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호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김광희 ‘세노야’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故 권태균 | 사진작가

    입력2015-02-24 15:2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968년 봄, 고은과 서정주가 해군 함정을 타고 남쪽바다로 나갔다.
    • 서늘한 새벽바람, 멸치잡이 배에서 “세노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은은 귀를 세운다.
    • 그해 겨울, 종로의 막걸릿집에서 취한 고은이 타령조 한 구절을 읊조린다.
    • “세에노야, 세에에에노야~ 싸안과 바다에에 우리가 싸알고….”
    • 서울대 음대생 김광희가 재빨리 오선지를 채우고, 친구 최양숙이 처음 노래를 뽑았다.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미당(未堂)이 사고를 쳤지, 작은 배 하나 내놓으라고. 그런데 부두에 다가가니 정말 해군 함정 한 척이 턱하니 버티고 있더군. 그 배를 타고 남해안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밤새 술을 마셨지. 취하면 자다가, 술이 깨면 다시 마시고. 시간이 많이 흘렀고, 어느 순간 새벽바람이 서늘하더군.

    그런데 저 멀리서 구슬픈 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세야, 노야, 세노야, 세노야…. 언뜻 들으면 무슨 민요 같기도 하고…. 가까이 가보니 멸치잡이 배에서 흘러나오더군. 뱃사람들이 멸치잡이 그물을 당겨 올리며 구성지게 부르던 후렴구, 세야, 노야…애잔한 선율에 순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고, 오랫동안 그 곡조가 잊히지 않더군.”

    미당, 소동파, 적벽부

    1968년 봄, 시인 고은과 미당 서정주는 진해 육군대학 초청으로 문학 강연에 나선다. 당시 고은은 불면증과 심각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특히 자신의 이름 앞에 ‘聖(성)’ 자를 붙이는 등 스스로를 사회적 파산 상태로 만드는 자폭행위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저술활동은 왕성하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널리 알려진 에세이집 ‘G선상의 노을’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등이 같은 해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주로 신구문화사 편집실에 기거하며 최인훈, 염무웅, 신동문과 어울려 술 마시기에 열중하던 그는 용돈이 궁했고, 따라서 육군대학 초청은 요즘 말로 ‘당근’이었던 셈이다. 당시 육군대학 총장은 문학을 좀 아는 분인지라 고급장교를 대상으로 한 교양강좌에 파격적으로 미당과 고은을 함께 초대했다.



    강연 후 저녁 자리에서 술이 몇 순배 돌자 미당이 총장더러 ‘미당스럽게’ 파격적인 생떼를 부린다. 한려수도를 만끽하고 싶으니 옆 부대 해군에 부탁해 작은 함정을 하나 내달라는 것. 이 대목에서 미당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상상했다고 전한다.

    적벽부. 만고의 명문 아니던가. 인생무상을 느낄 때마다 술과 함께 서로서로를 위로하던 산문시. 동파가 달 밝은 적벽에 지인들과 배를 띄우고 놀다가 인생의 유한함을 절감하는 내용이다.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니 천지에 하루살이가 붙어 있는 것과 같고 망망대해에 한 알의 좁쌀처럼 보잘것없다는 그 시절 동파의 마음과 미당의 마음이 겹치는 대목이다.

    배가 준비됐다.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아직은 모든 게 어수룩하던 시절, 멋쟁이 장군이던 육군대학 총장은 고민 끝에 해군에 부탁해 두 시인을 위한 소형 함정을 준비한 것이다. 기쁨에 들뜬 시인은 술과 안주를 함정에 가득 싣고 바다로 산보를 떠나게 된다. 멀리 보이는 진해 고절산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괴짜 시인을 태운 배는 물 맑은 봄바다를 미끄러져 나갔다.

    그 봄 새벽녘 아득한 물안개를 뚫고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귓바퀴에 손을 모으고 집중한 고은의 귀에 청승맞은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세에에~ 노오야~ 세에에~ 노오오야~” 소리는 남해안 인근 바다에서, 어부들의 입에서, 손끝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물을 당겨 올릴 때 지르는 일종의 장단 맞추기 또는 흥얼거리는 후렴구였다.

    뱃사람들의 후렴구

    함정이 가까이 다가서자 멸치 잡는 풍경이 한껏 펼쳐졌다. 파도는 굴곡진 뱃전에 포말을 만들고, 고기 잡는 어부들의 동작 또한 또렷했다. 미당은 술에 취해 나가 떨어진 지 오래. 혼자 남은 고은이 흥얼거렸다.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임에게 주리~” 이렇게 흥얼거리며 기억된 시구는 뒷날 절창의 노랫말로 쓰이게 된다.

    발표 이래 수십여 년 동안 클래식 반열에 올라 한국인을 위무해온 ‘세노야’의 노랫말은 이렇게 탄생한다. 그러나 노래로 등장하기까지는 반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노래 ‘세노야’의 탄생 장소는 남해가 아니라 서울 동숭동 언저리 선술집이다. 노래는 술김에, 그것도 아주 우연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1968년, 겨울이 깊을 대로 깊은 12월이었다. 아직은 서울대학교가 건재하던 동숭동 입구 종로5가 선술집 한구석에서 주거니받거니 마시기 시작한 술자리가 이미 자정을 넘긴 채 새벽이 가까워왔다. 이른바 낭만시대.

    “어이 땡중! 노래 한 곡 불러보슈,시인입네,허무주의자입네,완전한 예술지상주의자입네 떠벌리지 말고 노래나 한 곡 불러주소.”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봄바다로 출어를 앞둔 어부들의 손놀림이 더없이 바쁘다.

    이미 자제력을 잃은 최경식(당시 이화여고 음악교사, 현재 미국 거주)은 고은에게 노래 한 자락을 강요했다. 옆자리에 앉은 그의 누이동생 최양숙(성악가, 가수,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은 그런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고은은 난처했다. 동갑내기인 최경식과는 호형호제하는 친구 사이라 그렇다손 쳐도 최양숙, 또 최양숙의 성악과 동기생인 미모의 여대생 김광희(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현재 미국 거주)까지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괴고 바라보는데 미칠 지경이었다고 회고한다.

    밤이 깊었다. 선술집은 점차 조용해지고 옆자리 손님들도 떠난 지 오래다. 술에 취해 고은을 괴롭히던 최경식도 이미 곯아떨어진 지 오래. 텅 빈 선술집 안을 둘러보던 고은은 실내를 채운 적막감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노래인지, 소리인지 모를 타령조의 한 구절을 읊어 내리기 시작한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임에게 주오….”

    누에가 실 뽑듯이

    고은이 누에가 실을 뽑듯, 선무당이 도끼 칼날에 올라 설움에 겨운 사설을 늘어놓듯 한 마디, 한 마디씩 노래말을 뽑아냈다. 지켜보던 김광희가 종이에다 오선을 죽죽 그리고는 콩나물 대가리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선술집에선 이제 더 이상 술기운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붉은 백열등을 감싸 안은 밤안개만이 잠시 동안의 적막을 채워줄 뿐. 음표 붙이기를 끝낸 김광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고요함을 뚫고 최양숙이 구겨진 오선지를 잡고 노래를 뽑았다.

    “세에노야, 세에에에노야/ 싸안과 바다에에 우리가 싸알고/ 싸안과 바다에에 우우리가 가아아아네/ 세노야 세노야/ 기이쁜 일이면 저 싸안에 주우고/ 슬픈 일이며으은 이이메에게 주오오….”

    노래 ‘세노야’의 탄생 설화다. 일부에서는 ‘세노야’의 무대가 고은의 고향인 전북 군산 옥구 앞바다라고 하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 필자는 최근 고은 선생과 만나 그 시절 얘기를 또렷하게 들었다. 정리하자면, 노래의 부모는 고은과 김광희이고 모티프를 얻은 장소는 남해 진해와 통영 앞바다, 그리고 노래가 탄생한 장소는 종로5가 막걸릿집이다. 그리고 ‘세노야’는 당연히 성악가 최양숙의 노래다.

    최양숙은 서울대 음대 성악과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1960~70년대를 풍미한 최초의 여성 샹송 가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성악가에서 대중가수로의 변신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38년 함경남도 원산 출신.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월남해 마산 무학여중에 다녔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진학했다. 대학 2학년 때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그녀의 꿈은 오페라 가수였다.

    대중음악과의 인연은 그해 KBS 합창단원으로 몇 달간 동남아 순회공연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오랜 항해의 지루함을 잊기 위해 선상의 즉석 음악경연대회에 출연, ‘쟈니 기타’를 불러 큰 호응을 얻었다. “가수로 전향해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대중가수로 외도를 시도했다. 쓸쓸함이 담긴 독특한 저음의 음색 때문에 그의 노래는 일반 대중보다는 주로 지식인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불후의 3대 명곡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최양숙의 노래 ‘세노야’를, 이 곡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양희은의 노래로 기억한다. 당시 서강대 학생이던 20대 초반의 양희은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대학가의 주목을 받았다. 비교적 심플한 곡조로 기타 연주가 쉬워 통기타, 청바지 세대, 이른바 ‘쎄시봉’ 세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통영은 유치환, 박경리, 김상옥,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등 쟁쟁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예향이다. 왼쪽 사진은 통영우체국앞에 있는 청마 유치환 시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로 유명한 시 ‘행복’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벽화 그림으로 유명해진 통영의 동피랑 마을.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통영 동피랑의 벽화마을.

    대성리에서, 강촌에서 엠티(MT)가 끝나는 이슥한 밤에는 어김없이 ‘세노야’가 불렸다. 구성지면서도 유장한 가락은 한국인의 고유 정서인 한(恨)을 깊숙이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세노야’가 불려질 때쯤이면 격렬했던 토론도, 붉게 타오르던 모닥불도 사위었으며 대개는 술에 취해 훌쩍거리거나 친구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의 계절이 오면 주목받는 시인이 고은이다. 1933년 태어나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1960년 첫 시집을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시, 소설, 평론 등 155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의 작품은 20여 개 외국어, 50여 권으로 번역됐다. 불가와 속가를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껴안았고, 비장하고도 격렬한 그의 시들은 압제에 시달린 한국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의 시에는 저항의 정신이 넘친다. 비록 번번이 수상에 실패해 민망하긴 하지만 동시대 다른 생존 문인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저만큼 우뚝 서 있다. 그가 해마다 수상자 후보로 언급되는 데는 가열한 비판정신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반골 시인 고은이 만들어낸 서정적이고도 애잔한 노랫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고은의 시 중 대중가요로 변신한 것은 딱 3곡이다. 모두가 불후의 명곡이다. ‘세노야’ ‘작은 배’ ‘가을편지’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지고/ 한겨울에 거센 바다 지키는 사람들…”로 시작되는 동요 ‘등대지기’ 역시 외국 민요에 고은이 노랫말을 붙인 것이다.

    대중에게는 김민기와 최양숙이 번갈아 부른 ‘가을편지’가 단연 돋보인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로 시작되는 ‘가을편지’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만인의 ‘엘레지’가 되어 우리 주변에 울려 퍼진다. 노래에 담긴 계절의 짙은 고독감과 통속적이기까지 한 서정성은 세대를 초월하며 이 노래에 불멸의 생명력을 부여했다.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라는 대목에서 가을병을 앓지 않을 한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작곡자인 김민기는 물론이고 양희은, 최백호, 이동원, 조관우를 비롯해 최근에는 보아까지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이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서툴지라도 손편지를 써보고픈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 편지는 받는 이의 가슴에 작은 행복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가수 조동진이 불러 유명해진 ‘작은 배’(1993) 역시 명곡이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라~ 라~ 라~/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대단히 철학적인 노래다.

    모닥불 앞의 청춘들

    그러나 고은의 노래 중 최고는 역시 ‘세노야’다. 반세기 가까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만인의 클래식 포크 아니던가. 그래서 이 노래가 시인과 음대 여학생이 야밤의 술자리에서 어울려 지은 노래라는 역사적 실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다. 어려웠던 시대, 극도로 절제된 슬픔이 절절히 배어 있는 노래이고, 더구나 저항 시인 고은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애상적이고도 숙명적인 슬픔의 노래다.

    그래서 노래는 불러도 슬프고 들어도 슬프다고 한다. 비록 쎄시봉 세대의 노래이지만 386 세대인 지금의 기성세대에게도 청춘의 노래였다. ‘세노야’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강촌 어디엔가 사위어가는 모닥불 앞에서 사랑과 고민을 속삭이던 그 시절 스물 몇 살의 청춘들이 그려진다. 봄이 문턱을 넘어섰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