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명사에세이

문제적인,너무나 문제적인 집!

  • 입력2018-05-09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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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번 찾아오고 싶다고. J는 내 지도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학생이다. 학부 졸업을 앞둔 그 어느 날, J는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했다. 사회학을 배워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고. 나는 뛸 듯이 기뻐 어서 오라고 했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연구비를 따다 장학금을 주었다. 석사 과정을 잘 마치고 논문을 쓰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집’에 우환이 생겨 한동안 학교에 나올 수 없다고 했다.
     
    기다렸다. 한참 지난 후 J가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부랴부랴 석사 논문을 마치고 결혼을 했다. 상대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사귀던 복학생 오빠. 그는 대학을 자퇴하고 전문대에 다시 들어가 기술을 배워 제철소에 취업한 터였다. J도 남편 직장을 따라 제철소가 있는 노동자의 도시로 옮겨갔다. 그런 J가 학교에 다시 온다는 것이다. 

    점심을 먹은 후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J가 쭈뼛쭈뼛 말을 꺼낸다. 

    “선생님, 다시 … 공부하고 싶어요.” 

    흔들리는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결혼하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남편 직장 가고 나서 혼자 ‘집’에만 있으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짐을 정리하다가 대학원 시절 발제했던 노트들을 봤어요. 다시 읽으니까 그때 생각이 너무 새로운 거예요.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나 싶었어요.”



    새로운 도전을 꿈꿨던 제자

    그동안의 삶을 털어놓는다. 낯선 외지에 가니 아는 사람 하나 없다. 하루 종일 ‘집’에서 남편 퇴근하기만 기다린다. 하루 해가 너무 길다, ‘집’ 안에서 홀로 지내기에는. 때 지난 공부 노트들을 꺼내본다. 당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적어놓은 글들.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내가 고작 이러자고 대학원 공부를 했나, 자괴감이 몰려온다. 다시 시작하자.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J가 대학원 박사 과정 면접시험을 봤다. 그해 겨울, 서울에서 열린 한국사회학회 학술대회에도 참석했다. 한눈에도 다시 공부하려는 열망이 강해 보였다. 그런데도 뭔지 모를 불안한 마음. 그리고 대학원 등록일이 다가오는 어느 날 J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집’ 나가래요.” 

    “뭐?” 

    “대학원에 갈 거면 아빠가 ‘집’ 나가래요. 학교가 멀어서 수업 있는 날에만 아빠 ‘집’에서 다니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못 받아주겠다는 거예요.” 

    불안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자식에 대한 낮은 기대. 특히 딸에 대한. 여자의 생은 남편 만나 가정을 꾸리고 ‘집’에서 애를 낳고 키우며 사는 것이라 굳게 믿는 ‘지방의 마음.’ 

    편지를 썼다.

    J야, 사정을 들어보니 안타깝구나. 하지만 내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J의 삶의 의지다. 결혼 후 홀로 떨어져 있다 보니 성찰을 하고 깨달음이 있었다고 믿었는데, 여전히 홀로 서지 못한 듯해 안타깝구나. 그런 여린 의지로는 이 세상을 독자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뜻이 없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고 싶다고 했지? 이성복 시인의 시를 보낸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는 길은세상 어디에도 없는 길이에요. 


    이 길은 오직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야 하므로,우리 몸속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가령 거미 같은 곤충을 보세요.자기 몸속에서 토해낸 실을 밟고공중에서 옮아가잖아요. 

    그처럼 이 길은 오직 우리 자신 속에서만만들어질 수 있어요.

    답장은 없었다. 이후 연락이 아예 끊겼다. 

    결혼 후 학문의 세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 다른 제자들도 떠오른다. 대학원 시절, 우리는 공식적인 스터디가 끝나고도 그날 공부한 내용에 대해 계속 열띠게 토론했다. 제자들은 한나 아렌트처럼 자기만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만들겠다고 거듭거듭 다짐했다. 우리는 끈끈한 학문 공동체였다. 나는 학파가 만들어진다는 희망에 달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자들은 학자로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공부 대신 친밀성의 세계를 선택했다. 이후 웬만해서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공부보다 공부하는 분위기가 더 좋았다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떠오른다. 결혼과 함께 공부는 끝났다. 공부보다 사실 공부하는 분위기가 더 좋았다. 아니 열띠게 토론하며 공부하는 척하는 스타일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공부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것보다 오히려 친밀성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사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다는 것을. 좋은 가부장을 만나 사는 것은 공부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훨씬 쉽다. 공부로서 인정받는 길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나는 현실 가능성이 높은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지금 철 지난 해변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쓸쓸하다. 하지만 어찌 제자들만 탓하랴. 외국으로, 아니 하다못해 서울로 유학 가지 않아도 지방대 대학원에서 여성이 학문의 길을 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놓지 못한 기성세대의 잘못 아닌가? 그럼에도 이 모든 사회구조적 역경을 돌파하려는 강한 앎의 의지를 갖지 못한 제자들이 못내 안타깝다. 

    경제적 지원 능력을 가진 남성과 결혼한 다른 제자들은 그렇다 치고, 낯선 도시에서 노동자의 아내이자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J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운동하는 남편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던 조주은의 ‘현대가족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남편이 밤새 야간노동을 마치고 아침에 ‘집’에 들어오면, 아침상을 차려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밤을 새운 남편이 숙면해야 했기 때문에. 둘째는 둘러업고, 첫째는 유모차에 태우고서 하루 종일 화봉동 거리를 다녀야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집’에 들어가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 때문에 남편이 자고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게 꺼려졌다. 종일 점심도 거른 배를 움켜쥐고 갓난쟁이 두 아이를 업고 밀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하염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주부를 상상해보라.

    ‘하층 노동계급’임에도 중산층의 가부장적 핵가족 모델을 흉내 내 전업주부로 살다가 온갖 고초를 겪은 조주은은 뒤늦게 토해낸다. “나는 엄마, 아내,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 탐구해야 했고, 나와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싶었다.” J도 여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집’을 넘어 세상에 대해 알려는 의지가 다시 생겨날까.


    최종렬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 미국 네바다주립대 사회학 박사
    ● 199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 저서: ‘다문화주의의 사용: 문화사회학의 관점’, ‘사회학의 문화적 전환: 

       과학에서 미학으로, 되살아난 고전 사회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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