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호

정·재계 거물이 빚어낸 ‘국회 옆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5-06-26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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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국회의사당 옆에는 큰 도로가 나 있지만 미국 국회 옆에는 미술관이 있다.
    • 미국 정치의 심장부 한가운데 우뚝 선, 워싱턴DC의 내셔널 갤러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부터 현대미술 작품까지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한다.
    정·재계 거물이 빚어낸 ‘국회 옆 미술관’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셔널 몰(National Mall)을 찾는다. 이 도시의 핵심이 모두 이곳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내셔널 몰은 시내 한복판에 길이 3km, 폭 483m로 조성된 커다란 공원이다. 동쪽 끝에는 국회의사당(Capital Hall), 서쪽 끝에는 링컨 대통령 기념관(Lincoln Memorial)이 있고, 가운데쯤엔 높이가 169m나 되는 오벨리스크, 워싱턴 모뉴먼트(Washington Monument)가 서 있다. 내셔널 몰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24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 궁궐 같은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of Art)도 자리 잡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국회의사당과 가까운 동쪽부터 이스트 빌딩(East Building), 웨스트 빌딩(West Building), 조각정원(Sculpture Garden)이다. 지금은 국립 미술관이지만, 1937년 설립 당시엔 대재벌 앤드루 멜론(Andrew W. Mellon·1874~1937)의 돈과 소장품에서 출발했다. 멜론의 물적 지원 아래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존 포프(John Russel Pope)가 궁궐같이 웅장한 규모로 웨스트 빌딩을 설계했는데, 그때 세계에서 가장 큰 대리석 건물이었다고 한다.

    꼭 들러야 할 이스트 빌딩, 조각정원

    이스트 빌딩은 한참 뒤인 1978년 멜론의 아들, 딸의 헌금으로 완공됐다. 설계는 중국계 유명 건축가 페이(I M Pei)가 맡았는데 1981년 유명 건축상을 받았을 정도로 예술성이 뛰어나다. 본관 웨스트 빌딩과는 지하 통로로 연결돼 있으며 현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웨스트 빌딩 서쪽의 조각정원은 1999년에 만들어져 유명한 현대 조각 작품들이 야외에 설치되어 있다.

    미술관 관람은 무료다. 그런데 잘 모르고 가면 규모가 가장 큰 본관인 웨스트 빌딩만 둘러보고 나오기 쉽다. 나도 첫 방문 때 그런 실수를 했다. 이스트 빌딩에는 현대미술 유명 작품이 수두룩하기에 반드시 가봐야 한다. 아름다운 조각정원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곳이다.



    이 미술관은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 안에 있던 내셔널 갤러리와는 별개의 미술관이다. 거물 정치가이기도 했던 멜론이 미술관을 지으며 이름을 내셔널 갤러리로 하자, 스미소니언의 내셔널 갤러리는 ‘내셔널 컬렉션(National Collection of Fine Arts)’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는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이란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는 ‘반관반민’ 형태로 운영된다. 미술관 유지와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은 연방정부가 대고, 작품 구입 및 특별 프로그램 운영비는 민간 기부금과 자체 기금으로 조달한다.

    3대 재벌이자 재무장관

    정·재계 거물이 빚어낸 ‘국회 옆 미술관’
    피츠버그 부자 가문에서 은행가이자 판사의 아들로 태어난 앤드루 멜론은 사업의 귀재였다.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둬 ‘석유왕’ 록펠러, ‘자동차왕’ 포드의 뒤를 이어 3대 재벌로 등극했다. 그는 피츠버그 대학에 다녔지만 피츠버그에 훗날 명문 사립대로 성장한 카네기-멜론 대학(Carnegie-Mellon University)을 세웠다. 당시 피츠버그는 미국 산업혁명의 메카로 여러 사업이 번창하고 있었고, ‘철강왕’ 카네기는 멜론의 사업 동료였다.

    멜론은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간 재무장관으로 봉직했다.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재무장관을 오래 맡은 인물이며, 3명의 대통령을 연속으로 보좌한 3명의 미국 관료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하딩, 쿨리지, 후버 대통령을 보좌했는데, 불행히도 재임 중인 1929년 세계 역사상 최대의 경제 재앙으로 일컬어지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발생했다. 그는 대공황 수습에 온 힘을 쏟았지만 ‘인기 없는’ 장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재무장관에서 물러난 직후에는 1년 동안 영국 주재 미국대사를 지냈다.

    이런 경력의 소유자이다보니 미술관을 세우려는 그에게 힘이 붙지 않을 수 없었다. 1937년 의회는 ‘국가 원로’ 멜론의 뜻에 따라 미술관 설립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때 멜론의 나이가 82세였다. 그 나이에도 국가를 위해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멜론의 의지가 바로 ‘미국 정신’이 아닌가 싶다. 의회 승인으로 미술관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의사당 바로 턱밑에 미술관 건물이 지어졌다.

    멜론은 미술관 설립을 위해 돈과 소장품 전부를 내놓았다. 건축비로 당시 돈 1000만 달러를 기부했고, 기증한 작품들은 그때 가치로 4000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그의 아들과 딸은 물론, 당시 내로라하는 부자들도 소장한 작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웨스트 빌딩은 1941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재로 준공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멜론도, 건축을 맡은 존 포프도 1937년 타계해 이 행사를 지켜볼 수가 없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러시아 최고이자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그런데 1930년대 초에 이 미술관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중요 소장품을 비밀리에 해외로 팔아넘긴 것이다. 그것도 정부가 주도해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사회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는 사유재산을 금지했다. 미술품도 당연히 국가 소유가 됐다. 그리고 1920년대 말에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한다. 그런데 이를 위한 자금이 부족하자 공산당 정권은 1928년 해외에 팔 작품 리스트를 만들라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명령했다. 한 점에 5000루블 이상 받을 수 있는 작품 250점을 뽑아내라는 구체적인 지시였다.

    에르미타주의 미술품 밀매

    러시아의 미술품 매각 소문은 서유럽 미술상과 부자 수집가들 귀에 흘러들어갔다. 마침 미국대사로 영국에 나와 있던 멜론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미 미술관 건립을 구상하고 있던 그에게 솔깃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곧 ‘작전’에 들어간 멜론은 약 670만 달러를 들여 에르미타주의 명품 21점을 확보했다. 그중에는 라파엘로의 ‘The Alba Madonna’도 포함돼 있다. 멜론은 이 작품에 116만여 달러를 지불했는데, 당시로선 단일 작품에 지불된 최고의 가격이었다고 한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이때 에르미타주 명품을 몇 점 건졌다.

    러시아의 ‘그림 수출’은 1933년 11월 4일 ‘뉴욕타임스’가 폭로할 때까지 비밀리에 진행되다가 1934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부관장이 스탈린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며 끝이 났다.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후 러시아 의회는 러시아 소장품을 해외에 못 팔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소 잃고’가 아니라, ‘소 없는’ 외양간을 고친 꼴이다.

    멜론이 에르미타주에서 입수한 21점은 모두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됐다. 이 작품들은 현재도 내셔널 갤러리의 핵심 소장품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는 오랫동안 이 작품들을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전시회에 내보내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가 되돌려주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에 야 러시아에 작품들을 종종 빌려주고 있는데, 2002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티치아노의 ‘Venus with a Mirror’를 에르미타주에 대여해줬다.

    멜론은 마흔다섯이 돼서야 결혼했다. 신부는 스무 살의 영국 여성으로 기네스 맥주 회사(Guinness Brewing Co.) 오너의 딸이었다. 부부는 슬하에 딸 아일사(Ailsa Mellon Bruce·1901~1969), 아들 폴(Paul Mellon·1907~1999)을 뒀다.

    당대 최고 재벌의 상속자인 만큼 아일사와 폴 역시 미국 최고 부자였다. 미국 경제지 ‘포춘’은 1957년부터 미국 부자 명단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 남매는 사촌 두 명과 함께 8대 부자 명단에 들었다. 최고 부자 8명 중 4명이 멜론 가문인 것이다. 이들 각자의 재산은 오늘날 화폐 가치로 34억 달러에서 59억 달러 사이라고 한다. 아일사와 폴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내셔널 갤러리에 수많은 작품과 돈을 기부했고 미술관 운영에도 직접 참여했다.

    예일대 출신인 폴은 사업보다는 자선활동과 예술품 수집, 경주마 사육 등에 관심이 더 많았다. 군 생활도 오래해 소령까지 지냈다. 그는 아버지의 돈으로 지은 웨스트 빌딩과 아버지의 소장품 115점을 1941년 국가에 헌납했다. 또 40년간 미술관 이사회에 참여하며 이사, 이사장(2번), 이사회 의장, 명예이사 등을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누이 아일사와 함께 이스트 빌딩 건축을 주도했고, 수년에 걸쳐 1000점이 넘는 작품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했다. 대부분 프랑스와 미국의 명작이다. 아일사는 1969년 사망하면서 153점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美 대륙의 유일한 다빈치 작품

    정·재계 거물이 빚어낸 ‘국회 옆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는 멜론이 주도해 세워졌지만, 이후에는 미국의 수많은 부자가 달려들어 오늘날의 위상으로 발전시켰다. 그중에서도 조지프 와이드너(Joseph E Widner)라는 필라델피아 부동산 재벌은 미술관 설립이 결정되자마자 2000점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가운데는 영국의 유명한 후기 인상파 화가 오거스터스 존(Augustus John)이 그린 와이드너의 초상화도 포함돼 있다.

    뉴욕 증권시장에서 활동하며 금융 재벌로 등극한 체스터 데일(Chester Dale)도 미술관 설립 초기에 많은 작품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했다. 그는 27세 때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아내와 결혼하며 아내의 조언으로 미술품 수집에 눈을 떴고, 이후 사업에 성공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명작을 대량 수집했다. 처음에는 개인 미술관을 설립하려고 했으나, 생각을 바꿔 소장품을 모두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했다. 그의 기증품에는 회화 240점 이외에도 조각과 드로잉, 1만2000여 점의 그림 카탈로그와 1500권 이상의 희귀 도서도 포함돼 있다.

    거대한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는 단 한 점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이 존재한다. 바로 ‘Ginevra de´Benci’로 여기,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품이다. 미술관은 1967년 무려 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이 그림을 사들였다. 이 거금은 아일사 멜론이 만든 멜론 브루스 펀드(Mellon Bruce Fund)에서 나왔다. 당시까지 역대 최고의 그림값이었다고 한다.

    정·재계 거물이 빚어낸 ‘국회 옆 미술관’
    ‘Ginevra de′ Benci’는 1474년 피렌체 귀족 가문의 딸 지네브라(Ginevra)가 열여섯 나이에 결혼하게 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다. 이의를 제기하는 주장도 있지만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여인은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표정만큼은 엄숙하고 진지하다. 미소도 없고, 관람자와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는, 그저 무심하게만 보이는 그림이라 ‘모나리자’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낸다. 지네브라는 매우 깐깐한 아가씨였던 모양이다. 원래 그림은 아래쪽으로 더 길었는데, 많이 훼손돼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 탓에 지네브라의 팔과 손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추측이 무성하다. 훼손 없이 잘 보존됐더라면 모나리자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다빈치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미술관은 르네상스 시대, 다빈치와 더불어 피렌체의 천재로 불린 라파엘로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The Alba Madonna’(1510)이다.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 예수, 요한을 그린 성화. 예수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있고, 마리아의 무릎에 앉은 요한이 그 십자가를 맞잡고 있다. 그림의 배경으로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시골 풍경이 그려져 있다. 매우 아름답고 성스러운 이 작품은 스페인 귀족인 알바(Alba) 가문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183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에게로 넘겨져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소장하게 됐다. 미술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나 독일의 폭격을 우려해 명품 100여 점을 비밀리에 노스캐롤라이나 애슈빌로 옮겨 보관했는데, 이 그림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거칠고 삭막한 여의도엔…

    정·재계 거물이 빚어낸 ‘국회 옆 미술관’
    미국은 20세기 초반까지 문화적으로 후진국이었고, 유럽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했다. 그 때문인지 미국인들은 유럽에서 출세한 미국인 화가들에게 유달리 애정이 많았다. 그 대표적 화가 중 한 명이 19세기 후반 인상파 시기에 유럽에서 활동한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다. 내셔널 갤러리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Symphony in White, No. 1’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처음엔 ‘The White Girl’이라고 불렸다. 휘슬러가 연인 조안나 히퍼넌(Joanna Hiffernan)을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1862년 완성한 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 1863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됐으나 낙선했다. 낙선자들이 살롱전에 반발해 낙선작들을 모아 별도로 전시한 것이 그 유명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출품되기도 했던 ‘낙선전’이다. 낙선전 당시에는 마네 그림보다 휘슬러 그림이 더 주목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휘슬러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고 거기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 뒤 가족은 다시 영국으로 옮겨갔지만,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군인 대신 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파리로 건너갔고, 다시 런던으로 옮겨가 거기서 화가로서의 인생을 살았다. 이 그림은 1896년까지 휘슬러 가족이 소유하고 있다가 그림 수집가 해리스 휘트모어(Harris Whittemore)에게 팔렸다. 1943년 휘트모어 가족은 이 그림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했다.

    정·재계 거물이 빚어낸 ‘국회 옆 미술관’
    최정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저서 :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미국은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데, 우리나라 국회의사당 옆에는 무엇이 있을까. 삭막한 여의도 섬에 문화시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가끔은 이종격투기 경기장으로 변모하는 국회의 거친 정서를 예술로 순화시킬 방도는 과연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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