내며 이들을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을 운영했다.

베니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페기가 30년 넘게 살던 집에 그녀가 일평생 수집한 개인 소장품을 중심으로 만든 미술관이다. 그랜드 커낼(Grand Canal) 옆에 자리한 이 아름다운 미술관에는 지금도 관람객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온다. 개인 저택이었던 만큼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들이 전시됐고, 미술관 내부에는 20세기 유명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잔뜩 걸려 있다. 화가인 페기 딸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상설전시관이 있다. 소장품이 많다고 해서 전시 작품이 많을 순 없고, 상설 전시는 더더욱 어려운 게 미술관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은 수십 점의 칸딘스키 작품을 상설 전시한다. 둘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 칸딘스키 였을까?

1930년 7월 리베이는 솔로몬을 칸딘스키 스튜디오로 데려간다. 이때부터 솔로몬은 칸딘스키에 빠져들었다. 추상화의 원조 작가 칸딘스키의 천재성을 미리 알아본 것이다. 솔로몬은 일평생 150점이 넘는 칸딘스키 작품을 사 모았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당시로서는 쓰레기 조각이 될 수도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칸딘스키에 몰입했다. 그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이다.

칸딘스키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 법학교수가 됐다.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은 서른 살 때부터다. 늦깎이 화가가 순수추상화의 시조가 됐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다.

칸딘스키는 1896년 독일 뮌휀으로 옮겨가 예술학교에 다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고향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모스크바의 진부한 미술 이론에 환멸을 느껴 1921년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이듬해부터는 독일의 유명한 종합미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자 칸딘스키는 크게 좌절한다. 1933년에는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조차 문을 닫게 됐다. 이에 칸딘스키는 프랑스로 이주해 여생을 보냈고, 1939년에는 아예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칸딘스키 천재성 알아본 아방가르드 후견자

바실리 칸딘스키, ‘Composition 8’, 1923(왼쪽) 바실리 칸딘스키, ‘Various Actions’, 1941(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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