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20대 리포트

대학 내 여학생 파우더룸

요긴한 편의시설? 외모지상주의 상징?

  • 입력2018-06-04 09: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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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장 새로 하고 고치고 ‘북새통’

    • 고데기로 머리 손질하기도

    • 강남 미용실처럼 산뜻

    • 외국인들 “다른 나라 대학엔 없어”

    “방송국 대기실 아닌가요? 거울이 크고 의자도 잘 마련되어 있네요.” 

    “강남에 있는 미용실 같아요.” 

    “카페나 백화점에 있는 휴게실처럼 보이네요. 깨끗하고 분위기도 좋아요.” 

    두 장의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물어보자 중년 남성인 양모(50) 씨, 한모(59) 씨, 임모(44) 씨가 내놓은 답변이다. 정답은 대학교 내 여학생 파우더룸이다. 거대한 거울과 테이블, 푹신한 의자까지 구비돼 있다.

    마스크 벗고 화장 시작

    고려대학교 현대자동차경영관 지하 2층 여자 화장실의 파우더룸은 여학생들이 화장을 하거나 외모를 점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편의시설이다. 이 건물 지하 3층부터 지상 5층까지 8개 층의 여자 화장실 안에는 이러한 파우더룸이 모두 설치돼 있다. 



    5월의 어느 날 정오 무렵 이곳은 화장을 하러 들어온 여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단발머리를 한 학생은 분홍색 통에서 파란색 콘택트 렌즈를 꺼내 들었다. 빠른 속도로 렌즈를 낀 학생은 곧이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갔다. 마스크를 낀 학생은 가방 속에서 커다란 검은색 화장품 파우치를 꺼냈다. 마스크를 벗은 얼굴은 민낯이었다. 학생은 쿠션 파운데이션으로 피부 화장을 한 다음 눈과 입술에 포인트 메이크업도 확실히 했다. 부스스하던 첫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어느새 세련된 얼굴이 탄생했다. 많은 학생이 화장을 하기 위해 파우더룸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왔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최모(여·23) 씨는 “화장을 안 하고 학교에 올 때가 많은데, 종종 파우더룸에서 화장을 느긋하게 한다”고 말했다. 경영학을 이중 전공하는 황모(여·24) 씨도 “화장을 고치기 위해 자주 찾는다. 졸업 사진 찍는 날에 파우더룸 덕에 편하게 화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쉬는 시간에 고데기 주로 써”

    서울여대 인문사회관의 파우더룸은 1층 로비에 자리 잡고 있다. 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빨강, 노랑, 파랑으로 구성된 화려한 색조의 벽이 눈에 들어온다. 안에 들어서니 화려한 조명이 거울에 반사돼 내부가 반짝거렸다. 큼지막한 거울이 모든 벽에 붙어있고 한쪽엔 전신거울도 있다. 거울 앞엔 연두색 테이블과 의자들이 잘 구비돼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테이블 아래에 여러 개의 콘센트가 마련돼 있다는 점이다. 이 파우더룸 안엔 12개의 콘센트가 있었다. 여학생들이 머리 손질을 위해 고데기를 사용할 때 쓰인다고 한다. 

    서울여대 시각디자인학과에 재학 중인 정모(여·24) 씨는 “예전엔 이 파우더룸을 많이 썼다. 쉬는 시간에 파우더룸에서 고데기를 쓰는 학생이 매우 많다”고 했다. 정씨는 “화장도 할 수 있고 앉아서 쉴 수도 있는 휴게 공간으로 사용하기에 좋다”고 덧붙였다. 같은 대학 경영학과의 오모(여·23) 씨는 “수업이 끝나고 급하게 약속이 있을 때 파우더룸에 들른다. 화장을 고치기도 하고 어떨 때엔 화장품을 다 가져와 완전히 새로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사이버관에도 파우더룸이 있다. 건물 2층에 큰 열람실이 있는데, 이곳 여자 화장실에만 방 형태의 파우더룸이 존재한다. 양 벽에 거울과 테이블이 놓여있다. 오른쪽 테이블 밑에 건축자재 같은 짐 더미가 쌓여있었다. 고려대와 서울여대의 것과 비교했을 때 소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열람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만큼, 많은 여학생이 이곳을 ‘사랑방’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오후 2시경 검은색 저지 옷을 입은 여학생이 전화를 하며 파우더룸에 들어왔다. 입술에 립스틱을 덧바르며 계속 통화하다가, 치마 맵시를 정돈하고 나갔다. 곧이어 노란색 염색 머리를 한 여학생과 단발머리 여학생이 재잘거리며 들어왔다. 노란 머리 학생은 거울에 코를 박을 듯이 다가가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눈 밑에 번진 검댕이 신경 쓰이는지 계속 눈 주변을 비볐다. 단발머리 학생은 가방에서 기름종이를 꺼내 얼굴 전체를 두들긴 다음, 쿠션 파운데이션으로 피부 화장을 수정했다. 둘은 한참을 떠들다 나갔다.

    “교내에선 화장하라는 무언의 시선”

    사실 고려대 현대자동차경영관, 서울여대 인문사회관, 한국외대 사이버관 같은 ‘방 형태’의 여대생 파우더룸이 흔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국내 대학은 여자 화장실의 세면대 옆이나 변기 앞에 거울과 테이블 정도를 간단히 두고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신경영관, 성신여자대학교의 행정관과 조형1관, 경희대학교의 생활과학대학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간단한 형태라고 해서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방 형태로 된 파우더룸보다 훨씬 많은 학생이 드나들었다. 

    오후 4시 30분경 연세대 중앙도서관 1층 여자 화장실의 파우더룸 앞은 많은 여학생으로 붐볐다. 거울 앞이 비어있는 때가 거의 한순간도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은 꼬리빗으로 앞머리를 빗거나 틴트를 꺼내 입술 화장을 하거나 옷매무새를 꼼꼼히 정리하곤 했다. 화장실에 들어온 여학생 중 3분의 2 정도가 파우더룸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이처럼 많은 여학생이 대학 내 파우더룸을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이들은 예쁘게 보이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말했다. 혹은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고려대 미디어학부에 다니는 김모(여·24) 씨는 “학교에서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화장을 고치게 된다”고 했다. 모 여자대학 대학원에서 조교로 일하는 한 대학원생(여·26)은 “교수님이나 교직원들로부터 ‘교내에선 화장을 하라’는 무언의 시선을 받고 있다. 보통 화장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 내 여학생 파우더룸은 다른 나라에선 흔한 일이 아니다. 일부 외국인 교환학생이나 유학생들은 국내 대학의 여학생 파우더룸에 대해 “한국에만 있는 여성 외모지상주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변기와 세면대만 있을 뿐”

    미국 하버드대학교 응용수학과 재학생인 캐더린 스캇은 “하버드대학뿐만 아니라 다른 미국 대학에 여대생이 화장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의생명학과에 재학 중인 핸서 설머도 “호주의 대학 여자 화장실엔 변기와 세면대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프랑스 푸아티에대학교 재학생인 샬린 어리건, 홍콩대학교 재학생인 주디 루이, 일본 도쿄외국어대학교 재학생인 마나 구보타도 자국 대학에는 여대생 파우더룸이 없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수년 전 한국 여대생들의 성형수술 붐이 외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일부 외국인들은 한국 대학 내 여대생 파우더룸도 이와 연관 지어 보는 듯했다. 

    교내에 여대생 파우더룸을 두는 이유에 대해 한국외대 건설기획팀은 “요즘은 옛날과 다르게 학교에 여유 공간이나 편의시설을 많이 두는 추세다. 여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화장을 할 수 있고 옷매무새를 다듬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고려대 경영대학 측은 “현대자동차경영관의 경우 100% 기부금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학교가 건물 설계에 딱히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며 “현대자동차 측이 건물 설계를 다 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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