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순(順), 명(明) 황제 아들을 삶아 먹다

반란군에 무너진 조선의 ‘부국(父國)’

  • 입력2018-04-1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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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이 혼란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키웠다가 고생한 것처럼 명나라도 몽골의 굴기를 저지하고자 누르하치를 지원했다가 나라가 멸망하는 비극에 처한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 팔기군의 말발굽소리가 시시각각 베이징으로 다가오는데도 동림당과 환관당 사이의 당쟁은 더욱 격화했다. 

    • 그들은 반대 당 사람들을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 증오했다.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데도 당파 다툼이 끊이지 않는 21세기 한국의 모습과 유사하다.

    영화 ‘최종병기 활’. 만주에서 궐기한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차지한다.

    영화 ‘최종병기 활’. 만주에서 궐기한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차지한다.

    임진왜란 이후 부녀자를 중심으로 강강수월래 놀이가 유행한다. 강강수월래는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군이 무리를 지어 “지금 막 순찰 돈다(剛剛巡邏·gang gang xun luo)”고 외치던 것이 기존(旣存)의 놀이와 결합해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막 순찰 돈다(剛剛巡邏·gang gang xun luo).”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파견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쫓겨 명나라 국경을 지척에 둔 의주까지 도주한 조선왕 이균(李鈞·선조)은 명(明)에 줄기차게 사신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했다. 이균은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1592년 9월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설번은 조선과 요동(만주)이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임을 들어 파병 불가피를 주장했다. 병부상서 석성도 동의했다. 명나라는 북부와 서부에서 몽골과 투르판 위구르가 침공하고 농민반란이 일어나던 상황이었는데도 고려인 이천년(다정가를 지은 이조년의 형)의 후손인 이성량(1526~1615)의 장남 이여송(李如松)을 사령관, 낙상지(駱尙志)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해 4만3000명 대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추가 북상을 저지하게 했다. 

    1593년 1월 이여송은 포르투갈 대포와 화전(火箭) 등 신무기를 보유한 절강군(浙江軍)을 동원해 조선군과 함께 고니시가 점령한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이후 기병 위주의 직할부대 요동군만을 이끌고 한양으로 남진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이여송은 1593년 말 명나라로 돌아가 군단장급인 요동총병으로 승진했으나 1598년 4월 타타르(몽골)군과의 요동전투에서 전사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 원군과 조선 해군사령관 이순신의 활약에 더해 곽재우, 정인홍, 조헌, 고경명 등 사대부 출신이 주축이 된 의병의 분투로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일본군의 침공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조선이 쇠약해진 이유는 중화(善)-오랑캐(惡) 흑백논리의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과 함께 단종(端宗) 이홍위(李弘暐) 집권 1년차인 1453년 발생한 계유정난부터 선조 집권기인 1589년부터 1591년까지 3년간 계속된 기축옥사에 이르기까지 140년간 사대부 엘리트들이 수천 명을 서로 죽이고 죽는 자괴작용(自壞作用)을 일으킨 데 있다.

    6·25전쟁 때 미군, 국군·인민군, 중공군 비율과 유사

    일본은 1596년(정유년) 12월 14만2000명 대군을 동원해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일본군은 경상·전라·충청 등에서 조·명 연합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598년 9월 명나라군 14만4000명과 조선군 2만5000명, 일본군 14만2000명(6·25전쟁 때 미군, 국군·인민군, 중공군 비율과 유사)은 울산, 순천, 고성 등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결전을 벌였다. 울산성 등지에서 악전고투하던 일본군은 1598년 9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조선 침공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충격을 가했다. 연인원 21만 명, 은(銀) 883만 냥 등 국력을 쏟아부은 명나라는 멸망을 향해 달려간 반면 일본은 100년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강화된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등 명나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갖게 됐다. 에도(도쿄) 중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군마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면 전쟁의 승패는 달랐을지 모른다. 당시 일본은, 인구는 조선의 2배인 2000만 명, 경제력과 군사력은 조선의 3배가 넘었다. 일본은 30만 정예군 가운데 절반인 15만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조선 정규군은 4만~5만 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세계 최강 육군국(陸軍國)으로 유럽대륙이 보유한 전체 총기 수를 능가하는 50만 정의 조총(鳥銃)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 간 국력 차는 더욱 커졌다.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는 18세기경 100만 인구의 세계 최대 도시였다. 당시 베이징과 파리 인구는 약 50만 명, 한양 인구는 3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19세기 말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데는 이러한 경제·군사적 배경이 자리한다.

    누르하치, 만주를 석권하다

    일본의 조선 침공은 몽골의 동진(東進)이라는 명·몽골 분쟁의 그늘에 숨어 세력을 키워온 여진 건주위(建州衛)에 드러내 놓고 숨 쉴 공간을 제공했다. 동아시아는 더 이상 명과 몽골, 조선이 아니라 변경의 만주(여진)와 일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명나라는 몽골의 만주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요동 동부의 건주위를 강화했다. 당시 명나라는 요하 유역을 포함한 만주 일부만 직접 통치했다. 다른 지역 대부분은 자치 상태였다. 

    여진족은 ①초기 고구려의 중심을 이루던 랴오닝성 동부-지린성 서부 건주여진 ②부여의 고토(故土)이던 창춘·하얼빈 지역 해서여진 ③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하던 헤이룽장성·연해주 지역의 야인여진으로 3분돼 있었다. 명과 조선에 가까운 건주여진은 상대적으로 발달한 문화와 경제구조를 가졌으며 해서여진은 예헤부, 하다부, 호이화부, 우라부 등 4부로 구성됐는데, 모두 금(金)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중 예헤부와 하다부가 해서여진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거란의 후예로 보이는 예헤부는 내몽골에서 이주해온 부족으로 반명(反明) 의식이 매우 강했다. 명나라는 하다부를 지원해 예헤부를 누르려 했다. 하다부는 명나라에 반대해 봉기한 건주여진 출신 왕고(王杲)가 도망쳐오자 그를 명나라로 넘겨주는 등 친명정책(親明政策)으로 일관했다. 명나라는 몽골을 의식해 여진 여러 부족을 지원했으나 여진족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명 조정은 여진족 내부 상황을 잘 알던 요동 담당 이성량으로 하여금 여진족 대책을 총괄케 했다. 이성량은 여진 각 부족이 서로 싸워 지나치게 약화되자 1개부를 지원해 다른 부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이에 따라 선정된 것이 젊고 유능한 아이신고로 누르하치(1559~1626)였다. 이성량의 지원을 배경으로 강력해진 누르하치는 곧 소극소호, 혼하, 완안, 동악, 철진 등 5개 부를 모두 장악하고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예헤부와 하다부 간에 벌어진 해서여진 내란으로 인해 누르하치는 한층 강력해졌다. 해서여진 영향 아래 있던 국제시장 개성(開城)이 폐쇄돼 인삼과 모피 등 교역상품이 건주여진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명, 조선, 몽골 각 부 상인들이 모두 건주여진에 모여들게 됐으며, 건주여진은 한층 부유해졌고 조선과의 직접 통상로도 확보했다.

    탈레반 키운 미국처럼 누르하치 지원한 明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그들의 신앙 대상인 문수보살의 ‘문수(文殊)’에서 차용해 만주(滿洲)로 부르기로 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누르하치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해서여진 4부가 예헤부를 중심으로 백두산 인근 여러 부족을 끌어들여 건주여진(만주)을 공격했다. 역시 거란의 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시보족(錫伯族)도 만주에 반대하는 동맹군에 가담했다. 누르하치는 이들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군에 가담한 백두산 지역 수사리부와 눌은부를 합병하는 등 만주 전역을 통일해나갔다. 1597년 4년간의 싸움 끝에 만주와 해서여진 4부가 평화조약(和約)을 체결했으나 만주와 해서 간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층 강력해진 만주는 1599년 기근에 처한 하다부를 합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후에야 명나라는 만주의 팽창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만주는 1607년 호이화부를 멸망시키고, 1613년에는 우라부마저 멸망시켰다. 이로써 예헤부를 제외한 해서여진 3부가 모두 만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누르하치는 산하이관(山海關) 이서(以西) 중국을 점령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이 혼란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하기 위해 탈레반을 키웠다가 고생한 것처럼 명나라도 몽골의 강화를 저지하기 위해 누르하치를 지원했다가 나라가 멸망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도요토미는 누르하치를 잘 몰랐겠으나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누르하치의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명나라의 쇠퇴는 선덕제, 홍치제를 제외한 중기 이후 황제 대부분이 무능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황제 독재체제 명나라는 어리석은 황제가 계속 집권하자 요동의 한 부족(部族)에 불과하던 만주의 공격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에다가 정덕제 시대 유근(劉瑾), 천계제 시대 위충현(魏忠賢) 등 대환관들이 잇달아 등장해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철학 과잉도 문제지만, 철학이 없는 무절조(無節操)한 황제와 고위 관료들은 더 큰 문제였다. 

    명나라의 멸망은 황궁 뒷방에 틀어박혀 늘 마약에 취해 있던 만력제(萬曆帝)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그의 손자들인 유약한 천계제(天啓帝)와 의심만 많던 숭정제(崇禎帝)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공예를 특히 좋아한 청소년 황제 천계제 시대 최대 권력자가 환관 위충현이다. 일자무식 위충현은 장래가 불투명하던 황손(皇孫) 주유교를 충직하게 모신 공로로 그가 천계제로 즉위한 다음 유모 객씨와 결탁해 비밀특무기관 동창(東廠)의 책임자가 됐다.

    北京으로 다가온 팔기군의 말발굽소리

    누르하치.

    누르하치.

    위충현은 권력을 장악하고 난 7년 동안 동한(東漢)의 십상시(十常侍)나 당나라의 이보국, 정원진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국가에 큰 해악을 끼쳤다. 고병겸, 위광징, 반여정, 장눌, 육만령 등 반동림당(反東林黨) 인사들은 당파싸움 끝에 동림당 인사들을 박멸하기 위해 일자무식인 위충현을 공자와 맞먹는 성인(聖人)으로 받들었다. 고헌성(顧憲成)이 재건한 장쑤성 우시(無錫)의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한 양련(楊漣)과 좌광두(左光斗) 등 동림당 사대부들은 위충현을 탄핵했으나,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했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 팔기군의 말발굽소리가 시시각각 베이징으로 다가오는데도 동림당과 환관당 간 당쟁은 더욱 격화했다. 그들은 반대 당 사람들을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 증오했다. 

    만주족은 수렵민이었다. 포위해 공격한다는 점에서 수렵과 전쟁은 같은 패턴으로 진행된다. 만주족이 뭉치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누르하치는 300명을 1니르(화살이라는 의미)로 하는 군사·행정조직을 만들었다. 5니르를 1자란으로, 5자란을 1구사(旗)로 편성했다. 니르는 중대, 자란은 연대, 구사는 사단과 같은 개념이다. 누르하치는 가한(可汗)으로 즉위하기 전 이미 8기, 400니르를 확보했다. 즉 12만 대군을 보유한 것이다. 기(旗)는 군사조직인 동시에 행정제도이기도 했다. 400니르 가운데 만주·몽골 혼성 니르가 308개, 몽골 니르가 76개, 한족 니르가 16개에 달하는 등 만주는 초창기부터 다민족적(多民族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어 외에 몽골어와 한어도 구사할 수 있는 다언어 구사자였다. 

    누르하치 세력이 통제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커지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와의 교역을 중단하면서 예헤부를 지원해 누르하치에 맞서게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압력에 맞서 독립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수도를 랴오닝성 동부 허투알라(興京)에 두고는 요하 유역 푸순(撫順)을 공격해 명나라 장군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곤 추격해온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의 1만 군을 대파했다. 누르하치는 새로 통합한 해서여진 하다부 땅을 집중 개간하는 등 자립 태세를 갖춰나갔다. 누르하치는 1618년 자기 가족을 포함한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탄압 사례를 일일이 열거한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해 명나라의 군사력에 힘으로 맞설 것임을 공언했다. 누르하치에게 공포를 느낀 명나라는 1619년 병부시랑 양호(楊鎬)를 요동경략, 즉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양호는 선양(瀋陽)에 주재하면서 누르하치군에 대처했다. 

    명나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양호는 1619년 12만에 달하는 명나라-예헤부-조선 연합군을 4로(路)로 나눠 누르하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李如栢)을 부사령관인 요동총병에 임명하는 한편, 두송(杜松)과 왕선(王宣), 마림(馬林), 유정(劉綎)으로 하여금 각 1로를 담당하게 했다. 양호와 유정은 조선에 출병해 일본군과도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예헤부가 1만5000 병력을 파병했으며, 광해군 이혼(李琿)도 지지 세력 북인을 포함한 사대부들의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강홍립(姜弘立) 지휘하에 1만 병력을 파병했다.

    明軍 3만 명 전멸한 사르허 전투

    4로 장군들 가운데 누르하치를 경시한 두송은 무공(武功)을 독점하기 위해 총사령관 양호가 내린 명령을 어기고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먼저 훈허(渾河)를 건넜다. 누르하치는 아들 홍타이지, 도르곤 등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선허(瀋河) 하안(河岸) 사르허에서 시커먼 흙비(霾)를 정면으로 마주한 두송 군단을 대파했다. 두송의 명나라군 3만 명은 전멸했다. 

    사르허 전투는 명과 만주(후금)의 세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이를 이여백과 나머지 3로군 장수들에게 일제히 통지했다. 이는 명나라군의 사기만 떨어뜨렸다. 마림은 도주하고, 유정은 전사했으며, 이여백은 휘하 병력이 함몰된 데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양호는 참형을 당했다. 만주군은 명나라군을 분산·고립시킨 후 각개격파했다. 명나라군은 군율 이완에다가 지나치게 분산돼 있어 집중돼 있던 만주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조선군은 강홍립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만주군에 투항했다. 누르하치는 승세를 타고 예헤부도 평정했다. 

    만주(청나라)가 명을 멸망시켰다기보다는 명이 자멸의 길을 걸었다. 천계제 재위 7년간 명나라는 남은 활력을 모두 갉아먹고, 멸망의 저편으로 급히 달려갔다.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의심이 많고,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한 인물이었다. 나라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잘 알던 그는 조급하게 행동했다. 잘 안되면 부하들을 파면하고 처형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의 재위 기간 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주원장이 봉기한 안후이는 물론, 허난과 산시(陝西) 등에서 일어난 기근으로 인해 민란이 빈발했다. 숭정제는 후금(청나라)과의 전쟁비용을 염출하고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관영 역참제도를 폐지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역졸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전국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실직한 역졸들이 농민군에 가세했다.

    멸망의 저편으로 달려간 大明天地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유민(流民) 지도자 중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이 가장 유력했다. 만주의 공세와 농민봉기로 인해 명나라는 질풍노도의 태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명나라 조정은 만주의 공세에 대항하고자 군사력 증강을 꾀했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했으며, 이는 결국 증세로 이어졌다. 여기에다가 왕가윤(王嘉胤)을 우두머리로 해 고영상(高迎祥)과 장헌충 등이 가담한 유민군(流民軍)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했다.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증세를 해야 한다. 그런데 증세는 민심 이반을 가져와 봉기군의 세력을 키우는 악순환을 야기한다. 

    순(順)나라를 세우는 이자성은 산시(陝西)성 옌안(延安) 출신으로 고영상의 부장이자 처조카다. 왕가윤의 농민군은 1630년 산시성 부곡현을 함락시켜 명나라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긴장한 명 조정은 홍승주와 조문조 등을 파견해 왕가윤 집단을 진압케 했다. 왕가윤이 전사했는데도 봉기군의 수는 늘어만 갔다. 1637년 재상 양사창의 전략에 따라 홍승주, 웅문찬, 손전정 등의 명나라 장군들이 산시와 허난 등에서 고영상과 장헌충 등이 거느리는 유민군단을 집중 공격해 일패도지(一敗塗地)시키고 고영상 등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이 무렵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도 푸젠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명 조정으로부터 관작(官爵)을 받고 항복했다). 

    고영상이 처형되자 이자성은 기근이 격심하던 허난으로 이동해 유민을 흡수한 끝에 다시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됐다. 이때 흡수한 우금성(牛金星) 부자와 이엄(李嚴) 등 지식인들의 지도로 이자성 집단은 조직력까지 갖추었다. 이자성은 후베이의 우창을 점령하고, 쓰촨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허난으로 들어가 1641년 뤄양을 함락했다. 이자성은 그곳에서 만력제의 아들 복왕 주상순(朱常洵)을 생포했다. 이자성의 부하들은 살해된 주상순을 사슴고기와 함께 삶아 먹었다. 그만큼 부패로 이름난 주상순에 대한 증오심은 격렬했다. 

    이자성의 뤄양 함락에 부응해 장헌충은 명나라 서부 군사기지 샹양(襄陽)을 점령했다. 이자성은 1642년 황하 중하류 카이펑(開封)을 점령한 후 샹양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신순국(新順國)을 세웠다. 이자성이 정권 수립을 공표하자 숭정제는 봉기군 진압 실패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는 신하들을 처형하는 등 극도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1644년 1월 1일 이자성은 시안(西安)에서 즉위식을 열고 순(順)을 건국했다. 그러곤 동정(東征)을 개시했다. 

    이자성군의 주력은 산시(陝西)→허난→허베이 루트가 아닌 산시(陝西)→산시(山西)→내몽골 루트로 베이징을 탈취하기로 했다. 이자성은 먼저 산시성 타이위안을 점령해 석탄의 베이징 반출을 막았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식량은 주로 강남에, 석탄은 주로 산시(山西)에 의존했다. 이자성의 타이위안 점령이 명나라 정부에 미치는 타격은 매우 컸다. 그는 이어 다퉁, 양화, 선부, 거용 등 베이징 인근 산시와 내몽골 군사요충지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군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이자성의 순나라군을 막을 군대는 베이징 부근 어디에도 없게 됐다.

    대청제국의 서막

    만주족 기병이 명나라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만주족 기병이 명나라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이자성은 타이위안에서 다퉁, 선부를 거쳐 베이징에 육박했다. 명 조정에서는 난징천도론도 제기됐으나 이자성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이자성은 3월 18일 명나라 관료와 환관들의 환영을 받으며 베이징에 입성했다. 숭정제는 태자 등 어린 세 아들을 황족 주순신(朱純臣)에게 맡겨 외가로 도피하게 한 후 자결했다. 주순신과 숭정제의 장인 주규, 대학사 위조덕 등은 이자성에게 항복해 숭정제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을 기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자성은 이들의 뻔뻔함에 화를 내고 유민집단으로 이뤄진 유종민(劉宗敏) 군단에 넘겨 모두를 살해케 했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지방 곳곳에서 항복해왔다. 최전선 산하이관의 요동 방위사령관 오삼계(吳三桂)는 장병과 주민 50여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 베이징을 향해 오다가 롼저우(灤州)에서 베이징 실함(失陷)과 숭정제 자결 소식을 들었다. 순나라와 만주 쪽에서 사절이 오고간 끝에 오삼계는 순나라가 아닌 만주를 택했다. 만주에 투항해 있던 그의 외삼촌 조대수가 투항을 권유했다. 오삼계가 만주에 투항한 데는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오삼계의 아름다운 첩 진원(陳沅)을 탈취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오삼계가 대군을 이끌고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청나라의 중국 본토 점령이 용이해졌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염원하던 입관(入關)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졌다. 만약 오삼계가 이자성에게 항복했다면 순(順)과 청(淸)이 병립해 중국과 만주는 완전 분리됐을 가능성이 크다. 퇴락하는 명나라와 달리 새로 들어선 순나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조선과 몽골은 만주의 속국이 됐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구가 적은 만주는 조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고 만주와 몽골은 결국 조선에 동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삼계의 청나라 투항과 청나라의 산하이관 돌파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홍타이지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이자 실력자 도얼곤은 중국을 지향했다. 도얼곤은 오삼계로 하여금 산하이관에서 출격해 이자성군(순나라군)을 공격하게 했다. 사르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흙비(霾)와 돌풍이 청나라군 쪽에서 순나라군 쪽으로 불어 순군(順軍)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오삼계군의 뒤를 이어 청나라군이 돌격했으며 순나라군은 대패하고, 무질서하게 서쪽으로 패주했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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