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위대한 정신이 태어나는 순간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4-12-19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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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정신이 태어나는 순간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br>카를 구스타프 융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무의식을 이해하고 싶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닌 본능의 미스터리 말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나는 항상 융으로 돌아온다. 심리학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심리학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심리’라는 틀에 갇히기 싫어 다른 분야로 멀리 멀리 떠나갔다가도, ‘또 한 해가 가는구나’하는 생각 때문에 쓸쓸해지는 연말이 되면 나도 모르게 융으로 돌아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심리학이라는 단어에 갖는 거부감은 이토록 복잡하고 불가해한 마음을 과학으로 해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내게 과학의 이미지는 아직도 조금은 차갑고 무섭고 공격적인 그 무엇이다. 과학은 소중하지만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의 독단은 무섭다. 내 마음이라는 뜨거운 대상을 과학의 차가운 칼날에 베이기 싫은 마음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심리학자보다 융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는 그가 항상 문학과 철학과 신화를 이야기하며 심리학을 더 커다란 인문학의 장으로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는 차가운 심리학을 뜨거운 심리학으로, 과학의 영역에 갇혀 있던 심리학을 인문학으로 확장한 사람이다.

    뜨거운 심리학

    심리학이 뭔가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의 고민 위에 대단한 존재로 군림하는 현실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우리가 심리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지 당장의 심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내가 꿈꾸는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할 수 있는 최첨단 현미경으로서의 과학이 아니라, 아무리 탐사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처럼 불가해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경의를 담은 그 무엇이다.

    융의 마스터플랜은 단지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신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부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를 통해 ‘인류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이 그의 커다란 그림이었다. 사실 나는 ‘심리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몸짓이 좋다. 그러려면 항상 융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이 책은 카를 구스타프 융이 미국 포드햄 대학에서 한 정신분석 강의록이다. 그가 이 강의를 맡았던 1912년은 심리학의 권위 자체가 크게 의심을 받던 때였다. 게다가 융 자신도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시기였다. 그는 아직까지 정신분석의 발전 단계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강의 초반부터 인정한다. 그는 정신분석의 진정한 창시자인 프로이트에 대한 커다란 존경심을 품었지만 그의 학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인간의 모든 리비도를 결국에는 성적인 것으로 환원해버리는 프로이트의 일원론을 넘어서기 위해 융은 끊임없이 분투했다.

    이 책의 초반부에는 젊은 시절의 융이 프로이트 이론을 넘어서기 위해 프로이트 이론의 맹점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내용이 나와 ‘카를 구스타프 융다운 장엄함과 품격’을 기대했던 독자는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융이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산이었다. 프로이트를 넘어선다는 것은 단지 프로이트는 틀리고 융 자신은 옳다는 식의 이분법에 몸을 담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업적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프로이트 사상의 맹점을 공정하게 파헤치고, 마침내 프로이트와 대항하면서 융 자신이 ‘사상의 자기다움’을, 자기만의 특이성을 꽃피워내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카를 구스타프 융의 사상’이라는 꽃봉오리가 조금씩 부풀어 올라 마침내 만개하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리비도라는 용어에서 ‘성적’ 의미를 빼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이트가 ‘성욕에 관한 3편의 에세이’에서 이 용어에 부여한 성적 정의를 확 없애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 초기 유아기의 아이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 고통도 받고 쾌락을 즐기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 아이의 고통과 즐거움이 성욕 리비도 때문인가?

    내면의 분열이 시작되는 순간

    이 책이 진정으로 흥미로워지는 순간은 융이 자신의 환자들이나 실제 사례들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내면의 분열’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정신질환이 시작되는 최초의 순간을 프로이트는 유아기의 성적 트라우마에서 찾곤 하지만, 융은 우선 각자가 처한 현재의 욕망과 행동에서 찾고자 한다. 인간의 자기 분열이 시작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

    예컨대 평생 알프스를 등반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능력 부족을 깨닫고 포기하는 순간. 그는 기로에 직면한다. 그는 정직하게 자신의 능력과 용기가 부족한 것을 인정함으로써 다음 행로를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내 탓이 아니라 악천후 때문이야’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아서야’ ‘내 주변 상황이 나를 받쳐주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핑계를 대는 방법도 있다.

    솔직하게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는 사람은 언젠가 알프스에도 오를 수 있고, 자신에게 맞는 다음 행보를 준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알프스에 오르는 사람들’을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의 일화처럼 ‘거대한 신포도’로 만들어버린다. 끝없이 ‘외부 상황’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진정한 문제로부터 도피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중요한 화두인 ‘퇴행’이다. 사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애꿎은 남을 탓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유아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알고 있지만, 그는 일단 ‘나의 용기가 부족하다’는 충격적인 사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만한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을 통해 잠깐 ‘자신이 작아지는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실은 자신의 진짜 자아와 맞서게 된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두 가지 자아가 싹트고 분열하기 시작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본래의 자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지금 산을 오를 수 없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또 하나의 자아가 탄생한다. 융은 말한다. 이런 자기기만과 자기모순의 결과로 리비도가 둘로 쪼개져, 각각의 리비도가 서로 대립한다고. 남에게 보이는 자아와 본래의 자아가 부조화를 이루는 상태, 그것이 바로 내면의 갈등으로 번져나간다.

    더 나쁜 것은 리비도가 이런 쓸모없는 전투에 매달리면서, 그는 어떠한 모험도 할 수 없게 돼버린다는 것이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는 한, 산을 오르려는 원래의 소망을 결코 실현할 수 없게 되고,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도 점점 자신감과 의욕을 잃게 될 것이다. 용감하게 현실과 맞서고, ‘아직 내가 능력과 용기가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음 도전’을 향해 열심히 준비하는 건강한 리비도의 길을 버린 채, 자꾸만 애꿎은 외부 환경을 탓하며 유아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퇴행’이다.

    그의 리비도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로부터 철수하고 진짜 행동을 유아적 환상으로 바꿔놓는다. 융은 신경증 환자 중 많은 사람이 바로 이런 ‘퇴행’을 겪음을 발견한다. 즉 대부분의 정신 질환이 발생하는 최초의 원인 중 하나는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자아가 탄생’함으로써 우리는 본래의 자아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퇴행과 저항

    퇴행의 가장 부정적인 효과는 제대로 된 도전, 새로운 삶을 향한 모험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퇴행을 경험한 환자는 자신의 기억을 차근차근 설명하거나, 냉철하게 자신의 기억을 재생하는 데 강한 ‘저항’을 보인다. 이 저항이 치료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환자의 이 강한 ‘저항’을 통해서만 의사는 환자의 트라우마에 접근할 수 있다.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기 전까지, 환자들은 트라우마의 원인이 자신의 ‘정직하지 못함’과 ‘스스로의 게으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융은 이 ‘퇴행’이나 ‘저항’이 신경증 환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음에 주목한다.

    융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뛰어난 의사에게 우리 정신의 주도권을 맡겨버리는 수동적인 체험이 아니라, ‘내 무의식의 진정한 발견자와 치유자’는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기까지의 지적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철저히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장인이다. 내 운명이라는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나갈지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 의식을 얼마나 제대로 통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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