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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웅산 수지 영욕의 30년

‘미얀마의 어머니’ 인권 대신 민족 선택한 까닭은?

  • 신승현 미얀마 영문 매거진 ‘MYANKORE’ 편집장, 前 KBS PD cnucontents@hanmail.net

아웅산 수지 영욕의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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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족을 둘러싼 구원(舊怨)

라카인주에 사는 무슬림, 즉 로힝야족 문제는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군부의 소수민족 탄압과 연계돼 있다. 1885년 버마를 지배하게 된 영국은 라카인 일대에서 버마족과 아라칸족이 식민통치에 저항하자 벵골만 지역에 살던 벵갈리족을 이 지역에 이주시켜 의도적으로 민족 간 갈등을 부추겼다. 이때 이주한 이들이 지금 로힝야족의 뿌리다. 영국은 이들을 무장시켜 버마족과 싸우게 했다. 로힝야족은 버마족뿐만 아니라 미얀마에서 식민 지배 저항운동을 하던 대다수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로힝야족을 제외한 미얀마 내 종족 모두가 그들을 원수로 여기게 됐다. 

독립 후 미얀마는 영국 측에 로힝야족을 데리고 갈 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이 아무런 조치 없이 철수했다. 이후 미얀마 정부는 이들을 불법이주자로 간주하고 방글라데시와 국경인 라카인주 서부 일대로 밀어냈다. 1982년 제정한 국적법에 따라 로힝야족의 시민권마저 박탈했다. 

민족 갈등에 종교가 개입하면서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미얀마 불교는 이슬람 팽창의 최후 저지선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슬림 탈레반이 바미얀 석불을 파괴하는 것을 본 불교도들 사이에서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2015년에는 로힝야족 가운데 합법적 체류 자격이 있는 사람들조차 서류 발급이 거부됐고 선거권도 빼앗겼다. 이러한 조치는 아웅산 수지가 이끈 민족민주동맹이 2015년 11월 총선에서 승리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새 정부가 들어서도 로힝야에 관한 법을 바꿀 수 없도록 군부가 미리 대못을 박은 것이다. 

로힝야족 문제가 국제 이슈가 된 것은 아웅산 수지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2012년 라카인의 주도(州都) 시트웨(Sittwe)에서 불교도와 로힝야족이 충돌해 200여 명이 숨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유혈 충돌 이후 정부는 로힝야족 12만 명을 난민수용소에 격리하고 학교와 의료시설 접근도 금지했다. 이 시기 아웅산 수지는 오랜 가택연금에서 벗어났고 그해 4월 1일 보궐선거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불교도를 옹호하고 군부를 두둔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왜 로힝야족만 집중적인 탄압을 받는 것일까. 이유는 동화(同化) 거부와 고립 그리고 인구 폭증 등이다. 로힝야족은 미얀마어 사용을 거부하고 그들만의 언어를 고집했다. 라카인 지역에서 로힝야족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불교도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불교 정체성 약화와 민족 잠식에 대한 불안은 이슬람 혐오 정서를 키웠다. 

어쨌든 로힝야족을 압박할수록 군부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다른 소수민족과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독립이나 자치권을 주장하는 소수민족의 무장(武裝)이 강화할수록 미얀마 군대와의 충돌은 격화됐고, 군부에 대해 국민의 신망은 높아졌다.


헌법 위에 군림하는 군부

그리고 지난해 8월, 이른바 ‘8·25 사태’가 발생했다. 로힝야족 반군단체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이 핍박받는 동족을 보호하겠다며 대(對)미얀마 항전을 선포하고 경찰초소 30여 곳을 급습했다. 미얀마군은 ARSA를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군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성폭행, 방화, 지뢰 매설 등이 알려지면서 유엔과 국제사회가 들끓었다. 

이때 수천 명의 로힝야족이 목숨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버리고 국경을 넘은 이가 62만6000여 명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로힝야 탄압이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 버금가는 인도주의적 문제라고 비난했다. 비폭력과 관용의 상징인 불교의 나라이자 인권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라 세계는 더욱 경악했다. 

현재 미얀마는 민간 정부와 군부의 연립정부(Coalition Government) 형태다. 아웅산 수지는 지난 총선에서 군사독재체제를 종식한 게 아니라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대통령, 부통령, 상하 양원 의장, 행정부 등 21개 장관을 확보했을 뿐이다. 의회 권력의 4분의 1과 또 한 명의 부통령, 국가 안보와 치안 관련 3개 장관은 군부 몫이다. 더욱이 미얀마에서는 군부 동의가 없으면 개헌을 할 수 없다. 군부가 유사시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을 수 있고, 아웅산 수지는 대통령이 될 수도 없다. 2008년 헌법은 군부지도자 딴 쉐가 아웅산 수지라는 절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2003년부터 준비한 군부 장기집권 책략이었다. 

군부는 2008년 국민투표를 거쳐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군부는 2010년 11월 13일 아웅산 수지의 15년 가택연금을 해제하기 직전 총선을 실시해 권력을 선취할 정도로 치밀했다. 2011년 3월 30일 군 서열 4위의 떼인 세인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되면서 군부 파워를 지속하는 시나리오가 합법적으로 완성됐다. 현재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지가 ‘대통령 위에 있다면(Beyond the President)’, 군부는 헌법 위에 군림한다. 

군부의 최대 과제는 내부 안정과 소수민족과의 평화, 인도와 중국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의 생존전략이다. 1989년 군부는 버마족 패권에 저항하는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다. 그리고 소수민족과 평화협상을 체결해 내전을 종식하는 성과도 거뒀다. 또 정부 조직에 종교부를 두는 등 불교 종단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고, 2007년 샤프론 혁명(미얀마 승려들이 갑작스러운 유류비 인상에 반대해 일으킨 반정부 시위)을 강경 진압했다. 또 소수민족 무장세력을 소탕하고 그들을 국경선 너머로 쫓아냈다. 이를 수행한 장군들이 딴 쉐의 뒤를 이어 군부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라카인 사태는 미얀마 정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아웅산 수지는 아버지의 꿈이었던 ‘하나의 미얀마’를 실현코자 했다. 이를 위해 아웅산 장군이 버마연방 건립 목적으로 추진했던 삥롱회담을 계승한 ‘21세기 삥롱회담’을 취임 후 두 번이나 개최했다. 일반 시민들도 참여한 이 회담의 주제는 연방주의와 헌법 개정이었다. 그러나 군부의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내용들이라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그 과정에서 로힝야 사태가 터졌다. 결과적으로 아웅산 수지는 수렁에 빠졌고 군부는 기회를 잡았다. 

라카인은 지금 미얀마 정치의 한가운데 있다. 지난 총선에서 외면받은 군부는 라카인 사태로 국민적 신망을 얻었다. 군부가 내세운 ‘불교적 국수주의’에 불교민족주의 세력이 공개적으로 화답하며 대대적인 지지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점점 일반 불교도에게 퍼져 지난 시절 군부에 맞서 뭉쳤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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