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호

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사실상’ 처벌이 된 구속 무죄추정원칙은 어디로

  • 입력2018-04-08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법적으로 볼 때 구속은 처벌이 아니다. 수사와 재판 도중 도망가거나 증거를 인멸하지 못하도록 신체의 자유를 제한해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구속은 ‘사실상’ 처벌로 여겨진다. 구속됐을 뿐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이 구치소에서 지나치게 열악한 대우를 받는 것도 이런 인식이 생긴 한 원인이다.
    [pixabay]

    [pixabay]

    판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그때 좀 더 잘할 걸’ 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구속영장 발부를 조금 더 엄격하게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피의자나 피고인을 구속하는 이유는 도망을 가거나 증거를 인멸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구속 재판을 받던 대다수 피고인을 돌이켜 보면 구속 상태가 아닌데도 도망을 가거나 증거를 인멸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 비율을 따져보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구속영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작은 소도시 법원에서 처음 영장업무와 형사단독재판을 겸하던 시절 만난 어느 할아버지 피고인이 생각나곤 한다. 그는 피해자들 말로 ‘성격이 괴팍한 노인네’라서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부지깽이 같은 것을 들고 나와서 쫓아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항의하는 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피고인이 못 참고 부지깽이를 휘둘렀다가 학부형들에게 고소를 당해서 결국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받게 되었다. 그는 처벌을 받고도 1년 뒤에 똑같은 범행을 저지른 바람에 이번에는 꼼짝없이 실형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성격 괴팍한 노인네’의 부탁

    실형이 명백히 예상되는 경우에는 증거인멸이나 도망 우려가 더 높다고 판단되어 구속영장 발부 가능성이 높아진다. 영장을 발부하는 판사 입장에서도 비교적 마음이 편하다. 피고인은 어차피 실형을 받을 것이고 미결구금기간(재판이 확정되기 전에 구속되어 있는 기간)은 형기에 모두 산입 돼 피고인에게 손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피고인이 징역 2년을 선고받을 사안에 대해 1년간 재판이 진행된다고 하면, 1년간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정신적 고통을 겪은 뒤 재판이 끝난 시점부터 다시 2년 동안 징역형을 사는 것보다는 구속 상태에서 1년간 재판을 받은 다음 나머지 1년만 징역형을 사는 것을 피고인이 선호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도 같은 이유로 그 피고인에 대한 기록을 처음 보았을 때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구속영장을 발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피고인은 몇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혼자 키우고 있는 손녀를 맡길 사람을 찾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다니고 있는 노인대학 졸업장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마침 뒤에 사건이 없어서 피고인의 이야기를 제지하지 않고 죽 들어보았다. 

    그는 방음이 잘 안 되는 집에서 홀로 서너 살 된 손녀를 키우고 있었는데 밤에 손녀를 업고 힘들게 재워놓기만 하면 인근 학원에서 나온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번번이 손녀를 깨워버리니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손녀의 부모는 아이를 낳은 직후 이혼하고서는 손녀를 보러 오지도 않아서 가뜩이나 몸과 마음이 힘든 상태였다. 사건기록에는 없는 이야기였다. 또 한 가지 그가 강조한 것은 자신이 노인대학을 다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가방끈이 짧은 것에 한이 맺혔는데 두어 달만 더 다니면 졸업장이 나오니 그것을 꼭 받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례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피고인은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증거를 인멸하지 않았고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짧은 기간이지만 손녀와 3대가 함께 살았고, 노인대학 졸업장도 받았다. 판결을 선고하는 날 나는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하고 그를 법정 구속했다. 

    훨씬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보다 덜한 처벌을 받는 사람이 많은데 이 정도 사안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1년 6개월이나 징역을 살게 하는 것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법이 징역형 하한을 그렇게 못 박아두어서 더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고 언제나처럼 딱딱한 표정으로 형을 선고했는데 뜻밖에도 그 할아버지 피고인은 구금실로 가기 전 내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흰 머리를 깊이 숙였다. ‘성격 괴팍한 노인네’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 10분 면회를 바꿔라

    이런 현상이 아주 불합리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면 비록 유죄로 판단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고 따라서 피고인 측 반론을 본격적으로 들어보기 전이라는 한계가 있으나, 구속된 후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통계상 매우 낮은 현실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러나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구속이 ‘사실상’ 처벌 못지않다면 구속을 하는 쪽에서는 최대한 절제해야 하고, 구속을 당하는 쪽을 위해서는 불이익을 최대한 완화해주어야 한다. 처음 영장업무와 형사단독재판을 했을 때 선배가 성인오락실 사건, 고래잡이 사건, 사기 사건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거라고 조언해서 나는 개별적으로 구속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영장을 발부한 적이 있다. 경력이 짧은 내가 생각이 짧아서 이례적인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운 마음에서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에도 과감하게 구속영장을 기각할 것을 그랬다. 

    구속이 처벌로 간주되는 효과가 덜해지도록, 구속된 사람들의 처우도 대폭 개선되면 좋겠다. 헌법상 무죄로 추정된다는 사람들의 생활이 왜 수형자와 거의 다름없이 제한되는지 의문이다. 지난번 지인을 면회 가보았더니 미결수 면회시간이 1일 1회 10분이었다. 변호인 접견권은 종일 보장되므로 변호사를 매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은 구치소에서 회사도 운영할 수 있는 반면,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유죄판결을 받은 수형자와 별다를 바 없다. 적어도 가족만큼은 종일 만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옆에서 교도관이 대화를 받아 적고 있는데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면회를 10분 허용하고서 무죄로 추정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형사재판소 (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