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찬란한 건축 유산 앙상블 다시 볼 수 있을까

네팔 카트만두 계곡

  • 글·사진 조인숙 |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대표 choinsouk@naver.com

    입력2015-05-20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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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팔 카트만두 일대에선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건축 유산을 만날 수 있다. 왕궁과 사원, 광장, 불탑 등이 한데 모여 있는 이 도시를 걷다보면 형언할 수 없는 매력에 젖어들게 된다. 네팔 대지진으로 유적이 파괴됐다는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에 펄럭이던 윈드호스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주 많은 곳을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내게 다시 가고 싶은 도시를 꼽으라면 네팔 카트만두(Kathmandu)가 두말할 것 없이 1순위다. 꼭 1년 반 전 아시아건축사협의회 회의 및 포럼 참석차 카트만두를 처음 찾았다가 엄청난 교통체증에 놀랐지만, 뚜렷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 도시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다음 달 ‘살아 있는 도시유산 보호(Revisiting Kathmandu-safeguarding Living Urban Heritage’ 관련 심포지엄이 카트만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다시 달려갔다.

    1년 반 전에 둘러본 네팔의 찬란한 유산이 지진으로 상당 부분 파괴됐다는 게 차마 믿기지 않는다.

    재해 위험 토론하던 곳, 지진으로 파괴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된 카트만두 계곡(The Kathmandu Valley)은 단일 유적이 아닌 앙상블(ensenbles) 유적으로 총 7개 구역(seven monumental zone)으로 구성된다.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 파탄 더르바르 광장, 박타푸르 더르바르 광장, 스와얌부나트 불교 사원, 부다나트 불교 사원, 파슈파티나트 힌두교 유적, 창구 나라얀 힌두교 유적이다. 이 중 오래된 유적은 기원 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건축 유산은 이번 지진 이전에도 1833년과 1934년 지진으로 일부 파괴된 바 있다. 등재 세계유산의 점유 면적은 167ha로 서울 창덕궁의 약 2배 넓이다(완충 지역 면적은 70ha).

    세계유산 등재 당시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판단하는 평가 세부 기준 중 iii, iv, vi을 충족시킨 것으로 인정됐다. 그 내용은 이렇다(이 중 한 가지만 충족돼도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ⅲ. 7개 구역의 기념물 앙상블은 카트만두 계곡의 전통적인 문명을 잘 드러낸다. 벽돌, 석재, 목재 및 청동을 다루는 장인의 솜씨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며, 멀리 떨어진 히말라야 계곡에서 2000년 넘게 살아온 네와르(Newars)족의 문화적 전통이 이 독특한 도시에서 분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또한 힌두교와 불교의 공존과 융합이 매우 독특하다.

    ⅳ. 카트만두 계곡은 뛰어난 건축물들과 앙상블, 그리고 도시 조직으로 구성돼 1500~1800년 정점에 이른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보여준다. 정교하게 건축된 왕궁, 사원, 불탑들로 구성된 유산은 세계에서 카트만두 계곡이 유일하다.

    ⅵ. 정령 숭배 의식이나 탄트리즘(Tantrism), 힌두교와 불교의 독특한 공존과 융합이 돋보인다. 그 상징적, 예술적 가치가 전설, 의식, 축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건물 장식이나 도시 구조, 때로는 주변 자연환경에도 잘 나타난다.

    카트만두 계곡은 2006년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경계 변경’을 허가받는데, 이때 세계유산이 도시 개발로 훼손될 우려가 있음이 거론됐다. 그러나 위원회에 자연재해에 대한 평가 기준이 없어 지진에 취약하다는 점은 논의되지 않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데 또 하나의 필수 요건은, 등재 이후 어떻게 관리하고 보호할 것인지에 관한 계획이다. 네팔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가장 높은 수위로 보호하겠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해 위험 관리”라고 밝혔다. 등재 결정 당시부터 재해 위험 관리에 대해 고민했지만, 자연재해는 인간의 대처 이상으로 위력이 세다보니 이번 지진 참사로 무참하게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이제 본격적으로 카트만두 계곡 탐방을 시작한다. 탐방에 앞서 자주 등장하는 주요 개념 두 가지를 살펴보자.



    △ 더르바르 광장(Durbar Square) : 네팔 중세 왕국의 궁전 및 전면 광장과 그 일대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 왕궁, 사원, 조각상, 정원, 분수 등으로 이뤄진다. 카트만두 계곡에 포함된 3곳의 더르바르 광장은 이번 지진으로 거의 다 파괴됐다.

    △ 네와 건축(Newa Architecture) : 네와르족이 발달시킨 고유한 건축양식. 사리탑과 카이티야(chaitya·기도처)가 있는 불교 수도원에서 정원, 주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는 건축양식으로 괄목할 만한 벽돌 작업과 네팔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나무 조각이 특징이다. 네와르 장인들에 의해 해외, 특히 중국에 전파되기도 했다.

    파탄에서 묵을 집으로는 황금사원(Golden Temple)이 보인다는 중세 목조주택 게스트하우스 맨 위층을 예약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오래된 골목 안에 있는 집이었다. 아침식사를 즐기던 발코니에서는 황금사원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외지인에게 숙소로 빌려주는, 훨씬 저렴하고 역사가 더 깊은 네와르 주택도 많았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선진국보다 와이파이 인심은 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목조주택들을 복구하느라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카트만두 3대 역사 도심 중 하나인 파탄 더르바르 광장은 현 행정구역 랄릿푸르(Lalitpur· ‘美의 도시’라는 뜻)의 중심이며 수도 카트만두에서 약 5km 떨어져 있다. 한때는 칸티푸르(카트만두), 랄릿푸르(파탄), 박타푸르 세 왕국이 독립적인 세력을 이뤘으나, 네팔을 통일한 샤 왕조(Shah Dynasty·1768~2006)가 중앙집권적 통치를 하면서 독립 왕국 파탄은 사라졌다.

    찬란한 건축 유산 앙상블 다시 볼 수 있을까

    파탄 크리쉬나 만디르.



    파탄 더르바르 광장, 파탄 박물관

    Patan Durbar Square&Patan Museum

    이번 지진 피해 이전에 남아 있던 구조는 랄릿푸르 왕국의 싯디 나라심하 말라(1620~1661)와 그의 아들 스리니바사 말라(1661~1685) 때 조성됐다. 파탄은 가장 오래된 불교도시인 동시에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그 결과 55개의 주요 사원과 136개의 중정이 대부분 더르바르 광장 주변에 산재한다. 가히 네와르 건축의 보고(寶庫)라 하겠다.

    옛 왕궁은 파탄 더르바르 광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원래는 7개의 초크(Chowk·안마당 또는 중정)가 있었는데, 1934년 지진으로 3개만 남았다. 왕궁 양쪽에는 힌두사원이 밀집해 있고, 북쪽에는 파탄 박물관이 있다. 원래는 불교사원이 있던 자리에 왕궁으로 지었으나 1934년 지진으로 폐허가 됐다. 이후 복구를 거쳐 네팔-오스트리아 협력으로 최초의 공공 박물관으로 개관했다고 한다.

    주 출입문인 황금문 안으로 들어가면 중정 가운데에 케샤브 나라얀을 모시는 아주 작은 힌두 사원이 있다. 거기서 안으로 더 들어가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나오는데, 심포지엄 개회 행사를 여기서 하며 전통 네팔식 저녁식사를 했다.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유산 답사를 아쉽지 않을 만큼 했다고 자부하는데, 광장에 이렇게 오래되고 정교한 목조 및 붉은 벽돌조 유산이 밀집한 것을 보고 좀 놀랐다. 아마도 이런 면이 네팔에 자꾸 오고 싶도록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숙소 발코니에서 매일 보던 황금사원도 알고 보니 기원전 1~2세기에 세워진 불교사원으로 중요 유적 중 하나였다.

    파슈파티나트 힌두사원

    Pashupatinath Temple

    파탄에서 출발한 버스가 우리 일행을 내려준 곳은 카트만두 유일의 골프장 근처였다. 인적이 드문 산길 초입에서 벽돌집 공사 현장이 보였다. 마치 과거 한옥을 모방해 오늘날에 세우듯, 네와 건축을 모방해 전통 네와르 목조 창호를 다는 중이었다.

    거리가 멀어 지름길을 택하다보니 산을 넘어야 했다. 산속 유적과 무수한 기도탑(Votive Stupa), 원숭이 떼를 뒤로하고 파슈파티나트 힌두 성지를 향했다. 사원에 도착할 무렵,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강변 화장장에서 유골 태우는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저물녘 노을과 어우러졌다. 이번 지진으로 수천 명이 사망한 탓에 아마도 이 화장장이 요즘 무척 붐비지 않을까, 우울한 생각이 든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은 카트만두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는 힌두교 성지로 파슈파티를 봉헌한다. 파슈파티 또는 쉬리 파슈파티(Shree Pashupati)는 힌두교 시바신의 화신으로 ‘동물의 제신’이다. 파슈파티는 힌두 세계에서는 추앙받는데, 특히 네팔에서는 비공식적으로 국가신(神)으로 간주된다.

    이곳은 네팔에서 가장 신성한 힌두 사원군(群)이자 대륙 최대 시바 성지 중 한 곳으로 사원, 아쉬람(Ashrams·일종의 암자), 신상(神像), 명문(銘文)이 집결해 있다. 신성한 바그마티 강 유역을 따라 수세기에 걸쳐 조성됐고 전체 면적은 264ha에 달한다.

    중심 사원은 네팔식 탑(Nepalese Pagoda) 건축이다. 사면체 구조에 전통적 조각을 한 목조 서까래를 얹었고, 중층으로 된 지붕은 금도금 동판으로 덮여 있다. 건물은 방형 기단 위에 세웠는데, 하부에서 상부 황금 첨탑(Gajur, a gold pinnacle)까지의 높이가 23m가 넘는다고 한다. 주 출입구는 4곳인데 모두 은판으로 덮여 있다. 내부는 안팎의 두 가르바 그리아(Garbha Griha)라고 하는 성소(聖所)로 향하는데, 바깥쪽 개방된 복도를 지나면 가장 깊은 곳인 안쪽 가르바 그리아에 도달할 수 있다. 이곳에 성상(聖像)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성소에는 푸자르(Pujar·성직자)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가르바 그리아는 지성소(Holy of Holies) 또는 모태실(womb-chamber)이라는 의미다.

    이런 구조는 꼭 힌두교에서만 사용된 공간 개념은 아니다. 이 지역의 불교 사원도 같은 개념의 공간으로 조성됐다. 안쪽 중심 공간에 석불이 안치된 경주 석굴암과 유사한 구조로 이해하면 된다. 5세기 때 지어진 원래 건물은 흰개미 피해로 훼손돼 부파틴드라 말라(1696~1722) 왕 때 현재의 형태로 완전히 새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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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개가 넘는 사원과 기념물로 구성된 파슈파티나트 힌두 사원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박타푸르 더르바르 광장

    Bhaktapur Durbar Square

    영화 ‘리틀 붓다’에는 스와얌부나트나 부다나트 등 네팔의 다른 건축 유산도 나오지만 무엇보다도 사원이나 탑, 도자기 굽는 마을 등 박타푸르의 다채로운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타푸르는 카트만두나 파탄에 비해 발전이 더딘 대신, 18세기 초반에 지어진 목조건물들이 화재 한 번 없이 그대로 보존되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1934년 지진에도 끄떡없었던 이 건물들이 이번 지진 참사에 내려앉았다.

    박타푸르는 고대 네와르 왕국의 도시로 15세기 후반에서 1769년까지 말라 왕조의 수도였다. 마치 소라껍데기처럼 생겼으면서 ‘신앙 또는 헌신의 장소(Place of devotees)’라는 의미가 담긴 사원이나 목재·금속·석재 공예 등으로 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졌다. 1974년 복원된 이래 독일의 지원을 받아 수리, 보존 및 유지 관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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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타푸르의 시디 락스미 사원.

    박타푸르 더르바르 광장 북동쪽에는 옛 왕궁이 있다. 이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조형물이라고 하는 궁전 입구의 황금문(Lu Dhowka/Sun Dhoka, the Golden Gate)으로 들어가면 내부의 중정 탈레주 초크(Taleju Chowk), 바이랍 초크(Bhairab Chowk)와 연결된다. 이곳은 힌두 신자만 들어갈 수 있지만, 탈레주 초크 앞의 나가 포카리까지는 외국인도 들어갈 수가 있다. 나가 포카리(Naga Pokhari)는 17세기 왕실용 물 저장소(水槽)로 신화에 나오는 코브라 뱀인 나가(Naga)가 전체를 에워싸고 기둥 위에 뱀 머리가 있는 독특한 벽돌 조형이다.

    박타푸르의 파슈파티나트 사원(Pashupatinath Temple)은 왕궁 건립과 동시대인 15세기 말라 왕조의 약샤 말라(1428~1482) 때 건립된 것으로 앞에서 기술한파슈파티나트 힌두 사원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사원의 버팀목에는 에로틱한 형상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힌두교 현자이자 산스크리트 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발미키(Valmiki)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니야타폴라 사원(Nyatapola Temple)은 1702년 건축된, 네팔에서 가장 높고 견고한 건축물 중 하나로 높이가 30m나 된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멀리 히말라야 전경이 내다보인다.

    닷타트레야 사원(Dattatreya Temple)은 박타푸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로 1427년 약사 말라 왕 때 건립돼 수백 년 동안 지진 및 기타 재해에도 견뎌 왔다고 한다. 원래는 1층이었으나 16세기에 증축돼 현재는 3층 건물이다. 답사 당일 이 사원 앞 광장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어 광장의 용도를 함께 볼 수 있었다.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 쿠마리 사원

    Kathmandu Durbar Square&Kumari Temple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은 옛 칸티푸르(Kantipur· 카트만두) 왕국의 궁전 앞 광장으로 수많은 독특한 건물과 중정으로 구성됐다. 특히 수세기에 걸쳐 조성된 뛰어난 네와 건축 및 공예 장식의 정교함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광장에는 말라 왕조(1201~1769) 및 샤 왕조(1768~2008)의 궁전이 남아 있다. 이곳 중정의 구성이 한국 궁궐 건축과 유사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곳을 하누만 도카(Hanuman Dhoka) 더르바르 광장이라고도 하는데, 궁전 주 출입구에 있는 하누만 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누만’은 힌두 원숭이 수호신, ‘도카’는 네팔어로 문(門)이라는 의미다.

    동쪽에는 10개의 초우크가 남아 있는데, 일부는 건립 연대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넓은 중정은 나살 초크(Nasal Chowk· ‘춤추는 이들의 마당’이라는 뜻)로, 국왕의 즉위식 등 공식 행사를 하던 곳이다. 이 역시 우리 궁궐 앞마당에서 즉위식을 하던 것과 유사하다.

    프라탑 말라(1641~1674) 왕 통치 시절 건축 및 문화예술이 번성했으나 그의 사후 주춤해졌다고 한다. 프라탑 왕은 15개 언어를 해독했다는 전설이 있고, 이를 증명하는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의 상징물로는 본인이 직접 세운 프라탑 데와자(Pratap Dhvaja)라는 사각 돌기둥이 있다. 기둥 상부에 자신과 두 부인, 그리고 세 아들의 조각상이 있다.

    마지막 말라 왕인 자야 프라카쉬 말라(1736~1746) 때 쿠마리 바할(Kumari Bahal)이라는 사원이 건립된다. 지금도 쿠마리 사원에는 당시의 테라코타 타일이 그대로 있다. 쿠마리는 살아 있는 여신으로 추앙받는 소녀다(쿠마리는 네팔어로 ‘처녀’라는 뜻). 좋은 가문 출신의 소녀가 엄중한 심사를 거쳐 쿠마리로 선발되며, 초경이 시작되면 자리에서 물러난다. 쿠마리는 스스로 걷거나 말하면 안 되지만, 요즘은 추후 사회 적응을 위해 가정교사가 와서 글을 가르치고 수업 때는 교사와 대화를 해도 된다고 한다.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은 1833년 및 1934년 지진으로 엄청난 수난을 겪었고, 도로 확장으로 일부가 헐려 17세기 도시의 매력이 많이 줄었지만, 5에이커 정도의 면적에 네와 건축물이 즐비했었다. 이번 지진으로 거의 폐허가 된 이곳을 어떻게 복구해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다.

    스와얌부나트 불교 사원

    Swayambhunath Temple

    찬란한 건축 유산 앙상블 다시 볼 수 있을까

    스와얌부나트 사리탑. 불자들은 이 사리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 날엔 스와얌부나트 사원 근처에서 토론회와 현장답사가 있었다. 토론장에서 가까워서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서쪽에서 사원으로 들어갔다. 참배객 대부분은 아침 일찍 동쪽에서 365개의 가파른 돌계단으로 올라가 바지라(Guilded Vajira·불멸과 불가항력을 상징하는 천신의 무기)와 입구를 수호하는 두 마리 사자상을 지나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탑을 돈다고 한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약 2000년 전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고 하는,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이다. 흔히들 ‘몽키 템플’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야생 원숭이가 정말 많다. 스와얌부 푸라나(Swayambhu Purana)라는 불교 경전에 따르면 카트만두 분지는 원래 하나의 커다란 산정호수였다. 거기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 이 분지가 ‘스스로 존재함(Self-Created)’이라는 뜻의 스와얌부로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스와얌부나트 사리탑(Stupa) 건축은 기단 위에 흰색 돔을 얹고 그 위에 금으로 도금한 사면체 구조물을 올려놓았다. 각 면에는 부처님의 눈과 코가 그려져 있고, 사리탑 안에는 많은 유물이 있다. 이 사리탑은 상당한 상징성을 갖는다. 기단의 돔은 우주를 표현하고, 도금된 사면체에 그려진 부처님의 양미간에 있는 ‘제 3의 눈’은 인간 마음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음을 표시한다. 또한 물음표처럼 보이는 것은 1이란 숫자를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이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은 결국 하나로,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3층의 탑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13단계를 묘사한 것이다. 불자들은 이 사리탑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불경을 1000번 읽은 것만큼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주변은 참배객들로 늘 북적거린다.

    이곳에서 또 하나 괄목할 만한 건축은 프라탑 말라 왕 때인 1646년 건립된 백색 쉬카르(Shikhar) 사원인 아난타푸르(Anantapur, 南東)와 프라타푸르(Pratapur·北東)다. 계단을 올라 바로 마주하는 거대한 바지라(Vajira)도 프라탑 말라 왕 때 조성한 것이고, 계단 하부에 불교의 삼보인 불법승(佛法僧)을 나타내는 그림도 당시 작품이라고 한다.

    다녀온 지 1년 반이 지난 장소들을 하나하나 기억해내기가 쉽지 않지만, 막상 글을 쓰다보니 새록새록 현장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열악한 환경임은 틀림없지만 정말 마력이 있는 도시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나타나는 유적과, 바람에 펄럭이는 윈드호스(Windhorse·경전을 목판으로 찍어놓은 네모난 천 조각)를 뒤로하고 스와얌부나트 사원 계단을 내려와 택시에 오르면서 곧 다시 방문하리라 마음먹었다. 미처 실천에 옮기기 전에 지진 참사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찬란한 건축 유산 앙상블 다시 볼 수 있을까

    고대 네와르 왕국의 도시 박타푸르의 더르바르 광장 전경.



    찬란한 건축 유산 앙상블 다시 볼 수 있을까
    찬란한 건축 유산 앙상블 다시 볼 수 있을까
    1 스와얌부나트 내 쉬카르 사원에 나부끼는 윈드호스.

    2 파슈파티나트 화장장에서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3 파탄 망가히티 앞 마니만답.

    4 나살 초크는 카트만두에서 가장 큰 중정으로, 국왕 즉위식 등 공식 행사를 하던 곳이다.

    찬란한 건축 유산 앙상블 다시 볼 수 있을까
    1 박타푸르 옛 왕궁은 목조로 된 창문 발코니 때문에 ‘55개 창문 궁전(the Palace of 55 Windows)’이라고도 한다.

    2 파탄의 황금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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