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선처 호소, 억울함 토로, 긴 침묵…

최후진술 천태만상

  • 입력2018-05-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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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고인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십시오.”검사와 변호인의 최후변론이 끝나고 재판장이 이렇게 말하면 피고인이 일어나서 최후진술을 한다. 검사나 변호인의 최후변론은 기승전결이 정형화되어 있는 반면에 피고인의 최후진술은 훨씬 더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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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고인 최후진술의 첫째 유형은 피고인이 반성하고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경우다. 흔히 피고인이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고 선처해주십시오”라는 식으로 말한다. 피고인이 내 앞에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것은 내가 들을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피해자에게 할 말이다. 상처는 피해자에게 났는데 약은 판사에게 바르는 격이다. 

    내가 사과를 받고 있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민망해서 “저한테 사과할 것은 없고 혹시 피해자에게는 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피고인이 정작 피해자에게는 사과도, 반성도, 용서를 구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진심이 의심스러워진다. 칼자루를 쥔 판사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사과라 하더라도 피해자가 직접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피해자의 깊은 상처가 가해자의 사과 한 마디에 눈 녹듯 사라질 리 없다. 그렇더라도 가해자의 사과를 들었을 때와 듣지 못했을 때 상처의 크기가 같을 수 없다. 그것도 피고인이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하는 사과가 아니라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서서 판사가 보는 앞에서 마이크에 입을 대고 공식적으로 하는 사과를 듣는다면.

    사과와 반성

    그런데 피해자는 보통 재판에 나오지 않는다. 법정이라는 무대 위 주인공은 피고인뿐이다. 피해자가 앉을 자리는 없다. 피해자를 따로 초대하지도 않는다. 원래는 검사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검사와 피해자가 같을 수 없다. 검사가 건조하게 피해자를 포함한 공익을 대변하는 것과 피해자가 직접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처지와 기분을 말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피해자가 법정에 나올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증인으로서 법정에 나와서 증인석에 앉아서 신문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어디까지나 사건의 진상을 경험한 증인으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을 증언할 뿐이다. 피해자가 증인으로 나오면 철저한 신문 대상이 되어 피고인 측에서 피해자를 불신하는 전제에서 날카롭게 따져 묻는다.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가 오히려 악화되기 십상이다. 그나마 피해자가 증인으로 법정에 나오는 사건은 피고인이 죄를 부인하는 사건에 국한된다. 자백 사건에서는 피해자를 비롯한 증인을 대개 부르지 않는다. 형사사건은 대부분 자백 사건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형사사건에서 피해자는 법정에 나오지 못한다. 

    판사로서 피해자 얼굴 한 번 못 보고, 눈물 한 방울 보지 못하고, 한숨 소리 한 자락 듣지 못한 채 재판하는 것이 나는 때로 아쉬웠다. 재판마다 피해자에게 기일의 일시,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법정에 ‘피해자석’도 놓아주면 안 될까. 법대 왼편에 피고인석과 변호인석이 나란히 있는 것과 같이, 법대 오른편에 검사석과 피해자석이 나란히 있을 수는 없을까. 그러면 검찰도 정의를 수호하고 피해자를 돕는 기관이라는 이미지를 알리는 데 유용할지 모른다. 



    내가 재판할 때는 검사 옆자리에 피해자가 앉아 있다고 상상하곤 했다. 사건의 주인공이 피고인 원톱이라고 생각할 때와 피고인과 피해자 투톱이라고 생각할 때는 사건을 보는 각도나 어림잡게 되는 균형점 등이 크게 달라진다. 

    나는 피해자가 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되는 사건의 경우에는 법원 직원을 통해 전화로 피해자에게 마지막 변론기일을 알려주라고도 했다. 사실 제도에 없는 것이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소심해지기도 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일종의 일탈에 해당해 그런 일을 하는 판사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제도의 변화나 발전을 위한 논의는 일탈하는 사람에 의해 촉발된다는 믿음으로, 올해가 마지막 재판이라는 생각으로, 소심함을 물리치고 일탈을 저질러보곤 했다.

    침묵하는 피고인

    그렇게 기일을 알려주어도 피해자가 법정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가 나와서 피고인이 사과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한 처벌을 면하려는 꼼수라며 화를 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고인이 판사 앞에서 사과와 반성을 할 때는 처벌을 면하려고 하는 마음도 분명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런 마음이 전부일까. 적게나마 정말 미안한 마음도 있지 않을까. 피해자가 피고인을 향해서 법정에서 화를 분출하고 고함을 지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 상처를 마음에서 떼어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모두 다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피고인 최후진술의 둘째 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고인이 “달리 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앉아버리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피고인 중 누구도 정말 할 말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형사재판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을 주인공으로서 겪고, 그 사건으로 경찰과 검찰 수사를 연달아 받고, 짧게는 몇 달 길게는 한두 해 정도 재판을 받은 피고인이 그 험난하고 긴 여정의 종착역에서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그 여정의 결말을 결정할 수 있는 판사에게.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50대 여성 두 명이 떠오른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나의 요구에 긴 한숨 끝에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어두운 표정으로 “할 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사지’라는 간판을 걸고 성매매를 하다가 걸린 여성들이었다. 이미 세 차례나 동종 전과로 처벌받은 전력도 있었다. 제대로 교육받은 적 없고, 재산도 없고, 행색도 초라하고, 머리카락도 바싹 타버린 듯 탈색돼 건강도 몹시 나빠 보였다. 빈말이라도 여느 피고인들과 마찬가지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으니 선처해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그 흔해빠진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다시 또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일이 아니면 달리 먹고살 길이 없다는 것을, 판사조차 이미 알고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밖에도 피고인이 할 말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법정에서 말하는 것이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나는 큰 회식 자리에서 ‘폭탄사’ 하나 하는 것도 그렇게 힘든데), 자기 마음을 자신조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경이 복잡해서, 괜히 말을 했다가 오히려 말실수로 손해볼까봐, 길게 말하면 판사가 싫어할까봐, 말을 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마음에 등등의 이유로 할 말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피고인 최후진술의 셋째 유형은 자신의 억울함을 길게 호소하는 것이다. 위법한 행위를 했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를 ‘동기적 억울함’이라고 나 혼자서 부른다. ‘법 위반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 전임자부터 동료까지 관행적으로 해오던 일이다. 현재의 시스템상 이런 일을 하지 않고는 사업 내지 업무를 정상적으로 해낼 수 없다. 다른 누군가에게 다 속아서 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TV에 나오는 누구누구는 수백억씩 해먹고도 구속 좀 됐다 풀려났는데 나는 고작 몇백만 원 먹었다고 이렇게 감옥에 가 오래 있어야 하느냐고 따져 묻는 이도 있다. 마지막 경우의 피고인을 두고 예의가 없다거나 판사에게 대들었다고 씩씩거리는 판사도 있지만 나는 피고인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피고인이 말하는 동기적 억울함을 나도 대개 공감한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모든 절차와 규정을 다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신보다 더 힘 센 사람이 뇌물이나 부정한 행위를 요구할 때 혼자서 따르지 않으면 아예 사업이나 업무를 해낼 수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도 안다. 내가 그 처지에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므로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동기적 억울함은 사회 전반의 제도 개선으로 해결해야 한다. 동기적 억울함을 이해하면서도 처벌할 때만큼 만큼 기분이 울적한 일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아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 양 행세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누구든 한번 그런 피고인을 직접 만나고 처벌해보면 내 심정을 알 것이다.

    선고 연기 요청

    피고인 최후진술의 넷째 유형은 판결 선고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합의를 시도하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런데 대개는 선고를 연기해줘도 돈을 구하지 못한다. 당초부터 돈을 구할 능력도, 생각도 없지만 그저 판사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피고인도 있다. 판사 입장에서도 연기해주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선고가 연기되면 판결문 마감이 연장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다른 사정을 들어 선고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하는 피고인도 있다. 사귀던 여성이 더 이상 자기를 만나주지 않는다며 술을 마시고 그 여성의 집에 쳐들어가서 여성의 목에 칼을 대고 위협한 남성 피고인이 있었다. 죄가 중하고 피해자도 처벌을 원해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피고인이 마지막 변론기일에 자기가 감옥에 가면 초등학교 3학년생 딸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아내와는 오래전 이혼한 상태였다) 사람을 구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한 달의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한 달 후에도 그는 딸을 맡길 곳을 찾지 못했다며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2주를 더 주었다. 2주 후에도 그는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딸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나의 추측이지만 그렇다면 당일 피고인을 구속할 경우 딸이 집에 왔다가 아빠가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그 딸의 심정을 생각하니, 또 내 딸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어떨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좋지 않았다. 그래서 2주를 더 주었다. 그러나 2주 후에도 피고인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할 수 없이 법정구속했다. 직원을 통해 딸에게 아버지가 구속된 사정을 알려주라고 요청했지만 그 뒤로 챙겨보지는 못했다. 그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 아직도 신경이 쓰인다.

    허를 찌른 최후진술

    그 밖에 최후진술 자리에서 허를 찌르는 특이한 말을 하는 피고인도 심심찮게 있다. 어떤 폭력 범죄 피고인은 검사가 벌금 500만 원을 구형하자 벌떡 일어나서 “재판장님, 벌금은 쪽팔립니더. 차라리 징역을 보내주이소!”라고 고함을 쳤다. 내가 정말 징역이 더 나은지 묻고 몇 년을 원하는지 물으니 대답이 없었다. 100살이 훌쩍 넘은 피고인도 있었다. 1913년생이었으니 3·1 운동(1919)에 동참했을 수도 있는 나이였다. 명의신탁이 문제 되어 법정에 섰는데 비교적 가벼운 벌금 사안이었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전과 없이 살아오던 분이 전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러한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더듬더듬 말하다가 졸도를 하셨다. 

    사람이 부산하게 오가는 길거리 상점 앞에서 자위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공연음란죄로 기소된 남자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직업란에 거리공연가라고 적었고, 중세 마법사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법정에 나왔다. 시종일관 내게 자신은 길거리에 놓인 단상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 사이 난 틈으로 똥을 쌌을 뿐 자위행위를 한 적이 없다, 누가 똥을 싸면서 자위행위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쪼그리고 앉아서 똥을 싸는 모습과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을 시연하려 했다. 저런 분이라면 법정에서 응가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쳐들고 “아,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하게 되었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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