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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의 이 사람

미국 진출 선언 전인권의 또 다른 ‘행진’

“세상아 봐라, 나 전인권이다”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미국 진출 선언 전인권의 또 다른 ‘행진’

  • ● ‘전인권밴드’ 음악으로 ‘록의 본고장’ 무대에
    ● 멋지게 노래하고 70 되기 전 떠날 것
    ● 저녁 8시에 잠자고 새벽 3시에 눈뜨는 까닭
    ●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모두 어쩌면 축복일지 몰라”
[홍태식 기자]

[홍태식 기자]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7월 28일 서울 홍대 앞 한 합주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전인권의 목소리가 두꺼운 방음문을 뚫고 복도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행진’이 끝난 뒤 잠시 쉬는 틈을 타 연습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전인권밴드’는 곧장 다음 곡 ‘걱정 말아요 그대’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신윤철의 기타, 민재현의 베이스, 신승민의 드럼과 박소영·고경천의 키보드가 꽉 찬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이내 전인권의 보컬이 자유자재 춤을 췄다. 탁하면서도 맑고 깊으면서도 청량한, 오직 전인권만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연이어 ‘세일링(sailing)’까지 듣고 나자 ‘이 무슨 호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록의 본고장 향해 행진

“어때요, 괜찮죠?” 

연습을 마친 뒤 악기를 정리하며 전인권이 물었다. 스스로도 꽤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번에 미국에서 이 노래들을 불렀어요. 반응이 굉장히 좋았죠. 보통 좋은 게 아니에요. 공연기획자 말이, 그쪽 사람들이 우리 사운드에 반했대요. 노래가 입체감 있게 확확 나온다고, 이렇게 개성 있는 밴드는 미국에서도 본 적 없다고들 한대요. ‘그동안 우리가 연습한 게 헛되지 않았구나’ 자신감을 얻었어요.” 

느릿한 말투에서 경쾌한 리듬이 느껴졌다. 그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전인권밴드는 7월 초 미국 LA, 뉴저지, 애틀랜타 등에서 공연했다. 1986년 밴드 ‘들국화’로 미국 무대에 섰던 전인권에게는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 올해 데뷔 40년차인 그는 줄곧 ‘한국 록의 자존심’으로 불렸다. 하지만 정작 ‘록의 본고장’ 관객은 들국화 공연 이후 그를 본 적이 없다. 1987년부터 다섯 차례나 반복된 마약 관련 수감 전력이 번번이 발목을 잡아서다. 

전인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외 관객 앞에 자기 음악을 선보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지난해 솔로 데뷔 30주년 기념으로 추진했던 뉴욕 카네기홀 공연도, 대관과 티켓 판매까지 마쳤으나 비자를 받지 못해 끝내 무산됐다. 이후 극적으로 미국 비자가 나오면서 이번 공연이 성사된 것이다.
 
이날 전인권을 만난 건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오랜 꿈을 이룬 소감을 들으려 했다. 전인권은 “그동안 우리 음악이 세상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그걸 확인했다”며 입을 열었다. 

“유튜브에서 내 노래를 듣고 좋아하게 된 외국 팬이 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페이스북에 찾아와 글을 남기는 사람도 있어요. ‘한국어를 모르지만 당신 노래를 들으면 운다’고, ‘미국에 오면 반응이 끝내줄 테니 꼭 오라’고 한 미국인 여성 팬이 있죠. 이름이 ‘줄마’인데, 그 사람을 이번에 공연장에서 만났어요. 우리 콘서트를 보려고 플로리다에서 뉴저지까지 차를 몰고 왔대요.” 

이번 공연 관객 다수는 ‘전설’ 전인권을 직접 보려는 중년의 재미교포들이었다. 그러나 줄마 같은 외국 팬도 적잖이 공연장을 찾았다고 한다. 전인권을 더욱 설레게 한 건 현지 음악 전문가들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번 공연을 기획한 미국 에이전트가 유명 제작자 몇 명을 초대했다. 비욘세랑 작업했던 프로듀서, 그래미상을 받은 프로듀서 등이 콘서트장에 와서 내 노래를 들었고, 전인권밴드의 미국 활동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머잖아 미국에서 음반을 내고 투어 공연을 다니게 될 것 같다. 올겨울 구체적인 협의를 하러 다시 미국에 갈 예정”이라고 말하는 전인권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앞으로 3년 안에 승부 보겠다”

“내가 3년 있다가는 그림을 그릴 거거든요. 양평이나 파주 같은 데 집을 한 채 사서 안팎으로 다 벽화를 그리려고요. 그 집을 딸이랑 손녀한테 남겨주는 게 꿈이에요.” 

한창 미국 얘기를 하다 말고 전인권이 불쑥 꺼낸 말이다. “네? 양평에서 그림이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음반을 내려고 하신다면서요. 

“네. 지금 미국에 있는 기획자랑 한창 얘기하고 있어요. ‘걱정 말아요, 그대’ 같은 노래는 영어 번역 작업도 시작했어요. 내가 영어는 잘 못하지만 영어 노래는 꾸준히 연습했어요. 미국 사람들이 듣기에 내 노래가 괜찮대요. 잘될 것 같아요.” 

그런데 3년 후엔 벽화를 그리시고요. 

“오래전부터 ‘나는 70이 되기 전에 무대를 떠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리 정신적인 게 뛰어나도 가수는 가수예요. 노래를 잘해야 하는데 힘이 떨어지면 그걸 못하죠. 주위를 보면 그렇더라고요. 뛰어난 보컬들도 70쯤 되면 변화를 겪어요. 푹 꺾이는 게 보여요. 그때 굳이 노래하려고 애쓰고 싶지 않아요.” 

전인권은 “지금 내 바람은 그렇게 되기 전에 미국에서도 ‘노래 잘한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라더니, 잠시 있다가 “히트할 수 있으면 더 좋죠”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요즘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우리 밴드가 연습을 무지 많이 해요. 삼청동에 있는 우리집 연습실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한 번 만나면 네 시간씩 꼬박꼬박 연습해요. 지난 몇 년 동안 완전히 음악에 빠져 지냈어요. 예전에는 음악 공부라는 걸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안간힘만 썼어요. 그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죠. 이젠 달라요. 정말 많은 음악을 듣고 있고, 매일매일 발성과 리듬을 연습해요. 밴드가 안 모이는 날은 혼자 해요.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음악 공부만 하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날 내 목소리가 돌아왔고, 음악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드럼과 베이스, 기타와 키보드가 딱딱 맞아 들어갈 때 오는 전율, 그게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약 같은 건 생각도 안 나게 행복해요. 지금 나는 밴드 음악이 좋고, 세상 사람들한테 우리 노래를 더 많이 들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3년 후에 딱! 이 생활을 끝내고 그림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말하자면 은퇴 예고였다.


전설과 몰락

[홍태식 기자]

[홍태식 기자]

전인권은 1974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첫 앨범은 1979년 강인원 등과 결성한 그룹 ‘따로 또 같이’로 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던 전인권의 이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건 1985년의 일이다. 그해 9월 최성원, 허성욱, 조덕환, 주찬권 등과 함께 내놓은 ‘들국화’ 1집은 그 시절 청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대한민국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세계로 가는 기차’ 등 수록곡 대부분이 메가 히트를 기록했고, 전문가들이 선정한 각종 ‘한국 대중음악 명반’ 리스트에서도 1위를 독차지했다. ‘행진’을 작사 작곡한 전인권은 이후 탁월한 보컬이자 싱어송라이터로 독보적 위상을 얻게 된다. 

그러나 영광은 길지 않았다. 1987년 10월, 그가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된 게 몰락의 시작이었다. 들국화는 해체됐고, 그는 ‘전인권’ 이름으로 여러 차례 음반을 냈지만 1992년, 1997년, 1999년, 2008년 잇따라 ‘마약사범’으로 구속되며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그사이 음악적 명성은 사회적 오명과 뒤섞여버렸다. 

“내가 사람들을 참 많이 실망시켰죠. 진짜 황당하게 만들었던 걸 알아요. 약 때문에 잡혀 들어갈 때마다 많은 사람이 나서서 도와줬어요. 좋은 변호사님이 변호해주고, 선후배들이 탄원서를 냈어요. 예술 하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치료하면 나아질 거라고 법원에 가서 말해줬는데 내가 또 약을 한 거예요. 그때 생각하면 참….” 

음악인으로서 최고 전성기였어야 할 그의 중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2000년대 중반, 전인권의 공연을 본 일이 있다. 그의 목소리는 그저 거칠기만 할 뿐 꽉 막혀 있었고, 여러 옥타브를 넘나들며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던 시원한 ‘샤우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전인권은 뛰어난 음악인이라기보다 헝클어진 머리와 선글라스 따위로 더 주목받는, 그저 특이한 외모를 가진 ‘왕년의 인기 가수’ 취급을 받게 되는 걸까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홍태식 기자]

[홍태식 기자]

알고 보니 그때 그는 이미 몸도, 마음도 더는 노래를 할 수 없을 만큼 상한 상태였다. 전인권이 다섯 번이나 감옥 신세를 지고도 출소 뒤 다시 마약에 손을 대자 그의 아내는 남편을 정신병원에 직접 입원시켰다고 한다. 1년 넘게 또 다른 ‘수감생활’을 한 전인권이 길고 어두웠던 약물의 터널을 벗어난 건 2011년부터다. 

“병원에서 나오고 한 달쯤 지나 우리 딸이 결혼을 했거든요. 그때 내가 얼마나 엉망일 때예요. 그런데 얘가 내 팔을 꼭 잡고 신부 입장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자기를 난처하게 만든 아빠인데, 나를 거의 끌어안듯 꽉 잡아줬어요. 그 아이와 같이 걸어가면서 속으로 생각했죠. ‘내가 널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다. 다시 한번 정상에 서보겠다.’ 그날 이후 정말 달라지려고 노력했어요.” 

아까 말씀하신 음악 공부를 시작하신 건가요? 

“일단은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꿨어요. 저녁 8시부터 잤죠. 잠이 안 오면 병원에서 잠 잘 들게 하는 약을 타다 먹었어요. 중독 안 되는, 좋은 약이요. 그렇게 일찍 자면 사람을 안 만나게 돼요. 술 마실 일도 없어져요. 그때부터 술을 완전히 끊었고, 약도 안 해요. 담배는 좀 피우지만, 그거 말고는 몸에 나쁜 거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일찍 자면 또 좋은 게 일찍 일어나는 거죠. 두세 시면 눈을 떠요. 그때부터 발성 연습을 해요. 좋은 음악도 많이 찾아 듣고요.”


돌아온 데스페라도(desperado)

[홍태식 기자]

[홍태식 기자]

그리고 어느 추운 겨울 날, 그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집에 아무도 없고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라고 한다. 그는 마당에 나가 이글스의 ‘데스페라도(desperado)’를 소리 높여 불렀다. 언제부턴가 도무지 트이지 않던 목소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Don’t your feet get cold in the winter time, the sky won’t snow and the sun won’t shine’ 대목에 이르자 기쁨에 몸이 떨려 왔다. 그리고 맨 마지막 ‘before it’s too late’는 아예 한 옥타브를 올려 불렀다. 오랜 방황의 시간 동안 그를 떠났던 목소리가, 전인권을 가장 전인권답게 하는 그 힘이, 그날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2012년 전인권은 최성원, 주찬권과 함께 ‘들국화’ 재결성을 선언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멤버들 또한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던 전인권의 목소리가 회복됐음을, 심지어 과거보다 더 좋아졌음을 인정했다. 그 무렵 최성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인권이가 제주도에 찾아와 내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를 1981년부터 들었는데, 이날 노래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그해 7월 지산밸리록페스티벌 무대에 서면서 ‘들국화’, 그리고 전인권의 귀환을 세상에 알렸죠. 

“그날 수많은 사람이 우리랑 같이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불러주는데 참 좋았어요. 나는 옛날에 ‘데스페라도(무법자)’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진짜 멋있어지겠다고 생각했죠.” 

그가 ‘미국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2013년 발표된 들국화 4집의 1번 트랙 ‘걷고 걷고’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모두 어쩌면 축복일지 몰라’라는 대목이 있다. 전인권이 작사 작곡한 노래다. 그는 이 곡에서 ‘걷고 걷고 또 걷겠다’면서 ‘아침은 다시 밝아오겠지’라고 나직하게 읊조린다. 

사실 ‘들국화의 아침’은 밝아오지 않았다. 이 음반 발매 직전 드러머 주찬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또 한 번 해체될 운명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전인권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곧 전인권밴드를 결성했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운도 따랐다. 2004년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 음반을 통해 발표한 노래 ‘걱정 말아요 그대’가 2015년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큰 사랑을 받았다. 2016년 서울 상암경기장에서는 FC서울 축구 경기가 열릴 때마다 이 노래가 응원가로 울려 퍼졌다. 전인권은 그해 8월 경기장을 찾아 수만 명의 관중과 함께 ‘걱정 말아요 그대’를 ‘떼창’한 경험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해 겨울 이어진 촛불집회에서도 전인권의 노래는 자주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웠다. 잠시 표절 시비에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걱정 말아요 그대’는 이제 시비 없이 전인권 노래로 인정받는다. 그가 미국 무대에서 이 곡을 부르고, 가사 번역 작업을 진행 중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전인권은 “당시 논란이 됐던 독일 밴드 노래와 특정 부분이 비슷한 건 사실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내가 그 노래를 미리 알고서 갖다 쓴 게 결코 아니다. 노래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다. 독일 쪽에서도 ‘의도적이지 않은 것으로, 표절이라고 볼 수 없다’는 메시지가 왔다”고 밝혔다. 표절 시비가 이어지는 동안 마음의 상처를 적잖이 받았다는 그는 “이번에 미국에 다녀오면서 그간의 울화와 분노를 전부 씻었다”고 말했다.


노래 정말 잘하는 가수

[홍태식 기자]

[홍태식 기자]

“나는 이런 기회를 참 오랫동안 원했어요. 사람들이 밥 딜런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그 사람한테 정신적으로 뒤진다고 생각 안 하거든요. 우리는 스팅, 밥 딜런 그런 사람들 못잖게 고생해봤고, ‘고생 이퀄 철학’이라고 내 음악에 자신이 있어요. 우리 딸, 아들, 그리고 두 손녀한테 지금의 내 모습이 선물이 된다면 더는 바랄 게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3년, 미국 비자 기간이 끝날 때까지 음악 활동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거예요.” 

1954년 태어난 전인권의 나이는 사실 이제 겨우 만 63세다. 70이 되려면 7년이 남았지만 그는 ‘3년’을 한도로 잡았다. 그는 “그 안에 세계 어디 내놓아도 노래 정말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은 슬픈 거예요. 그 애환을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 노래가 대중한테 사랑받은 건 사람들이 그 안에 담긴 정서를, 내 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수만 명 수십만 명이 같이 부른 노래이니, 미국에서도 분명히 통할 거예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라는 ‘걱정말아요 그대’의 가사가 떠올랐다. 그의 ‘과거는 어두웠고 힘이 들었’다. 미래 또한 ‘항상 밝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계속 노래하고, ‘새로운 꿈’을 꾼다. 데뷔 40년을 맞은 지금, 또 다른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신동아 2018년 9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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