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줌 인

한국 썰매 개척자 강광배

“미친 듯 썰매 위해 살았고 원 없이 이뤘다”

  • 입력2018-03-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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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계올림픽 최초 루지·스켈레톤·봅슬레이 모두 출전

    • “스켈레톤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종목”

    • 스켈레톤 세계 1위 윤성빈 키워내

    • 무혐의 판명된 업무상 횡령 및 강요 의혹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대한민국 썰매의 1호 올림피언. 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 등 썰매 전 종목 올림픽 출전, 한국 썰매의 개척자…. 강광배(45) 한국체육대학 교수를 향한 수식어들이다. 강 교수는 대학 시절 스키 강사로 활동하다 운명처럼 인연을 맺은 썰매 종목의 매력에 이끌려 1998년 생애 처음으로 루지 국가대표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한다. 이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유학을 떠나 스켈레톤과 인연을 맺었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는 봅슬레이 선수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면서 전 세계를 통틀어 동계올림픽 사상 최초로 썰매 전 종목에 출전한 기록을 세웠다. 선수 생활 은퇴 후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강 교수에게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2018년이 남다른 감회와 의미를 갖는 해일 수밖에 없다. 강원도 강릉에서 강 교수를 만나 동계스포츠에 얽힌 히스토리를 들어봤다. 

    참고로, 썰매 종목인 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스켈레톤과 루지는 납작한 썰매에 엎드리거나 누워서 타는 것이다. 엎드리면 스켈레톤, 누우면 루지다. 봅슬레이는 ‘얼음 위의 포뮬러원(F1)’이라고 하는, 차처럼 생긴 썰매를 타고 달린다. 2인승과 4인승이 있는데 2인승은 선수와 썰매를 합쳐 390kg을, 4인승은 630kg을 넘지 못한다.

    스키 강사 출신

    강광배 교수는 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로 동계올림픽 썰매 전 종목에 출전한 최초의 선수로 IOC 박물관에 기록되어 있다. [동아DB]

    강광배 교수는 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로 동계올림픽 썰매 전 종목에 출전한 최초의 선수로 IOC 박물관에 기록되어 있다. [동아DB]

    강 교수가 썰매 종목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엔 썰매가 아닌 스키를 탔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스키를 처음 접한 건 1991년 무주리조트에서였다. 당시 스키는 부의 상징이었다. 자동차 위에 스키 캐리어를 달고 다니면 부자라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하계스포츠는 88서울올림픽을 통해 발전했지만 동계스포츠는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무주리조트에서 스키를 처음 접했다는 건 직접 탔다는 의미인가. 

    “직접 타긴 했지만 무주리조트에 간 건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 처음엔 일부러 스키를 멀리했다. 뭐랄까. 부의 상징과도 같은 스키는 나랑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스키를 공짜로 탈 수 있었고 선배들이 일과 마치고 스키장으로 향했는데 난 일부러 마음에 두질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식당에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는 근사한 스키복을 입은 채 스키를 메고 나타났다. 그의 모습과 아르바이트 복장을 한 내가 오버랩되면서 묘한 감정이 생기더라. ‘저놈도 타는데 나라고 못 탈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해서 스키장을 찾은 것이다.” 

    처음 타본 스키, 어떤 느낌이 들었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할 만큼 엄청난 스릴과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리프트 운영이 마감된 후에는 정상까지 스키를 들고 걸어서 올라갔다. 주위에서 독종이라고 하더라. 스키 선수로도 활약했다. 전북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후 도 대표로도 뛰었다. 덕분에 눈썰매장을 지키는 일에서 스키 강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다.” 

    스키를 잘 탔고 입상도 할 정도였다면 국가대표에 도전하고 싶진 않았나. 


    “어릴 때부터 스키를 탄 게 아니라 선수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스키 강사를 하면서 사람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선수로는 국가대표가 되기 힘들겠지만 공부하면 국가대표 감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스키에 내 인생을 모두 바치려 했다. 그러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초등학생들을 지도하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장애 5급 판정을 받을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 그때 엄청난 절망감에 휩싸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던 것 같다.”

    국가대표의 꿈

    스키 강사를 생업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한 강광배. 불의의 부상으로 생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된 사실이 그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방황을 거듭하며 피 끓는 청춘을 보내던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무주리조트에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려 한 것이다. 문제는 그가 이미 썰매 종목인 루지 국가대표 선발전 공고를 보고 국가대표의 꿈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솔직히 루지가 무슨 종목인 줄도 몰랐다. 내 눈에는 ‘국가대표’라는 단어만 띄었다. 스키 국가대표 감독이 꿈이었는데 부상으로 그 꿈을 이룰 수 없다면 루지 선수로라도 태극마크를 달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무주리조트에서 날 채용하고 싶다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고민이 많았다. 내 꿈은 국가대표가 되는 것인데 무주리조트에 취업하면 그 꿈은 영영 이룰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면접을 보려고 전주에서 무주까지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자전거라니, 그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갔다는 건가.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인생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터라 자전거를 타며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양복 담은 가방을 메고 자전거로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친구가 무주리조트 앞에 있는 설천이란 곳에 사는데 그 친구네 집에서 샤워를 하고 양복으로 갈아입고 리조트까지 향했다. 리조트 관계자와 면접을 보기 전 내가 먼저 이런 얘기를 꺼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지만 오랜 꿈인 국가대표를 위해 루지 선수가 돼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습니다. 소중한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고. 굉장히 어이없어하신 걸로 기억이 난다. 내가 멘토로 삼던 지도교수님에게 이런 설명을 드렸다가 ‘멍청한 놈’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솔직히 내가 봐도 한심했다. 루지 국가대표 선발전에 뽑힐 거란 보장도 없고, 루지 경기장도 없는 한국에서 루지 국가대표에 뽑히겠다며 취업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루지로 올림픽 첫 출전

    강 교수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 스켈레톤으로 출전했을 때 모습. [동아DB]

    강 교수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 스켈레톤으로 출전했을 때 모습. [동아DB]

    그래서 루지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했나. 

    “2위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루지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할 수 있었다. 스키장 아르바이트생이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훈련 환경이 열악했다. 전용 훈련장이 없어 여름에는 아스팔트 언덕길에서 연습용 썰매를 타고 내려왔다.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탄 건 이듬해 전지훈련을 가서였다.” 

    취업을 포기하고 선택한 국가대표였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치른 소감이 궁금하다. 

    “한마디로 촌놈이 출세한 셈이다. 종목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축제였다. 이토록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에 섰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성적에 상관없이 모든 걸 다 이룬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에는 3명의 한국 루지 선수가 출전했다. 강광배와 대학 후배인 이기로, 레슬링 선수 출신 이용 현 봅슬레이스켈레톤 대표팀 총감독이다. 성적은 처참했다.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탄 경험이 절대 부족하다 보니 썰매를 조종한 게 아니라 썰매가 선수들을 데리고 내려온 수준이었다. 

    올림픽 정식 경기를 앞두고 훈련하면서 갈등이 심했다고 들었다. 이유가 무엇이었나.

    “얼음 위에서 훈련할 때마다 실력과 경험 부족으로 벽에 부딪히는 바람에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죽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더욱이 대표팀을 이끄는 지도자가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집합시킨 후 기합을 줬다. 낮에는 썰매 타느라 온몸이 멍이 들었고, 저녁에는 기합 받느라 죽을 맛이었다. 다른 나라 선수들도 지켜보는데 얻어맞는 일이 반복됐다. 마지막에는 도저히 못 참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지도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스켈레톤을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루지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그분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서 맞아도 꼼짝할 수 없었다. 지금 같으면 SNS를 통해 지도자의 만행을 고발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미움과 원망보다 측은지심이 들더라.”

    거듭된 부상과 시련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마치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유학을 떠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유학을 떠난 건가.

    “루지를 하며 얼음 위에서 한없이 썰매를 타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 한이 맺힌 것이다. 때마침 국제루지연맹(FIL) 군터 렘머러 수석 코치를 알게 됐고 그는 아시아에서 루지를 제대로 발전 보급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며 나를 지목하면서 FIL에 레터를 보내 내게 장학금 지원을 요청했다. FIL은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난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오스트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부하면서 루지를 더 연구하고 경험해 좋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새롭게 했다. 그런데 인스부르크에서 썰매를 타다가 다시 부상을 당했다. 대한루지연맹에서는 세대교체를 이유로 대표팀 명단에서 날 제외시키더라. 명단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FIL로부터 10원도 받을 수 없었다. 집에다 비밀로 하고 인스부르크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전화해선 ‘어제 꿈자리가 사납던데 별 일 없느냐’고 물으시는 게 아닌가.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나선 펑펑 울었다. 도통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실컷 울고 나니까 한결 개운해지더라.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루지는 부상으로 할 수 없지만 공부라도 하고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덕분에 독일어를 배웠고, 독일어 시험에 합격한 후 박사 학위를 밟았다.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다. 결국 2년 만에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새 10kg이 빠져 가족들이 날 못 알아볼 정도였다.”

    강 교수에게 오스트리아 유학 생활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그는 “교수 강광배는 물론 개척자 강광배도 없었다”고 말한다. 거듭된 부상과 수술로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불운한 인생에 회의를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포기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극복해낸 자신이 한없이 대견했다고 말하는 그다.

    코리아 번개

    부상으로 루지를 포기한 상태였는데, 스켈레톤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 

    “인스브루크 대학의 지도교수가 내게 어떻게 유학을 왔느냐고 물었다. 루지를 하러 왔다가 부상으로 못 하게 됐다고 말씀드렸더니 스켈레톤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루지도 그랬지만 스켈레톤도 처음 듣는 종목이었다. 엎드려 타는 종목이라 부상 부위에 무리가 가지 않을 거란 얘기도 덧붙이더라. 곧장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를 소개해줬고 그 선수의 안내로 스켈레톤을 처음 타보게 됐다. 그런데 그 느낌이 정말 시원했다.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루지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종목 같았다. 오스트리아 지역 대회에서 1위에 올랐을 때는 지역 신문에 ‘코리아 번개’로 소개됐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는 스켈레톤연맹이 없던 걸로 알고 있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선수로 뛰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대표로 뛰었지만 태극마크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한국루지연맹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자비를 들여 국제연맹에 가입 신청서를 낸 후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출전할 수 있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스켈레톤 선수로 출전한 다음 후배들에게 스켈레톤을 물려주고 나왔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봅슬레이 4인승 한국대표팀 감독 겸 선수로 출전했다. 세 종목의 올림픽 출전을 이룬 셈이다.

    “밴쿠버 올림픽에는 세 종목에 한국 선수들이 모두 출전하길 바랐다. 그래서 봅슬레이를 떠올린 것이다. 스타트 연습장은 물론 훈련장도 없는 한국에서 봅슬레이를 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루지, 스켈레톤을 하면서 트랙에 대한 공포감이 없지만 다른 선수들은 한 번도 봅슬레이를 탄 적이 없어 그 공포감이 심했다. 올림픽 출전권을 땄지만 봅슬레이를 살 만한 돈이 없었다. 연맹도 난색을 표했다. 당시 CF 출연료와 개인 지원 등의 방법으로 봅슬레이 4인승 장비를 구입해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이 장비는 올림픽 이후 연맹에 기증했다). 밴쿠버 올림픽을 마치고 나니 내 자신이 지쳤다는 걸 깨달았다. 올림픽에서의 1분을 위해 4년을 준비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에 한국 선수들이 모두 출전했던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끝으로 ‘썰매 개척자’의 삶을 마무리했다. 미친 듯이 썰매만 위해 살았던 삶이었고, 원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내며 살았다. 이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4회 연속 동계올림픽 출전

    썰매 불모지의 나라에서 1998년부터 2010년까지 4회 연속 동계올림픽 무대를 밟은 강광배. 그는 역대 올림픽에서 썰매 3종목에 모두 출전한 전 세계 유일의 선수다. 한국 썰매를 세계 수준으로 키워낸 개척자로 살면서 기적 같은 행보를 보인 그의 진기록은 스위스 로잔의 IOC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후 후배 양성에 주력했다. 그중 스켈레톤 세계 랭킹 1위인 윤성빈이 제자라고 들었다. 

    “처음 윤성빈을 뽑았을 때는 실력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인데, 운동신경이 있는 반면에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옛날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성빈이를 한국체육대학 봅슬레이스켈레톤팀으로 데려와 다른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게 했다. 잠자리와 식사는 우리 집에서 맡았다. 성빈이는 훈련을 하면 할수록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뛰어난 재능을 뽐내며 단숨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루는 성빈이에게 이런 얘기를 해줬다. ‘평창올림픽 때까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주인공이다’라고. 당시 성빈이는 그 말이 무슨 말인 줄 몰랐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 성빈이가 스켈레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게 보이면서부터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더라. 성빈이는 스켈레톤 입문 5년 만에 세계 랭킹 1위에 올랐고 평창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꼽힌다. 평창뿐만 아니라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할 예정이라 윤성빈의 스켈레톤 독주 체제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평창 이후

    강광배 교수는 1998년부터 2010년까지 4회 연속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박해윤 기자]

    강광배 교수는 1998년부터 2010년까지 4회 연속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박해윤 기자]

    2002년부터 2010년까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기술전문위원과 선수위원회 위원, 2011년 평창올림픽조직위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올림픽 유치에 힘쓴 것으로 알고 있다. 

    “스켈레톤과 봅슬레이 선수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도전을 가장 멋지게 소화해냈다고 자부한다. 올림픽 유치도 마찬가지였다. 평창이 두 차례나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건 동계스포츠의 저변이 미흡했고 동계스포츠를 하는 선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IOC 위원은 내게 ‘한국에 눈이 오니? 썰매 선수는 몇 명이나 돼?’라고 물을 정도였다. 평창올림픽을 유치해야 썰매도 살고 대한민국 동계스포츠가 동반 성장한다고 믿었다. 강원도 평창에 동계올림픽이 열리면서 동계스포츠도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내가 처음 스켈레톤, 봅슬레이 장비를 구입할 때 연맹 지원금이 0원이었다. 지금 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1년 예산이 60억 원이다. 놀라운 변화와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날지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잘 끝날 거라 믿는다. 어느 올림픽보다 준비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잘 해낼 수밖에 없다. 모든 선수가 최선을 다할 때 올림픽을 보는 사람들은 감동을 느낀다. 평창에서 수많은 드라마가 펼쳐지길 바란다. 동계올림픽 기간에만 보이는 반짝 관심이 아니라 정부와 국민의 관심이 꾸준히 지속되었으면 한다. 하계 종목처럼 동계스포츠 종목도 골고루 성장하고 사랑받는 국민 스포츠가 되길 바란다.” 

    아직 강광배 교수의 스토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가슴에 품고 있던 ‘그 사건’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2015년 강 교수는 익명의 제보로 인해 업무상 횡령 및 강요 혐의를 받았다. 강 교수가 봅슬레이 대표팀을 이끌던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각종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었다. 봅슬레이 장비 구입 대금조로 받은 돈을 빼돌리고 후배 코치들에게 지급된 수당도 가로챘다는 게 골자였다. 강 교수의 모친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선수들을 강제 노역시켰다는 의혹도 받았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

    검찰 조사 결과 봅슬레이 구입 대금을 빼돌렸다는 혐의는 이 돈으로 봅슬레이 부품을 추가 구매한 사실이 밝혀졌고 후배의 코치 수당을 뜯어냈다는 의혹도 무혐의로 판명됐다. 강제 노역 관련해서도 선수들이 강 교수 모친의 펜션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자, 휴식 시간에 보수 작업을 도운 것이지 강제로 작업에 동원된 게 아니라는 선수들의 진술이 추가됐다. 

    강 교수를 궁지로 몰아넣은 이들은 그동안 썰매 종목의 개척자로 활약한 강 교수의 반대 세력이었다. 한국 썰매가 무섭게 성장하자 강 교수에게 쏠리는 힘을 분산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강 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정말 죽으려고 했다. 너무 억울하고 또 억울해서 발톱이 빠질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며 등산을 다녔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술을 안 마시면 버티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그 일도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고 나선 차를 한잔 마셔도, 맥주를 마셔도 이전과는 다른 맛을 느끼게 된다. 사람 관계도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난다. 어떤 스트레스를 받아도 스트레스로 느끼질 않는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족들한테 더 집중하게 되었다. 썰매에 미친놈이 호되게 당했다. 누굴 탓하겠나. 그 또한 내 탓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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