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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성향이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싶거든”

‘민족대표 34인’ 스코필드 박사 이야기

  • 최진영 | 중앙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범죄 성향이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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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1889~1970)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4월 12일은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스코필드 박사의 45주기였다. 그리고 내년이면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꼭 100년이 된다. 1916년 처음 한국을 찾은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 · 1운동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미움을 사 1920년 본국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후 세계 각국에 일제의 잔학행위를 알리는 데 힘썼고, 195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초빙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여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최진영 중앙대 명예교수가 4월 10일 열린 스코필드 박사 서거 45주기 추모기념식에서 그를 기리는 글을 발표했다. 최 교수는 1958년부터 3년간 스코필드 박사의 통역과 비서 업무를 맡았고, 그가 서거할 때까지 서신을 주고받았다. 최 교수는 “그의 수많은 업적은 여러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정 많고 위트 넘치는 인간적 면모는 덜 알려진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1958년,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과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동숭동 캠퍼스 길 건너 의과대학 구내에는 외국인 교수회관이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미국인 교수들의 통역이나 서류 정리 등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문과의 권중휘 교수께서 부르시더니 “한국에 국빈으로 오신 유명한 노교수께서 교수회관에 들어오시니 여러모로 도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네” 하고 교수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처음 스코필드 박사를 뵈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머리는 백발에 한쪽 다리를 못 써 지팡이를 짚은 채 미소를 지으며 활달하게 인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교수회관은 아래층에 거실, 식당, 부엌과 조그마한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사무실은 미국에서 오신 다른 교수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침실은 모두 2층에 있었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2층을 오르내리실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박사는 2층에 자리한 방을 침실 겸 사무실로 정하셨습니다.

손수 내의 빨아 입어

저는 그때부터 스코필드 박사의 통역 및 비서 업무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학교에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교수회관에서 박사와 미국 교수들을 도왔습니다. 박사께 통역이 필요했던 이유는, 1920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한 이후 근 40년이 지났기 때문에 오래전에 배운 한국어를 거의 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교수회관은 미국 교수들께 영어회화를 배우려는 학생들, 스코필드 박사께 성경 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들, 그 밖에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늘 붐볐고, 그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제 몫이었습니다. 박사가 오시기 전, 그리고 머무는 동안을 전후해 교수회관에 체류한 미국 교수들로는 하웰 교수(Dr. A C Howell) 부부, 할로 교수(Dr. Virginia Harlow), 필립스 교수(Dr. Elizabeth Phillips), 그리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이던 헨더슨(Gregory Henderson) 부부가 있었습니다.

박사와 제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저는 영어로 듣고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의 말씀을 통역하고 대화하면서,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박사께서 정성을 쏟으신 고아원이나 중·고등학교에 갈 때면 늘 함께 가서 통역을 했습니다. 2층에 머물던 영국 교수가 떠나자 박사는 제게 그 방에 가끔 와 있으면서 일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셨고, 덕분에 박사의 일상생활을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사는 “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짜고 매운 한국 음식은 먹기 어렵더라”며 주로 양식을 드셨는데, 수프 같은 가벼운 음식이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셨습니다. 교수회관에는 개성에서 온 부부가 음식과 청소 등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한국 경제가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교환교수로 온 미국 교수들에게는 미8군 PX에서 장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식당 아주머니가 한국의 시장에서 장을 봐서 만드는 음식을 드셨습니다.

“범죄 성향이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싶거든”

최진영 교수(오른쪽), 그리고 그의 두 딸과 담소 중인 스코필드 박사. 1967년 스코필드 박사가 최 교수의 미국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남편이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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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 중앙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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