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이준 열사 넋 서린 곳서 선서… 96년 만에 痛恨 풀었다”

  • 입력2018-05-13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국제형사재판소 출범이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미국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제형사재판소를 강하게 공격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사람은 오직 아프리카인뿐이라고 불평한다. 인권변호사들은 조지 W 부시, 토니 블레어 등 강력한 지도자들이 전쟁범죄로 기소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은 식민주의의 기억이 있고 서방의 간섭에 대한 본능적 증오와 의문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처럼 주권 절대 사상으로 복귀하는 경우마저 나타난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선거팀. 황철규 법무협력관, 나, 한명재 유엔대표부 참사관(왼쪽부터), 맨 오른쪽은 신각수 외교부 조약국장.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선거팀. 황철규 법무협력관, 나, 한명재 유엔대표부 참사관(왼쪽부터), 맨 오른쪽은 신각수 외교부 조약국장.

    2002년 11월 30일 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 초대 재판관 후보로 나를 지명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창설 움직임은 진즉 알고 있었으나 내게 이 같은 요청이 올 것은 전연 예상하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정년퇴직하면 무엇을 할 지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의를 받으니 얼떨떨하기만 했다.

    지미 카터가 보낸 축하 편지

    노무현과 이회창이 맞대결하는 대통령선거가 며칠 안 남은 시기여서 온 나라의 관심이 그리 집중됐으므로 나의 재판관 선거를 도와주거나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승주 교수가 회장, 김현 변호사가 사무국장으로 급조된 후원회에 제자들과 일부 고마운 분들이 선거 비용을 조금씩 도와줬고, 외교부에서도 한참 고려하다가 김항경 차관과 신각수 조약국장이 예산을 풀어 나의 선거를 지원하기로 했다. 

    2003년 새해가 밝았다. 매년 양력 설날이면 정초 3일간 제자들을 맞이해 세배하고 집에서 만든 조랭이 떡국을 먹으면서 덕담을 하는 관례가 수십 년간 계속됐다. 이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많은 제자를 맞이하는 등 들뜬 분위기가 이어졌다. 

    나는 1월 8일 뉴욕으로 이동해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다른 나라 후보들을 보니 대법원장이 출마한 경우가 많았다. 이미 선거운동도 많이 했다. 피지의 대법원장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헌정을 파괴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많은 NGO(비정부기구)의 항의를 받고 후보에서 사퇴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선거는 희망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조약에 투표 방식을 아주 자세하게 규정해놓았다. 45명 후보자의 이름이 인쇄된 투표지를 놓고 지역 안배, 남녀 안배, 전공 안배(국제법 및 형사법 전공)를 고려해 여러 명에게 동시에 투표하는 방식이다. 투표 방식이 하도 복잡해 이틀 동안이나 예행 연습을 거쳤다. 나는 첫 투표에서 최고득표를 이뤘다. 



    한명재 유엔대표부 참사관과 황철규 법무협력관 등의 헌신적 선거운동과 한평생 국제적으로 축적된 경험이 재판관 당선의 기초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한다. 재판관 선거가 완료된 후 축하 만찬, 언론 인터뷰 등 시끌벅적한 통과의례가 있었다. 2003년 2월 18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축하 편지를 받고는 비로소 당선된 실감이 났다. 카터 전 대통령은 세계 평화와 인권에 관해 외곬으로 흔들림 없이 노력해온 챔피언이라고 할 수 있다.

    괄목할만한 업적 거둔 임시 재판소들

    인류의 소원인 평화와 안전을 달성하고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인류는 평화와 안전을 위해 오랫동안 지혜를 모아왔다. 막연한 희망이 구체화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전범재판소를 설치해 전범자들을 단죄한 것이다. 민간인을 살상한 책임자를 붙잡아 국제법정에서 처벌할 수 있는 국제법적 선례를 만듦으로써 다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일어나지 않고 세계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형성됐다. 

    1990년대 발칸반도에서 엄청난 대학살이 재연된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1993년 임시 유고전범재판소(ICTY), 1994년 르완다학살재판소 등이 설립돼 발칸반도의 도살자 등을 성공적으로 응징해왔다. 그 외에도 동티모르, 시에라리온, 캄보디아, 레바논 등 여러 임시재판소가 필요할 때마다 설립돼 임무를 수행한 바 있다. 정의 실현과 관련해 임시 재판소들은 괄목할만한 업적을 거뒀다. 

    대량 학살의 비극이 발생할 때마다 임시로 재판소를 설치해 대응하는 방법은 시간과 돈이 엄청나게 들 뿐만 아니라 대증요법에 불과하므로 영구적인 국제형사재판소를 설치해 살상 책임자들을 일벌백계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95년 로마회의가 소집돼 1998년 로마규정(Rome Statute)이라는 기본조약이 성립됐으며 예상과 달리 4년 만에 60개국의 비준이 이뤄져 2002년 7월 1일 발효됐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이 현실화한 것이다. 

    나를 포함한 18인의 초대 재판관이 2003년 3월 1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거행된 취임식에서 선서했다. 초대 재판관들의 취임 선서는 네덜란드 정부의 배려로 800년가량 된 목조건물인 기사관(Ridderzaal·The Hall of Knights)에서 이뤄졌다. 1907년 이준 열사 등이 고종의 밀지를 가지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왔다가 입장을 거절당한 통한의 장소다. 이곳에서 당당하게 선서함으로써 96년 만에 역사적 한을 간접적으로나마 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형사재판소를 삐딱하게 본 미국

    국제형사재판소는 신설 국제기구였다. 재판관의 정착을 도와줄 보조 인력이나 선례가 없었다. 나 역시 교포도 드물고 말도 잘 안 통하는 타향에서 혼자 집을 구하고 차를 사고 은행계좌를 열었다. 전화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2월 중 우리를 따라와 많은 도움을 주며 머물던 딸 유진도 유난히 나쁜 기후에 혀를 내두르고 떠났다. 여러 달 동안 재판소가 임시로 잡아놓은 허름한 숙소를 트렁크를 들고 피난민처럼 전전하다가 포부르그에 방 2칸짜리 아파트를 샀다. 

    초대 재판관 18명은 법원의 기초를 다지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다. 구체적 사건이 없던 때라서 소송 규칙이나 내부 규정 등을 심의·제정했다. 

    재판소 출범이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제형사재판소를 강하게 공격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타격을 주고자 노력했다. 부시 행정부는 80여 개국에 주둔하는 미군이 현지에서 저지른 살인 사건 등이 회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국제형사재판소 출범을 반대했다. 그들이 우려하는 미군의 범죄는 주둔한 나라와의 행정협정(SOFA)에서 다룰 일이었다. 전쟁, 침략, 집단학살, 인도에 반하는 범죄 등 4가지 사안만을 다루는 국제형사재판소와는 범죄 관할이 원천적으로 다른 데도 미국 정부의 태도는 삐딱했다. 

    로마조약은 인류가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어렵게 성립시킨 것이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평소에는 면책특권을 향유하더라도 집단학살 등의 범죄를 조장했거나 묵인한 경우에는 현역 여부와 관계없이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명제에 터를 잡고 있다. 지도자가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고자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도 벌을 안 받는다는 생각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위험하다.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으로 집단학살 등의 범죄만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처벌하도록 새로운 국제적 형사정의 시스템이 합의됐는데 그 정상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응보적·회복적 정의 실현

    2003년 3월 1일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취임식에서 만난 코피 아난(오른쪽) 당시 유엔 사무총장.

    2003년 3월 1일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취임식에서 만난 코피 아난(오른쪽) 당시 유엔 사무총장.

    인권 보장이 이뤄진 나라의 정부나 지도자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지도자도 상대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인권 문제가 심각한 중국이 가장 분명한 사례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2002년 구자라트주 대량 학살에 연루돼 오랫동안 미국 비자 발급이 거부됐으나 총리가 되자마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환대 속에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중차대한 결함이 있는 지도자마저도 정상적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다면 국제형사재판소 중심의 국제형사정의체제는 내재적 불일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사람은 오직 아프리카인뿐이라고 불평한다. 인권변호사들은 조지 W 부시, 블라디미르 푸틴, 토니 블레어 등 강력한 지도자들이 전쟁범죄로 기소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은 식민주의의 기억이 있고 서방의 간섭에 대한 본능적 증오와 의문이 있다. 짐바브웨처럼 최악의 인권 기록을 가진 나라마저 국제 형사정의에 대해 회의적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예처럼 주권 절대 사상으로 복귀하는 경우마저 나타난다. 인권 유린자들이 숨 쉴 공간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한 임무를 수행해왔다. 2002년 국제형사재판소가 신설되면서 유엔과 별도로 형사정의를 통한 평화 확립의 독자적 국제 시스템이 구축됐다. 그동안 유엔은 국제사법재판소와 안전보장이사회라는 2개의 수단을 갖고 세계 평화를 유지해왔으나 그것만으로는 미진했다. 전쟁범죄 등 반(反)평화범죄를 저지른 자를 반드시 수사해 처벌함으로써 응보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인류의 인식과 열망에 따라 국제형사재판소는 국제형사정의를 통한 지속가능한 평화 확보 수단으로서 창설된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중범죄자를 처벌하고 손을 씻는다면 이는 여느 형사법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는 한발 더 나아가 국제형사재판소가 관할하는 범죄로 피해를 본 수많은 피해자에게 체계적 구호를 제공해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확보해주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회복적 정의와 치유적 정의의 실현을 위한 피해자 신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단순한 형사법원이 아니라 앞으로 유엔과 쌍벽을 이뤄 지속가능한 세계 평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선도할 국제기구인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수사와 처벌 외에 피해자를 위한 회복적 정의 실현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실험이므로 이 실험은 결코 실패하면 안 된다. 또한 국제사회의 전폭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무명 한국인 소장으로 선출해

    2007년 7월 13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이준 열사 추모 심포지엄.

    2007년 7월 13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이준 열사 추모 심포지엄.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으로 일한 지 6년이 지난 2009년 3월 10일 소장 선거에 출마했다. 브라질의 실비아 스타이너 재판관과 경선 끝에 18명 중 12표를 얻어 당선됐다. 그동안 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무던히도 인내하면서 동료들에게 늘 진실하게 대했다. 동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마다 성의껏 행동했다. 외교관을 하다가 당선돼 왔기에 형사재판을 본 일조차 없는 동료에게는 재판 업무에 관한 지식과 요령을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르쳐주기도 했다. 

    서유럽의 식민사관에 입각한 재판소라고 인식돼 비난을 받던 국제형사재판소가 예상을 깨고 아시아인을 소장으로 선출했다. 나의 당선은 국제형사재판소를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앞잡이라고 공격하는 아프리카인에게 할 말을 잃게 했다. 국제기구가 160여 개나 상주하는 헤이그의 국제사회에서 동양인이, 그것도 무명의 한국인이 국제형사재판소장으로 선출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필립 키르쉬 전임 소장에게서 업무를 넘겨받은 후 소장단(소장과 부소장 2인) 회의를 소집했다. 최고급 식당에서 사비로 오찬을 베풀었다. 한국에서는 판공비나 업무추진비로 회식 모임을 주선하고 공금으로 밥값을 내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제기구에는 판공비나 접대비 예산이 전연 없으므로 사비에서 지출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동료들과 식사하는 경우는 자연히 거의 없고, 사무실에서 냉수나 커피를 마시면서 의논할 때가 많다. 

    2009년 4월 26일 방콕을 찾았다. 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로마조약에 가장 먼저 서명한 나라였으나 왕의 존재가 신성불가침이므로 국왕의 면책이 보장되지 않는 한 로마조약의 비준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장관들이 면담을 회피하고 모두 슬슬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었다. 대개 차관급이나 그 이하 실무자가 나왔는데 책임 있는 말을 하는 관리가 없었다. 

    국제형사재판소 조약을 비준한 나라 중 일본, 영국,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25개 왕국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국왕의 면책특권에 관한 법률적 난점을 잘 극복하고 회원국이 됐다. 이들의 선례를 연구해 자기네의 비준 준비에 참고로 할 수도 있겠건만 태국 관리들은 무성의하기 짝이 없었다. 

    태국 등 많은 동남아 국가의 전반적인 인상은 관리들의 준비와 자세가 기대 이하였고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과한 선물이나 주고 선심성 초청 약속만 쓸데없이 남발할 뿐 국제형사재판소로서는 소득이 없었다. 군부가 행정부를 통제하는지 군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인도네시아 군부가 동티모르에서 저지른 범죄

    2009년 3월 27일 국제형사재판소장 당선 축하연.

    2009년 3월 27일 국제형사재판소장 당선 축하연.

    태국을 거쳐 인도네시아를 찾았다. 인도네시아 역시 군부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대면서 비협조적이었다. 과거에 아체나 동티모르 등 주변 국가나 소수민족을 군이 무자비하게 제압한 원죄가 있는 터라 로마조약에 가입하면 정부의 실권을 쥔 군부가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내가 국제형사재판소는 조약에 규정된 대로 불소급의 원칙과 보충성의 원칙에 의해 운영되므로 그러한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으나 그들은 재판소장의 말조차 반신반의했다. 각 부처가 모두 모인 회의에서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산만하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동시에 말도 잘 안 통하는 등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도네시아 일정을 마치고 5월 1일 헤이그로 귀임할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사이가(齋賀) 재판관의 장례식이 그녀의 고향인 시코쿠(四國)에서 거행된다는 연락을 받고 아시아에 온 김에 급히 일정을 변경해 홍콩과 도쿄를 경유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사이가 재판관은 노르웨이 대사를 하다가 일본이 로마조약에 비준한 후 재판관으로 온 분인데 취임 직후부터 법학을 공부한 일이 없다는 이유로 자격 미달이라는 지적에 시달렸다. 아주 작은 몸매에 몹시 마른 데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독신 여성이었다. 나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퍽 마음을 쓰던 동료다. 형사재판을 본 일도 없는 분이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관이 됐으니 속으로 무던히 긴장하고 걱정을 많이 했으리라. 나는 사이가 재판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형사소송의 기본 원리를 설명해주고 기술적 세부 사항도 가르쳐주는 등 도움을 줬다. 그는 나를 무척 고맙게 생각했다. 소장 선거 때 내게 출마를 권고한 재판관 중 한 분이면서 선전부장 노릇도 해줬다. 그런데 그해 3월 하순 어느 일요일 그가 골프를 치다가 9번 홀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로테르담의 심장 전문 에라스무스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회복할 때 내가 날마다 문병을 갔는데 늘 자기가 건강해져서 복귀하면 무조건 나를 돕겠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감사함을 표했다. 나는 그의 용태가 호전되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운명했다.

    헤밍웨이가 찬탄한 킬리만자로

    2009년 5월 16일 소장 당선 후 처음으로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 출장을 갔다. 말썽 많은 회원국 대사들을 만나 국제형사재판소의 견해를 설명하는 양자 회담이 업무의 대부분이었다. 4일간 19회의 양자 회담, 오·만찬, 세미나, 연설, 국제형사재판소 연락사무소 직원 면담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다. 각국 대사들을 만날 때마다 사무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시간을 더 소비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대하면서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슬로베니아가 주최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세미나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한 게 특히 기억에 남아 있다. 뉴욕의 유엔 커뮤니티에 공식적으로 데뷔하는 것이기도 해서 조심하면서도 알맹이 있는 말을 많이 했다. 어느 경우에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거의 대부분의 유엔 주재 대사와 외교관, 많은 수의 NGO가 자리를 메웠다. 그들이 하는 질문은 예리한 데다 다양했다. 나는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과잉 기대를 낮추고 여러 가지 오해를 불식하고자 노력했다. 

    5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아프리카로 공무 출장을 다녀왔다. 나로서는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흥미로운 첫 여행이다. 1990년대 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고 한국에서 지구 남반부까지 종단 여행한 일이 있긴 하지만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사하라 남쪽의 검은 아프리카를 가야 진정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것이다. 

    KLM 567을 탔는데 그야말로 만석이다. 왜 이리 붐비느냐고 물으니 겨울이 돼 기온이 적당한 데다 탄자니아의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으로 가는 도중 킬리만자로(Mount Kilimanjaro)를 보고자 킬리에 내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중간 공항은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가 있는 탄자니아 북부 도시 아루샤에 있다. ICTR이 문을 닫으면 아프리카 인권법원이 이곳에 들어설지도 모르므로 이래저래 이곳은 발전하지 않을까 싶다. 

    KLM 567은 남쪽으로 9시간을 날아 적도를 넘은 뒤 캄캄한 밤에 킬리에 착륙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찬탄한 킬리만자로가 밤인 터라 잘 보이지 않는다. 45분 정도 더 가면 목적지인 탄자니아의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이다.
     
    탄자니아를 떠나기 하루 전날 그 나라 대통령 면담 일정이 잡혔다. 6월 2일 11시에 만나자는데 우리는 이날 이른 아침 비행기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렇게 늦게야 통보해주다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통령을 만나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지지를 확약받는 게 남아공의 다른 일정보다 중요했다. 남아공행을 미루고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답을 보냈다. 원래는 6월 1일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었다. 그가 지방에 갔다가 오후 1시까지 돌아온다고 하기에 늦은 오후라도 면담이 가능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삼촌이 작고해서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단다.

    국제형사재판소 비난 아프리카 국가들

    2009년 6월 2일 음리쇼 키크웨테(왼쪽) 탄자니아 대통령과 면담하고 있다.

    2009년 6월 2일 음리쇼 키크웨테(왼쪽) 탄자니아 대통령과 면담하고 있다.

    나중에 대사관 측의 말을 들어보니 탄자니아에서는 약속을 회피하거나 취소할 때 삼촌이나 고모가 죽었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라고 한다. 의례적인 거짓말인 셈인데 아프리카의 가족 개념은 수백 명이 넘는 대가족을 뜻하므로 삼촌이나 조카가 항상 죽게 마련이라고도 한다. 

    오전 9시 35분 탄자니아 정부의 외빈용 차량을 타고 자카야 음리쇼 키크웨테 대통령을 만나러 30㎞ 떨어진 쿠두치 해변으로 이동했다. 참으로 풍광이 좋은 곳에 흰색으로 잘 지어진 열대식 개방형 호텔이 나타났다. 10시 15분에 도착해 한참 기다린 끝에 드디어 그를 만났다. 기다리는 중간 화도 났으나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반팔 셔츠에 노타이 차림으로 나타난 키크웨테 대통령은 대단히 똑똑한 인상을 주며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내 수행원이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을 트집 잡아 국제형사재판소를 비난할지 모른다고 경고한 것과 달리 그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지금껏 이룩한 업적과 사법 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하더라도 듣기에 싫지 않았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전 세계를 진동시킬 만큼 크다. 그런데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개인적으로 면담하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는 적법 절차를 거쳤음으로 다툴 수 없으며 누구도 법보다 상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청산유수처럼 말한다. 앵무새가 따로 없을 정도로 다들 비슷하게 말한다. 그런데 키크웨테 대통령은 알 바시르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가 잘못된 것은 없으나 시점과 우선순위가 다소 아쉽다고 밝혔다. 수단의 경우 정의 실현과 인도적 지원, 국민 보호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데 때 이른 구속영장 발부로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키크웨테는 아주 영리한 대통령이었다. 천방지축인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의 판단 착오라는 뜻인 듯한데 나는 키크웨테에게 특별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국제형사재판소가 국제사법기관으로서 잘 정착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아프리카 출신 직원들의 헌신과 노력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한 1995년 로마회의 때부터 탄자니아가 크게 공헌한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그가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 정상회의에서 안면을 바꾸고는 국제형사재판소를 비난하는 것을 보면 과연 이 대통령이 믿을만한 사람인지에는 심각한 의문이 들었다.

    사모곡

    2009년 7월 4일 새벽 3시 15분 어머니가 영면하셨다. 병이 중하다는 소식에 6월 14일 귀국해 2~3일 용태를 살피니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시는 형편이라 단단히 각오한 채 귀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임종도 못한 채 7월 5일 새벽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빈소를 지키면서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을 한 줄 급히 작성했다. 다소 길지만 내가 당시 쓴 글을 소개한다. 

    ‘어머니! 이제는 사모곡을 목 놓아 불러도 소용이 없겠지요. 

    1919년 기미독립선언이 힘차게 울려 퍼지던 해에 1남 4녀 중 첫째로 이 땅에 오셔서 넉넉하고도 절도 있는 집안에서 성장하셨다지요.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예이신 아버님과 결혼해 감시와 핍박과 궁박함 속에서도 저 하나를 낳으시어 이만큼 키워주셨지요.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한답시고 일제가 무자비하게 공출하고 무차별적으로 징용을 하던 힘든 시기에 저를 낳으시어 먹을 것도 의약품도 없는 가혹한 시절에 어머니는 수술 후유증으로 여러 해를 몹시 고생하시면서도 거의 혼자 험난한 집안을 지탱하셨지요. 한때는 생가 시어머니, 양가 시어머니, 서(庶)시어머니까지 받들면서 거의 매일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과 서울 원서동을 왕래하신 힘든 나날을 저는 잘 압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깐일 뿐 할아버지가 같은 해 연말 청천벽력과 같이 정치적 암살로 쓰러지셨을 때 이불깃으로 낭자한 선혈을 닦아내시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 큰 초상과 소상 및 대상을 감당하신 여장부가 어머님이 아니시던가요. 어렵고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어머니는 저의 교육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시면서도 행여나 외아들이 교만해지거나 비사교적으로 될 것을 염려해 학습 외에도 여러 일이나 궂은 심부름 일을 일부러 많이 시키셨지요.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 못 간 우리 식구와 고모님 가족이 명륜동 집의 지하에 은신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날마다 어머니가 한강변으로 노력 동원에 끌려 나가시면 저는 창동까지 걸어가 감자나 호박 또는 푸성귀, 재수가 좋으면 한 줌의 보리쌀을 얻어다가 죽을 쑤어 연명하던 공산 치하 3개월을 잊을 수 없습니다. 1·4 후퇴 시에는 부산도 못 미더워 제주까지 피난 가야만 했고, 수없이 이사를 거듭하면서 가까스로 여러 해 만에 서울을 수복하는 시기에도 저를 위해 흔들림 없는 안정적 교육에 늘 신경 쓰셨지요. 

    최근에는 누군가에게 일생 중 가장 기뻤던 순간은 제가 서울법대 재학 중 고시 양과에 합격해 잔치를 했을 때라고 그러셨다면서요.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어머니는 아들이 당장 정부에 출사해 자리를 잡는 것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미지의 나라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지요. 한없이 자비로우시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엄청난 결정을 내리시는 어머니는 과연 100만 대군을 지휘하는 큰 장수보다 강하십니다. 나라가 가난하고 여권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 김포공항에서 의연하게 작별하고 저의 금의환향을 기원하시면서 눈물을 참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삶을 지탱한 힘의 원천, 어머니!”

    저에게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해주신 어머니의 위대한 결단에 깊이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맨해튼의 아리랑식당에서 두 어머니만 모시고 간단한 약혼식을 치렀을 때 기뻐하시던 모습, 귀국한 뒤에도 신식 며느리와 유학한 자식에게 폐를 안 끼치고자 배려하시던 모습,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예상대로 판·검사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학계에 진출했을 때 서운함을 뒤로 한 채 격려해주신 모습을 떠올립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의식불명이 되셔서 5년 반을 식물인간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고통은 한없이 크셨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식 내외에게 부담을 안 주고자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아버님의 간병을 도맡아 장기간 지극정성으로 수발을 다하셨지요. 돈암동 성당의 연령회원들을 비롯한 많은 분도 어머니의 깨끗한 환자 관리에 지극히 감탄한 바 있지요. 

    논현동에 태양열 단독주택을 지었을 때는 물론 현재의 서초동에 목조주택을 지어 자리를 잡을 때도 어머니의 안목과 판단에 힘입어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모시고자 다소 큰 집을 지었지만 자식 내외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고 합가를 거부하셨지요. 늘 주말이면 집에 오셔서 일박하고 가실 때마다 건강하셔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특별히 해드린 바 없이 세월을 흘려보냈고, 특히 제가 국제형사재판관으로 선출돼 부득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근무해야 하는 통에 그나마 옆에서 모시지 못한 것이 크게 후회됩니다. 제가 마침내 지난 3월 국제형사재판소장으로 당선됐을 때 요금이 아까워 함부로 걸지 않는 국제전화를 거시어 정말인지 확인하셨지요. 

    사실 한국인 최초의 세계사법기구 수장이라는 국내 언론의 표현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국제형사재판소에 부임한 회원국 대사들을 접견하는 일, 세계 각국을 공식 방문해 국가원수들과 협의하는 일, 각종 국제기구나 민간단체와 협조하는 일 등 실로 한 나라를 운영하는 바와 같은 격무에 시달림을 간파하시고는 보약을 먹으라고 강권하셨지요. 제가 오늘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오로지 어머니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직책의 과중함을 핑계 삼아 편찮으신데도 곁을 지키지 못하고 이제 뒤늦게 달려와서 사모곡을 부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식구 수는 적지만 크고도 복잡한 살림을 빈틈없이 지켜오시는 동안 남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온갖 풍상과 곡절을 꿋꿋이 이겨내시면서 늘 자식과 손주들이 잘되는 것을 축수하시던 어머니! 어머니가 이 땅에서 보내신 90평생은 참으로 위대했고 파란만장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평상시의 자비로움과 중대한 고비마다 내리신 현명한 결단에 의해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비록 가시더라도 저와 뒤에 남은 자손들은 남기신 유훈과 업적과 발자취를 귀감 삼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제는 편안하고 아늑한 어머니의 나라로 먼저 보내드리오니 부디 평화와 영원한 휴식을 취하소서.’

    송상현
    ● 1941년 출생
    ●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 고등고시 행정과(14회)· 사법과(16회) 합격
    ●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 서울대 법대 교수
    ● 서울대 법대 학장
    ●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 現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