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하덕규 ‘한계령’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입력2014-12-19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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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살 정덕수. 초등학교를 나온 뒤 서울의 다방을 전전하며 시를 쓰던 그가 노랫말을 지었다. 집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정 시인의 눈에 비친 한계령. 음악다방 DJ가 낭독하던 시를 들은 ‘시인과 촌장’ 하덕규가 곡을 붙였다.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열여섯 살 겨울, 연탄을 때는 공부방은 냉기로 가득 찼다. 나일론 양말을 신었지만 발은 시렸고 창호 문풍지 틈으로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바늘구멍에 황소바람이란 말이 실감났다. 한겨울에도 더운 물이 콸콸 나오는 아파트에 사는 지금의 세대가 과연 이 말이 던지는 의미를 알겠는가.

    대입 공부를 하다가 지칠 때쯤이면 나는 방구석에 덩그러니 서있는 통기타를 들었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차가운 내 얼굴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양희은의 노래였다. 서투르게 어쿠스틱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입시 스트레스도 추위도 몰랐다. 끝자락인 “저엉녕 저엉녕 너를 사랑했노라”를 부를 때쯤이면 문득 나의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혹시나 노래 제목처럼 비극적인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나는 순진한 십대 고교생일 뿐이다.

    양희은스러운 클래식 포크

    양희은, 지금 세대에게는 그저 TV에 나와 수다나 떠는 펑퍼짐한 아줌마로 보일지 몰라도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는 무한한 의미를 던지는 이름 석 자다.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들쳐 멘 청순하고 늘씬한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청춘의 시절, 공부방 구석에는 세고비아 기타가 우두커니 서있고,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노래책들은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 사이에 당연히, 그리고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노래책에는 기타 코드가 명기됐는데 386세대 대부분이 그 책들을 보며 혼자 기타를 익혔다.



    그 중심에 있는 노래가 양희은이 부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C-A min-D min-G 코드 네 개만 알면 별 어려움 없이 칠 수 있어 기타 초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연습곡. 슬로 록으로 분류되는 노래는 단출한 코드 덕분에 기타를 배우기에는 딱 들어맞았다. 마치 골프에 입문할 때 레슨 프로의 지시에 따라 달랑 7번 아이언 클럽만 한 달 내내 휘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양희은이 부른 노래는 아주 많다. 이 면에 소개했던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대중에게는 양희은 노래로 인식된다. 헤르만 헤세의 글에 곡을 붙인 ‘작은 연못’과 ‘하얀 목련’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미국 민요 ‘Merry Hamilton’을 번안해 부른 ‘아름다운 것들’ 등이 생각난다. 그는 포크 음악이 주류음악으로 자리매김하던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양희은은 조금 애매한 모습을 띠었다. 가수라기보다는 TV에 뻔질나게 등장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수다를 떠는 이웃집 아줌마 같은 모습을 보인다. 뒤늦게 아름아름 알려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물론 의심할 바 없는 명곡이지만, 1970~80년대의 청아한 톤은 사라지고 우스갯소리나 쏟아내는 그렇고 그런 대중 연예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양희은의 존재감을 유지해주는 노래가 있다. 바로 ‘한계령’이다. 노랫말이 주는 깊은 울림과 계절적인 쓸쓸함, 비장미까지 잘 버무려진 ‘한계령’은 양희은의 음색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노래다. 그래서 대중에게는 클래식 포크쯤으로 인정된다. 실제로 어느 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시인들이 좋아한다는 말은 곧 노랫말이 기성 시 못지않게 서정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양희은의 노래로 가장 유명하지만 무려 40여 명의 가수가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이 땅의 웬만한 가수는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의미다. 소프라노 신영옥 등 클래식 가수까지 덩달아 부르고 있다. 그뿐 아니다. 소설가 양귀자는 동명의 소설 ‘한계령’을 발표했고, 이 작품은 중등 교과서에 실려 그 위력을 더했다.

    노산 이은상의 ‘피어린 육백리’

    원래 이 노래는 보컬 그룹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불렀다. 노래의 탄생도 드라마틱하다. 깊은 감수성의, 웬만한 서정시를 뺨치는 노랫말은 무명 시인 정덕수(51)의 작품이다. 놀라운 건 마치 생을 달관한 듯한 몰아일체감의 이 시를 정 시인이 10대에 지었다는 사실이다.

    1981년 정 시인이 고작 열여덟 나이에 고향 외설악 산행을 하다 연필로 끼적거린 시가 ‘한계령’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면 입이 딱 벌어진다. 시인 정덕수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설악산 오색약수터 입구 오색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한줄기 구름처럼 떠돌았다.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집을 나갔다. 어린 나이에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다가 젖은 눈으로 바라본 건너편 산마루가 한계령이다.

    곤고했던 그 시대가 그랬듯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봉제공장, 철공소에서 막일을 하며 고달픈 생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가난한 청년의 꿈은 시인. 그래서 1980년대 서울시내 문인들이 다니는 술집과 다방을 꿰뚫고 다녔다. 황금찬 시인이 단골이던 을지로 입구의 보리수다방, 지금은 없어진 계림극장 옆 청자다방, 동대문야구장(지금의 동대문디자인 프라자) 맞은 편 산장다방이 그가 순례하던 곳들이다. 객지를 떠돌다가 열여덟 살 때 고향에 잠깐 들르는 길에 ‘한계령’이란 시를 지었고, 그는 이 시를 들고 음악다방 DJ에게 노래를 신청할 때마다 낭독을 부탁했다. 우연히 이 시를 접한 하덕규가 곡을 붙여 노래가 탄생하게 된다. 오랜 세월 저작권 문제로 하덕규와 다툼을 벌였으며 지금은 가사 저작권의 절반을 자신이 받게 됐다고 정덕수는 설명한다. 이렇듯 비감한 노랫말의 원작자가 정덕수로 밝혀지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탄생의 세속적인 우여곡절과는 달리 노래 ‘한계령’은 초탈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어떤 이는 이 노래를 들으면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지나치게 비장한 노래라는 비판도 있다. ‘자살 권유가’라는 좋지 않은 별명도 따라 다닌다. 실제로 정 시인이 서울 생활에 고달픈 나머지 고향을 찾아 자살을 시도하려다 쓴 유서라는 소문도 있지만 작자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한계령은 익숙하다. 설악산 일대의 풍경이나 지명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도 한계령(해발 920m)은 이미 너무나 유명하다.

    “여기는 바로 설악산 한계령으로부터 흘러오는 한계의 시냇가, 발길은 북쪽을 향하면서 눈은 연방 설악산 들어가는 동쪽 골짜기를 바라본다. 30년 만에 다시 보아도 밝은 빛, 맑은 기운이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가슴속의 티끌을 대번에 씻어 주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시원하냐! 그래, 이런데서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겼더란 말이냐! 친소(親疏)도 없이, 은원(恩怨)도 없이, 싸우다 말고 총을 던지고 냇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데가 아니냐! (…)”

    이쯤 되면 아! 하고 이마를 탁 칠 사람이 많겠다. 바로 노산 이은상 선생의 ‘피어린 육백리’다. 고교시절 열공했던 국어책에 등장하는 ‘피어린 육백리’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더러는 그 시절, 까까머리 고교시절의 앨범을 끄집어내는 이도 있겠다. 노산이 휴전선 일대의 격전지를 둘러보며 민족의 비극을 울분에 차서 쓴 기행 수필이다. 글은 강건하고 화려하다. 느낌표가 군데군데 난무한다. 분단 현장을 답사해 역사와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했다는 점, 영탄적 표현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글 바닥을 관통하는 기본 정서는 본능적인 애국심이다.

    이렇게 불타는 애국 정서가 겉으로 드러나는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지만 기성세대는 밑줄 좌아악 긋고 공부했다. 사나운 국어선생은 전문을 달달 외우게 했다. 암송에 실패하면 발바닥을 맞기도 한 기억이 아련하다. 감탄부호 같은 것은 되도록 아끼는 게 격을 갖춘 글로 간주되는 지금의 글쓰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감정이 철철 넘치는 노산의 글이다. 덕분에 ‘피어린 육백리’는 지금의 중장년층 가슴에 살아 펄떡이는 기행문이 됐다.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1971년 수많은 군인이 거의 맨손으로 고갯길을 뚫었다. 한계령 공사로 숨져간 장병을 기리는 위령비가 정상 고갯마루에 서 있다.



    김재규의 길, 김수근의 휴게소

    한계령(寒溪嶺)은 이름처럼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고개다. 한계령의 본디 이름은 오색령이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군생활을 한 지금의 중장년층에게는 ‘김재규로(路)’로 알려졌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이 일대 4개 사단을 거느린 군단장으로 있던 1971년 군단 예하 1102 야전공병단을 동원해 난공사 끝에 그해 12월 27일 눈보라 폭풍 속에 개설한 도로이기 때문이다.

    이후 한동안 김재규로, 오색로로 불리다가 지금은 한계령으로 통일돼 불린다. 그래서 지금도 한계령 정상에는 당시 군단장 김재규를 기리는 준공 기념비가 칼바람에 외롭게 서 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날씨에 볼펜 잉크마저 얼어붙었다. 글이 써지지 않은 무서운 날씨다. 겨울 산행이 금지돼 정상으로 가는 계단은 철문에 굳게 잠겼다. 국립공원 사무소의 도움으로 찾아본 고개 정상의 위령탑 겸 준공기념비에는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고갯길을 만들다 발파 사고로 죽어간 병사들의 이름이 커다란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증오심에 가득 찬 일부 탐방객이 김재규 이름을 정으로 찧어 놓아 그의 이름 자리에는 흔적만 남아 비감함을 더한다. 망자의 이름까지 정으로 쪼아버릴 정도의 극단적인 증오감에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네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노래 ‘한계령’과 더불어 한계령을 빛나게 하는 또 하나는 한계령휴게소다. 김수근의 작품으로 굳이 무슨 무슨 건축대상 등 화려한 수상이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는 순간 대한민국 최고의 휴게소 작품임을 느낄 수 있다. 철골구조에 자리한 목재건물 전체가 모두 그을린 양 검은색으로 배치돼 배경이 되는 설악의 아름다움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절제와 관조미의 극치인 휴게소 안은 조악한 기념품과 어묵 파는 공간으로 변해 있다. 어디 나직이 앉아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을 바라보며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을 느낄 최소한의 여유조차 없는 소란함, 그 자체다. 유려한 외관만 보고 실내는 찾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깨 떠미는 겨울산

    외설악 한계령 아랫동네가 바로 오색약수다. 약수터 입구에 오색초등학교가 있다. 정 시인은 학교 관사에 산다. 이 학교는 정 시인의 아이 2명과 친척아이 2명을 포함해 전교생이 모두 6명인 초미니 학교다. 하지만 교장, 담임교사, 전담교사, 행정실장, 주무관 등 교직원만 무려 8명이라는 설명은 듣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한다.

    한겨울 설악을 찾는 이는 많지 않다. 겨울 저녁은 너무 빨리 왔고 펜션과 식당은 칼바람에 움츠린다. 눈 덮인 계곡의 겨울나무들은 외롭고, 나무들이 부르는, 아무도 듣지 않는 겨울 노래가 휘파람처럼 들린다. 노래방이 없던 시절,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나는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땅에서 피할 수 없는 게 노래 순서다. 폭탄주에 반쯤 취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덜컥 나왔다. 그땐 내가 지금보다 많이 순수했나 보다. 그러나 회식자리는 일순간 고요해지고 많이 취한 사람은 더욱 취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지금은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 스물한두 살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눈시울이 젖어 온다. 그때로 돌아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 어둠에 물든 산은 내게 내려가라며 어깨를 떠민다. 겨울 한계령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차창에는 중년이 된 한 청년이 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아,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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