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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 80년대

제1부 - 帝國에 비끼는 노을 | 9회. 언젠가는 가야 할 그날

  • 이문열

둔주곡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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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손 기자였다. 

“나요. 그냥 듣기만 하시오. 거기 내 책상 서랍에 말이요….” 

“그렇게 음모적으로 목소리 가라앉히지 마세요. 지금 우리 부서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어요. 또 누가 있다고 해도 선배님과 제가 통화하는 게 무슨 들켜서는 안 되는 엄청난 음모도 아닐 거고요.” 

손 기자가 무엇 때문인지 사뭇 상냥한 후배로서만이 아닌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다. 그제야 자신의 지나친 배려를 부담스러워하는 그녀가 에둘러하는 핀잔임을 알아차리고, 얼른 말투를 가벼운 농담조로 바꾸어 받았다. 

“알겠소. 알았어요. 어쨌든 거기 내 서랍 맨 위에 흰 봉투가 하나 있을 거요.” 

“금요일 아침에 출근은 않고 밖에서 웬 사무실 서랍 속의 봉투는. 아, 여기 뭔가 얄팍한 게 하나 있네요. 왠지 사표 한 장 달랑 들어 있을 것 같은.” 

그사이 서랍을 열어보았는지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러나 그에게는 뜨끔한 추측을 하게 하는 말을 보태 그렇게 받았다. 그녀가 벌써 봉투 속까지 알고 하는 소린 줄 알고 잠깐 당황한 그가 짐짓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이따가 부장님 돌아오시거든 그걸 좀 전해주시오.” 

“벌써 9시 반인데 출근하지 않으실 거예요? 봉투 안에 든 게 뭔지 모르지만, 출근해서 선배님이 직접 부장님께 드리시는 게 나을 텐데요.” 

“실은 여기가 동대구 고속터미널이고, 나는 지금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오.” 

“무슨 일로 상경하시는지 모르지만, 그럼 돌아와서 부장님께 드리세요. 늦어도 다음 월요일엔 출근하실 거 아니에요?” 

“아마 그 월요일에도 출근하지 못할 것 같아 그렇소.” 

그가 애써 좀 전의 뜨끔한 느낌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잠깐 전화 수화기로도 느껴질 만큼 싸늘한 정적에 이어 손 기자가 그보다 더 메마르고 뒤틀린 어조로 대꾸했다. 

“그럼 조금 전 제가 잘 본 거네요. 지난번 서울 다녀오고 나서부터 한 주일, 왠지 여기저기 눈치 보고, 이것저것 재고 견주시는 것 같더라니. 하지만 그럴수록 여기 이 봉투는 선배님이 돌아오신 뒤 부장님이나 국장님께 직접 제출하시는 게 좋겠네요.” 



“사람의 진퇴가 그래서야 너무 궁색하지 않겠소? 소학(小學)에도 쓸고 닦고 사람 맞은(灑掃應對) 다음에는 들고 남(進退)의 예절이던데. 물러날 때가 들 때보다 더 엄중하다던가.” 

“하이고, 대책 없는 우리 라오스슝(老師兄), 문자 쓰지 마시고,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부장님이나 국장님께 바로 전화하시죠. 그런 일에 애매한 후배 끼워 넣지 마시고. 저는 애초부터 거기 끼일 필요도 없고, 또 끼고 싶지도 않아요.” 

손 기자가 이번에는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말투가 빠를 뿐만 아니라 문장과 문장, 구와 절 사이를 최대한 빨리 이어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까지 찰칵 끊어버렸다. 그 소리를 무슨 육중한 자물쇠 소리처럼 들으며 그는 야릇한 곤혹에 빠져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우리가, 아니 손 기자와 내가 ‘예’ ‘아니오’로 단순하게 끝낼 주제를 이렇게 뒤틀리고 비뚤어진 말로 길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지…. 

얼마 뒤 9시 45분 서울행 고속버스가 들어와 차에 오른 뒤에도 그는 조금 전 그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언제부터 우리가, 아니 손 기자가 내게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게 됐지. 2기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내가 직장 선배고, 나이도 대여섯은 많을 텐데, 알던 정 보던 정 없이…. 하지만 고속버스가 미처 대구 시가지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는 그리 오래지도 않은 기억 속에서 이미 그녀에게 그 비슷한 어조와 어법을 들은 적이 있음을 퍼뜩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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