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호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美·英·佛에서의 악전고투 1963~1972

장인인 남재 김상협의 조언… “대한민국은 바다로 나가야”

  • 입력2018-03-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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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을 경험한 내가 어떻게 하면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평소의 생각이 웅대한 해법체계의 건설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검찰과 법원에서는 조심스럽게 임관 의향을 타진해 왔지만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아 막연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 15회, 16회를 반년 간격으로 실시하는 바람에 1년에 2차례 사법시험 합격자가 배출됐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1963년 3월 서울대 사법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대학 재학 중인 1962년 10월 고등고시 행정과를 통과했고, 졸업 직전인 1963년 2월 사법과에 합격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법대학원에 진학했다. 사법대학원은 사법연수원의 전신으로 내가 입학하기 1년 전 신설된 판·검사 및 변호사 훈련기관이다. 

    얼마간 출석해 강의를 들어보니 교수진 대부분이 서울대 법대에서 가르쳐주신 은사여서 마음이 편안했으나 강의 내용은 법대 2~3학년 때 배운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는 무책임한 반복이었다. 사법대학원의 준비 부족과 무책임함을 경멸하면서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할 생각을 접었다. 건방진 말이지만 별로 새롭거나 배울 만한 것이 없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으며 일본 판례에 경도되는 현실에도 불만이 있었다. 

    사법대학원 운영에 실망한 나는 행정부 관료로 진출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여기고는 총무처에 임관 신청을 했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고등고시 행정과 제1부 합격자는 내무부 지방국에서 수습을 마치면 곧바로 군수(사무관)로 나가고 치안국에서 수습 딱지를 떼면 경찰서장(총경)으로 임명하던 시절이다. 이것이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관계 진출 정석이었다. 나는 당시 내각사무처 사무관으로 발령이 났다.

    대리석으로 지은 중앙청으로 출근

    1965년 군법무관 복무시절. 맨 왼쪽이 나다.

    1965년 군법무관 복무시절. 맨 왼쪽이 나다.

    나는 사법대학원은 시험 때만 나가고 지금은 헐리고 없는 우람한 대리석 건물인 중앙청으로 출근했다. 지금 같으면 사리에 어긋나는 겸직을 했다고 비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단기간의 조건부 임용을 마치고 1964년 초 총무처 직위분류과 제5계장의 보직을 받았다. 내 계에는 직원이 10명 넘게 있었는데 나를 보좌하는 두 명의 주사(6급)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보통고시 출신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해 주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분이 각각 버티고 있었다. 계원으로는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보초 서던 경력자, 보통고시 합격자, 다른 부처에서 밀려서 넘어온 분 등 실로 출신과 경력이 다양한 사람들과 타자수 미스 오가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나보다 많았다. 5·16 군사정변 이후 얼마 안 됐을 때여서인지 혁명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육사 8기생이 군복을 입은 채 직속 국장으로 부임하는 등 긴장된 분위기에서 근무했다. 

    하루는 아버님이 나를 불러놓고 공무원은 박봉 탓에 자제하려고 해도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데다 부정부패에 빠져 신세를 망치는 수가 있으므로 매월 내 월급액과 동일한 액수를 용돈으로 줄 테니 절대로 유혹에 빠지지 말고 되도록이면 부하 직원에게 베풀면서 살라고 단단히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님이 준 돈으로 당시 거의 유일한 대중용 술인 카바이트로 발효시킨 막걸리를 직원들에게 자주 샀고 비싸서 잘 못 찾는 무교동 보신탕집에 데리고 가 보신을 시켜줬다. 사법대학원 동료들과는 종로5가 쌍과부집에서 두부찌개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사법대학원은 원래 2년 과정인데 3기생인 우리는 1년 반 만에 수료했다. 1964년 9월 수료 직후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 산하 보병학교에 군법무관 훈련을 위해 입대했다. 2대 독자에 해당되므로 사병으로 입대하면 6개월로 병역을 마치는데도 법무관 요원이 극도로 부족하던 시절이기에 법무관으로 징집돼 3년간 복무했다. 전국에서 군기가 가장 세다는 전투교육사령부에 준사관후보생과 동시에 입소했다. 같은 날 입소한 간부후보생들이 우리를 기합 주고 못살게 굴었다. 같은 날 함께 입소했지만 입소시간이 우리보다 약간 먼저이므로 선배로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2개월의 훈련을 마치면 중위 계급장을 다는 데 비해 그들은 1년간의 고된 훈련을 받은 뒤 소위 계급장을 다는데도 우리를 아주 힘들게 들볶아대는 것이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이할꼬

    육군본부에서 1년 반 근무한 후 강원 인제군 원통리 11사단으로 전근 배치됐다. 서울에서 가장 먼 38선 이북인 데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이할꼬’라는 말을 듣는 오지 중 오지다. 원통리는 당시 서울에서 춘천과 양구를 거쳐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12시간가량 가야만 도달하는 마을이었다. 선임하사가 얻어준 하숙방은 초가지붕 이엉 밑에 감추어진 서까래의 끝이 내 턱쯤에 와 닿는 나지막한 곳이었다. 문화생활이란 일절 없는 데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심한 욕설이 담긴 북한의 대남방송이 밤새도록 들려와 숙면을 취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서울에 나왔다가 법무참모부에 오래 근무한 장교들을 일정한 조건하에서 법무관으로 임명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돼 논란이 이는 것을 알았다.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가 매우 적어 군 미필 합격자가 법무관으로 모두 입대해도 군의 법률 수요를 충당할 수 없으므로 만성적 결원을 충원한다는 명분하에 손쉬운 전형을 통해 일단의 보병장교를 법무장교로 임명한 후 10년을 복무하면 변호사 자격을 준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같은 계획은 법조계 인사들의 심한 저항을 받았다. 몇몇 동기생을 만나 소상한 전말을 들었는데 약국에서 10년간 심부름했다고 일정 조건을 갖추면 약사 자격을 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의견서를 작성하고 동기생들의 서명날인을 받아 야당 총무 등에게 수교했다. 이 같은 의사표시가 나중에 큰 문제로 비화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군 당국은 허가 없이 집단행동에 나섰다고 문제를 삼으면서 강경하게 대응했다. 주동자급으로 분류된 나를 포함한 3명의 군법무관은 서울에서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다. 박모 육군 법무감은 이 사건이 출세와 진급에 지장을 줄까 우려해서인지 지레 엄단을 주장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일을 키웠다. 나를 포함한 현홍주, 김찬진 등 이른바 주동자 3인은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김유후, 장기욱 등 선배 법무관의 사주를 받아 일을 벌였다는 각본에 따라 파면됐다. 김유후, 장기욱 등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 두 사람이 배후라고 허황되게 지목하는 등 전연 승복할 수 없는 웃기는 각본을 작성해 유치하고도 형식적인 수준의 징계가 이뤄진 것이다. 형사사건의 수사와 사건 처리의 수준, 징계조사와 그 절차 등이 아주 후진적인 시절이었다.

    열대 기화요초 가득한 뉴올리언스

    파면의 법적 효과를 꼼꼼하게 알아봤다. 당시에는 파면당하면 즉시 불명예 제대해야 하고 3년간 공직 취임이 제한되는 불이익이 있었으나 3년이 경과하면 징계에 따른 불이익이 모두 실효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당국자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유치하고 실망스러워 파면을 감수한 채 즉각 제대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은사 김기두 선생님의 권고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둔 것이 있었다. 결연한 마음으로 1967년 7월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있는 명문 튤레인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에 참가하고자 뉴욕에 머물렀다. 소낙비의 빗방울이 굵은 것에 놀라 ‘미국 것은 빗방울조차 크네’라고 중얼거린 생각이 난다. 외국에서 온 풀브라이트 유학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프린스턴대 기숙사에 입주했다. 한국이 그리우면 주머니 사정 탓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학 앞 유일한 중국 음식점에서 두부찌개 비슷한 얼큰한 음식을 사 먹곤 했다. 뉴욕 시내에 나가도 한국 음식점의 수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서울에 전화를 걸려면 신청하고도 여러 시간을 기다려야 통화가 될까 말까 하던 시절이다. 

    나는 풀브라이트로부터 등록금과 책값 외 매달 270달러씩 생활비를 받았는데 독신이므로 견딜 만했다. 학생 식당에서 70센트 정도에 한 끼 사 먹을 수 있었다. 처음 보거나 신기한 음식이 매우 많았다. 프린스턴대 구내식당에서 종이팩에 든 신선한 우유를 처음 보았다. 한국에서는 미8군에서 유출된 분유를 끓는 물에 타 먹는 게 고작이었다. 아이스크림이 그처럼 종류가 많은 것도 미국에 도착해 알았는데 원하는 종류를 정확히 말할 줄 몰라 사 먹지 못한 기억도 있다. 

    튤레인대가 터 잡은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니 처음 접해보는 열대지방의 기화요초가 나를 반기고 식민지 시대부터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아 뒤섞인 독특한 문화적 특색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획기적 흑백 통합 판결을 완벽하게 집행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남부였기에 흑인도 백인도 아닌 나는 곤혹스러운 경우가 간혹 있었다. 버스나 전차에 인종 간 좌석 배치 표시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공용건물 입구의 인종별 출입구 표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잘 들리지도 않는 영어로 악전고투

    1966년 8월 30일 서울대 사법대학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다.

    1966년 8월 30일 서울대 사법대학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다.

    내가 튤레인대에서 LL.M(법학석사)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서울에서 사달이 났다. 나는 파면 처분을 감수하고 불명예 제대한 민간인 신분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도미했고, 3년만 공부하고 귀국하면 신분상 불이익이 해소된다고 믿었으나 문제가 생긴 것이다. 

    62명의 동기생을 한꺼번에 징계 처분한 법무감실에서는 일이 커져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지 당사자 모두에게 불복항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전원이 항고한 결과 나의 경우는 파면이 강등으로 한 단계 경감됐다. 중위로 군에 복귀해 3개월 미만의 잔여기간을 복무해야 했는데 나는 미국에 거주했다. 후일 알고 보니 박모 법무감이 신경질을 내면서 모두 빠짐없이 항고를 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통에 선임하사가 겁을 먹고 나의 군번도장을 임의로 찍어 항고서류를 올린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징계 감경 처분에 따라 병영에 복귀하더라도 제대가 두세 달 남은 경우에는 집에서 제대 준비를 하는 게 당시의 관례였다. 귀국 후 잔여기간 또는 그 이상을 복무하도록 처리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었으나 박모 법무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길길이 뛰면서 나를 당장 귀국시켜 영창에 처넣으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외무부를 통해 미국 정부에 송환 요청을 하라고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1967년 로이 헌트와 북한산에서.

    1967년 로이 헌트와 북한산에서.

    수년 후 귀국해 서울법대 교수가 된 후 이 고약하기 짝이 없는 법무감을 여러 번 만났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군대에서 예편한 장성들에게 여기저기 자리를 만들어 감투를 나눠줬다. 이 사람도 아무런 전문성도 없이 한국제당협회라는 민간단체의 상근 부회장 자리를 얻었는데 업계에서 선출된 협회 회장이 나의 처삼촌이었다. 그런 연고로 가끔 처가 쪽 대소사에서 그를 만났지만 나는 끝내 이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튤레인대에서 잘 들리지도 않는 영어로 악전고투하면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처럼 한국인 선배가 남겨놓은 각종 요령과 자료도 없었으며 한국인 거주자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힘들게 공부했다. 

    남부의 뉴올리언스는 전형적인 미국이 아니라고들 한다. 이 지역은 스페인, 프랑스 및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들의 문화가 흑인노예들의 생활과 뒤섞여 독특한 분위기와 음식, 음악, 생활양식을 창조해낸 곳이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보이는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낭만이 은근하다. 그러나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동백림 사건으로 뒤숭숭하던 파리

    법무부에서 프랑스 사법관양성학교에 파견해 1년간 교육훈련차 파리에 와 있던 외우 김유후 검사와 연락이 닿아 1968년 5월 일단 파리로 갔다. 

    파리는 학생 시위가 최고조에 달해 최루탄이 터지고 돌이 날아다니는 험악한 상황이었다. 드골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좌파 학생들의 시위였는데 프랑스 경찰은 참으로 무자비한 데다 시위하는 학생을 진압하고 잡아가는 방법이 아주 폭력적이다. 유럽은 미국식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정부가 통제하는 사회적 민주주의요 규제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파리 한인 사회 분위기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뒤숭숭했다. 중앙정보부 비밀요원들이 파리에도 잠입해 북한 쪽과 왕래했거나 북한의 도움을 받은 유학생들을 한밤중에 납치해 한국으로 송환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더 많은 유학생이 유사한 방법으로 강제 송환된 모양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규모면서 가난한 파리 한인학생사회는 서로를 의심해 내왕이 끊어지는 등 험악한 분위기였다. 

    유럽 사회는 미국 등 신세계와 달리 외국인 유학생이 학비가 떨어졌다고 해서 허드렛일로 용돈을 벌 수 있는 사회구조가 아니었는데 가난에 시달린 일부 유학생이 북한 공작원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유럽은 일반적으로 사회민주주의가 우세했으며 북한 정권의 본질을 잘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공작원이 유럽 국가에 침투해 가난한 한국 유학생을 유혹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소문으로는 북한 공작원의 유혹에 넘어간 유학생은 우선 동베를린으로 초대돼 그곳에서 평양냉면 등을 대접받고는 북한을 몰래 다녀오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공산국가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 공산국가의 우표 등 물품을 사도 국가보안법 위반 시비가 일어나던 시절이었지만 유학생들의 북한 왕래 소문은 한인 사회에 조금씩 퍼져가고 있었다. 

    이렇듯 우려스러운 사태를 발본색원한다고 중앙정보부가 앞장서 전광석화 같은 방법으로 혐의자를 밤에 자는 중에 담요로 싸서 납치해 와버렸으니 남의 나라의 주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이런 국제법상 무지막지한 일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한국과 여러 유럽 국가의 관계가 수년간 냉각되고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가 몹시 훼손된 일은 모두가 아는 바다.

    총파업으로 도시 기능 마비… 걷고 또 걸어 파리 탈출

    1968년 5월 27일 미국 튤레인대 법대, LL.M. 과정에 입학한 8인. 맨 오른쪽이 나다.

    1968년 5월 27일 미국 튤레인대 법대, LL.M. 과정에 입학한 8인. 맨 오른쪽이 나다.

    나 나름대로 파리 생활에 익숙해갔으나 프랑스의 정세는 더욱 악화돼 강력한 전국노조가 총파업(General strike)을 결의했다. 총파업의 위력은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도 하기 어렵다. 

    총파업에 돌입하면 경제·공공활동이 정지된다. 비행기·지하철·버스·전차가 멈춰 서고 통신 업무, 즉 편지배달·전화통화·소포배달이 중단되며 식료품점, 주유소, 약국, 신문·잡지 판매소, 청소 작업 등 일상생활에 긴요한 서비스가 모조리 중단된다. 상점이 문을 닫으며 거래가 모두 정지된다. 

    나처럼 외국에서 온 유학생은 총파업 때 굶어 죽기 딱 좋은 상황에 처한다. 나는 버티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걷고 또 걸어 파리 시내를 벗어났다. 총파업은 파리 시내만을 표적으로 한 것이므로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상점에는 채소와 과일은 물론 신선한 빵이 풍성하게 진열돼 있었다. 평소에 딱딱해서 잇몸을 다치게 한다고 불평하던 바게트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 미증유의 상황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입학 허가를 받아둔 것이 있었다. 프랑스법을 파리에서 공부하는 것을 포기한 채 파리 교외에서 히치하이크(hitchhike·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는 일)로 벨기에 브뤼셀까지 간 다음 런던을 거쳐 케임브리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듣던 대영제국에 온 것이다. 1968년 9월 말 모처럼 하늘이 맑은 날 입학식을 했다. 케임브리지 시장과 여러 귀빈이 임석해 성대한 환영식을 했다. 귀족인 시장 말씀 중 두 가지가 잊히지 않는다. 신입생 여러분은 두 가지 문제로 고통당할지 모르는데 하나는 나쁜 기후, 다른 하나는 임석하신 귀부인들 앞에서 말씀드리기 뭣하나 그들이 요리하는 형편없는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후로 나는 이 말이 얼마나 진실인지 뼈저리게 느끼면서 지냈다. 

    살면서 보니 해가 나는 날이 별로 없는 데다 기후가 변화무쌍했다. 영국인의 식사는 다섯 가지 채소와 고기를 삶아 소금을 찍어 먹는 게 다였다. 삶은 감자, 완두콩, 당근, 미니양배추, 브로콜리에 어떻게 익혔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고기 한 점을 곁들여 소금을 뿌린 후 맛없는 빵과 함께 먹는다. 지금은 영국의 음식이 다양해졌으며 맛도 있지만 그 당시의 음식은 형편없었다. 

    주거 환경도 수준 미달이었다. 처음 입주한 하숙방은 난방시설이 전연 없었다. 손바닥만 한 전기난로가 있는데 가운데를 지나가는 가느다란 열선 한 개가 내는 열을 반사경을 통해 받는 구형이었다. 문제는 전열기 뒤에 달려 있는 동전 통에 10펜스를 넣으면 10분간 전열선이 빨갛게 열을 내다가 꺼지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10분마다 동전을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유럽 대학과 미국 대학의 차이

    한국에서 연식정구만 알던 나는 푸른 잔디밭에서 치는 테니스가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처음 접해본 론(lawn·잔디밭)테니스를 한동안 즐겼고 윔블던에서 열린 경기에도 구경 갔다. 조정 팀에 가입해 열심히 노를 젓기도 했다. 귀국 후 한국에 소개가 안 된 조정 보급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조정을 모르는 재벌가에서 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은 후 직원을 투입해 독점 운영하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다. 

    문명, 부, 사상 및 학문과 예술의 축적, 전통과 질서 의식 등 영국의 엄청난 온축을 부러워하면서도 일상생활 경험에서는 큰 실망을 느꼈다. 학생회관에서 식사할 때 음식을 많이 퍼가는 아일랜드 학생을 향해 온갖 경멸의 말을 공공연히 내뱉는 영국 학생들을 보곤 했다. 또한 내가 모처럼 음악회나 뮤지컬 또는 연극을 관람하고자 영국 여성과 함께 기차를 타고 런던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행인들이 큰 소리로 어떻게 영국 여성이 유색 인종과 데이트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영국인들이 가진 우월감은 참으로 못 말리는 수준이다. 영국의 것이 세계 표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야만적이긴 하나 무시할 수 없는 미국인을 제외하면 자기네가 세계 제일이라는 태도를 서슴없이 보인다. 강한 우월감, 이중인격적 태도, 인종차별적 언행이 상당히 불편했다. 

    해를 넘기고 케임브리지 생활을 마감했다.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코넬대는 뉴욕 시내에서 자동차로 5시간 반가량 걸리는 자그마한 도시 이타카에 있다. 나는 이곳에서 공부를 참으로 열심히 했다. 학위 과정을 빨리 마쳐 학비를 절약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새도록 논문 자료를 정리했다. 

    잠시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대학을 경험해본 바로는 대학이 유럽에서 처음 생겨났을 때는 소수의 귀족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던 것 같다. 또한 단순한 지식의 전수만이 아니라 인격 함양도 동시에 강조한 전(全)인격적 인재 양성기관이었다. 대학이 소수정예를 위한 교육을 제공했으므로 국립임이 당연시됐다. 다수의 유럽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교육열이 남다른 이민자 가정 부모의 요구를 소화하고자 대학이 우후죽순 설립됐고 각 대학은 많은 수의 학생을 받아 소수정예가 아닌 대규모 교육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교육의 질이 저하되는 것을 막고자 시험에 따른 학점제, 필수과목 지정, 기타 여러 가지 학사 제한 및 감독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소수정예의 자유로운 전인격적 교육의 전통을 가진 유럽 대학의 안목으로 미국의 대학을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한국의 대학은 일제강점기에는 유럽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셈이나 광복 후에는 미국의 압도적 영향하에 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미국 로펌에 변호사로 들어가

    나는 학위 공부를 마친 후 이타카의 자취방을 떠나 뉴저지주 유니언시티의 고층아파트로 이사했으며 맨해튼 최남단 월스트리트의 해상법 전문 로펌에 취직했다. 역사가 오래됐으며 해상 관계의 피고, 즉 해운회사만 전문적으로 대리하는 해상법계 세계 최대 로펌이었다. 

    1970년만 해도 미국에서는 한국을 잘 몰랐다. 한국법 관련 수요나 한국과의 거래를 위해 한국인을 고용하는 사례가 전무했다. 나는 운 좋게도 박사학위 논문이 주목받아 어렵사리 채용됐다. 함께 어울리던 또래의 신출내기 동료 미국 변호사들이 지금은 은퇴했는데 이따금 교신하거나 성탄 카드를 주고받는다. 

    로펌에 들어가기 한 해 전 장래의 처부모님이 코넬까지 오셔서 나를 보고 다녀가신 뒤 집안 간 공론이 성사되고 뉴욕에 사는 처이모 내외분의 중간 역할로 인해 이화여대 졸업 후 학사 편입해 코네티컷 칼리지를 마친 아내와 약혼했다. 

    나는 대학원과 병역을 마치고 비로소 해외 유학을 했으므로 늦깎이 유학생에 해당할 것이다. 영어 발음이 원어민처럼 되지 않았으며 정서적으로도 그들의 사회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으나 가정을 이룬 후 유학을 온 분들보다는 훨씬 다채롭게 서구 문화를 익혔다. 

    1971년 하반기 귀국하자마자 병역 문제 해결에 착수했다. 군의 경위 조사를 거친 후 석 달이 채 안 되는 잔여기간을 복무한 다음 제대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 그대로 시행했다. 제대한 뒤 한국에서의 나의 진로에 관해 무척 고심했다. 

    나는 여러 어른을 찾아뵙고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 먼저 서울법대 은사님을 여러분 찾아갔다. 대부분의 선생님이 당신들이 교수로서 처한 여러 가지 경제적 및 기타 어려움을 들면서 나처럼 진로에 선택의 여지가 많은 사람이 구태여 고달픈 학자 생활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의 말씀을 이구동성으로 해주셨다. 

    집안에서는 법조계나 정부에 출사하는 것에 대해 찬반의견이 팽팽했다. 유학 후 귀국하고 보니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동기생들이 이미 고을의 군수를 지냈는가 하면 큰 도시의 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이른바 ‘고문 패스’(고등문관시험 합격)를 하면 어린 나이에도 군수 발령을 내던 관행이 계속됐기 때문인 것 같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상태에서 군수로 발령받으면 대학생 교복을 입은 채 부임하기도 해 그런 사람을 일본어로 이른바 ‘쓰메에리 군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쓰메에리란 대학생 교복 목둘레 안쪽에 달린 흰 플라스틱으로 된 칼라를 뜻하는 말이다. 

    당시에는 사법시험 합격자도 아주 어린 나이에 판·검사로 발령받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경우 아무리 어린 판·검사라도 영감이라고 존칭을 쓰면서 모시는 시대였다. 당시 90세가 다 되신 할머니께서는 옛날 생각으로 내가 어느 고을의 군수나 아니면 검사로 진출하는 것을 역설하셨다. 부모님은 나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이셨다.

    “공·사법 아우르는 해법체계 구축해보라”

    나는 1971년 11월 4일 결혼했다. 이희승 선생이 주례를 맡았다.

    나는 1971년 11월 4일 결혼했다. 이희승 선생이 주례를 맡았다.

    1971년 11월 4일 함께 귀국한 약혼녀 김명신과 타워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무직자 둘이 결혼부터 한 셈이었다. 

    고려대 총장으로 막 부임해 몹시 바쁘신 장인어른(남재 김상협 선생)을 뵙고 오랜 시간 진로를 상담했다. 그분은 당신의 의견을 먼저 명확하고 강하게 개진하는 편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권장하면서 당신의 학자 생활에 비춰 교수로 출발하는 것도 좋겠다는 점과 일단 법학교수가 되면 현재 사법 분야에 속하는 상법전 제5편 해상법과 공법 분야에 속하는 해양국제법을 아울러 이를 모두 포섭하는 거대한 해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아 학문에 도전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씀했다. 한국이 유라시아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반도이므로 바다로 나아가야 하며 해운의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뜻이 담긴 조언이었다. 장인께서는 어느 분야를 전공하더라도 국제적 동향을 면밀히 주시해 분석 및 비교해야 한다는 말씀도 곁들였다. 

    6·25전쟁을 경험한 내가 어떻게 하면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평소의 생각이 웅대한 해법체계의 건설로 서서히 바뀌어가는 과정이었다. 검찰과 법원에서는 조심스럽게 임관 의향을 타진해 왔지만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아 막연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숙고한 끝에 1971년 9월 서울대에 임용신청서를 제출했다. 채용을 낙관했으나 당시 서울법대 학장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거절 통보를 해왔다. 소문으로는 일부 법대 교수님들이 고시 양과를 합격해 법조인 자격이 있으므로 법조계나 관계로 달아날 사람이 아닌지 의심했다고도 한다. 당시에는 교수 공개채용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학장이 마음만 먹으면 의중 인물을 임용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던 시절이다. 

    당시 서울대 총장이던 한심석 선생님은 내 선친과 오랜 낚시 친구였다, 부총장이던 민병구 선생님은 나의 장인과 도쿄대 동문이었으며 문교부 장관이던 민관식 박사는 집안 간 상당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시쳇말로 든든한 ‘빽’이 있으므로 이분들이 힘을 쓰면 나를 밀어 넣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이분들은 서울법대 학장의 결정을 듣고 한결같이 분개했다. 한 분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아니 단군 할아버지 이래 처음으로 고시 양과 합격 후 미국에서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아온 젊은이가 모교 교단에 서겠다는데 그런 졸업생을 뽑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를 임용하겠다는 말인가.”

    서울법대 강단에 서다

    한심석 총장은 나를 따로 불러 실망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학장에게 압력을 가해 임용하도록 못 할 바도 아니지만 참고 기다리면서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는 게 말 많은 학계에서 앞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 참으로 감사하고 사려 깊은 말씀이지만 얼마나 더 빈둥빈둥 놀아야 하는지 참으로 막연했다.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이따금 반주를 곁들여 박 대통령과 저녁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고 듣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민 장관의 농담을 즐기고 그분을 통해 청와대 밖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듣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화제가 궁한 나머지 민 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내가 서울법대에 제출한 임용 신청이 거절된 사례를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서울대의 편협하고 고루한 분위기를 비난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나의 임용 신청 거부와 관련한 일화가 박 대통령 기억에 남아 이후에도 내 사례를 언급했다고 한다. 

    1972년 5월 갑자기 기회가 왔다. 나의 임용을 극력 반대하던 서돈각 학장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동국대 총장으로 영전하면서 서울법대를 떠나시게 된 것이다. 그후 나의 임용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며 후임 학장인 김증한 교수는 상법 교수로 채용하겠으나 당장은 민사소송법 교수가 필요하니 민사소송법도 함께 가르쳐주길 바란다고 특별히 부탁하셨다. 지금과 달리 당시는 법대 교수 중 사법고시 합격자가 전혀 없었다. 예외 없이 법조계로 나갔기에 학교에 교수로 남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동숭동 캠퍼스에 신축된 도서관 내 연구실을 배정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자 생활의 첫출발을 했다. 그해 9월 5일 첫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기는 했으나 학생 수백 명 앞에서 2시간 동안 강의하고 집에 돌아오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바로 그다음 날 첫아기인 재혁이가 태어났다. 동숭동에서 강의를 마치자마자 명륜동에 있던 고려대병원으로 순산한 안사람과 아기를 보러 갔다. 첫 아이의 탄생을 보는 느낌은 전율 그 자체였다.

    송상현
    ● 1941년출생
    ●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 고등고시 행정과(14회)· 사법과(16회) 합격
    ●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 서울대 법대 교수
    ● 서울대 법대 학장
    ●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 現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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