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장군님의 영도를 실현하라”(北 노동당)
“장군님 총포탄 돼 과업 완수”(통진당 연계 일심회)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4-12-23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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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과 연계성’이 위헌정당 심판 쟁점
    • 중앙당·서울시당 장악 주력
    • 北 노동당 지령 내용과 같은 당직 인선
    • 北 “산악회 지도방법 보고하라”
    • 통진당 “극히 일부 당원의 행위일 뿐”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2013년 9월 5일 구속영장 발부 직후 구치소로 향하면서 결백을 외치는 이석기 통진당 의원. 이 의원은 2014년 8월 11일 항소심에서 내란선동이 인정돼 징역 9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위헌정당 해산 심판이 임박했다. 지난 11월 25일 마지막 변론이 끝나 결정만 남았다. 헌재는 통진당 강령 및 활동이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나는지 판단한다.

    2013년 11월 정부가 통진당 해산 심판을 청구한 후 18차례 변론이 진행됐다. 법무부와 통진당이 제출한 서면 증거가 각각 2900여 건, 900여 건에 달한다. 그중 법무부가 제출해 헌재가 증거로 채택한 일심회·왕재산 사건 관련 문서가 북한과의 연계성과 관련한 핵심 증거다. 수사기록의 증거 채택을 놓고 법무부와 통진당 간 공방이 거칠었다.

    헌재는 왕재산 사건 대북 보고서와 북한 노동당 지령문 등을 증거로 채택했다. 통진당 측은 최후변론에서 “왕재산이나 일심회 등 사건은 극히 일부 당원의 행위”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수사기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신동아’가 입수한 수사기록과 대북 보고서, 지령문 등에 따르면 북한은 통진당(민노당)을 장악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통진당을 통해 ‘김정일의 영도를 실현’하려 한 것이다. 노동당의 지령과 똑같은 내용으로 통진당 당직 인선이 이뤄진 적도 있으며 강령을 바꾸려는 시도도 했다.

    “우리 당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북한 노동당은 일심회를 통해 중앙당 및 서울시당 장악에 집중했다. 일심회는 미국 시민권자 마이클 장 씨가 주사파 운동권을 포섭해 결성한 지하조직. 장씨는 1994년 노동당 대외연락부(현 225국) 지령을 받고 1994년 밀입북해 노동당에 입당한 후 ‘모란봉’이라는 대호명(對號名·보안을 위해 이름 대신 사용하는 명칭)을 받았다. 유기순 당시 북한 대외연락부 부부장은 “통일사업을 위해 남한 내 지하조직을 꾸리라”고 지시했다.

    장씨는 1997년 말 연세대 출신 손○○ 씨를 포섭해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은 일심회를 결성했다. 일심회는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를 실현하려 한마음으로 뭉쳐 투쟁한다’는 뜻이다. 장씨는 고려대 애국학생회 부부장 출신 이○◇(2000년 말 포섭) 씨, 고려대 삼민투 위원장 출신 이○○(2001년 6월 포섭) 씨, 전대협 사무국장 출신 최기영(2005년 2월 포섭) 씨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장씨는 중국 등에서 대외연락부 인사와 접촉해 김정일 영도체계를 구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 내 정세, 민노당 내부 동향 등을 노동당에 보고했다. 손씨 등도 베이징 대외연락부 안가(安家)를 방문해 △민노당 지도방향을 학습하고 △충성결의 편지를 작성 및 제출했으며 △민노당 주요 인물에 대한 평가 사업 임무를 부여받았다. 일심회는 ‘장군님의 영도를 실현하라’는 지령에 따라 민노당 중앙당과 서울시당을 장악하는 데 주력했다. 최씨는 통진당의 2012년 집권전략위원회에 핵심 간부로 들어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최종 변론이 2014년 11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렸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일심회는 △민노당 당대표 비서실과 중앙당 기조실에 근무하는 실무 간부를 포섭해 정책 생산과 결정 과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했고 △당내 NL(민족해방)계 모임인 통일산악회 지역조직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해 당내 지지를 확대했으며 △당직선거 때는 북한 노동당이 지목한 인물을 당직에 선출되게 하고자 당내 NL계 전국모임을 소집해 지지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최씨가 집권전략위원회에 진출해 당 강령을 북한의 요구에 맞게 바꾸려 했으며 △당내에서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범좌파(PD계)에 대해서는 고립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지령문에 따르면 북한 노동당은 “△민노당 정책 방향을 우리 당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할 것 △중앙당 간부대오를 친북 NL 계열로 영입·강화할 것 △민노당이 통일전선적 정당이 되도록 대외사업을 영도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일심회는 최씨에게 “중앙당의 기획 실무 부문에 대한 김정일의 영도를 구현해 민노당이 우리 당(북한 노동당)의 요구에 맞게 반미 민족 공조의 합법적 단위로 역할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또한 “NL계가 조직한 통일산악회를 파악해 이를 지도할 방법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최씨는 통일산악회의 규모와 관련해 경기동부 200여 명, 울산연합 1000여 명, 인천연합 2000여 명이라고 보고했다.

    2005년 12월 6일 북한 노동당은 민노당 당직 선거를 앞두고 약정된 e메일을 통해 일심회에 “당직 선거를 계기로 당 정책위원회를 완전 장악하라” “정책위원장으로는 경기동부의 이○△을 내세우고, 그 아래에 우리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을 넣어라” “당직·공직 겸직 금지가 없어지는 경우 ○○○만한 인물이 없으므로 그를 당대표로 선출하라” “당직·공직 겸직 금지 조항이 폐지되지 않으면 현 비대위 집행위원장을 당대표로 밀고 나가라”고 지시했다.

    합정동 RO 모임과 ‘산악회’

    2006년 1월 당 대표에는 ○○○ 씨, 정책위원장에는 이○△ 씨가 선출됐다. 북한의 지령 내용과 똑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그렇게 된 것일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이○△씨는 한때 경기동부의 실세로 지목된 인물로 ‘수령’이라고 불리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무총장에는 김선동 전 의원이 선출되는데 이때 경기동부와 광주전남이 연대해 범(汎)경기동부연합이 탄생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 노동당은 이후 “사상과 이념 종교의 차이를 넘어 단일대오를 이뤄야 한다” “우리 당(북한 노동당)의 단일전선체 건설 방침을 민노당의 공식 입장으로 관철시킬 것” 등을 일심회에 지시했으며, 일심회는 △당 강령의 대중화 추진 △민노당 중앙당 내의 기획역량 강화 △단일전선체 연내 건설 △상층 통일전선 사업 강화 △좌파(PD계)에 대한 대책 수립을 5대과업으로 설정했다.

    일심회 조직원들은 “조국의 동지들 안녕하십니까. 적후(敵後)에서 보고 올립니다” “오직 장군님의 안위와 건강만을 생각합니다” “한 명 한 명을 수령의 결사옹위로 만들고, 장군님의 별동대가 되겠습니다” “장군님의 선군영도가 유일한 정답입니다. 새로운 세기의 수령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장군님의 총포탄이 되어 과업을 완수할 것” 등의 다짐을 했다. 노동당은 “장군님이 동지들을 천금같이 여긴다”고 이들을 독려했다.

    일심회 조직원 최씨와 이○○ 씨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출신 이상규 통진당 의원과 함께 ‘서울모임’(2005년 8월 21일 결성, 구성원 10여 명)에서 함께 활동했다. 서울모임은 통진당 서울시당을 배후 조종하는 전위조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동부로 분류되는 일부 인사가 일심회 간첩들과 교집합을 이룬 것이다.

    또한 “일심회 한 조직원이 2006년 3월 2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노동당 공작원을 만나 민노당 서울시당에서 소위 위대한 장군님의 영도를 실현하는 데 이상규의 포섭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일심회 판결문에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는 서울모임의 핵심이 이 의원이라고 적시됐다. 또한 판결문은 “경기동부연합은 200명의 활동가가 해마다 산행을 하며 동지애를 다지는데, 이를 ‘산악회’로 전환해 운영할 수 있다고 북한 지도부에 보고했다”고 밝힌다. 2013년 5월 합정동 RO 회합에서 내란 선동 행위를 한 것으로 항소심에서 인정된 이석기 의원의 RO 또한 ‘산악회’로 불리기도 했다. 합정동 RO 모임에 참석한 핵심 대오는 130여 명이다.

    혁명론, 선군정치 학습

    일심회는 서울모임을 통해 PD계열인 심상정 현 정의당 원내대표 쪽의 전진그룹을 견제하고, 또 다른 PD계열인 혁신그룹 등과는 전술적으로 제휴하기로 했다. 이들은 ‘선군정치 동지회’ ‘8·25 동지회’를 통해 서울시당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나가기로 했다.

    또한 NL계 비공개 정기모임을 통해 ‘선군정치와 통일정세’ ‘당 사업 이론과 사상론’ 등 혁명론을 학습했다. “민노당 중앙과 서울시당에 (김정일의) 영도체계를 내오는 것은 당내 NL계의 주체사상화가 없이 지도부 장악만으로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으며 통진당 ○○○, ○○○씨를 서울시당 장악과 관련해 각각 책임자, 지도 핵심 대상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요컨대 북한 노동당은 일심회를 통해 민노당의 중앙당과 서울시당을 장악해 김정일의 영도가 실현되도록 기도한 것이다.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2014년 11월 25일 위헌정당 해산 심판 최후변론에서 통진당 측 대리인으로 나와 “당 대표로 일하면서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북에서 받은 지령이니 실현시키라는 지시를 받은 바 없다”고 강조하면서 “평화와 화해의 역사를 만들려 했을 뿐 이적행위도 남남(南南) 갈등 조장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통진당 측 대리인의 설명대로라면 북한 노동당이 통진당 장악을 기도했으나 실제로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소지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 일심회와 통진당 당권파의 교집합은 지엽적인 사안인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서울모임 외에는 찾기 어렵다.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최종 변론이 열린 2014년 11월 25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진보단체 회원들이 해산 반대 시위를 했다.

    한편 법무부가 헌재에 제출한 문서에 따르면 통진당은 일심회 사건의 ○○○ 씨를 비롯해 과거 이적단체 활동으로 처벌받거나 이에 가담한 18명에게 당원 교육을 맡긴 것으로 돼 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에게 손도끼와 함께 “배신자는 반드시 죗값을 치른다. 다음엔 경고가 아니라 죗값에 맞는 처벌을 할 것”이라고 쓴 협박문을 보낸 김○○ 씨가 당원교육위원회 교육부장을 맡기도 했다. 일심회 사건으로 수감돼 복역을 마친 최기영 씨는 현재 통진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기획실장이다. 이○○ 씨는 통진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출소한 후 통진당에서 다시 활동하는 것이다.

    “진보 대통합 정당 구성하라”

    왕재산 사건은 민노당 인천 조직과 관련이 있다. 1980년대 주사파 세력 중 일부가 당시 북한 노동당 사회문화부(현 225국)에 포섭돼 정치권 침투 공작을 벌인 것.

    왕재산 총책 김덕용 씨의 대호명은 ‘관덕봉’이다. 김씨는 1993년 8월 26일 김일성을 만나 이른바 접견교시(김일성과 직접 면담)를 받았다. 북한 노동당이 김씨에게 내린 지령은 △조직 안에 유일적 영도체계 구축 △지도 핵심을 육성해 중요 지역과 부문에 포치(북한 조선말대사전에 따르면 ‘포치(布置)’는 사업 담당에게 일을 분담해주면서 수행방법 등을 일러줘 앞으로 사업이 달성되게 짜고 드는 것을 뜻한다) △혁명사상과 위대성 보급 및 선전 △통일전선적 방법으로 혁명역량 조성 △조직의 안전을 철저히 보장하며 합법적 무역 공간을 통해 조국과의 연계·연락 실현 등이다.

    김씨는 이후 ‘반미구국학생동맹’ 출신 임○○ 씨와 대학 동창인 이○○씨를 포섭해 북한이 김일성 항일 유적지로 선전하는 함북 온성군의 왕재산을 명칭으로 삼은 지하조직을 결성했다.

    노동당 225국은 왕재산을 통해서도 한국의 각종 선거 때 지령을 하달했다. “진보 세력, 개혁민주 세력의 역량을 확대하고 민노당을 중심으로 진보 대통합정당을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2007년 대선을 내다보고 지역 운동단체를 망라해 동원하라”고,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 때는 “승리의 성과를 토대로 진보 대통합을 차질 없이 추진하라”고 지령했다. 2011년 5월에는 “진보신당의 통합반대 세력은 ○○○○과 협동해 통합으로 이끌고, 통합이 파탄되면 고사시켜라” “국민참여당은 이라크 파병 주장 등을 반성할 경우 통합에 참여케 하라”며 진보신당, 국민참여당과의 합당과 관련한 지침을 내놓았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때 왕재산 구성원들은 “조직원들이 열심히 투쟁해 민노당 후보 중 기왕의 포섭 대상인 ○○○과 ○○○을 당선시켰다”고 북한 노동당에 보고했다.

    북한이 이른바 종북 성향 세력에 선거자금을 댔다는 증언도 헌재 심판과정에서 나왔다. 1980년대 대학가를 붉게 물들인 주사파 팸플릿 ‘강철서신’ 저자로 북한과 직접 연계된 지하당(민혁당)을 최초로 조직한 김영환 씨가 2014년 10월 21일 16차 변론에 출석해 “이석기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혁당 산하 경기남부위원회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해체한 적이 없다. 이들이 민노당에 가담하는 과정을 보면 민혁당 때의 노선과 방침을 따르지 않나 추측된다”면서 “1995년 지방선거 때 성남과 구로 지역에 김미희·이상규 후보(현 통진당 의원)가 각각 출마했는데, 민혁당에서 한 명당 500만 원씩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중에는 북한에서 지원받은 40만 달러도 있다”고 주장했다.

    김미희·이상규 의원은 10월 22일 김씨의 선거자금 관련 주장은 “명백한 허위사실 유포면서 명예훼손이다. 법적인 모든 책임을 물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종북마녀사냥이 벌어진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덧붙였다.

    “이석기가 반발해 해체 안돼”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주체사상을 신봉한 민혁당 재건 그룹이 경기동부의 핵심”이라고 가장 먼저 보도한 ‘신동아’ 2012년 5월호.

    김영환 씨는 1991년 5월 16일 강화도 해안에서 북한이 보낸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후 민혁당을 결성했다. 1997년 중앙위원회(김영환 하영옥 박○○) 표결에서 2대 1로 해체를 결정했다. 경기남부위원장이던 이석기 의원과 수도남부사업부 이상규 의원 등이 하영옥 씨와 함께 이에 반발해 민혁당을 재건했다. 이석기 의원 등이 김씨를 변절자로 규정하고 민혁당 산하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를 유지한 것이다. 다음은 김영환 씨와의 일문일답.

    ▼ 민혁당을 해체하면서 왜 조직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했나.

    “해체 선언만 했을 뿐이지…. 하영옥, 이석기가 반발했다. 결속이 안 됐다.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 돈과 선(線)은 어떻게 했나.

    “돈은, 1991년 김일성에게 딱 한 번 40만 달러를 받았다. 돈은 남아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남은 게 있어도 넘겨줄 수 없다고도 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활동에 쓰일 게 분명하니 돈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선도 마찬가지다. 내가 반대하는 방향의 일에 활용될 것이 분명해 넘겨주지 않았다. 생각이 바뀐 뒤에도 1997년까지 북한 접촉망을 유지했다. 선을 끊어버리면 북한이 다른 조직원에게 접근할 소지가 있다고 봤다.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전향했고, 나머지는 설득하는 것이 단기간엔 불가능하다고 여겨 선을 완전히 끊어버린 게 1997년이다. 북한에서 공작원을 다시 파견해 하영옥을 만났다. 선하고 돈은 그즈음 복원됐을 것이다. 하영옥이 구속된 후 선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이석기 의원이 상징하듯 민혁당 잔존 세력이 현재 통진당 당권파의 핵심이다.

    일심회 판결문에는 조직원들이 2006년 서울시당 선거 때 민혁당 출신의 ○○○을 사무처장으로 출마시키기로 했고 실제로 당선된 것으로 돼 있다. 통진당 내 대표적 기획통으로 꼽히며 19대 총선에서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이○○씨도 민혁당 부산지역위원장 출신이다.

    국회 본회의장 최루탄 투척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김선동 전 의원은 일심회 조직원 최기영 씨가 북한 노동당에 보고한 인물자료에 “사실상 경기동부연합 성향, 뚝심 있는 운동가로 한다면 하는 스타일, 버럭 성질과 변방 출신(광주전남연합)이라는 열등의식” 등의 문구가 담겼다. 2006년 당직 선거 때 경기동부와 제휴해 사무총장에 당선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동부의 뿌리 격은 1991년 12월 결성된 NL계 전국연합의 지역조직 중 하나로 경기 성남을 기반으로 삼은 ‘성남연합’이다. 이들은 1990년대 초부터 성남의 청년단체에 진출해 활동하면서 세를 넓혔다. 1989년 조직한 ‘터사랑 청년회’에서 이석기 의원, 김미희 의원, 우위영 전 통진당 대변인, 민혁당 하부조직원이던 ○○○ 씨 등이 활동했다. 전 민노당 경기도당위원장 정형주 씨는 ‘성남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95년 성남시에 분당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윤원석 전 ‘민중의소리’ 대표는 ‘분당청년회’를 결성했다.

    ‘신동아’는 2012년 5월호에서 “주체사상을 신봉한 민혁당 재건 그룹이 경기동부의 핵심”이라고 가장 먼저 보도했다(‘국회 진입한 마지막 주사파 실체’ 제하 기사 참조). 이정희 대표 등 통진당 당권파 인사들이 경기동부의 실체를 모른다고 주장하던 때다.

    “전략적 지위 정당 따로 있다”

    조현연 정의당 진보정의연구소 소장은 2009년 내놓은 책에 이렇게 썼다.

    “자주파 계열의 헤게모니 그룹인 종북파가 자주파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 자주파, 특히 종북파에게 민노당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통일전선적 성격을 지닌 정당으로, 그것은 ‘전략적 지위의 정당’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통일전선적 성격의 전술 정당이기에 그들에게 민노당은 장악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고 당을 장악하면 종북파 노선의 패권주의적 관철이 우선시되었다. 즉 종북주의 때문에 패권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의 기본노선과 숙원사업은 2001년에 마련된 59쪽 분량의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이른바 9월 테제 문건에 잘 드러나 있다.”(조현연 ‘한국 진보정당 운동사’ 참조)

    조현연 소장은 민노당 정책위 부위원장,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을 지냈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전략적 지위의 정당’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을 원용하면 2012년 4월 11일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한 북한의 노동당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때 주체사상을 신봉한 이들이 PD계열 중심으로 창당된 민노당에 본격적으로 입당하기 시작한 때는 2001년 9월 충북 괴산의 군자산에 모여 이른바 ‘9월 테제’(군자산 결의)를 결의하면서부터다. 9월 테제의 핵심은 “3년 내에 광범위한 대중조직화를 통해 민족민주정당을 건설하고 10년 내에 자주적 민주정부 및 연방제 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분당(分黨)되기 전 통진당은 민노당과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새진보통합연대)가 2011년 12월 창당한 정당이다. 이 같은 3자 통합구도는 2012년 총선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을 거치면서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계열이 떨어져나가는 분당 사태를 거치면서 깨졌다. 민노당 분당(민노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뉨)과 통진당 분당(통진당, 정의당으로 나뉨)을 거치면서 종북 시비를 겪는 세력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통진당을 나와 정의당을 창당한 심상정 의원, 노회찬 전 의원 등이 당권파를 견제할 때와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경기동부로 상징되는 당권파가 패권을 오로지한 가운데 이석기 의원의 RO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영환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북한 노동당은 현재의 통진당 당권파 인사들의 선거 자금을 지원한 셈이다. 또 일심회·왕재산 수사기록, 북한의 지령문, 판결문 등에 따르면 북한은 지속적으로 진보정당에서 ‘김정일 영도’를 실현하려 했다.

    김영환 씨는 그러나 “이상규 의원은 민혁당 중앙간부였기에 ‘이게 민혁당 자금이다’ 이렇게는 알고 있었다”면서도 “그런데 그 돈이 북한 자금이라는 것은 몰랐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일심회와 통진당 당권파가 직접으로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 또한 앞서 언급한 ‘서울모임’ 외엔 찾아보기 어렵다. 민노당 당직 선거, 진보정당 통합 등과 관련해 북한이 일심회, 왕재산을 통해 도모한 것이 실제로 실현된 듯 보이는 몇몇 사례도 우연의 일치이거나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일 수 있다.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결정의 핵심 쟁점인 북한과의 연계성은 이렇듯 모호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또한 통진당의 목적,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구체적으로 위협했는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비슷하게 주장하면 다 불온?”

    11월 25일 위헌정당 해산 심판 최후변론에서 정부 측 대리인들은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민혁당 잔존 세력이 통진당 당권을 장악해 활동했다. 통진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연원이 김일성과 북한에 있다”면서 “통진당은 우리 사회를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북한에서 전파된 개념으로 북한의 대남혁명 전략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통진당 측 대리인들은 “당 강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과 무관하다. 비슷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정당을 불온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면서 “(위헌정당 해산 심판 청구는) 노동자 농민 서민의 정치적 의사표현 권리를 완전히 빼앗는 것으로 해산 청구가 받아들여지면 정부 비판을 불허하는 전체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변론했다. 또한 이석기 의원에 대해서는 “당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은 적이 없는 소속 국회의원 한 명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9인의 현자(賢者)’라고 불리는 헌법재판관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통진당이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를 부인하는 ‘조직화된 적’인지, 헌법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정당인지 판가름 나는 순간이다.

    항소심에서 내란선동 혐의 등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은 이석기 의원의 상고심 선고도 1월 말께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헌재 결정과 대법원 판결로 통진당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2012년 5월), 이석기 의원 내란선동 혐의 구속(2013년 9월 5일) 등으로 나라를 혼란케 한 일련의 사건이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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