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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그들이 이혼 못 한 진짜 이유

  •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그들이 이혼 못 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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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속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현대인이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형사취수(兄死娶嫂)’,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고대의 풍습도 상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비교적 가까운 19세기 중반까지도 이혼이 사실상 금지됐는데, 그 이면에는 ‘지참금’이라는 또 다른 관행이 숨어 있다.
바실리 페로프, ‘불평등한 결혼(The Unequal Marriage)’, 1862,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바실리 페로프, ‘불평등한 결혼(The Unequal Marriage)’, 1862,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고대사회에는 형사취수(兄死娶嫂)의 풍습이 실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고구려를 비롯해 흉노 등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동,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도 형사취수의 관습이 있었다. 

고대 유대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형제의 아내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레위기’ 18장 16절).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형사취수가 허용된다. ‘신명기’ 제25장 5,6절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이 있다.

형제 가운데 누군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형제의 아내는 시집을 떠나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법이 없다.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그 여성이 재혼관계에서 얻은 큰아들은, 이미 죽은 형제의 아들로 삼아야 한다. 이로써 죽은 형제의 혈통이 대대로 보존되게 할 일이다.

알고 보면 히브리 사회에서 형사취수의 전통은 뿌리가 매우 깊다. ‘창세기’ 제38장 8절에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은 형의 혈맥을 이어주기 위해 미망인이 된 형수와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행위는 유대의 오랜 전통이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형사취수 제도의 경제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큰아이는 사망한 혈통상의 아버지가 가졌던 세습 권리를 물려받았다. 정확히 말해, 망자(亡子)가 큰아들이었을 경우에 그 아이의 상속분은 망자가 받을 몫의 두 배로 오히려 확대된다. 이로써 망자의 가문이 별문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망자의 부인 역시 시동생과 재혼함으로써 여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형사취수 제도가 강제 결혼은 아니었다. 형수든 시동생이든 어느 한쪽이 그 결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 ‘할리차(halitzah)’라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형수에 대한 부양 의무를 포기할 수 있다.


일종의 ‘사회보장’ 제도

유대 사회도 그렇지만, 형사취수 제도는 족내혼의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성행했다. 그런데 유대 사회와는 달리 대개의 경우 망자의 부인이 죽은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서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 누구든 망자의 부인의 점지를 받으면 반드시 그녀와 결혼해야 했다. 

이 점에서 2세기말, 고구려 왕실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주목된다. 고국천왕(재위 179~197)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당장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잡음이 크게 일어났다. ‘삼국사기’는 그 책임을 왕비 우씨에게 전가한다. 우씨는 왕의 사망 소식을 숨긴 채 야밤에 시동생 발기와 연우의 처소를 차례로 방문했다. 자신의 재혼 상대자를 스스로 물색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우씨의 이러한 처사를 맹비난한다. 발기의 입을 빌려, 우씨는 남녀 간의 예절도 모르고, 왕위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이치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발기는 우씨의 결혼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왕좌를 놓치고 만다. 

우씨의 처사를 유교적 도덕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우씨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만하다. 그녀의 심야 방문은 왕비족 전체의 정치적 명운이 달린, 그야말로 막중한 협상이다. 고국천왕의 둘째 아우 연우(산상왕· 재위 197~227)는 옥좌에 오르면서 우씨를 왕비로 선택했다. 말 그대로 형사취수한 것이다. 

권력 싸움에 진 발기는 형수의 패륜을 탓하며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한다. 그는 적국 한나라로 망명해 재기를 노리지만, 그것 역시 실패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비극의 씨앗이 우씨라는 여성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 그것은 당사자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한·중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경제 주체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일찍 사망했고, 설상가상으로 단 한 명의 아들도 남기지 못했다면, 여간 큰 타격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형사취수 제도는 망자의 부인을 위한 든든한 사회보장제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형사취수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은 망자의 가계를 계승했다. 그는 망자의 상속분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생부(生父)의 재산에 대해서는 상속권이 없었다. 예외는 있다. 만약 생부가 별도의 재산을 그 아들에게 주기를 원할 경우 사회가 이를 허가했다. 

형사취수 제도는 일차적으로 혈손이 끊어진 형제의 가문을 지속시키려는 사회적 장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뜻밖에 경제적 위기로 내몰린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공동체의 노력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들면, 여성의 결혼지참금에 관한 사회적 합의이기도 하다. 신부가 결혼 당시 가져온 지참금이 끝까지 신랑 집안의 재산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혼은 쉽지 않았다. 이혼은 공공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부 중 일방이 ‘순결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점이 명백할 때만 이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늘이 맺은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 이런 기독교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이혼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애 요인은 신부가 결혼식 때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이었다. 누구도 그 재산을 선뜻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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