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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평양 사내 이충백傳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 | 윤채근 단국대 교수

평양 사내 이충백傳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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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엽과의 악연

1617년 함경도병마절도사 박엽(朴燁)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살인귀라는 별명을 지닌 그의 등장은 평양 사람들에겐 또 다른 재앙이었다. 문과로 등제한 박엽은 전쟁수습기에 병조에서 이력을 시작해 주로 군공을 통해 승진한 인물이었다.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탐욕스러웠다. 

한양 조정에 저항하던 평양 사람들의 기세를 짓눌러놓기 위해 박엽은 매일 아침 자신이 죽일 사람 수를 공표했고 숫자를 채우지 못하면 아전들과 그 식솔들 목이라도 베고 나서야 취침했다. 공포에 질린 아전들은 없는 죄라도 만들어 죄수를 양산해내야 했다. 평양 백성들은 급한 용무 아니면 외출을 삼가고 숨조차 조심하며 쉬었다. 

자경단 패두가 감영 앞길에 노상방뇨했다는 혐의로 목이 잘리자 조직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충백은 고뇌했다. 식인귀 사냥 없는 삶은 아무 의미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리 자주 출몰하던 식인귀들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투전판도 색주가도 사라진 평양성은 삼엄하게 돌아가는 커다란 군영으로 화해 활력을 잃었다. 그렇다면 박엽이야말로 식인귀였다. 놈으로부터 평양을 지켜야만 했다. 충백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 그건 박엽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박엽은 자신이 총애하는 기생 월아를 만나러 가끔 감영을 벗어나 기방을 찾았다. 월아야말로 박엽을 살해할 기회를 만들어낼 유일한 끈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그가 놓친 게 있었다. 혈기를 억누르기에 그는 지나치게 젊은 데다 기생 월아는 너무 요염했다. 월아에게 접근한 충백은 곧바로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고 색계에 눈떠 주체 못 할 격정을 불사르던 그는 거꾸로 박엽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충백이 한양성에 출현한 건 1618년 여름이다. 그해 6월 월아와 동침하던 밤 느닷없이 군졸들이 기방 정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알몸의 충백은 담장을 넘고 성곽을 타고 보통강을 헤엄쳐 박엽이 보낸 사살조를 겨우 따돌릴 수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충백은 거지꼴로 남하해 한양 소의문 장터에 발을 디뎠다. 그는 숨을 멈추고 한양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주시했다. 놀랍게도 온 천지가 식인귀였다. 그는 마침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 



한양의 시장은 나라가 관리하는 시전과 여항에서 자생한 난전(亂廛)으로 나뉘어 있었다. 난전은 불법인 관계로 시전 상인들의 견제를 받는 데다 장마당을 관리하던 평시서(平市署) 관원들의 끝없는 뇌물 상납 요구도 들어줘야 했다. 이 복잡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는 왈자패들이 구역마다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 정점에 한양 최대 난전 배오개 장터의 패두가 있었다. 배오개 패두와 맞닥뜨릴 때까지 충백은 수없는 적수를 때려눕혔다. 어떤 놈은 칼로, 또 어떤 놈은 주먹으로 이기며 실력을 증명한 그는 투전꾼과 개백정 사이의 영웅이 되었다. 

드디어 배오개 패두의 오른팔이 되어 밤낮없이 도박과 창기에 탐닉하던 충백은 패두와 어울리던 술친구들과도 사귀었다. 그 가운데엔 배오개에 이웃한 훈련원 소속 하급 무관들도 있었다. 훈련원의 군사훈련장인 예장(藝場) 부근 주점에서 그들과 섞여 술을 마시던 밤, 충백은 깊이 감춰둔 말을 비로소 털어놓았다. 

“이보기요. 한양성 안에 식인귀 있단 말은 혹 들어봤습네까?” 

술자리는 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술맛을 잃은 무관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마지막엔 충백만 남았다. 그는 폭음했고 사납게 취했다. 충백이 예장에서 난동 부린다는 소식을 들은 패두가 찾아와 앞자리에 앉았다. 패두가 말했다. 

“이충백이, 고마 해라. 니 속 안다. 내도 봤다 아이가.” 

충백은 눈이 번쩍 뜨였다. 식인귀를 보는 자가 또 있었던 것이다. 

“두령도 보이요? 열 놈 중 한 놈은 죄 마귀란 말이요.” 

싱긋 웃은 패두는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속삭였다. 

“누가 모르나? 알지만 말 못하는 기라. 들어봐라. 나랏님이 식인귀라믄 믿겠나? 갱복궁에 드나드는 양반들 태반이 식인귀라믄 니는 믿겠나? 알아도 말조심해야 하는 기라.” 

충백은 희미하게 술이 깨며 패두의 일그러진 얼굴과 그 뒤로 빛나는 초승달을 바라봤다. 차츰 풍경의 초점이 잡혔다. 세상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는 더 이상 순진한 옛날로 돌아갈 순 없을 것 같았다.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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