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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 따라 걸으며

  • 손상원 정동극장 극장장

정동길 따라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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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동극장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은 보행자가 걷기 편하도록 차도를 좁히고, 인도를 넓혀놓은 길이다. 양옆으로 은행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같은 가로수가 우거져 아름다운데다 걷기에도 편하니, 서울의 ‘걷고 싶은 길’ 첫손에 꼽힐 만하다. 

나는 이 길을 매일 걸으며 출근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20년 넘도록 연극의 메카로 불린 종로구 대학로를 지켜온 내가 대학로가 아닌 정동길을 걸어 첫 출근하던 날 절로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1990년대 초반 대학 연극반 시절, 공연 대본을 구하기 위해 덕수궁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 자료실은 덕수궁 내에 있었다. 자료실을 방문하는 일은 추려놓은 작품 리스트 중 어떤 작품을 올리게 될까 하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장 가슴 설레는 일 중 하나였다. 

필름으로 된 자료를 찾아 복사한 대본을 덕수궁 벤치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내려가면서 머릿속으로는 무대를 그리곤 했다. 대본을 읽은 첫 기억 그리고 머릿속에서 상상한 무대와 장면들. 이날의 기억들이 이후 내가 작품을 만들 때마다 ‘첫 대본을 읽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대본을 들고 자료실 정문을 나설 때 이미 연극 한 편을 다 완성한 것만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 시절로부터 25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정동극장에서 일한다. 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정동길을 걸어서 출근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거리

정동길에는 많은 문화 공간이 숨 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92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대법원 건물을 전면부만 남겨둔 채 신축했다고 한다. 그런 시립미술관의 미술 작품 감상 역시 정동길 산책에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미술관 앞마당에서 휴식을 취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기에도 좋다. 도심에서 예술과 자연을 느끼며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미술관 정문 앞 로터리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나온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지금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한 배재고등학교의 동관을 가능한 한 원형 그대로 보존한 이 역사박물관의 외벽에는 1916년에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를 바라보며 100년 넘게 자리를 지킨 건물이다. 

작지만 알차게 꾸며진 박물관을 돌아보면 배재학당은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나도향처럼 우리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을 키운 둥지였으며 야구와 육상 같은 근대 스포츠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방문 한다면 우리의 근대사를 들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거기서 나와 정동극장 뒤편을 돌면 중명전이 나온다. 대한제국의 비운과 함께한 이곳은 덕수궁 별채로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궁궐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 중 하나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이곳을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 사절 알현실로 사용했다. 1907년 고종은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된다. 고종은 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이곳에서 파견한다. 

올해 7월 1일 보수공사를 마치고 중명전이 다시 문을 열었다. 전시실에는 당시 을사늑약 체결 장면을 인물 모형을 통해 생생하게 구현해놓았다. 그 뒤편에서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 대감의 모형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일로 파면된 뒤 일제가 준 귀족 작위도 거부하고 스스로 집에 유폐된 채 살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을사늑약과 을사오적에 대해서만 배우다가 중명전에서 한규설 대감에 대해 알게 된 후, 나라를 위해 끝까지 소명을 지켜낸 분들을 역사적으로 더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역사는 바로 이런 인물들 아닐까? 중명전 마당은 간결하고 정돈된 잔디밭이어서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느낀 소감을 한 장의 추억과 함께 남기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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