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만동묘 복원과 중화주의

明황제 숭앙 송시열, 최익현… 중국 향한 사대주의의 부활

  • 입력2018-03-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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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4년 조선 성리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이유로 만력제를 숭앙하는 만동묘를 세웠다. 유생(儒生)들의 골수 중화주의는 1865년 대원군에 의해 철거된 만동묘를 10년 후인 1875년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표출됐다. 1942년 일제(日帝)가 철거한 만동묘가 최근 복원됐다. 중화사상이 중화제국(中華帝國) 개념으로 나아가는 국면에서 한국 사회 일각에 뿌리 박힌 중화주의는 치료 불가능한 고질병인 것으로 보인다.
    티무르 동상.

    티무르 동상.

    칭기즈칸의 2남 차가타이는 1227년 현재의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 분지(盆地) 알말릭을 수도로 차가타이 칸국(Khanate)을 세웠다. 차가타이 칸국은 13세기 중엽 칭기즈칸의 3남 오고타이의 후손 카이두가 원(元) 세조 쿠빌라이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에 연루돼 원과 킵차크 칸국의 협공을 받은 데다 일 칸국과도 분쟁을 겪은 끝에 13세기 말부터 약화했다. 

    튀르크 계통의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이 톈산산맥을 경계로 동부(모굴리스탄·신장)와 서부(우즈베키스탄)로 분열된 기회를 틈타 1360년 서부에 속한 고향 샤흐리샤브즈(史國) 일대를 확보한 후 1370년에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점령하고 대칸이 됐다. 

    티무르는 현재의 카자흐스탄, 이란, 이라크, 크리미아반도를 포함한 남부 러시아를 차례로 정복해 대제국을 세웠다. 중앙아시아-중동 핵심부를 장악한 티무르는 1398년 4월 인더스강을 건너 힌두스탄 평원에 진입했으며 같은 해 12월 델리를 약탈했다. 1400년 10월 시리아의 알레포를 점령하고 1401년 3월 다마스쿠스를 함락했다. 이로써 티무르의 적수는 전 세계를 통틀어 오스만튀르크와 명나라만 남았다. 

    티무르는 시리아 정복을 끝낸 후 1401~1402년 겨울 남부 코카서스에서 전열을 정비해 1402년 6월 오스만튀르크 공격을 개시했다. 40만 티무르군은 1402년 7월 20일 앙카라 대회전(大會戰)에서 역시 40만 규모로 편성된 오스만튀르크군을 섬멸했다. 티무르군은 서진을 계속해 마르마라해 연안에 자리한 오스만튀르크의 수도 부르사를 약탈하고 1402년 12월 성(聖) 요한 기사단 치하의 난공불락 해안도시 이즈미르를 단 2주 만에 함락했다. 

    1405년 티무르는 70만 대군을 편성해 숙적 명나라 정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티무르는 명나라로 진격하던 도중 키르키스의 숙영지(宿營地)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몽골의 再등장

    티무르의 굴기에 앞서 중원에서 축출된 몽골도 명나라에 도전했다. 몽골의 부흥은 신속했으며 명나라의 대응도 빨랐다. 북원군(北元軍)이 명나라 남옥(藍玉)의 군대에 패배한 1388년 부이르호(湖) 전투 이후 칭기즈칸 가문 등 할하족이 주류를 이룬 북원은 약해지고 타타르족(러시아 거주 튀르크 계통 타타르와는 다르다)이 대두했다.
     
    티무르 제국의 지원을 받은 타타르족 수장 벤야시리는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도전했다. 1402년 ‘정난의 변’을 감행해 조카 건문제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주원장의 넷째 아들 영락제는 구복(丘福)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벤야시리를 치게 했으나 명나라군은 1409년 케룰렌강 전투에서 타타르군에 전멸당했다. 이듬해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해 오논강에서 타타르군을 격파했다. 

    타타르족이 약화되자 몽골 서부를 근거로 하는 오이라트족이 등장했다. 1414년 영락제는 다시 24만 대군을 동원해 몽골로 친정했으나 오이라트 세력을 뿌리 뽑지 못했다. 영락제는 1420년 난징에서 연경(베이징)으로 천도했다. 이로써 명나라는 몽골과 만주, 조선의 정세 변화에 극히 민감할 수밖에 없게 됐다. 

    걸승(乞僧)이자 명교(明敎) 신자 출신인 주원장은 나라가 체제를 갖춰가자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부하 위관(魏觀), 이선장(李善長), 호유용(胡惟庸), 육중형(陸仲亨), 부우덕(傅友德), 풍승(馮勝) 등 숱한 공신숙장(功臣宿將)을 살해했다. 주원장은 신하들을 가급적 죽이지 말 것을 호소하던 황태자 주표(朱標)에게 가시가 붙은 탱자가지를 쥐여주면서 “너에게 가시 없는 탱자를 남기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나라 조정의 관리들은 “매일 아침 입궐 시 처자와 이별 인사를 하고 저녁에 무사히 돌아오면 서로 기뻐했다”고 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주원장은 재상 호유용을 처형한 다음 후임 재상을 임명하지 않고 황제가 내각을 직접 통할하는 황제독재국가를 만들었다. 주원장은 황태자 주표가 죽은 후에는 황태손 주윤문의 미래를 위해 공신들을 살육했지만 건문제 주윤문은 4년간의 내전 끝에 숙부인 연왕 주체(朱棣)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세조·영락제 닮은꼴 정권 찬탈

    1399년 주체가 연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선도 명나라 내전에 휘말렸다. 여진족 출신 명나라 장수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는 1만 5000여 명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조선 입국을 요청했다. 임팔라실리를 따르는 1만 5000여 명 중에는 최강(崔康)을 포함한 랴오둥(요동) 조선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주체와 충돌하지 않으려고 임팔라실리 등 주모자들을 주체에게 넘겨줬다. 조선은 주체가 일으킨 내란이 4년이나 지속됐는데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요동 정벌을 주장한 정도전을 살해하고 집권한 이방원으로서는 정권 안정을 위해 중국 정권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주체든, 주윤문이든 어느 한쪽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주체의 쿠데타가 일어난 50년 뒤 조선에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세조(이유)는 주체의 사례를 통해 정권 찬탈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영락제로 등극한 주체의 후궁 가운데 하나인 한씨(韓氏)의 조카가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 이혈의 어머니 인수대비다. 

    태조 주원장이 농본주의적 한족 민족국가를 목표로 한 데 반해 영락제는 세계제국을 지향했다. 영락제는 몽골 정벌을 시도하면서 환관 정화(1371~1434)를 기용해 남중국해-인도양 항해에 나섰다. 정화의 아버지는 윈난(雲南) 출신 이슬람교도 무함마드다. 그의 가계(家系)는 이란 또는 터키계로 추정된다. 제1차 대항해는 1405년 창장 하구의 류자허(劉家河)에서 출발했다. 난징에서 건조한 300~2000t급 대형선 62척에 2만 7800명의 장병이 승선해 푸젠-베트남 중부(퀴논)-자바(수라바야)-수마트라(팔렘방)-스리랑카(갈레)-인도(캘리컷) 항로를 총 2년간 항해한 끝에 1407년 귀환했다. 

    정화의 대항해가 있은 지 60년 후인 1492년 제노아 공화국 출신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때 승무원 88명이 250t급 산타마리아호 등 3척에 승선해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에 도착한 것과 1497년 포르투갈 출신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항해 때 120t급 선박 3척이 사용된 것에 비춰 볼 때 명나라의 조선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정화의 대항해는 남중국해-인도양 연안 국가에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정난의 변’ 와중에 행방불명된 건문제의 행방을 수색하고 후추와 각종 진귀한 물품을 입수하는 것도 항해 목적 중 하나였다. 당시 수마트라 팔렘방에는 이미 상당수의 화교가 살고 있었다. 명나라에 적개심을 갖고 있는 티무르 제국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항해 목적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정화의 大항해, 일대일로로 부활

    명나라는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조선, 몽골, 오키나와, 신장의 도시국가, 동중국해-인도양 연안 다수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은 명나라는 성리학에 기초한 화이관(華夷觀)과 조공무역의 힘으로 중국 중심 질서를 만들어갔다. 

    7회에 걸친 정화의 대항해는 대체로 평화리에 실시됐다. 제3차 항해 시 조공을 거부하는 스리랑카 왕과의 싸움이 거의 유일한 전투다. 3차까지는 인도의 캘리컷, 4차부터는 호르무즈해협까지 항행(航行)했다. 분견대(分遣隊)가 예멘의 아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케냐의 마린디까지 나아갔다. 

    정화 함대는 기린 등 당시 기준으로 기이한 짐승을 잡아왔다. 1431년 제7차 항해는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 시대에 이뤄져 메카까지 항행했다. 성화제 시절 환관들을 중심으로 대항해가 다시 추진됐으나, 농본주의적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보수적 관료들은 정화가 남긴 보고서를 모두 파기했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이나 항해술도 이때 모두 사장(死藏)됐다. 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상공업 진흥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시기에 명나라는 쇄국주의(鎖國主義)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정화의 대항해는 최근 시진핑 정부에 의해 일대일로(一帶一路)로 되살아났다. 

    연왕으로서 베이징을 다스려본 영락제는 몽골과 중원의 분리가 야기한 몽골 부족의 경제난이 몽골과 명나라 간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몽골 원정을 통해 원나라처럼 막남(중국)과 막북(몽골)을 다시 통일할 계획이었다.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는 정벌전쟁에도 불구하고 몽골 세력이 꺾이지 않자 주원장의 건국이념으로 돌아가 수축형 민족국가를 지향했다. 그는 난징 재천도(再遷都)를 시도했다. 홍희제의 재위 기간이 매우 짧은 까닭에 재천도는 이뤄지지 못했다. 홍희제를 계승한 선덕제는 주원장의 수축형 민족국가와 영락제의 확장형 세계제국 사이의 중간을 선택했다. 재천도는 중단했으나 몽골 쪽 국경수비대를 허베이성 중북부까지 후퇴시키고 반란이 잦은 베트남은 포기하기로 했다.

    몽골 군단, 베이징 압박하다

    선덕제가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한 것이 그의 아들 영종 시대에 재앙으로 다가왔다. 영종은 사부(師父)인 환관 왕진(王振)을 중용해 2인자로 삼았다. 왕진의 위세는 상서(장관)의 무릎을 꿇릴 정도였다. 

    명나라에서 영종이라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등장한 때 몽골에서는 오이라트족 출신 에센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몽골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계속 압박했다. 

    몽골은 마시(馬市)라는 조공무역을 통해 명나라에 말을 비롯한 가축을 수출하고 대가로 식량과 차 등을 수입해 살아갔다. 조공무역은 경제적으로 약자인 몽골에 유리하게 진행됐다. 조공무역이 국가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왕진의 사익(私益)에도 해가 되기 시작하자 명나라는 교역량을 제한하려 했으며 에센은 1449년 랴오둥에서부터 간쑤까지 동-서 국경 전체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에센의 주력군이 산시성의 요충지 다퉁(大同)마저 공격하자 왕진의 사주를 받은 영종은 친정(親征)을 결정했다. 에센 군단의 위력을 잘 알던 병부상서(국방장관) 광야(鄺埜)와 병부시랑(국방차관) 우겸(于謙)이 친정을 만류했으나 영종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영종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기로 하고 동생 주기옥을 감국(監國)으로 삼아 우겸과 함께 베이징을 지키게 했다. 

    영종의 친정은 비극으로 끝났다. 명나라 대군은 장거리 행군 끝에 물이 거의 없는 베이징 교외 토목보(土木堡)에서 4만 오이라트 기병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포위된 명나라군 수십만 명이 학살됐다. 영종은 포로가 됐으며 왕진과 광야 등은 참살당했다. 에센은 곧바로 베이징성을 포위했다. 우겸은 주기옥을 황제로 추대하고 22만 병력과 각종 화기(火器)를 곳곳에 배치해 5일간의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에센은 조선군을 포함한 지원군에 의해 퇴로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해 몽골로 퇴각했다.

    조선이 요동 점령 못 한 까닭은…

    우암 송시열 초상. 18세기 문인이자 화가인 김창업이 그렸다. [국립춘천박물관]

    우암 송시열 초상. 18세기 문인이자 화가인 김창업이 그렸다. [국립춘천박물관]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 건국세력은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이 한자로 화림(和林) 또는 화령(和寜)으로 표기된다는 것에 착안해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중 하나를 나라 이름으로 선택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명나라로 하여금 만주를 영유한 적이 있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 왕과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觀)에 깊이 물들어갔다. 

    오이라트가 대명(對明) 동맹을 요청하고 베이징성을 포위하는 상황임에도 세종 이도의 조선은 압록강이나 두만강 건너편 어느 한 곳도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명나라가 조선 대군의 랴오둥(요동) 주둔과 여진족 준동 억제를 요구한 기회마저 활용하지 못했다. 조선은 오이라트군의 압록강 도하에 대비해 강계에 대군을 주둔시키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앞서 1433년과 1435년 4군(四郡)·6진(六鎭)을 개척한 것이 조선이 얻어낸 전부였다. 

    이도는 1433년 최윤덕(崔閏德)에게 1만 5000여 명의 병사를 줘 서북면(평안도)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했다. 최윤덕은 여진족을 몰아낸 곳에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武昌), 우예(虞芮) 4군을 설치했다. 이도는 1435년 김종서(金宗瑞)를 동북면(함경도)으로 파견해 경원(慶源), 경흥(慶興), 온성(穩城), 종성(鍾城), 회령(會寧), 부령(富寧) 등 6진을 개척하게 했다. 당시 조선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이라트와 손잡고 랴오둥을 점령했어야 했다.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둥 공략이 부담스러웠다면 6진 사령관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적어도 지금의 지린성과 연해주 일대를 점령하게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조선과 명, 몽골, 일본 간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명을 하늘로 생각하고 명나라에 외교·국방을 맡기다시피 한 조선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와 세조 주도의 계유정난 이후 거듭된 정변과 사화(士禍)는 조선의 왜소화를 가져왔다. 성종 이후 성리학자들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면서 조선의 독자성은 계속 약화됐다. 

    조선의 또 다른 문제는 왜구 출몰이었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기에도 이어졌다. 개국 초기부터 조선은 총포를 장착한 전함을 개발하는 등 해군력을 증강하는 한편, 왜구 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아시카가(足利) 막부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1419년 상왕(上王) 이방원의 명을 받은 이종무는 함선 227척과 군사 1만 7000여 명으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토벌했다. 조선은 류큐, 샴, 자바 등과도 교류했다.

    몽골, 야성 잃고 無力化

    왜구의 침략을 그린 16세기 명나라 그림.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 해안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알마 제공]

    왜구의 침략을 그린 16세기 명나라 그림.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 해안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알마 제공]

    에센은 칭기즈칸 가문인 황금씨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대칸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후손 톡토아부카를 대칸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2인자인 태사(太師) 자리에 머물렀다. 에센의 매부이기도 한 톡토아부카는 에센이 베이징을 칠 때 만주와 몽골을 경계 짓는 싱안링(興安嶺)을 넘어 여진족 건주위와 해서위 등을 공격해 승리를 맛보았다. 

    톡토아부카가 에센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실력을 갖추자 명나라는 두 사람을 이간시키는 작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톡토아부카와 에센 사이에 대립이 심화됐다. 톡토아부카는 에센의 누이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다. 참을 수 없게 된 에센은 1451년 톡토아부카 일족을 학살하고 자립했다. 칭기즈칸의 후손을 죽인 데 대한 반발로 많은 몽골 부족이 에센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세력을 잃은 에센은 1454년 부하에게 피살됐으며, 이로써 서북 만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를 영역으로 하던 오이라트 제국도 붕괴하고 말았다. 

    오이라트족이 약화되자 할하족이 대두했다. 에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할하족 출신 바투멩게, 즉 다얀 가한(大元可汗)은 1493년 이후 마시(馬市)를 둘러싼 긴장이 발생할 경우, 산시와 허베이 등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명나라가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다얀의 손자 알탄 가한 시대에 이르러 마시를 둘러싼 명나라와 몽골 간 갈등은 도를 더해갔다. 당시 명나라 변경에서는 군대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반란군 일부는 몽골로 도피했다. 알탄은 이들에게 내몽골의 토지를 내주어 경작하게 했다. 이들은 알탄을 부추겨 명나라를 침략하게 했다. 알탄은 1542년 산시성 태원 등을 공격했으며, 조선 명종 이환(李峘)이 집권하던 1550년에는 베이징 교외 고북구와 통주를 함락시키고 베이징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알탄은 명나라 각지로부터 지원군이 당도하자 베이징성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이때도 조선은 중국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0년 이후 알탄은 명나라보다는 중앙아시아, 신장, 티베트에 더욱 관심을 뒀다. 그는 몽골, 신장, 칭하이, 티베트, 중앙아시아 일부를 통합해 대제국을 세웠다. 알탄은 유목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티베트로부터 라마불교를 받아들였다. 유목민족이 종교의 영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후돌궐(後突厥) 빌게 가한의 동생 퀼테긴(Ku‥ltegin)과 재상 톤유크의 업적을 새긴 오르콘 비문(731)에 잘 나타나 있다. 톤유크 비문에는 “이질적인 종교를 받아들이지 말고 돌궐 정신을 보존하자”는 문장이 새겨졌다. 알탄의 라마불교 귀의는 톤유크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언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몽골의 오이라트, 타타르, 할하족은 급격히 라마불교화됐으며, 몽골족은 야성을 잃고 무력화(無力化) 되어갔다.

    대재앙 서곡, 왜구

    명나라는 몽골(北虜)에 이어 일본으로부터 기원한 왜구(南倭)로부터도 시달림을 받았다. 전기 왜구는 원나라와 고려의 쇠퇴 및 남북조(南北朝)로 나누어진 일본의 정치적 혼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기 왜구에는 일본인과 함께 소수 탐라인(제주도인)도 참가했다. 1563년 이후 발생한 후기 왜구는 일본의 상공업 발달로 인한 화폐경제의 발달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후기 왜구는 일본의 조공무역 사절단이 닝보(寧派)에서 해적행위를 한 데 대한 보복으로 명나라가 조공무역을 중단시킨 폐관절공(閉關絶貢) 이후 창궐했다. 왜구는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낼 정도로 잔인한 행동을 다반사로 했다. 

    명나라 정규군마저 왜구를 무서워하게 되자 중국인 중 왜구 집단에 들어가거나 스스로 왜구를 자처하는 자가 늘어났다. 왜구의 70~80%가 중국인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왜구는 산둥부터 하이난까지 중국 해안 곳곳을 약탈했다. 해안지방 밀무역 업자들은 왜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왜구 대책은 밀무역을 겸하던 지방 호족들에 대한 대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방 호족들은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고, 왜구에 강경책으로 맞선 관료들을 적대시했다.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취한 주환(朱紈)이나 호종헌(胡宗憲) 같은 관료들은 안후이(安徽)의 대재벌 신안상인을 비롯한 호족(豪族)들과 부패한 중앙정부 관료들에 의해 자살로 내몰리기도 했다. 지방의 대재벌이 베이징 중앙정부를 흔든 것이다. 훗날 복명운동(復明運動) 주동자가 되는 중·일 혼혈 정성공 집안도 푸젠에서 밀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16세기 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식될 기미를 보이는 등 일본 정세가 안정되고, 유대유(兪大猷) 척계광(戚繼光) 등 무장들의 활약으로 왜구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기 왜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대재앙의 서곡에 불과했다. 동아시아의 변방이던 일본이 역사무대의 중심으로 뛰어오르는 순간이 다가왔다.

    충북 괴산군 화양동 ‘만동묘’

    충북 괴산군 만동묘.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됐다. [뉴시스]

    충북 괴산군 만동묘.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됐다. [뉴시스]

    명나라 관료들의 녹봉은 심할 정도로 적어 부패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가정제 시기의 엄숭(嚴崇) 엄세번(嚴世藩) 부자의 부패는 악랄 그 자체였다. 무능한 가정제와 융경제를 거쳐 융경제의 3남 주익균(朱翊鈞)이 10세 나이에 만력제로 즉위했다. 

    만력제 때 일본의 조선 침공(임진왜란), 만주의 부상(浮上) 등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만력제는 아편 상습 복용자였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만력제가 조선에 파병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再造之恩·재조지은)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그를 자자손손 숭앙(崇仰)했다. 1704년 송시열과 권상하 등이 만력제와 그의 손자인 숭정제를 숭앙하기 위해 충북 괴산군 화양동에 세운 만동묘(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뜻하게 된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유래)도 그중 하나다. 만절필동은, 황허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항로(李恒老)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한 조선 말 유생(儒生)들의 골수 중화주의는 1865년 대원군에 의해 철거된 만동묘를 그 10년 후인 1875년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표출됐다. 1942년 일제(日帝)에 의해 완전 철거된 만동묘가 최근 복원됐다. 우리 사회 일각에 깊이 뿌리박힌 중화주의는 치료 불가능한 고질병으로 생각된다. 한족 우월주의 성리학은 명나라 초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했으며 반동적(反動的) 성격을 띤다. 

    중화사상은 중화제국(中華帝國) 개념으로 발전했다. ‘중화제국’은 동으로는 서해, 서로는 타클라마칸사막, 남으로는 남중국해, 북으로는 고비사막 범위 내에 있는 모든 민족과 국가가 중화권에 속한다는 정치·사회·문화적 개념이다. 중국의 동북아 및 서남아 공정도 중화제국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이 재조지은이라는 표현으로 숭앙한 만력제 초기 장거정(張居正) 주도로 실시된 토지개혁 결과 감춰진 토지가 환수되고 조세가 늘어나 명나라는 상당한 재정흑자를 달성했다. 만력제는 장거정이 남겨놓은 400만 냥의 저축 가운데 아들 주상순의 결혼식에 30만 냥이나 썼으며, 남은 돈은 주로 자신의 무덤 조성에 사용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사대부 동림당(東林黨)과 동림당을 반대하는 환관당 간 대립은 한층 더 격렬해지고 만주와 일본은 나날이 강성해졌다. 

    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해 100여 년간 지속된 전국시대를 끝장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조선 침공을 개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원정군은 평양과 회령을 점령했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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