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호

그는 왜 도로 위의 개가 됐나

사람 잡는 보복운전의 심리

  • 김유림 채널A 사회부 기자 | rim@donga.com

    입력2015-06-23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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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왜 도로 위의 개가 됐나
    # 1 “감히, 경차 주제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5월 3일 오전 9시. 서해안고속도로 한 나들목에 빠져나가려는 차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사이로 SUV 한 대가 슬며시 머리를 들이밀었다. 경차 앞 틈새를 노리고 조금씩, 조금씩 밀고 들어오는 SUV. 그러자 경차는 앞차에 바짝 붙어 SUV의 진입을 막았다.

    그 순간, SUV 운전자 홍모(34) 씨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때부터 홍씨는 경차를 따라다니며 ‘분노의 질주’를 시작했다. 나들목을 빠져나와 도로에 진입한 홍씨는 경차 옆으로 차를 바짝 붙여 위협했다. 하마터면 추돌할 뻔했다. 경차는 튕겨나가듯 바깥 차선으로 피하면서 거리를 뒀다. 그러자 속도를 내 다시 경차 앞으로 차를 몬 홍씨, 이번에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위협 운전을 일삼았다. 급정거하기를 수차례. 심지어 홍씨는 도로 한가운데서 경차를 가로막고 차를 세우더니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차창으로 팔뚝을 내밀었다. 커다란 문신이 선명했다.

    “너, 이 XX! 보복운전으로 신고할 거야!”

    경차 운전자는 크게 소리 질렀지만, 어린 아들과 아내를 태우고 있던 터라 내심 이 악몽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 2 5월 11일 오후 9시 서울 아현동 교차로. 택시 운전자 조모(53) 씨는 여느 때와 같이 운전 중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차선을 변경한 뒤부터 이상하게 화물차 한 대가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화물차는 계속 경적을 울리며 상향등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잘못을 한 게 없다고 생각한 조씨는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무시했다.

    잠시 후 운전 중이던 조씨 얼굴에 갑자기 작고 동그란 비비탄 총알 한 발이 날아들었다. 깜짝 놀라 차창 옆을 보니 아까 뒤따르던 화물차 운전자가 조씨를 향해 비비탄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비비탄총은 제대로 조준해서 쏘면 콜라캔을 뚫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다행히 조씨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만약 총알이 눈에 맞았다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경찰에 붙잡힌 화물차 운전자 최모(46) 씨는 “택시가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더니 사과도 없이 가버리기에 순간 화가 났다”고 말했다.

    멀쩡한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왜 ‘괴물’이 되는 걸까. 거리의 무법자들에 의한 보복운전 사건은 매년 끊이지 않는다. 한국교통사고조사협회에 따르면 2013년 한 해 동안만 1600건이 발생했다. 관련 사망자도 35명에 달한다. 이는 보복운전으로 ‘사고’가 난 경우에만 해당한다. 집계되지 않은 크고 작은 보복운전 사건은 훨씬 많을 것이다.

    보복운전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다. △앞서가다 고의로 급정지하거나, 뒤따라오다 추월한 뒤 앞에서 급제동하는 경우 △차선을 물고 지그재그로 가다 - 서다를 반복, 진로를 방해하는 경우 △진로를 급하게 변경하면서 중앙선이나 갓길 쪽으로 상대 차량을 밀어붙이는 경우 등이다.

    24t 트럭이 밀어버린 쏘나타

    그는 왜 도로 위의 개가 됐나

    6월 1일 오후 6시, 서울 양화대교 노들길 진입로로 들어오던 승용차를 24t 덤프트럭이 50m가량 밀고 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보복운전의 수법이 더욱 악랄하고 집요해졌다.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거나 눈이 부실 정도로 상향등을 번쩍거리는 건 ‘애교 수준’이다.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위험천만한 보복운전이 끊이지 않는다. 앞선 사례처럼 비비탄총, 새총 등 엽기적인 도구를 이용한 보복운전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양화대교에 정신병자 덤프트럭이 승용차를 그냥 밀고 간다. 저 아주머니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해. 손이 벌벌 떨리네요.”

    6월 1일 SNS ‘인스타그램’에 충격적인 영상이 올라왔다. 24t 덤프트럭이 은색 쏘나타 한 대를 쭉 밀고 가는 모습이었다. 이 영상은 SNS를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네티즌 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바로 덤프트럭 운전자 박모(59) 씨를 잡아냈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박씨가 운전하던 트럭 앞으로 여성 운전자 송모(54) 씨의 쏘나타가 끼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두 차량이 가볍게 부딪쳤다. 그런데 박씨는 차를 멈추지 않은 채 시속 15km 속도로 운전을 계속했다. 소나타는 속수무책으로 50m가량 밀려갔다.

    경찰 조사에서 박씨는 “쏘나타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혐의를 부인했지만, 경찰은 박씨에게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봤다. 다행히 쏘나타 운전자 송씨의 부상 정도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정신적 충격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 순천에서는 무려 24km에 걸쳐 보복운전을 한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3월 14일 오전 5시, BMW를 운전하던 류모(31) 씨는 자신의 차 앞으로 SM5 승용차가 끼어들자 화가 났다. 안 그래도 밤새 술을 마신 터라 흥분 상태였던 류씨와 동승한 친구들은 “야, 따라잡아!”라고 소리쳤다.

    류씨의 BMW는 도로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지그재그로 달리다가 터널이 나오면 SM5 차량 앞에서 급정거하기를 반복했다. 점차 겁이 난 친구들이 류씨를 말렸지만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공포의 보복운전’은 30분간 지속됐다. 심지어 SM5 차량이 들어간 공장 앞에서 류씨는 “너, 당장 나와! 아니면 공장 폭파시킨다”고 협박까지 했다.

    ‘위협’ 아닌 ‘응징’?

    왜 그들은 보복운전을 하는가. 삼성교통문화연구원 박천수 연구원은 “보복운전자는 본인이 ‘위협’이 아닌 ‘응징’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먼저 상대방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당한 항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대표적인 보복운전 사례 하나를 들려줬다.

    “1차선에서 달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서기 위해 2차선에 진입하는 건 자연스러운 주행 행위다. 하지만 2차선을 달리던 중, 버스의 차선 변경을 인식하지 못한 승용차 운전자는 ‘옆에 잘 달리던 버스가 왜 갑자기 차선을 변경해 내 갈 길을 가로막는가’라고 분노한다. 그뿐만 아니라 ‘저 커다란 버스가 내 앞에 갑자기 정지해 내가 사고를 낼 뻔했다’고 피해의식까지 느끼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 승용차 운전자는 버스에 대해 보복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났고, 결국 버스운전자는 머리를 크게 다쳐 목숨을 잃었다. 박 연구원은 “승용차 운전자가 ‘내가 못 본 사각지대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다른 차와 소통하며 운전했다면 그런 끔찍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어지는 박 연구원의 말이다.

    “차선을 변경할 때 깜빡이를 켜면서 운전석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다른 차의 양해를 구해본 적 있는가. 아마 90%의 운전자가 무리 없이 이 차를 끼워줄 거다. 그런데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작스레 차선을 변경하는 경우, 뒤차 운전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분노와 공포를 느낀다.

    늦게라도 운전석에서 손을 흔들거나 미안하다는 의미로 비상등을 켜준다면 상황은 나아질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운전자들은 이런 ‘무언의 규칙’에 인색하다. 도로 위에서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상대 운전자의 작은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내는 보복운전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는 왜 도로 위의 개가 됐나

    5월 3일 오전 9시. 서해안고속도로에서 SUV 차량이 경차를 상대로 보복운전을 했다. SUV 차량이 급제동하면서 무리하게 경차 앞으로 들어오더니(왼쪽), 갑자기 차를 세운 채 움직이지 않는다. SUV 운전자는 1분간 도로 위에서 차를 멈춘 채 담배를 피우는데, 그의 팔에는 커다란 문신이 있었다.

    감히 나한테 피해를?

    최근 보복운전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보복운전자들의 차가 대부분 외제차나 대형 승용차 등 ‘고급차’라는 점이다. 앞선 사례 모두 보복운전자의 차가 피해 차량보다 크기나 가격이 비쌌다. 특히 현장 경찰들은 “외제차의 보복운전 사례가 상당히 늘었다”고 전했다. 서울 소재 경찰청 교통조사과 조사관의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나보다 못한 차를 타는 주제에 나한테 피해를 줘?’라는 심리가 있다. 솔직히 다른 차를 앞질러 겁주고 싶어도 내 차의 성능이 더 떨어질 것 같다면 처음부터 ‘분노의 레이스’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외제차가 내 차 앞에 끼어드는 경우, 대부분 서민 운전자들은 ‘외제차라고 잘난 척하냐’며 분노하긴 하지만 사고가 났을 때 보험료 부담도 있고 내 차가 속력 면에서도 앞설 것 같지 않으니 그냥 피해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최근 경찰청은 “보복운전에 대해 엄중 처벌하겠다”고 수차례 발표했다. 기존에는 보복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면 일반 교통사고에 준해 처리했다면, 앞으로는 ‘흉기 등 협박죄’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경찰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난폭운전’보다 특정인을 지목해 공격하는 보복운전이 훨씬 위협적이고 피해도 크다고 본다. 또한 최근 차량용 블랙박스가 대중화하면서 증거를 찾아내기가 쉬운 만큼 처벌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엄중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 운전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이해의 노력 아닐까. 도로 위 평화를 위해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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