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연쇄정상회담;北의 숨은 그림 찾기

뒤통수, 기망, 으름장 북핵 30年

‘볼턴으로부터’ 시작된 2차 북핵 위기… 볼턴이 싫어한 한국인 ‘임동원’

  • 입력2018-04-25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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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라늄농축 한국에 처음 알린 ‘네오콘’ 볼턴

    • 1994년 북한 공습 직전까지 갔다고? 과장된 얘기

    • 벼랑 끝·살라미·back-loading 도돌이표

    •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으아~ 정말 강경론자야.”

    “악의 축 세 나라 중 첫 번째 군사공격 목표는 이라크요, 그다음은 북한, 세 번째가 이란이다.” 

    2002년 5월 존 볼턴 미국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의 이 발언이 서울을 뒤집어놓았다. 볼턴은 2차 북핵 위기를 한반도에 ‘몰고 온’ 인물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담판을 앞두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에 쥔 완성 단계의 핵무력을 뒷배로 패를 높이려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트럼프는 전임자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초강경론자를 기용했다.

    “볼턴은 한국 땅 밟지 마라!”

    미국 언론이 전쟁광, 사이코로 칭하기도 한 볼턴이 다시 북핵 협상의 최전선에 섰다. 트럼프가 그를 불러들인 까닭은 뭘까. 그는 거칠기로 악명이 높다. 슈퍼 매파(super-hawk), 최강 매파(arch hawk)로 일컬어진다. 2003년 8월 시작된 6자회담 초대 수석대표를 지낸 이수혁 민주당 의원은 볼턴을 이렇게 기억한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하얀 수염을 길렀는데…. 으아~ 정말 강경론자야.” 

    북한 핵무력이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한미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은 하나같이 실패했다. 한국 정부는 정권별로 냉탕, 온탕을 오갔으며 미국도 으름장 놓기와 다가서기를 반복했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2년 2차 북핵 위기는 ‘볼턴으로부터’ 시작됐다. 농축우라늄 문제를 들고 한국을 찾아온 최초의 미국 관리가 그다. 미국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이던 볼턴은 2002년 8월 29일 한국 외교부를 극비리에 찾았다. 이 자리에서 볼턴은 북한의 농축우라늄 연구·개발 범위가 우려할만한 수준으로 확대됐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전쟁 반대! 볼턴은 한국 땅 밟지 마라!” 

    볼턴의 한국 입국을 앞두고 서울에서는 그의 입국을 반대하는 시위가 거칠게 열렸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정책에서 보조를 맞췄으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상황이 180도 바뀐 터였다. 2002~2003년은 반미 시위가 다반사로 일어나 한미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시기다. 

    외교부에서 비밀회의를 연 후 힐튼호텔에서 한미협회 주최 강연에 나선 볼턴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거듭 지목한 후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영속적으로 지속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볼턴은 북한을 생물학무기 개발국가로 거명하고 이라크에 이어 국가안보위협국으로 지목했다.

    ‘화염과 분노, 시즌1’ 주역, 네오콘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기 직전인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북한, 이란, 이라크 세 나라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이 미국의 다음 단계 대(對)테러 전쟁의 목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2017년 8월 8일)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다”(2017년 9월 19일) “나는 훨씬 크고 강력한 핵단추를 갖고 있다”(1월 2일)는 트럼프의 으름장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된 것과 비슷하게 2002년에도 북한에 대한 공격을 시사하는 발언이 워싱턴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중심에 네오콘의 대변인 격인 볼턴이 서 있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로 1차 북핵 위기가 봉합된 지 8년 만에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현재도 2차 북핵 위기의 연장선상이다. 

    2002년 10월 3일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부시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농축우라늄 문제를 제기하고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게 목적이었다. 강석주 북한 외무상 제1부상은 평양에 온 켈리에게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영어로 번역한 것은 “was entitled to possess not only nuclear weapon but any type of weapon more powerful than that”이다. 핵무기를 가졌다는 현재완료형인지, 앞으로 갖지 않을 수 없다는 미래형인지, ‘핵무기보다 더 강한 것’은 무언인지 확정할 수 없는 모호한 표현이다. 한국어의 ‘가지게 돼 있다’는 ‘곧 하게 된다’(about to have)로도, ‘할 권능이 있다’(entitled to have)로도 번역할 수 있다. 

    미국은 강석주가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사실상 시인했다고 봤으나 북한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맞섰다. 김대중 정부 외교안보 분야 핵심 인사들은 미국의 견해를 반신반의하면서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이 확증 정보를 제시하지 않았으니 볼턴을 비롯한 네오콘의 판단에 신빙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플루토늄탄 우라늄탄 수소탄 ‘3종 세트’

    문재인-김정은 남북 정상회담의 원로자문단 단장을 맡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한미 양국 정보기관의 확실한 증거에 기초한 신뢰성 있는 공동 판단이 나올 때까지는 존 볼턴의 발언에 개의치 않고 일단 남북관계를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4년 전 금창리 지하핵시설 정보를 상기하며 잘못된 정보 판단이나 정보 왜곡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확실한 입장을 견지하기로 한 것이다.” 

    임 전 장관은 햇볕정책 설계자·집행자로 불린다. 그는 2차 북핵 위기의 책임을 미국에 돌린다. 

    “부시 행정부가 확증도 없는 고농축우라늄 계획을 제기해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자 2003년 초 북한은 지난 8년간 중단한 핵 개발을 재개하면서 북핵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볼턴이 싫어하는 한국 관료가 ‘임동원’이다. 임 전 장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자문해주고 볼턴이 트럼프 대통령을 보좌하는 현재 상황은 역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볼턴은 회고록 ‘항복은 선택이 아니다’(Surrender Is Not an Option)에서 임 전 장관을 두고 ‘진정한 북한 변명자(real DPRK apologist)’라는 모욕적 표현을 썼다. 옹호자로도 번역할 수 있는 apologist는 잘못에 대한 변명을 대신하는 이를 가리킨다. 

    안보당국 고위직을 지낸 인사는 “김대중 정부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희망적 사고에 매몰되는 바람에 대북 정책 우선순위가 굳어져버려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위험성과 파급력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경수로 공급 지연, 농축우라늄을 빌미로 한 중유 공급 중단 등 미국의 약속 위반과 북한의 핵 개발을 연결 짓는 시각이 적지 않다.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강행한 후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까지 진행하면서 플루토늄탄, 우라늄탄, 수소탄을 사실상 갖췄다. 볼턴이 한국에 처음 알린 농축우라늄 계획은 잘못된 정보 판단이나 왜곡이 아니라 진행된 프로그램으로 드러났다.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는 북한이 2017년 말 기준으로 우라늄 230~760㎏을 농축한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로 플루토늄탄 개발을 일시적으로 멈춘 뒤 우라늄탄 개발도 시작해 완성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쇼(show)였다

    부시 행정부도 임기 말 북한에 다가서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반응한 것이다. 

    2008년 4월 미국 국무부는 “우라늄농축 계획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더라도 국제 사찰관이 북한의 모든 핵시설에 접근해 핵무기 계획의 중지 여부를 검증할 수 있도록 미·북 간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요시하던 우라늄농축은 차치하고 플루토늄 핵무기 생산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목표를 조절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유엔 주재 미국대사에서 물러나 야인이던 볼턴은 부시가 클린턴이나 카터가 써준 각본대로 행동하는 듯하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환에 화답해 2008년 6월 27일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했다. 그것은 쇼(show)였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탓에 핵무장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적대시 정책이 해소되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북한 주장을 뒤집으면 미국이 북한을 지속적으로 위협해왔다는 뜻이 된다. 미국의 논리는 북한이 핵무장을 추구하기에 적대시했다는 것이다.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이수혁 의원의 설명은 이렇다. 

    “누구한테 위협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공격할 의사가 있고, 없고는 의미가 없다.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의 인식 문제인 거다. 위협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지언정 언젠가 나를 공격할 것이라고 느끼는 것은 과장이라고 볼 일은 아니다.” 

    북한 핵 개발이 자위용이라는 주장에도 이렇듯 절반의 진실이 담겨 있다. 체제 생존을 위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시곗바늘을 북한 핵 문제의 기원으로 돌려보자.

    북핵의 기원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한 때는 1980년대 말로 체제 경쟁의 승자가 한국으로 사실상 결정된 시기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북한의 처지는 곤궁해졌다. 체제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에 다가서는 정책을 구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7선언에서 한국의 우방국이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서도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북방정책을 추진하고자 7·7선언이 나온 측면도 있으나 북한과 미국, 일본의 관계가 개선돼도 좋다고 본 것은 체제 경쟁의 자신감에서 비롯했다. 

    1989년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부시 행정부의 방침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관계 개선을 검토한다는 것이었다.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가 이어져 국제정세의 긴장이 완화한 1991년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한 전술핵을 철수했다. 한반도도 해빙 분위기로 흘러간 것이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5일 뒤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내 미국 핵무기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한미 양국은 1992년 팀스피리트(Team Spirit) 군사훈련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소련 중국과 수교한 것처럼 북한이 미국, 일본과 수교하는 교차 승인 방안이 대두 됐다. 

    1990년대 초입의 해빙 분위기가 깨진 것은 1992년 7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결과와 북한의 신고 내용이 일치하지 않은 까닭에 특별사찰 문제가 대두되면서다. 

    1992년 10월 미국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이듬해 3월 재개하기로 한 게 결정타가 됐다. 북한이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등에 반발해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강수를 두면서 미국,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무산됐다.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를 비롯한 진보진영 인사들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축소나 중단을 언급하는 데는 1992~1993년의 전례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한반도 해빙 분위기가 깨진 것은 북한 탓일까, 미국 탓일까.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서울대 명예교수)은 미국 네오콘 탓에 평양의 강경 군부가 힘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국방 장관이던 딕 체니, 대통령비서실장이던 도널드 럼스펠드 등 미국 네오콘과 북한 강경 군부 세력이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는 것이다.

    “한중수교 이후 고립감·체제 불안에 시달려”

    당시 주한 미국대사이던 도널드 그레그 태평양세기연구소 회장도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에서 해빙 분위기를 반전시킨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등과 관련해 “(네오콘에게) 완전히 기습당한 꼴이었다”고 썼다. 

    IAEA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등 핵 개발을 지속함으로써 해빙 분위기를 깬 것은 평양이지만 체제 불안에 시달리던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평양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는 것이다. 

    자오후지(趙虎吉) 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는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한 까닭을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와 한소수교(1990), 한중수교(1992)로 인한 고립감과 체제 불안에서 찾는다. “북한은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자 고립감에 시달렸다. 평양은 베이징에 배신당했다고 여겼다.” 

    이렇듯 한중수교와 교차 승인 실패로 인한 북한의 고립감과 체제 불안이 핵 개발로 이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으나 신정승 전 주중대사는 “교차 승인의 실패가 북핵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북핵 문제로 인해 교차 승인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사실에 가깝다”고 봤다. 

    한중수교 전후는 냉전 체제가 와해하면서 세계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 때다. 거의 모든 나라가 경제 우선의 실용주의로 나아갔다. 베이징은 그 같은 흐름에 올라타 오늘날의 중국을 건설했다. 북한만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정점으로 치닫는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 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가 북핵 개발 저지를 위해 핵 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타격(surgical strike)이라는 강경책을 고안했으나 외과수술식 정밀 공격을 하더라도 전면전으로 발전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소지가 크다는 검토 결과에 따라 선택지에서 배제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0년 ‛신동아’ 기자들에게 “클린턴 대통령에게 수차례에 걸쳐 ‘제2의 한국전쟁은 안 된다’고 설득했다”고 말한 후 “지금 되돌아보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1994년 대북 선제 타격 직전까지 갔다는 인식은 과장된 것이다. 한승주 당시 외무부 장관(고려대 명예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긴급사태 대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페리의 말에 따르면 ‘내 책상 서랍에는 있었지만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도 아니었고 그것을 책상 위에 꺼내놓은 것도 아니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외교안보 당사자들도 하나같이 미국 정부가 북한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정한 단계까지는 간 일이 없고, 실제로 클린턴 대통령에게는 보고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계획을 한국의 동의 없이 강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현실 자체를 놓고 볼 때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한국이 막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1994년 5월 한반도 주변에 미군 항공모함 전단이 전개된 가운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6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카터에게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해주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김일성 사망(7월 8일) 후인 그해 10월 제네바 공식 회담에서 북·미 합의로 1차 북핵 위기가 봉합된다.

    김일성의 ‘느닷없는’ 죽음

    자오후지 전 교수는 “김일성은 나진·선봉을 제2의 싱가포르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개혁·개방을 선택한 거다. 그런데 김일성이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느닷없이 죽는다. 자연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에 갔더라면 북한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도 비슷하다.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지 않아 김영삼-김일성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두 정상 간 한반도 통일과 핵 문제에 관한 통 큰 결단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이쪽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저쪽에서는 김일성 주석이었으니까, 당사자들 각자 위치나 위상으로 보아 ‘무엇인가 이뤄낼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했고 또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북한은 1990년대 중·후반 극심한 식량난을 겪는다. 김정일에게는 정치적, 생물학적 생존이 중요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3년간 유훈 통치라는 명분 하에 공식 활동을 자제하다가 1997년 10월 노동당 총비서에 올랐다. 북한은 1998년 8월 대포동 1호를 발사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북한이 ‘나 좀 봐 달라’는 식으로 도발하면 미국이 움직이는 국면은 지금껏 되풀이된다. 

    김정일에게 선군(先軍)정치는 생존 전략이면서 국내정치 전략이었다. 당도 내각도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 위기를 차단하는 위기관리 조치로 선군정치를 택한 것이다. 선군정치가 국내용 생존전략이라면 대외용이 핵 개발이다. 한국은 한미동맹으로 미국을 업었으며 중국은 믿을 수 없었다. 

    2000년 북한과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가까이 다가선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중지(모라토리엄)→남북 정상회담→북한 조명록 특사 방미→미국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방북으로 이어진 것이다. 클린턴의 방북과 북·미 정상회담이 논의됐으나 임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아 무산됐다. 클린턴의 임기가 남았더라면 역사의 물줄기는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2001년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후 대외정책 헤게모니를 볼턴을 비롯한 네오콘이 쥐었다. 부시 행정부는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이전까지 압박을 통해 북한 정권의 변화를 강요하는 맞춤형 봉쇄(Tailored Containment) 정책을 구사했다. 

    ‘볼턴으로부터’ 시작된 2차 북핵 위기는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일시 봉합된 후 2007년 2·13합의, 10·3합의로 구체적 이행 계획을 마련했으나 북한의 첫 핵실험으로 귀결됐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설계자들은 볼턴을 비롯한 미국의 네오콘 강경파들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부각하는 한편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는 등 압박에 나서 합의가 깨졌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이를 두고 ‘방해 책동’이라는 표현도 썼다. 

    2007년에도 미풍이지만 훈풍이 불었다.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종전선언, 평화체제 논의가 물살을 탔다. 미국과 사전 합의가 되지 않은 남북만의 논의는 곧바로 벽에 부딪혔다. 

    북한은 1차, 2차 북핵 위기 동안 협상하다가 몰래 개발하기도 하고 사찰을 받는 척하기도 했으며, 실제 사찰도 받았고,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기도 했다. 합의했다가 깨기, 뒤통수치기와 기망(欺罔)을 반복하면서 북한의 핵 능력은 완성 단계까지 왔다.

    北 3大전술 : 벼랑 끝, 살라미, back-loading

    북핵 협상에서 북한은 특유의 세 가지 전술을 구사했다. 첫째는 ‘벼랑 끝 전술’이다. 1994년 사용 후 핵연료를 인출해 추출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트럼프는 불장난을 좋아하는 불한당이자 깡패다. ‘노망난 이 늙은이(dotard)’를 분명히 불로 다스릴 것이다”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같은 김정은의 발언까지 극단적인 모험주의적 전술을 구사했다. 둘째는 ‘살라미 전술’(처리할 문제를 최대한 잘게 나눠 하나씩 해결하는 것)이다. 일괄타결이나 포괄적 합의를 선호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실제로는 살라미 방식으로 합의 이전의 원상으로 복귀할 수단을 보유하려는 행태를 보였다. 셋째는 부담이 적은 합의는 초기에 실행하고(front-loading) 상응 조치는 뒤로 미뤄놓는(back-loading) 것이다. 북한은 거의 모든 협상에서 이 같은 3가지 협상 전술을 구사했다.

    김정은-트럼프 ‘원샷’ 가능할까

    김정은-트럼프 담판으로 25년 묵은 협상이 ‘원샷’으로 해결될까. 이수혁 의원은 제네바 합의 이후 4자회담과 2차 북핵 위기 이후 6자회담의 데자뷔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북 정상의 포괄적 합의, 북·미 정상의 일괄타결이 이뤄지더라도 비핵화까지는 지난한 단계적 이행 과정이 필요하다. 북한 체제 보장, 평화 체제 구축 등 단계적 과정은 다자 틀에서 협의될 수밖에 없다. 

    평양은 선언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평화협정, 북·미수교, 주한미군 철수, 대북 무력 불사용 공약(재래식·핵무기 공격 포기 등), 핵우산 제공 철폐(미국의 핵 관련 전략자산 한국 철수 등), 한미 전략자산 훈련 중지 등을 요구할 것이다. 4자, 6자 틀에서 북한이 특유의 3대 전술을 재가동할 수도 있다. 비핵화 완료 시한을 2년 안팎으로 짧게 하고 이행 시간을 줄이는 데 주력해야 하는 이유다. 

    김정은이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어 ‘평양판 덩샤오핑(鄧小平)’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라면 한반도가 대격변에 돌입할 수 있다. 문재인-김정은-트럼프가 분단 73년 역사의 신기원을 이뤄낼지 세계가 주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역대 정부 대북정책은?
    오바마 ‘전략적 인내’는 MB정부 ‘현인택 작품’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 평화번영정책은 포용정책으로도 불리는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구상은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을 계승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결과적으로 북한 핵 개발을 막지 못했으며 평화 체제 구축에도 실패했다. 

    이명박 정부 비핵·개방·3000과 박근혜 정부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선(先)핵폐기를 강조한 봉쇄·압박 정책이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에 다가서는 방법으로 베이징이 평양을 움직이게 하려 했으나 결과는 나빴다. 북한이 핵 개발에 가장 속도를 낸 게 박근혜 정부 때다. 비핵·개방·3000과 한반도신뢰프로세스도 실패한 것이다.

    ‘전략’도 없이 ‘인내’만 했다?

    한미 정부의 궁합이 맞은 적도, 불협화음을 낸 적도 있다. 김대중 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페리 프로세스’를 만들면서 조정에 성공했으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김대중 정부와 엇박자를 냈다. 노무현 정부는 부시 행정부와 갈등을 빚었으나 후반에는 조정 국면에 들어갔다.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의기투합했으나 성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는 무시·방관의 소극적 정책을 구사했다. 북핵을 통제 가능한 위협으로 보고 북한 급변사태 및 붕괴를 기다렸다.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이름이 붙은 이 정책이 수립되는 데는 이명박 정부가 큰 역할을 했다. 전략적 인내는 북한이 핵 개발에 나설 시간을 벌어줬다는 비판을 듣는다. 전략 없이 인내만 했다는 것이다. 

    2009년 7월 오바마 대통령의 초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로 임명된 커트 캠벨이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과 서울에서 만났다. 현 장관과 오랜 지인 관계인 캠벨이 “한미 양국이 어떤 대북정책을 펴는 게 좋겠느냐”고 묻자 현 장관은 “전략적으로 인내(strategic patience)하면서 압박해야 한다”고 답했다. ‘전략적 인내’는 이렇게 시작됐다.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고려대 교수)은 “대북정책을 관장한 사람으로서 ‘전략적 인내’가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략적 인내는 이명박 정부와 조율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오바마도 후보 시절에는 김정일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오바마 행정부 첫해인 2009년 4월로 되돌아가보자. 오바마가 재임 중 펼칠 정책 중 하나인 ‘핵 없는 세상’과 관련해 연설하는 그날 북한이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오바마의 기분이 어땠겠나. 캠벨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 내놓은 정책이 전략적 인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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