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타수는 잃어도 동반자는 잃지 말자

주말 골프의 정치학

  • 이종훈│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입력2015-03-19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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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수는 잃어도 동반자는 잃지 말자
    ‘주말 골퍼’ 중 절반은 골프가 좋아서 친다. 나머지 절반은 비즈니스 목적으로 친다. 어느 쪽이 됐든 대개 4명이 18홀 라운딩, 그늘집 휴식, 사우나, 식사까지 대여섯 시간을 함께 보낸다.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스코어카드보다 중요한 것

    나중에 동반자들에게서 “에이, 그 친구 좀 아니더라고…”라는 뒷담화가 나오면 정말 곤란해진다. 골프를 함께 치자고 하는 사람이 점점 없어진다. 비즈니스도 잘될 리 없다. ‘동반자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치는가’는 ‘스코어카드에 몇 타를 적어내는가’ 못지않게 중요하다. ‘골프는 사교적인 운동’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골프는 절교를 유발할 수도 있는 운동’이라는 뜻도 된다.

    ‘여자골프 세계 최강국’ 국민답게

    한국의 아마추어 골퍼들은 스스로에게 반문해봐야 한다. ‘나는 필드에서 스코어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닌가’ ‘나는 공이 안 맞는다고 자주 짜증을 내거나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과연 나와 골프를 함께 치고 싶어 하는가’라고.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여자골프 세계 최강국’ 국민답게, 우리 아마추어 골퍼들은 타수에 상당히 집착하는 편이다. 이로 인해 ‘진상 골퍼’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교에 실패한 골퍼’가 되기도 한다.

    나에겐 엄격, 상대에겐 관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자신의 ‘사회적 자본’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다. 누구나 ‘공도 잘 치고 동반자들과도 잘 사귀는 골프’를 원한다. 그러나 골프는 인생사만큼이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공은 안 맞아도 사람은 얻는 골프’를 지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골프 매너(예절)를 잘 지켜야 한다. 동반자가 드라이버샷이나 퍼팅을 하려 할 때 조용히 해주는 것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나에겐 엄격하게, 상대에겐 관대하게’ 원칙을 따르면 ‘매너 없다’는 평은 듣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좋은 사람’으로 동반자에게 어필하는 사교 골프의 달인, 골프 정치의 달인이 되기 위해선 좋은 매너만으론 부족하다. 이와 관련된 4가지 팁을 소개한다.

    표정이 모든 걸 말한다

    첫째, 늘 밝은 표정을 지어야 한다. 정치인이 굳은 얼굴, 과묵한 태도로 일관하면 볼장 다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거 홍보물 속의 정치인은 하나같이 웃는다. 주말 골퍼도 정치인과 마찬가지다. 18홀 내내 밝은 표정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이 잘 맞으면 누구나 표정이 밝아진다. 안 맞으면 그 반대가 된다. 따라서 안 맞을 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첫 홀은 일파만파”

    첫 홀. 연습장에서 갈고닦은 회심의 드라이버샷을 날렸는데 오비(아웃 오브 바운스·2벌타). 아이언샷은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뒤땅. 간신히 원 퍼팅으로 막았지만 트리플 보기. 그린을 내려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진다. 파를 기록한 동반자는 “첫 홀은 일파만파(한 명이 파를 하면 네 명이 모두 파)!”라 외치고 캐디는 웃으며 스코어카드에 동그라미 4개를 그린다. 그러나 한번 찾아온 ‘멘붕’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많은 주말 골퍼가 경험하는 광경이다.

    납득할 수 없는 샷엔 웃지요

    우리는 이런 ‘평범한 골퍼’가 되어선 안 된다. 첫 홀부터 잘 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코어에 상관없이 첫 홀부터 밝은 얼굴을 보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샷이 나와도 그냥 웃고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 왜? 동반자들을 위해서다. 그러면 동반자들은 그 성의와 배려를 알게 된다. 누구도 그런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

    “매화샷이야”

    물론 무조건 웃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가식으로 비쳐선 곤란하다. 살짝 미간에 힘을 줘도 관계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표정이 밝아야 한다. 화를 내거나 내내 굳어져선 안 된다. LPGA 3인방인 스테이시 루이스는 가끔 골프채를 집어던진다. 이런 행동은 절대 따라 해선 안 된다. 첫 홀 오비에 이어 두 번째 홀에서 멋진 드라이버샷을 날린다면 동반자들에게 “매화샷이야, 매우 화난 샷”이라고 먼저 유머를 구사하는 게 좋다. 동반자들은 활짝 웃을 것이다.

    성격을 어떻게 바꾸냐고?

    골프를 치면 성격이 나온다는 말은 거의 사실이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성격은 결정적일 때 드러난다. 상대방이 내심 놀란다. 누구도 라운딩 동안엔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공감대가 흐르고 다음 라운딩엔 부르지 않는다.

    어떤 주말 골퍼는 ‘성격을 어떻게 바꾸란 말이냐’라고 항변할 것이다. 이런 골퍼는 골프를 그만두는 게 좋다. 공을 치면 칠수록 주변 지인들과의 관계가 점점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성격을 받아줄 가족이나 친구와 쳐야 하는데 그들도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니 골프를 아예 그만두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다.

    딴 돈 다 갖고 가는 사람

    둘째, 돈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 적당한 내기는 사교 골프에서 빠질 수 없다. 운동의 재미를 더해준다. 문제는 액수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1999년 ‘접대 골프의 요령’ 기사에서 “몇 개 홀에서 내기를 걸라”고 조언했다. 그래야 유대감이 생긴다는 이유다. 그렇다면 얼마 정도가 적당할까. 이 신문이 추천한 금액은 홀당 5달러였다.

    어떤 골프 모임에선 돈을 딴 사람이 그 돈으로 캐디피도 내고 밥도 산다. 잃은 사람에게 돌려주기도 한다. 사교 목적에 충실한 미덕이다. 잃은 사람으로선 괜히 고맙고 집으로 가는 길도 즐겁다. 반대로 딴 돈을 고스란히 다 갖고 가면 잃은 사람은 기분이 언짢아질지 모른다. 돈을 딴 뒤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고립을 자초하는 길이다.

    컨시드 안 주자 짧은 퍼팅 놓치고…

    일부 주말 골퍼들의 내기는 심각한 분위기로 흐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교 동기들 같은 가까운 친구들끼리 한 홀당 수만~수십만 원이 오가는 내기를 하기도 한다. 게임이 과열되기 십상이다. 오비가 나도 멀리건(벌타 없이 다시 치게 하는 것)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홀 컵에 가까이 붙여도 웬만해선 컨시드(다음 퍼팅에서 들어간 것으로 인정해주는 것)를 안 준다. 흔들린 상대는 그만 짧은 퍼팅을 놓친 뒤 5만 원권을 토해낸다.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대화도 끊긴다. 지폐만 살벌하게 오간다. 인간관계를 더 돈독히 하려고 내기를 하는 건데, 본말이 전도돼 내기가 목적이 되고 그로 인해 관계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친한 사람들과 골프 칠 땐 돈 몇 푼 때문에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 한다. 또 내기가 주가 된 골프는 이미 스포츠가 아니라 도박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소액으로 재미, 적절하게 배분

    접대 골프에 나선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내기에 져줌으로써 접대받는 사람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김영란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법에 따르면 공직자, 언론인, 학교 관계자는 1회에 100만 원 이상 금품을 받으면 처벌받는다. 1년에 300만 원 이상 금품을 수수해도 마찬가지다. 주말에 내기 골프 접대 자주 받다보면 한도에 걸릴 수 있다. “김영란법 때문에 골프장에 비상이 걸렸다”는 보도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 골프 문화가 과도한 내기 접대 문화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알려준 대로 몇 개 홀에서만 내기를 걸고, 그나마 소액으로 재미로 하고, 끝난 뒤 돈을 적절히 분배하면 골프장에 비상이 걸릴 일이 전혀 없다.

    ‘원 포인트 레슨’은 금물

    셋째, 함부로 가르치려 해선 안 된다. 정치인이 피해야 할 태도 가운데 하나가 가르치려 드는 태도다. 국민도 상대 정당도 이런 태도에는 발끈한다. 골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수는 말할 것도 없고 고수도 동반자에게 레슨을 해줘선 안 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격언으로 되돌아가보자. 이 신문은 “골프를 칠 때 상대방이 바라지 않는 조언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몇몇 주말 골퍼는 동반자가 실수를 반복하면 “드라이버 칠 땐 말이야…” 하면서 동반자의 자세를 교정해주려 한다. 가끔 이러한 ‘원 포인트 레슨’이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동반자에게 더 큰 혼란과 심적 부담을 안길 뿐이다. 프로들도 스윙 폼이 제각각이다. 또 스윙에 문제가 발견돼도 경기 중엔 교정할 엄두를 못 낸다. 아마추어가 아마추어의 스윙 폼에서 문제점과 해결책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 조언으로 라운딩 현장에서 당장 타수가 줄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조언을 받는 쪽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반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동반자가 먼저 물어올 때나 “제 경우에는…”이라며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다.

    “싱글하겠네” “라베 아닌가?”

    이 연장선에서, 동반자가 공을 잘 칠 때 동반자에게 “오늘 싱글하겠네” “라베(라이프 베스트 스코어) 아닌가?” 하며 과도하게 칭찬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골프는 심리 상태가 결과를 크게 좌우하는 운동이라 이런 말 한마디에도 곧잘 스윙이 흐트러진다. 점수가 무너진 뒤엔 너스레 떤 사람을 탓하기 마련이다. ‘저 친구는 골프 칠 때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해’ ‘저 친구 말에 자꾸 신경이 쓰여’라고 생각하면서. 동반자가 18홀 내내 즐거운 기분과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베스트 스코어를 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끔 망가져라

    넷째, 가끔 망가지는 게 낫다. 늘 잘나가는 정치인은 얄밉다는 인상을 준다. “스토리가 없다”는 비판을 듣는다. 반면 정치인이 망가지면 통쾌함을 준다. 동시에 인간미가 있어 보인다. 노련한 정치인은 때때로 ‘자학 개그’를 한다. 미국 대통령들의 자학 개그는 전설처럼 내려온다. 링컨 대통령은 “두 얼굴을 가졌다”는 비난을 받자 “그렇다면 내가 이 (못생긴) 얼굴만 갖고 나왔겠습니까?”라고 응수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의료개혁 홍보 동영상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속 시원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먼저 자해하면 반발을 약화시킨다. 골프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수가 한두 번 무너지는 건 인간관계 측면에서 나쁠 게 없다. ‘공이 잘 맞으면 스코어가 잘 나오고, 공이 안 맞으면 인간관계가 잘 풀린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주말 골퍼 친화적 스코어

    많은 주말 골퍼는 골프를 잘 치고 싶어 한다. 일부 골퍼는 스코어에 목숨을 걸 태세다. 이런 사람일수록 망가지는 걸 절대 용납 못한다. 사실 ‘싱글’이니 ‘보기플레이어’니 ‘100돌이’니 하는 말들은 골프를 대중화하기 위한 상업적 전략에서 나온 것들이다. 주말 골퍼는 이 ‘타수 줄이기 신화’에 목을 매는 것이고.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보면 주말 골퍼의 타수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주말 골퍼는 매 홀 프로골프시합 타석(블루 티)에 비해 홀 컵에 훨씬 가까운 타석(화이트 티)에서 친다. 코스의 길이와 난이도는 정비례한다. 따라서 주말 골퍼의 타수는 프로골프시합의 타수와는 다른 ‘그들만의 리그에서의 타수’인 셈이다. 거기에다 캐디는 스스로 알아서 ‘주말 골퍼 친화적’으로 스코어를 기록해준다. 우리 주변에 싱글기념패 받은 주말 골퍼는 많겠지만, 블루 티에서 PGA 경기 룰로 싱글을 친 주말 골퍼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얼마나 잘 쳐야 하나

    타수는 잃어도 동반자는 잃지 말자
    이종훈

    성균관대 박사(정치학)

    국회도서관 연구관

    CBS 라디오 ‘이종훈의 뉴스쇼’ 진행자

    現 아이지엠컨설팅(주) 대표, 시사평론가

    저서 : ‘정치가 즐거워지면 코끼리도 춤을 춘다’ ‘사내정치의 기술’


    우리는 주말 골퍼의 스코어에 이러한 특수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스코어에 너무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 다만, 초보자가 아닌 한 내기 골프를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못 치는 것만 피하면 된다. 보기와 더블보기를 주로 오가고 가끔 트리플보기 이상도 하는 정도면 내기 골프에 전혀 무리가 없다. 골프를 통해 스트레스보단 즐거움을 느끼고, 좋은 스코어보단 좋은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게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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