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정밀진단

정신과 전문의가 분석한 ‘댓글 심리학’

“악성 댓글은 익명성과 저급한 인정 욕구의 합작품”

  • 입력2018-05-2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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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세무민 유언비어가 세상을 망친다

    • 소화 기능 버리고 ‘뒷담화’를 택한 원시 인류

    • 악의적 가십이 더 널리 퍼지는 까닭

    亂之初生 僭始既涵 亂之又生 君子信讒 君子如怒 亂庶遄沮 君子如祉 亂庶遄已 

    혼란의 시작은 참언이 세상에 스며 퍼졌기 때문이다. 혼란이 계속되는 것은 위정자가 참언을 믿었기 때문이다. 위정자가 참언을 미워하면 혼란은 곧 수그러들 것이다. 위정자가 올바른 언론을 좋아하면 혼란은 바로 그칠 것이다. 

    -시경 교언편(詩經 巧言篇) 


    시경은 중국 서주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이다. 일본 교토대 고미나미 이치로(小南一郎) 교수에 의하면 당시 주나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시경에는 참언, 즉 거짓으로 꾸민 말을 경고하라는 내용이 많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참언과 교언(교묘하게 꾸민 말)은 늘 인간 사회에 있었다. 그러나 옳지 않은 말이 무분별하게 퍼지면 집단은 점점 기본적 믿음을 잃게 된다. 주나라는 결국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거의 멸망해 동주라는 명목상 왕실만 남고 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 이후 중원은 무려 500년 넘는 대혼란기를 맞는다. 



    흥미롭게도 시경에는 견융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주나라 왕실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도 별로 없다. 이 책은 오로지 그릇된 언어가 세상에 미치는 악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시경을 정리한 사람은 원래 공자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누가 편찬했건 편찬자는 주나라의 몰락이 이민족의 침입이나 내부 반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언비어가 주나라 몰락의 원흉이라고 여겼던 게 아닐지 싶다.

    주나라를 멸망시킨 참언

    최근 문제가 되는 온라인 댓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익명성이다. 이는 새로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늘 출처를 알 수 없는 참언이 유행했다. 시경의 다른 부분, 소아 하인사(小雅 何人斯) 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사람으로서 낯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구나(有靦面目 視人罔極).’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교묘한 말과 거짓된 이야기로 세상을 혼란케 하는 자를 추궁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침팬지도 언어는 거의 쓰지 못한다. 침팬지에게 말을 가르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고도의 언어 체계는 오로지 인간만 사용하는 독특한 능력이다. 

    인간의 왼쪽 뇌 상당 부분은 언어 사용에 특화돼 있다. 말을 만드는 브로카 영역과 말을 듣는 베르니케 영역, 그리고 이 둘을 잇는 궁상속 등 많은 부분이 언어 사용을 목표로 존재한다. 

    인간은 엄청난 진화적 희생을 치르고 언어를 얻었다. 뇌의 무게는 체중의 2% 안팎에 불과하지만, 전체 에너지의 약 20%를 사용한다. 대단히 비효율적인 기관이다. 큰 뇌를 유지하려면 어디선가 자원을 빼돌려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위장에 대한 투자를 줄였다. 그 대가로 인간 위장은 다른 영장류에 비해 아주 약하다. 소화를 못 하는 음식도 많다. 뭐든 먹고 소화해야 생존할 수 있는 자연 세계에서 상당한 희생을 치른 것이다. 우리 조상은 왜 이렇게까지 하며 큰 뇌를 원한 걸까.

    가십과 언어의 진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교황청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면서 1000년 넘게 이어지던 중세가 막을 내렸다. [REX]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교황청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면서 1000년 넘게 이어지던 중세가 막을 내렸다. [REX]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에 의하면 언어와 뇌의 진화는 ‘가십’, 즉 뒷담화를 위해 촉발됐다. 영장류 사회의 털 고르기를 통한 동맹의 형성 전략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털 고르기는 일대일로 일어나지만 대화는 여러 명과 동시에 할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대화는 대부분 기본적으로 네 명이 같이 하는 형태다. 커피숍 테이블도 네 명이 앉는 형태가 가장 많다. 일대일 털 고르기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던바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지만 분명 인간의 언어는 고상한 철학적 담론이나 문학적 공감을 위해 생겨난 게 아니다. 던바는 대학 카페테리아에서 주로 오가는 대화를 모아 분석했다. 놀랍게도 대화의 대부분이 ‘누가 누구랑 잤다더라’ 혹은 ‘누가 누구와 싸웠다더라’ 같은 가십이었다. 

    이를 ‘사회적 뇌 가설(Social Brain Hypothesis)’이라고 한다. 후속 연구에 따르면 악의적인 가십일수록 집단 내에서 더 잘 퍼지는 경향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착하다더라’보다는 ‘누가 나쁘다더라’는 정보가 훨씬 유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적 모듈은 부정적인 평판에 대해 더 깊은 주의를 가지며, 이러한 정보를 주변에 알려 잠재적인 위험을 예방하도록 진화했다. 

    한 번에 여러 명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효율적인 언어 시스템의 진화, 그리고 부정적인 정보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인지적 편향성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집단 전체를 급속도로 휘감는 루머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앞서 말한 대로 언어는 다수를 대상으로 한 효율적 정보 교환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인류는 수천 년 전, 또 다른 형태의 언어, 즉 문자 언어를 발명했다. 글은 새로운 형질은 아니지만 기존 음성 언어의 영향력을 배가했다. 오래 남고, 멀리 전달되고, 여러 개로 만들 수 있었다. 

    1517년 문자 언어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가 타락한 교황청을 비판하는 ‘대자보’, 즉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붙인 것이다. 이 반박문은 불과 두 주 만에 신성로마제국 전역에 퍼졌고, 한 달 만에 유럽 전체로 퍼졌다. 이 일 이후 루터는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지만, 결국 유럽은 종교개혁의 거대한 물결에 휩싸인다. 그렇게 1000년 넘게 유지되던 중세가 끝나고, 근대사회가 열렸다. 

    비슷한 시기 조선은 어땠을까. 1547년 명종 2년 전라도 양재역 부근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벽서(壁書), 즉 출처를 알 수 없는 벽보가 발견된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豈不寒心哉).’- 명종실록 2년 9월 18일

    이 벽서는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당시 14세에 불과하던 명종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윤원형의 누나였다. 벽서는 분명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를 비난하는 내용이었지만, 학자들은 윤원형이 상대 세력을 몰아내고자 꾸민 자작극으로 추정한다. 이 사건을 벽서의 옥(壁書獄)이라 하는데, 윤원형 반대파에 속하던 많은 사람이 벽서를 쓴 자로 지목돼 죽거나 유배당했다. 윤원형은 이후 영의정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문정왕후 사후에 탄핵을 받고 귀양 중에 자살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벽보를 붙이거나 유인물을 뿌리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유사 이래 국가는 불법 유인물과 유언비어를 강력하게 단속했고, 대신 왕실이나 국가 시책을 널리 알리는 방(榜)을 붙였다. 물론 피지배층은 이에 질세라 탐관오리를 욕하고 조정을 비난하는 벽서를 붙였다. 

    사실 벽보나 유인물은 순수한 면이 있다. 익명의 벽보라 해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붙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전제군주 시대라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며, 권위주의 정부에서도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 있었다. 위험과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므로 대중은 어렵게 붙은 벽보에 주목하고 그 진정성을 일단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

    밴드왜건 효과와 값싼 여론

    시가지에서 퍼레이드를 벌일 때, 행렬 맨 앞에는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악대 차량이 배치된다. 대중의 관심을 끌려는 것인데, 이 악대 차량을 영어로는 밴드왜건(Bandwagon)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유행한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정보가 힘을 얻는 현상을 흔히 밴드왜건 효과라고 한다. 보통 당선이 유력한 후보자에게 표가 몰리거나, 소비자가 시장 지배적 상품을 더 선호하는 현상을 말할 때 사용된다. 

    일단 사람이 많이 모이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모여 있다는 이유 때문에 모이는 것이다. 그래서 떠돌이 약장수는 차력 시범이나 마술 쇼를 통해 일단 관심부터 끌고 본다. 많이 모이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차력 시범과 약의 효능은 아무 관련도 없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온라인 신문기사에 달린 댓글도 마찬가지다. 댓글에 공감 수가 많아지면, 사람들은 그 댓글만 보게 된다. 댓글에 댓글이 달리고 왁자지껄한 논쟁의 장이 선다.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문기사는 그저 주의를 끄는 차력 쇼에 불과하다. 결론은 공감을 많이 받은 댓글이 내린다. 

    많은 사람의 관심이 일대일 대화나 신문 같은 아날로그 문자 언어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온라인 디지털 언어로 대화하고 소통한다. 최신 정보와 뉴스 대부분이 온라인 세계에서 생산되고 소비된다. 종이 신문을 보려면 구독료를 내야 하지만, 온라인 기사는 무료다. 클릭 한 번으로 기사를 내려받고, 다른 곳으로 전달하고, 본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시할 수 있다.

    ‘헤비 댓글러’의 불공정한 놀이터

    ‘헤비 댓글러’는 익명성에 숨어 공격성을 표출하는 통로로 댓글을 이용한다. 또한 공격성을 더 효과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조회 수가 많은 기사, 유명 언론사 기사를 주로 공격한다.

    ‘헤비 댓글러’는 익명성에 숨어 공격성을 표출하는 통로로 댓글을 이용한다. 또한 공격성을 더 효과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조회 수가 많은 기사, 유명 언론사 기사를 주로 공격한다.

    유력 언론사는 여전히 종이 신문을 발행하고 있지만, 제 돈 내고 사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적은 비용으로도 언론사를 차릴 수 있게 됐고, SNS 보급 확대는 모든 사람이 개인 언론사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를 낳았다. 

    거의 제로에 수렴하는 뉴스 접근 비용과 무한한 수의 여론 생산자는 저질의 밴드왜건을 양산했다. 이제 권위 있는 언론사 혹은 평판 좋은 필진이라는 점잖은 가치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자극적인 제목과 말초적인 기사로 관심을 끌어야만 살아남는다. 심지어 주요 언론사도 점점 이러한 진흙탕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싸구려 언론이나 매일반이다. 

    댓글 문제는 사실 불공정한 경쟁 규칙에서 시작된다. 저질 기사가 범람하는 현실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언론사가 있다고 치자. 공을 들여서 좋은 기사를 발행한다. 그런데 공든 기사 뒤에 덜컥 이런 댓글이 달리는 것이다. 

    ‘이것도 기사라고 썼냐? 기레기 같으니…….’ 

    이런 유의 댓글 열에 아홉은 기사를 읽지도 않고 작성된다. 독자 대부분은 댓글을 전혀 작성하지 않는다. 한 포털 사이트에 댓글을 단 하나라도 쓴 사람은 전체 회원의 1%가 되지 않았는데, 댓글을 단 사람 중 상위 100명이 수개월간 무려 23만 건의 댓글을 달았다. 하루 종일 댓글만 단 것이다. 

    이런 ‘헤비 댓글러’의 댓글은 욕설과 비방으로 가득하다. 기사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글로 도배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는 타인을 비방하며 내적 열등감을 투사하고, 스트레스를 욕설을 통해 해결하는 병적 심리다. 익명성에 숨어 공격성을 표출하는 통로로 댓글을 이용한다. 전 인구가 이용하는 온라인 포털 서비스가 수백 명에 불과한 헤비 댓글러의 병든 분노 배설 창구로 전락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더 효과적으로 과시하고 싶어 하므로 조회 수가 많은 기사, 유명 언론사 기사를 주로 공격한다. 깊이 있는 유익한 기사가 몇몇 댓글러의 무의미한 저질 댓글 탓에 싸구려로 전락한다. 공든 기사를 쓴 사람은 이를 막을 방법도 없고, 억울함을 토로할 방법도 없다. 

    악성 댓글의 자양분은 익명성이다. 내적인 분노를 분출하는 안전한 수단으로 댓글을 이용한다. 여기에 저급한 인정 욕구가 합쳐지면 도발이 시작된다. 적당한 기사나 댓글을 찾아서 꼬투리를 잡고, 왜곡된 우월성을 확인하려 한다. 어설픈 경험과 지식을 드러내며, 병적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특히 첨예한 사회 이슈에 대한 기사에는, 보다 선명한 댓글을 달수록 더 높은 공감을 받는다. 기사의 원래 목적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지만, 댓글 전쟁을 통해 갈등이 오히려 증폭된다. 공감 수를 통해서 인정 욕구를 채울 수 있으므로 의견은 더욱 극단으로 흐르게 된다. 이를 내스티 효과(Nasty effect)라고 하는데, 저급한 댓글을 통해 여론이 극단으로 양분되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 사회의 극단적 의견 대립 원인을 악성 댓글에만 물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일조한다고 본다.

    악성 댓글러와 내스티 효과

    최근 불거진 댓글 조작 논란으로 인해 댓글 실명제나 댓글 개수 제한 등이 검토된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댓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댓글을 쓰기 불편하게 하면, 그래도 가끔 좋은 댓글을 달던 사람만 빠져나간다. 더욱 지능적인 댓글 조작이 판치게 된다. 

    인간의 언어는 처음부터 가십을 위해 생겼는지 모른다. 문자와 인터넷은 이러한 능력을 엄청나게 증폭했다. 이렇게 무제한적인 저비용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만원 전철 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떠들면 가장 큰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목소리의 크기가 주장의 가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보통은 그 반대다. 

    경범죄처벌법 제3조 1항 9호에 따르면 아무 곳에나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 이유 없이 시비를 걸거나 겁을 주는 것(동법 제3조 1항 19호), 큰 소리로 떠들며 시끄럽게 하는 것(동법 제3조 1항 21호) 역시 금지된다. 누구도 길에 낙서를 하고,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며,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욕설과 비난으로 가득한 악성 댓글은 이것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많은 사람이 온라인 세계에서 시간을 보낸다. 악성 댓글은 오프라인 세상의 소란, 낙서, 시비 행위를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순찰하지 않는 공원은 이내 주정뱅이와 건달, 협잡꾼, 몸 파는 사람, 돌팔이 약장수가 차지한다. 지금의 온라인 세상이 바로 그렇다. 인터넷 공간도 결국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오프라인 세상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할 이유는 없다.


    박한선
    ● 1976년생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 서울대 인류학과 강사,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
    ● 저서: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역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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