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해열제’ 대신 ‘콘셉트’ 처방을!

‘땜질정책’으로 누더기 된 수능

  • 김유림 기자 | rim@donga.com

    입력2014-12-23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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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 출제·교사 검토, EBS 연계 집착하다 ‘수능 파동’
    • ‘자격검증 최소요건’이냐, ‘우수학생 변별고사’냐
    • 수시 입학생 vs 정시 입학생 갈등의 뿌리
    ‘해열제’ 대신 ‘콘셉트’ 처방을!

    김성훈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2015학년도 수능 생명과학Ⅱ, 영어 출제 오류의 책임을 지고 지난 11월 24일 자진 사퇴했다.

    “대학이요? 내가 가진 수없이 많은 장점 중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은 배우로서 인터뷰하는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요.”

    얼마 전 스마트폰으로 할리우드 신예 여배우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고 했다. 참 당당하고 멋진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TV 토크쇼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연기파 중년 남성배우’가 초등학교 고학년 딸과 함께 출연했다. 딸이 “나도 아빠처럼 배우가 될 거야”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당황했다.

    “그래, 뭐 나중에 배우가 되더라도, 일단 서울대는 가야 해. 그러면 ‘서울대 출신 배우’라고 해서 더 주목받을 수 있다고!”

    교육부의 ‘익숙한 해법’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8명이 “학벌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답했다. 대학 시절은 4년 남짓이지만 그 꼬리표는 40년 이상 따라다니며 인생의 주요 변곡점마다 큰 힘을 발휘한다. 모순은 이른바 ‘SKY’를 중심으로 한 서울 주요 대학 입학정원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사교육비를 줄이고 대학들이 공정하게 합격자를 선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교육정책을 편다. 문제는 정책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 박근혜 정부가 집권 직후부터 3년차인 현재까지 내놓은 교육정책만 해도 대학 구조조정, 대입 전형 간소화 방안, 선행학습금지법, 자유학기제, 수능 영어 절대평가 등 부지기수다.

    대학입시를 둘러싼 갈등은 2015학년도 대입수학능력시험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수학, 영어 과목이 너무 쉽게 출제되면서 1~2점 차이로 등급과 당락이 바뀌는 사태가 발생했다. “수능은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이 아니라 실수를 확인하는 시험”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영어와 생명과학Ⅱ 영역에서는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하는 문제 오류가 발생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교육부는 또 ‘익숙한 해법’을 내놓았다. 지난 12월 4일 교육부는 ‘수능 출제 및 운영체제 개선위원회(이하 수능개선위)’를 출범하겠다고 밝혔다. 김신영 한국외대 교수가 위원장을 맡았다. 수능개선위는 향후 4개월간 수능 출제 오류와 들쑥날쑥한 난이도를 안정화하기 위한 개선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하지만 수능개선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수능개선위원 7명 중 6명이 대학교수다. 수능 출제위원 중 현직 교사 비중이 너무 낮다는 것이 수능 출제 오류의 주요인으로 거론되는 판국에 또다시 교수 위주의 수능개선위가 꾸려진 것. 수능개선위가 얼마나 획기적인 해답을 내놓을지도 의문이다.

    2004학년도 수능 언어영역에서 복수정답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교육인적자원부는 지금과 유사한 대책위를 구성했다. 당시 △출제위원 검증 강화 △특정 대학 출신의 출제위원 비율 40% 미만으로 조정 △문제은행 방식의 출제체제 도입 등 개선안을 발표했으나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다.

    모 대학 교육학과 교수는 “2004년 2월 교육부는 ‘2008년부터 수능을 완전 자격고사화하겠다’고 예고했지만 언젠가 없던 일이 됐다. 이번에도 비슷한 수순을 밟지 않겠나”라며 불신을 드러냈다. 김신영 위원장에게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위촉된 지 얼마 안 돼 드릴 말씀이 없다. 연구를 해서 결과를 내놓겠다”고 답했다.

    한글 해설 외우는 영어공부

    많은 전문가가 대입정책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중에서도 수능의 EBS 70% 출제 연계정책이 집중포화를 맞았다. 수능과 EBS 연계가 도입된 건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당시 IT 발달에 힘입어 메가스터디를 필두로 한 온라인 사교육 시장이 급속히 팽창했다. 교육부는 사교육비 절감과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교육방송만 들어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며 이 정책을 도입했다. 2004년 4월 4일 한석수 당시 교육부 학사지원과장(현 대학지원실장)이 교육부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그런 고민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교육방송은 해열제 처방이다. 학교교육을 정상화해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교육 문제가 너무 심각하니 급한 불을 끄고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겠다는 것이다. 교육방송 수능 강의에서 그대로 수능 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EBS 방송 및 인터넷 강의는 학교교육 정상화 및 사교육비를 줄이고 교육복지를 확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후 10년간 ‘해열제’ 처방을 멈추기는커녕 투여량을 더욱 늘렸다. 2010년 이명박 정부는 EBS 출제 연계율을 70%로 확대했다. 70% 연계로 사실상 수능은 EBS 문제를 복제 출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시 교육부는 “EBS의 수능 연계 출제가 확대되면서 메가스터디의 영업실적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발표했다. EBS 강사 출신으로 지난해 세계지리 문제 오류 소송을 이끌었던 박대훈 강사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다.

    “메가스터디의 주가 하락은 EBS 때문이 아니라 업계의 다른 회사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EBS 때문에 오히려 학생들의 학업이 엉망이 됐다. 영어공부 할 때 영어 문제를 푸는 대신 EBS 문제집 뒤에 있는 한글 해설을 외운다. 시험문제가 그대로 나오니 첫 문장만 보고 바로 답을 고른다. 정작 순수하게 영어 공부하는 아이들은 손해를 보는 시스템이다.

    현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창의적 체험학습’과 ‘자기주도학습’이다. 하지만 EBS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칠판에 판서하며 수업하는 1980년대 서울 노량진 ‘한샘학원’ 스타일 강의를 고수하고 있다. 교육 목표와도 맞지 않고 시대착오적이다.”

    ‘교수 출제-교사 검토’의 함정

    “작년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문제 검토위원 수를 늘렸고 검토 과정을 한층 강화했다.”

    2015학년도 수능이 치러진 2014년 11월 13일, 양호환 2015학년도 수능출제위원장(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이번 수능에도 두 문제나 복수정답 사례가 발생했다. 김성훈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양호환 교수는 12월 10일 기자에게 “나는 출제위원장으로 위촉받아 파견돼 근무했을 뿐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평가원과 비밀서약을 했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출제 방식에 출제 오류가 예고돼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에도 EBS가 ‘원흉’으로 지목됐다. 출제위원들이 합숙소에 EBS 문제집을 들고 들어가 출제하는데, 출제의 근간이 되는 EBS 문제집 자체의 질을 담보할 수 없고 오류도 많다는 것. 이번에 복수정답이 인정된 영어 25번 문항 역시 EBS 문제집에 똑같은 지문이 있는 ‘연계 문제’다. 다음은 한 고교 영어교사의 말이다.

    “EBS 문제 중에도 이번 오류처럼 퍼센트(%)와 퍼센트포인트(%P)가 혼용되는 문제가 많았지만 오류가 수정된 적은 없다. EBS 교재는 주로 서울대 사범대 출신 현직 교사들이 만든다. 5명 정도 출제진이 단기간에 만들고 검증 절차도 간단하다. 한정된 시간 안에 수천 개의 문제를 만들다보니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다.”

    연이은 출제 오류 이면에는 출제-검토진 간의 ‘신분 차이’가 있다. 수능 출제·검토위원은 34일간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생활한다. 출제는 주로 교수진이 하고 검토는 100% 현직 교사들이 한다. 30년 경력의 고교 수학교사(현 교감)는 이렇게 지적했다.

    “교수들은 고교 교육과정에 둔감하다. 교사 검토진이 ‘교육과정에 없는 내용’이라고 지적해도 교수-교사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의견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수능 문제를 가장 잘 출제할 수 있는 사람은 현직 고3 교사다. 교과서,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가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직 교사가 문제를 출제하고 해당 학문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진 교수가 검토·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교수들은 특권의식이 강해 좀처럼 출제 권한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

    ‘해열제’ 대신 ‘콘셉트’ 처방을!

    12월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고등학교에서 2015 대입 수능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정시 배치 참고표를 들여다보고 있다.



    ‘수시충(蟲)’ 비하에 숨은 울분

    시험 점수 하나로 모든 게 결정되던 학력고사를 치른 학부모 세대에게 현재의 대입 전형은 암호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2015학년도를 기준으로 하면 대입 전형은 크게 ‘정시’와 ‘수시’로 나뉜다. 각각 2개, 4개 세부 전형이 있는데 실기고사를 반영하는 예체능을 제외하면 큰 평가틀은 수능, 내신 및 학생부, 논술 3가지다.

    수시 전형 비중이 점차 확대되는 양상이다. 2015학년도 정시 모집 인원은 전체의 34.8%로 수시 모집 인원(66.2%)의 절반 수준이다. 2016학년도에는 수시 66.7%, 정시 33.3%로 격차가 좀 더 확대될 예정이다. 수시전형 역시 수능 최저등급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능 성적을 반영하긴 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내신·학교생활기록부 등 학생부가 중시되는 추세다. 2014년 3월 고려대 인문계열에 딸을 진학시킨 한 학부모는 “바람직한 변화”라고 말했다.

    “우리 세대는 학력고사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다시피 했고 대학에 간 후에야 ‘꿈’에 대해 고민했다면, 내 딸은 고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끊임없이 가고 싶은 학과,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창의적 인재를 양성한다는 측면에서 현재의 대입정책 방향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내신 위주의 학생부전형 평가가 공정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다음은 서울 노원구의 모 일반고 교사의 말이다.

    “내신 전교 1등 하는 우리 학교 2학년 학생이 최근 모의고사에서 전 과목 3~4등급을 받았다. 수능 점수가 이렇다면 ‘인 서울’도 힘들다. 솔직히 이 학생이 대원외고 내신 전교 1등과 수시전형 내신 항목에서 같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불공정하지 않나.”

    그는 내신 자체의 공정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많은 학교에서 학생 공부 부담을 줄인다며 수능과 같이 EBS 문제집에서 문제를 고스란히 발췌해 출제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수도권 대학 정시 입학생들이 수시 입학생을 ‘수시충(蟲)’이라 비하한다고 하던데, 이는 정시생 처지에서 현행 수시 대입제도가 공정하지 않다는 의미 아닐까.”

    과오 반복은 피해야

    교육에는 정답이 없다. 대입제도는 더욱 그렇다. 전문가들은 “지금 보기에 새롭고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기 전에 ‘수능의 목적’부터 확실히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능을 자격시험화할 것인지, 변별력 있는 시험으로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콘셉트’가 없다는 것. 정권 성향에 따라 난이도는 하늘과 땅을 오갔고, 반발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정책을 도입해 ‘땜빵’처방한 결과가 현재의 ‘수능 대란’을 불렀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지향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을 지낸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는 “수능은 대학 수업을 들을 수 있는지 평가하기 위한 ‘자격시험’이어야 한다. 표준점수 5~10점 차이는 변별력이 없다”는 견해다.

    하지만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는 “대학이 가능성 있는 학생을 선발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3불 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으로 선택권을 막아놓았다. 여기에 수능까지 변별력이 없으면 대학은 어떤 근거로 학생을 뽑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다보니 수능을 5지선다가 아닌 서술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강정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찍어도 20%는 맞추는 5지 선택형으로는 실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창의적인 인재도 못 키운다”며 “사법시험, 행정고시처럼 수능에도 주관식이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수능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도순 명예교수는 “20년 전 내가 만든 수능이 엉망이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수능은 본래 언어와 수리 두 과목뿐이었지만 ‘과목 이기주의’와 정부 정책 때문에 과목 수가 계속 늘었고, 정권마다 새로운 정책이 도입되면서 ‘누더기’가 됐다는 것. 대입제도 대개혁을 앞두고 적어도 그간의 과오를 반복하진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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