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출산보다 커리어 낳아도 ‘전업엄마 그 이상’

한국 - 대만 닮은꼴 ‘알파걸 딜레마’

  • 타이베이=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5-05-22 0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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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 세계 5위 양성평등국
    • 합계출산율 0.895명…“저출산은 국가 안보 위협”
    • ‘최장 2년’ 육아휴직, 한국보다 널리 확산
    • “유리천장 여전”…알파걸 설득 ‘난제’
    출산보다 커리어 낳아도 ‘전업엄마 그 이상’
    3월 대만 외교부는 ‘대만 여성의 발전(Women’s Advancement in Taiwan)’이라는 주제의 방문취재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외국 여기자들을 초청했다. 한국, 미국, 독일 등 11개국 13명의 여기자는 6일 동안 입법원, 행정원, 시민단체 등을 돌며 대만의 주요 여성 리더들을 만났다.

    중소기업 오너 37%가 여성

    “마흔네 살에 자본도, 네트워크도 없이 창업했습니다. 7년이 지난 현재 28개국에 화장품을 수출하고 있어요. 중국 알리바바가 선정한 대만 온라인업체 톱10 중 2위에 올랐고요.”(미셸 성 텐아트바이오테크 대표)

    3월 9일 대만 타이베이 경제부 중소기업처에서는 여성 중소기업가 관련 콘퍼런스가 열렸다. 중소기업을 이끄는 예닐곱 명의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차례로 연단에 섰다. 금녀(禁女)의 영역은 없었다. 제조업, 소비재, IT, 농업 등 이들이 진출한 사업 분야는 다양했다. 예윈룽(葉雲龍) 중소기업처장은 “130만여 개 대만 중소기업 중 오너가 여성인 회사가 37%에 달한다”며 “이 비율은 점점 높아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날 콘퍼런스에 나선 린샤오메이는 요즘 대만에서 주목받는 차세대 여성 사업가다. 그는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치자마자 남편과 함께 ‘루이더간즈(瑞德感知·Thunder Sensing)’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고 CEO를 맡았다. 이 부부는 화재로 사망하는 인구가 매년 30만 명이 넘는다는 점에 착안해 스마트 화재 대피 시스템을 개발했다. 비상시 LED 표지판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출구 방향을 알려주는 시스템이다.



    린 사장은 “이 아이템으로 2011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1회 마이크로소프트 이매진컵에서 월드챔피언을 받았다”며 “지난해 대형빌딩에서 실험한 결과 우리 시스템을 도입하면 탈출 속도가 3배 빨라지는 것으로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제 곧 서른 살이 되는 린 사장의 최대 관심사는 사업을 키우는 것. 그는 “자녀 출산은 몇 년 후에 생각해 볼 일”이라고 했다.

    대만은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양성평등이 가장 잘 이루어진 나라다. 2013년 유엔개발계획 발표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에서 세계 5위로, 한국(17위) 싱가포르(15위)를 훨씬 앞질렀다(홍콩은 순위에 없음).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치는 여성 리더도 여럿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만 최대 스마트폰 제조사 HTC의 왕쉐훙(王雪紅) 회장과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주석을 꼽을 수 있다.

    1등 부자도, 1등 대선주자도

    2011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HTC 공동설립자인 왕 회장의 순자산은 68억 달러로 대만 최고 부자다. 그는 최근 HTC의 CEO로 다시 경영 무대에 컴백했다. 차이 주석은 2012년 대선 때 마잉주(馬英九) 현 총통의 턱밑까지 추격했던 제1야당 민진당의 대선 후보. 내년 1월 차기 대선에서 한 번 더 민진당 후보로 나설 예정이다. 그는 영국 런던정경대 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타이완정치대학 최연소 교수로 부임한 경력을 가졌다.

    스야핑(史亞平) 대만 외교부 차관은 “수많은 대만 여성이 정치, 경제, 과학기술, 예술 등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대만에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지위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고 강조했다. 대만 행정원에 따르면 여성 종사자 비율이 방송 분야 35.5%, 예술 분야 48.3%에 달한다. 의사결정 권한이 따르는 고위직에 오른 여성 비율도 빠르게 상승하는 추세다. 법조계에선 2007년 17.5%이던 여성 고위직 비율이 2012년 21.1%로, 스포츠계에선 같은 기간 13.1%에서 19.4%로 올랐다.

    여성 파워의 대두는 대만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2008년 12%이던 여성 고위직 비율이 2012년에는 30%로 크게 상승했다. 스 차관도 대만 정부 내 대표적인 여성 리더다. 그는 주(駐)싱가포르 대만대표를 지내고 2012년 6월 차관에 임명됐는데, 외교부 장·차관 4명 중 유일한 여성이다.

    대만 내 여권 신장이 여타 아시아 국가들보다 앞선 배경을 살피려면 선거제도를 들여다봐야 한다. 대만은 초기 헌법부터 전체 입법원(국회) 의석 중 10%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명시했고, 2004년에는 전국구 의원 절반을 여성으로 공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대만의 선거제도 개혁과 여성 국회의원의 의회 진출 향상’, 하영애, 한국동북아논총 제67호). 이런 제도적 뒷받침을 배경으로 많은 여성 정치인이 배출됐고, 이들은 대만 사회의 양성평등 확대에 기여했다.

    2012년 총선에서 당선된 입법원 의원 중 여성 비율은 33%에 달한다. 이는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국가보다 높은 수준이다.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역시 2012년 치러진 19대 총선 기준으로 15.7%에 불과하다.

    ‘싱글’ 아니면 ‘노 키드’

    출산보다 커리어 낳아도 ‘전업엄마 그 이상’
    “여러분 중에 싱글 있어요?”

    훙슈주(洪秀柱) 대만 입법원 부의장 겸 대변인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 몇몇 여기자가 손을 들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와우, 여러분은 성공하는 데 남자가 필요 없었네요!”

    현재 입법원 여성의원 중 선두를 달리는 훙 부의장은 집권당인 국민당 소속의 8선 국회의원이자 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싱글 여성. 과거에는 여성이 집안의 후광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예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훙 부의장이나 차이 주석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훙 부의장은 “대만은 여성 총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가”란 질문에 차이 주석을 내세운 민진당을 의식한 듯 “집권당엔 매우 직설적인 질문”이라며 웃었다. 최근 보도된 외신에 따르면 그는 국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만약 훙 부의장이 국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다면, 조만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여성 대(對) 여성’의 대선 레이스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왜 결혼을 안 하고, 또 왜 아이는 낳지 않는 건지….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돼요.”

    왕커징(王克敬) 씨는 은퇴한 여기자로 세계여기자여작가협회(AMMPE) 비서장을 맡아 요즘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형제자매는 7명. 다들 결혼해 자녀를 2명씩 낳았다. 그런데 모두 성인이 된 14명의 ‘2세’ 중 결혼한 이는 4명에 불과하다. 왕 씨는 “결혼한 넷 중 아이를 낳은 조카는 둘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3월 7일 토요일 오후, 타이베이의 대형 쇼핑몰 Q스퀘어에 자리한 한 카페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여기서 만난 제니퍼 리(32) 씨는 금융회사 근무 5년차의 골드미스다. 그는 “직업이나 가치관 등이 나와 맞는 ‘미스터 라이트(Mr. Right)’를 만난다면 결혼하고 싶겠지만, 자녀는 양육비도 많이 들고 커리어를 쌓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며 “주말에는 친구들과 만나고 여유롭게 쇼핑하는 싱글 라이프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외교부에서 근무하는 한나 쳉(34) 씨 또한 “여성에게 결혼이란 여전히 한 남자가 아니라 한 집안과의 결합이라서 부담스럽다”고 했다.

    양성평등의 그늘일까. 대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저출산으로 시름이 깊다. 1951년 7.04명이던 대만의 합계출산율이 2010년 0.895명으로 뚝 떨어졌다. 이런 속도로 출산율 감소가 지속된다면 2022년 인구 증가율이 ‘제로’가 된다는 예상이 나왔다. 마 총통이 “저출산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천명한 배경에는 이런 위기감이 깔려 있다.

    합계출산율 1명 간당간당

    출산보다 커리어 낳아도 ‘전업엄마 그 이상’
    한국과 대만의 저출산 양상은 흡사하다(표 참조). 결혼연령은 갈수록 높아지고 첫아이를 출산하는 나이도 점점 높아진다. 1981년 한국 23세, 대만 24세이던 여성 평균 초혼연령이 2012년 한국 29.6세, 대만 29.5세로 높아졌다. 첫아이를 낳을 때 여성의 평균연령은 한국 30.5세, 대만 31.1세다(2012년).

    늦게라도 결혼하고 출산하면 그나마 다행. 30~34세 여성의 미혼율이 크게 높아졌는데, 이런 현상은 한국보다 대만이 더 심각하다. 1982년에는 대만의 30~34세 여성 중 11.3%만 미혼이었는데, 2012년엔 46.8%가 미혼이다. 반면 한국은 1990년 5.3%에서 2010년 29.1%로 높아졌다. 한국은 30대 초반 여성 10명 중 3명이 미혼인데 반해 대만은 5명 가까이가 미혼인 셈이다.

    현재의 인구 규모를 유지하려면 여성 1명당 2.1명의 아이를 출산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과 대만 두 나라 모두 합계출산율이 여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데, 그 정도가 대만이 한국보다 좀더 심각하다. 대만은 2003년까지는 합계출산율이 한국보다 높았으나 이후 가파르게 떨어져 2014년 현재 간신히 1명을 넘어서고 있다.

    ‘임산부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도록 양보해주세요. 스위치 누르는 것을 도와주고, 물건 드는 것도 거들어주세요.’

    대만 정부청사 엘리베이터에는 이런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다. 비영리기구 대만여성센터(Taiwan Women‘s Center) 리리쉬안(李立璿) 연구원은 “대만 정부는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해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장려하는 한편, 모성(母性) 친화적인 일터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한 예로 대만 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 회사를 상대로 수유실을 갖출 것을 권장한다. 이런 정부 정책에 부응해 HTC는 2년 전 타이베이에 본사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2개 층마다 수유실을 마련했다. 모유 수유 중인 여성 직원은 이곳에서 모유를 유축한 뒤 냉장고에 보관하고 퇴근할 때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한국과 대만의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제도를 비교하면 우선 출산휴가는 대만이 8주로 한국(90일)보다 짧다. 출산휴가 중에 고용된 기관으로부터 급여를 100% 받는 것은 두 나라가 같다. 육아휴직 제도는 대만이 한국보다 좀더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육아휴직 기간이 한국은 최장 1년이지만, 대만은 최장 2년이다. 육아휴직 급여는 한국이 1년간 급여의 40%, 최대 100만 원을 지급하는 데 비해 대만은 첫 6개월간 급여의 60%를 지급한다. 다만 나머지 기간에는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

    “출산휴가만 쓰겠다”

    두 나라 간 격차는 육아휴직 사용 실태에서 더 여실하게 드러난다. 대만 인구는 2400만여 명으로 5100만 명이 넘는 한국의 절반이다. 그런데 육아휴직 사용자는 대만 36만6804명, 한국 6만9616명으로 대만이 한국보다 5배나 많다(2013년 기준). 한국보다 대만의 육아휴직 사용이 훨씬 일반화한 것. 다만 1년 넘게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여성 육아휴직자를 대상으로 2013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2개월 이상 18개월 미만 사용이 9%, 18개월 이상 사용이 11%에 그쳤다. 80% 이상이 1년 이하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것이다.

    HTC 소개를 맡은 이는 회장실(‘Chairwoman’이라고 쓴다) 소속 천이쉬안(陳毅萱) 팀장. 임신 8개월째인 그는 부풀어오른 배를 가린 푸른색 블라우스 위에 손을 얹고 유창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다. 이제 곧 출산하는 그는 “출산휴가만 사용하고 출근할 예정”이라고 했다.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성의 사회적 역량이 날로 커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나와 내 친구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업 엄마’ 이상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대만 행정원이 펴낸 2013년 인구정책 백서 제목은 ‘줄어드는 자녀, 고령화, 이민(Fewer Children, Population Aging, and Immigration)’이다. 저출산이 해소돼야 고령화나 이민 문제 역시 가닥이 잡히기 때문에 저출산에 가장 큰 정책적 무게를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대만의 합계출산율은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5년 이후 1명 안팎에서 더 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처지는 한국도 비슷하다. 아시아에서 높은 수준의 양성평등을 가장 먼저 이뤄낸 대만은 ‘알파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저출산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저는 오늘날 독립적인 여성들이 일과 가정의 균형을 지혜롭게 맞춰나갈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적절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공공 돌봄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아빠들도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으면 해요.”(천이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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