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평복 차림 단아한 여성이 비운의 국모”

을미사변 120년, 명성황후 ‘진짜 사진’을 찾아서

  • 황필홍 | 단국대 정치철학과 교수 · 개화공정미술 대표 phhphd@dankook.ac.kr

    입력2015-07-24 0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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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복 차림 단아한 여성이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 논란은 1970년대 중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외여행이 점차 확산되면서 국내 학자들이 국경 밖으로 나가 외국 문헌에서 찾아낸, 실로 다양한 명성황후 사진을 국내로 갖고 들어와 소개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즈음은 맑은 정신으로 명성황후의 얼굴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구한말을 살았던 이들이 거의 다 사라져가는 시점이었다.

    진짜 명성황후 사진이 어느 것인지 증언해줄 수 있는 대한제국 황실가계 내 인물로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 윤비와 고종의 형수인 흥친왕비, 그리고 순종의 동생 영친왕 등이 있다. 그러나 윤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 흥친왕비는 1974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해외에서 명성황후의 (것으로 알려진) 사진이 발견돼도 정작 이것을 보고 “맞다”고 해줄 사람이 없어 논란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궁녀 사진이 교과서에

    1970년대 초까지는 별 이견 없이 사진 A1, A2, A3, A4가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주로 해외에서 들어온 몇몇 사진 탓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B1, B2, B3, B4 등이다.

    일군의 사람들이 A1~4가 틀리고 B1~4가 맞다고 주장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문명개화(?)한 서양 사회가 제시한 새로운 사진’이라는 점이 외형적 위세를 뽐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A1~4의 여인이 권위 있는 관복이 아니라 조촐한 평복 차림인 탓에 일국의 왕비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 근거 모두 부실하다. 당시 우리보다 선진화한 서양 사회라고 해도 그들의 구한말 선교사나 교육자, 여행가가 국내의 쟁쟁한 정치가, 사학자, 언론인보다 조선의 사정에 정통하다고 볼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왕비가 평상복을 입은 채 사진 찍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평상복을 입었으니 왕비가 아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폄훼일 뿐이다. 평복 차림의 고종, 순종, 그리고 사대부 관리들의 사진 자료가 다수 남아 있으므로 이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B1~4가 명성황후 사진으로 주장됐다가 사그라진 것은 무엇보다도 사진 속 여성의 의상이 궁녀나 상궁의 복장(B1, B2, B3), 또는 이국인의 낯선 복장(B4)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왕비가 무슨 비상사태가 아니고서야 사진을 찍으면서 궁중녀의 옷을 입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그런데도 1975년 한 언론인이 해외에서 도서 한 권을 발견하고는 그 안에 실린 사진(B1)을 명성황후라고 소개하고, 몇몇 역사학도가 틀림없는 명성황후라고 맞장구치는 바람에 B1은 1977년부터 국정교과서에 실렸다. 1990년대가 돼서야 “사진 속 여성은 궁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B2와 B3도 비슷한 사정으로 명성황후 진짜 사진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B4는 복장, 헤어스타일, 얼굴 생김새 등이 도무지 한국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외국인들이 주장하는 명성황후의 사진이나 세밀초상화(사진을 토대로 그렸거나 해당 인물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그림) 속 명성황후 모습은 각각 다르다. 그것들 중 어느 두 개라도 같거나 비슷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정보가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필자는 A1~4가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이라고 본다. 위에서 언급했듯 구한말 평상복 차림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신분 계층을 가리지 않고 흔하게 발견된다. 왕비라고 해도 사적 공간에서는 관례복보다는 평상복 차림으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흰색 평복은 일상적으로 입는 옷일 뿐, 우리가 지레 연상하는, 속죄할 때 입는 특별한 소복(素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평복 차림 단아한 여성이 비운의 국모”
    ‘독립정신’ 사진이 진짜

    A1~4를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이러한 유추해석에만 그치지 않는다. 필자는 20여 년에 걸쳐 이와 관련한 자료를 추적해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4가지 결정적 근거를 찾아냈다.

    첫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 1910년 2월에 출간한 책 ‘독립정신’ 초간본에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의 사진이 실렸다. 명성황후 사진 아래에는 ‘명셩황후’라고 적혀 있다. 이 사진이 현재까지 발견된 명성황후 얼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고증 기록이다. 구한말에 조선인이 쓴 책에 아무 사진이나 게재했겠는가.

    게다가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독립협회 등을 통해 조선 근대화운동의 선봉에 선 인물이다. 당시로는 매우 드물게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고종을 비롯한 권부 실세와 직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당대 사회 지도층의 여러 가지 면모에 어두웠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출판사 대동신서관을 설립해 ‘독립정신’ 출판에 협력한 31명의 동지가 하나같이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1932년에도 같은 사진 쓰여

    둘째, 1917년 3월 재판본 ‘독립정신’에서도 명성황후 사진(A2)은 초판본에 쓰인 것과 동일하다. 이는 초판 출간 후 7년 넘도록 별문제가 없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사진에 문제가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진을 그냥 뒀을 리 없다. 책에 등장하는 다른 사진은 다 맞는데 유독 명성황후 사진만 틀리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원군과 고종, 링컨 미국 대통령, 청나라의 리훙장과 위안스카이, 일본 국왕과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은 다 맞는데, 하필이면 자국 국왕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사진만 진위를 의심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셋째,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은 1915년 6월 중국 상하이에서 태백광노(太白狂奴)라는 가명으로 ‘한국통사’를 순한문체로 발간한다. 이 책에 고종을 비롯한 여러 중요 인물의 사진을 실었으나 명성황후 사진은 싣지 않았다. 2년 후인 1917년 6월 박은식은 미국 하와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한국통사’를 본명을 밝히며 발간하는데, 여기에는 명성황후의 사진을 실었다. 그 사진이 A3이다.

    주목할 점은, 한문판에 조선 황실을 소개하면서 고종, 순종, 순종비, 의친왕, 영친왕 등의 사진을 실으면서 명성황후 사진은 싣지 않았다가 한국어판에 명성황후 사진을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사진이 있다가 사라진 게 아니다. 중국어판을 낼 때 사진을 구하지 못했거나, 사진은 구했지만 진짜 명성황후라고 믿지 못했기에 싣지 않은 것이리라. 여하튼 부정적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넷째, 장도빈이 쓴 ‘대원군과 민비’라는 책이 1927년 출판됐는데, 여기에도 대원군, 고종과 함께 명성황후 사진으로 A4가 실려 있다. A1, A2, A3와 동일한 사진이다. 명성황후와 동시대 인물인 장도빈은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며 훗날 단국대 초대 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양기탁,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을 주도했다. 그가 사용한 명성황후 사진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당시 전위 지식인이자 양식인이던 그의 동료들이 명성황후의 얼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얘긴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상상인가.

    또한 1910년과 1917년 ‘독립정신’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이 엉터리라면 1915년과 1917년 박은식의 ‘한국통사’ 역시 엉터리로 판명됐을 텐데, 양식 있는 장도빈이 10년 후 같은 사진을 그대로 쓸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 대원군과 명성황후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를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고 사용했을 리 없다.

    필자는 이런 근거에 따라 A1~4가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임이 입증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보충할 사료가 있다. 1932년 잡지사 개벽사가 발행한 ‘별건곤’ 부록에 49인의 ‘근대조선인물화보’가 실렸다. 바로 A′1이다. 필자는 A′1를 A1~4의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으로 추정한다. A′1과 유사한 데생으로 A′2가 있다. 이것은 잡지 ‘삼천리’의 1930년 7월호에 실린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논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개벽사가 명성황후의 얼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고, 개벽사에 관계한 사람모두가 명성황후에 관한 정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부록에 등장하는 49인 중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홍영식의 경우 유일하게 사진 대신 그가 누군가에게 쓴 편지로 대체됐다는 점이다(A′3 참조). 홍영식의 사진이나 초상을 못 구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명성황후 얼굴에 관한 정보가 부실하거나 사진의 진위가 불확실했다면 홍영식과 마찬가지로 편지 등 다른 방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남편과 아들이 몰라봤을까

    “평복 차림 단아한 여성이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 논란과 관련해 필자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일각에선 외국인의 저술을 더 신뢰한다는 사실이다. 낯선 조선 땅에 온 외국인이 가진 정보는 일천할 가능성이 큰 데도 그들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우리 내부 전문가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치우침이 있다.

    개화 시기는 주지하듯이 인류문명사에서 서세동점으로 서양이 동양을 유사 이래 공공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들을 여러 가지로 ‘동쪽’에 대해 생소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외국 영화를 생애 처음 봤는데 그것이 ‘벤허’였다. 내용을 소화하기는 고사하고, 서양인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도대체 누가 누군지 구분되지 않았다.

    19세기 말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외모도 그러했을 것이다.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교수 댁에서 개강 파티가 있어 중국, 일본 친구들과 함께 가서 인사했더니 그가 “내 눈엔 너희들이 다 같아 보인다”며 웃던 일이 생각난다. 구한말 우리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비교인식이 우리 지도층 인사들의 그것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

    A1~4 사진이 실린 책들이 출간된 시기는 1910년부터 1927년까지다. 명성황후의 남편 고종이 1919년까지 살면서 그 책들을 봤을 것이고, 아들 순종이 1926년까지 살면서 그 책들을 봤을 것이다. 며느리 순종비 윤씨는 1966년까지 생존해 있었다. 황실 식구는 이들 말고도 더 있다. 고종의 또 다른 아들 의친왕은 1955년에, 흥선대원군의 맏며느리이자 고종의 형 이재면의 부인 흥친왕비는 1975년에 별세했다. 만약 A1~4가 가짜라면 명성황후의 남편이, 아들이, 며느리가, 손윗 동서가 문제를 제기한 기록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필자는 일반 백성도 명성황후의 용모에 대해 대충은 알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즉, 가짜 명성황후 사진이 떠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비근한 예로 김홍집과 어윤증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화를 겪은 인물로, 광화문과 충청도 피신길에 사람들에게 맞아죽었다. 요즘으로 치면 성난 군중이 총리와 장관을 지낸 인물을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 무려 33년을 조선의 국모로 살아온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를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명성황후는 숨어 살던 사람이 아니다. 열여섯 살까지 경기 일원과 서울 외곽에서 살았고, 입궐 후에도 많은 사람을 만나며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일에 관계한 인물이다. 생전에는 낯설었다고 해도 을미사변 후 국장(國葬)을 치르면서 그녀의 얼굴이 만천하에 알려졌을 공산이 크다. 김구 선생의 일본 장교 살해 동기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 동기 중 첫 번째도 ‘국모 살해’에 대한 분노라고 한다. 그 어려운 시대를 가슴 아파하며 살던 우리 선조들이 설마 국모의 얼굴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고 여겼을까.

    마지막으로 좀 더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궁을 빠져나와 몸을 숨기면서 사진 찍는 것 등 얼굴을 드러내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명성황후의 사진이라는 것이 도대체 A1~4 이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A1~4는 그녀가 서른두 살이던 임오군란 이전 사진으로 봐도 좋을 만큼 젊은 날의 단정한 모습이다. 만약 공식적인 예복 차림의 사진이 있었다면 그것이 A1~4보다 더 많이 출판물에 사용됐을 것이다.

    “평복 차림 단아한 여성이 비운의 국모”
    ‘박영효 증언’ 나온다면…

    A1~4가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필자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A1, A2, A3, A4 그리고 A′1까지 다섯 종의 고문서 원본을 모두 소장한 수집가는 필자가 유일한 것으로 안다. 2011년 ‘월간중앙’은 이승만과 장도빈의 두 초판본 저서와 잡지 ‘삼천리’ 기사를 바탕으로 A1~4를 평상복을 입은 명성황후로 단정했다. 그리고 이 사진이 당시 언론사나 출판사가 보관 중인 유일한 명성황후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2010년에는 일본 근대정치사상가인 강범석 히로시마시립대 교수가 자신의 저서 ‘왕후모살 : 을미사변 연구’에서 A1~4가 명성황후의 얼굴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그는 “황후를 직접 봤을 가능성이 큰 박영효나 윤치호, 한규설 등은 ‘독립정신’이 나올 당시 생존해 있었으므로 이들이 황후 초상에 대해 언급한 것이 밝혀진다면 명성황후 사진에 대한 논란이 정리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고, 고종의 총애를 받아 한성판윤도 지냈다. 그는 갑신정변을 주도하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만큼 명성황후의 얼굴을 잘 기억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문 것이다. 또한 그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시기가 1920년대 초이고 1939년까지 생존했으니 이승만, 박은식, 장도빈의 저작물에 잘못된 명성황후 사진이 실렸다면 큰 신문사 사장으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잘못을 지적하는 증언을 남겼을 것이다.

    올해 2015년은 조선 경술국치 105주년이다. 이 망국의 역사가 있기 15년 전인 1895년 10월 새벽에 일본인 자객의 칼에 맞아 명성황후가 시해됐으니 올해는 을미사변 120주년이기도 하다. 육십갑자가 두 번이나 지났다. 국치일을 되새겨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것으로 흘러서는 안 되고, 명성황후가 감성을 자극하는 오페라나 뮤지컬의 대상이 되고마는 것도 더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역사의 기록으로 정면승부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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