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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라종일의 평화 전망

“종전선언·평화협정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

  •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라종일의 평화 전망

  • ● “선언·협정으로 안전 보장 안 돼”
    ● “주한미군, 한반도와 동북아 안정에 기여”
    ● “비핵화 비관적이지 않아”
    ● “金, 개방 견뎌낼 체제 만들어야”
    ● “비핵화→제재 해제→친환경 개발”
라종일 전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가천대 석좌교수) [지호영 기자]

라종일 전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가천대 석좌교수) [지호영 기자]

북한 비핵화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6월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거의 다 된 듯했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석 달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먼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 비핵화의 완결은 평화협정이 돼야 한다고도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이 취소됐고 미국은 연합훈련 재개를 언급했다. 그러자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내 비핵화를 약속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제안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핵물질 신고를 중재할 움직임을 보인다. 비핵화, 종전선언, 평화협정이 맞물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라종일 전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가천대 석좌교수)은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비핵화 국면을 큰 틀에서 새롭게 보는 관점이어서 흥미롭다. 

3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교류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막혀 있는 것보다요. 배경과 경위가 어떻게 됐든지 말이죠.” 

평양에 간 특사단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비핵화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청와대는 큰 성과로 보는데요. 


“의지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무엇을 가지고 확인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미군 때문에 제2의 6·25전쟁 없어”

김정은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안전 보장에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군사력이라고 보는 것 같아요. 혹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침략 때문에 자신들이 위험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납득이 잘 안 가요.” 

어떤 이유에서죠? 


“사실 국가는 추상체이고 국익도 혼란스러운 말이죠. 무엇이 국익인가? 북한의 국익과 안보는 무엇인가? 아마 북한의 국익은 김정은 정권의 안전 보장과 거의 동일시된다고 봐요. 이것은 물론 북한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면 김정은 정권의 안전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면 보장되는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애초 북한이 1950년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입니다. 미군은 북한이 말하는 침략군이 아니라는 것이죠. 미군이 진주한 이래 한반도에서 큰 전쟁이 없었어요. 외국 군대의 주둔이 그렇게 달가운 일이 아닐지라도 이것이 현실입니다. 휴전 이래 한반도 안정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죠. 

미군은 북한에 대해 억지(deterrence) 역할을 한 만큼 한국군에 대해서도 제지(restraint) 역할을 했어요. 미군이 주둔하지 않았더라면 남·북한 군대는 여러 차례 크게 충돌했을 것이고 전면전까지 확대될 수도 있었습니다. 한국 해군은 6·26전쟁 이전인 1949년 8월 17일 북한의 몽금포항에 함정과 특공대를 보내 북한 경비정 수척을 격침하고 포로를 잡아왔습니다. 북한에 대한 보복 차원이었죠. 정부가 이런 전과에 대해 포상하려 했는데, 미국이 강하게 항의했어요. 한국군이 38선 넘어 작전하는 것을 억제하려는 취지였죠. 이명박 정부 때가 돼서야 천안함 사건 이후에 포상이 이뤄졌어요.”


“북한군 자체도 그리 믿을 만한 것인가”

8월 26일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작별상봉에서 북측 리근숙(84·왼쪽) 씨가 남측 동생 황보우영(69) 씨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동아DB]

8월 26일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작별상봉에서 북측 리근숙(84·왼쪽) 씨가 남측 동생 황보우영(69) 씨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동아DB]

북한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나요? 

“김정은 위원장이 지금 누리는 권력은 북한 내에서 튼튼한 것으로 비쳐요. 확실한 도전자도 없고, 자신을 대체할 세력도 없고, 저항할 세력도 없어요. 안전한 정권으로 비치죠. 그러나 김 위원장은 북한을 외부 세계에 공개하거나 북한 주민들이 외부와 교류하도록 할 수 없죠. 이게 북한 정권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봐요.” 

지금 상태에서 만약 공개하고 교류하면 어떻게 되나요? 

“정권의 안전을 유지하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김 위원장은 100만이 넘는 군대를 갖고 있으니 무력으로 제압하면 되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군대만으론, 폭력만으론, 정권의 안전을 유지할 수 없어요. 김 위원장에게 북한군 자체도 그리 믿을 만한 것인가? 소련 정권이나 루마니아 정권이 무너진 사례를 보면….” 

라 교수는 “김정은 정권의 안전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장되는 상태는 북한이 자긍심을 갖고 나라를 개방하고 외부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는 아직 개방 쪽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한다. 외부 인사들과의 대담에서 북한 고위층은 “우리는 중국식 개혁·개방 모델이고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이고 그렇게 안 한다. 우리 식으로 할 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이 왜 중국·베트남 모델에 거부감을 가질까요? 

“그렇게 하면 북한이 한국에 비해 훨씬 후진적인 나라로 북한 주민들에게 인식되니까요. 이제까지 북한은 ‘우리나라가 제일 훌륭하다’고 해왔는데, 그렇게 이야기할 근거가 없어져버리죠.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너무 뒤처져 있기 때문에요. 그러면 북한 주민들이 ‘이제까지 뭐 한 거냐?’라고 하겠죠. 한국이 없으면 북한도 중국·베트남처럼 할 수 있어요. 진작 그렇게 했을 거예요. 뿐만 아니라 6·25전쟁이나 과거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는 것도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 

북한 주민들도 최근 소식을 들어 한국이 잘사는 건 알게 됐다고 하던데요? 


“그런 정도는 알겠죠. 그러나 더 많은 정보가 들어가고 인적 접촉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교류가 활발해지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면 상당히 많은 변화가 생기죠. 이렇게 되면 지금의 북한 체제는 큰 위기를 맞을지 몰라요. 미국과 평화협정을 한다고 북한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북한만이 할 수 있는 모델”

라 교수는 북한 정부가 개방에 대해 지금도 두려워한다는 점을 이산가족 상봉 행사로 설명했다. 남측 이산가족 89명과 북측 혈육 197명은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북한 금강산에서 6차례 12시간 동안 만났다. 금강산호텔 2층 상봉장에서 “상봉이 모두 끝났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이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오열했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형제자매와 다시 생이별해야 하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라 교수는 “이산가족 상봉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라면서 운을 뗐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니 이산가족이 생긴 지 70년이 되어가는데 이제까지 할 수 있는 일이 ‘고르고 골라 100여 명을 선정해 2박3일간 12시간 동안만 만나게 한 것’ 정도였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북쪽에서는 특히 이 행사를 준비하고 연출했죠. 우리 민족이 정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기다리는 분이 1만 명이 넘는다고 해요. 왜 서신 교환도 안 되죠? 편지라도 주고받든지 노무현 전 대통령 말대로 영상통화라도 하든지…. 지금 컴퓨터로, 휴대전화로 미국에 있는 사람들과도 영상통화를 하는데, 왜 북한에 있는 사람들과 못 하는지. 100여 명으로 제한하고 무슨 정치적 해결이나 한 것처럼 그러는데, 한편으론 감동적이고 눈물이 나지만 다른 한편으론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북한이 개방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봐서) 미국이 없다고 해서 북한 정부가 안전해질 것 같지 않아요.” 

라 교수는 김정은 정권이 자신의 체제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면서 개방으로 나아갈 길이 있다고 설명한다. 북한 나름의 개혁개방 모델을 내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에 적합한 개혁개방 모델은 어떤 것일까요? 

“북한이 지금 비록 낙후한 나라지만 세계에 떳떳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고 개방하면 됩니다. 선진국도 감히 하지 못하고 한국도 하지 못하는 그런 방식의 개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죠. 그것은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모델입니다.”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모델이라…. 

“지금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는 별 차이가 없어요. 양쪽 모두 시장에 의존하죠. 국가가 어느 정도 개입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시장이라는 건 객관적 현실이고요. 그러다 보니 전체 부의 80%가 극소수에게 몰리게 됐어요. 세계 최고 부자 8명이 갖고 있는 자산이 세계 하위 인구 절반이 가진 자산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소득 격차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어요. 중국과 러시아도 빈부 격차가 큰 편이죠.” 

우리나라도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왜 이런 양극화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중국이든 미국이든 러시아든 각국 정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야 하니까요. 그래야 소득이 나오고 직장이 생기죠. 소득과 직장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어요. 성장은 부의 쏠림을 부르고 결국 양극화로 이어지죠. 그런데 북한은 이런 양극화 없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어요. 또한 지금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이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어요. 이것은 인류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죠. 그래서 세계 일각에선 ‘부유층에게서 인류세를 거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친환경적인 경제성장을 실험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죠.” 

북한에 대해 말할 땐 대개 핵 문제만 이야기하는 편인데요. 

“북한이라는 숲을 안 보고 핵이라는 나무만 보는 것과 같아요. 김정은 정권이 왜 핵을 필요로 하는지 봐야 합니다. 결국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인데, 핵으론 보장이 안 되죠.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을 더 근본적인 방법을 제시해줄 필요가 있죠. 김정은 정권을 전복시킨다든지 민주혁명으로 바꾼다든지 하면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크겠어요. 그런 걸 그만두고 남북한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북한이 자긍심을 갖고 바깥세계를 대할 수 있게 해야 해요. 그러려면 중국식 모델이나 베트남식 모델보다는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발전 모델이 김정은 정권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죠.” 

라 교수에 따르면,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경제 발전 모델은 사람이 경제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북한이 ‘우리나라에선 노동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인간답게 산다’ ‘우리나라는 인류와 지구에 도움이 되는 모범적 경제 모델을 구현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김정은 체제가 비록 권력을 독점하더라도, 장기집권을 하더라도 용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봐요. 그나마 존재해야 할 정당성이 생겨요. 그렇지 않고 북한이 ‘미군만 빼면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 그런 식으로는 북한 체제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내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고 봐요.” 

라 교수는 “북한 문제를 다루는 우리나라 당국자들도 ‘종전선언을 들어준다고 해서, 평화협정을 체결해준다고 해서, 미군을 빼준다고 해서 북한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을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전선언, 남·북·미에 서로 다른 의미”

6월 북·미 정상회담 직후엔 사람들이 비핵화가 잘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김정은이 비핵화와 관련해 별로 한 일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반응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렇게 비관하지 않아요. 근대 유럽대륙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혹은 사회주의혁명으로 불안정했지만 영국은 그렇지 않았죠. 왜 그런가? 영국인들은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혁명을 하는 사람들과 그걸 억누르려는 사람들은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어요. 그러니 혁명, 반혁명이 일어났죠. 그러나 근대 영국처럼,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겠다고 하지 않고 뒤로 미루면서 파국이 일어나지 않게 조금씩 해결하는 방법’도 있어요. 단지 그런 식으로 하면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방의 선의만 믿지 말고, 자국을 튼튼하게 방위할 수만 있다면, 문제를 조금씩 뒤로 미루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먼저 하면 비핵화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타당하다고 보나요? 

“저는 종전선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잘 이해되지 않아요. 무엇보다, 저는 종전선언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한국, 미국, 북한 세 나라가 종전선언을 각각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나 생각해요. 한국에 종전선언은 평화죠.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죠.” 

그러면 미국에 종전선언은? 

“한국을 방위할 부담이 없어지거나 경감되는 것으로 해석하겠죠.” 

북한에 종전선언은? 

“6·25전쟁은 분명히 북한이 소련 스탈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시작한 전쟁인데, 자신이 시작한 전쟁이 끝났다는 게 왜 그렇게 북한에 중요할까요? 아마 북한에 종전선언은 ‘미국의 한반도 침략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나는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의 과정에서 이제 아물어가는 전쟁의 상처가 재발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말하자면, 북한이 매년 하고 있는 승전 기념일의 허구성 같은 것이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까 두려워 합니다.”


“패권이냐 왕도(王道)냐”

북한은 ‘종전선언이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니 이것부터 빨리 하자’고 말하는데요. 우리나라 일각에서도 ‘종전선언이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만. 

“글쎄요, 북한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종전선언은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인데…. 북한은 ‘6·25전쟁이 미국과 한국의 침략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죠. 중국도 러시아도 어느 나라도 그렇게 믿는 나라는 없어요. 그런데 북한은 진짜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따라서 ‘종전’이란 북한 시각에선 ‘미국의 침략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종전선언 이후엔 필연적으로 ‘침략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나가라’라고 하겠죠. 이미 북한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요. ‘종전선언은 첫 단계고 평화협정까지 하면 미군 철수로 이어져야 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북한의 종전선언이 이런 차원의 의미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각도가 다르지 않나 모르겠어요.” 

종전선언을 한다면 주역이 남·북·미·중이 될 터인데, 중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중국에서 요즘 ‘한반도가 중국을 겨냥한 비수’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한 말인데, 요즘 중국 사람도 이런 말을 한다고 해요. 저는 중국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게 우려스러워요.” 

지금의 중국이 일본제국주의를 닮아가는지 모른다? 


“이토는 유럽의 근대를 그대로 따라 하려 했어요. 마키아벨리즘도 받아들였죠. 국가가 권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죠. 제일 천박한 표현이 ‘부국강병, 일본말로 후고쿠교우헤이(富國强兵·ふこくきょうへい)’이였죠. 국가는 끊임없이 권력의 팽창을 추구해야 하고 이런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게 마키아벨리즘의 기본 논리죠. 

21세기의 중요한 문제는 이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 초 쑨원(孫文)은 일본을 떠나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일본은 이 지역에서 가장 선진적으로 빨리 발전하는 나라다. 내가 일본인들에게 문제를 하나 던져놓고 간다. 유럽을 모방해 패권을 추구하겠는가 아니면 동양의 전통인 왕도(王道)를 추구하겠는가.’ 저는 몇 년 전 중국 북경인민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쑨원이 일본인들에게 던진 질문을 지금의 중국인들에게 던지고 싶다.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겠는가, 왕도를 추구하겠는가’라고 말했어요. 중국에 왕도라는 개념이 있어요. 군사력이나 교묘한 술책으로 팽창하거나 다스리는 게 아니라 의(義)와 인(仁)으로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왕도를 ‘부민선린(富民善鄰)’으로도 해석해요. 국가가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부유해지는 것이고 군대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죠.”


김정은, 남북통일 밀어붙일까

북한의 비핵화에 관한 의구심이 커지는 것과 관련해, 라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를 안 하면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도 부담되는 일이지만 개발한 핵무기를 보관하는 것도 많은 정치적·경제적 비용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나라가 실제로 쓰기도 어려운 핵무기를 계속 가지고 있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전하면서도 핵무기를 못 썼죠. 히틀러나 제국주의 일본이라면 사용했을까? 사용할 수 없는 그런 무기입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지지하는 나라도 없어요. 중국과 러시아도 반대하죠. 그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게 북한에 점점 부담되지 않겠어요?” 

김정은 정권이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받는 방법으로 라 교수는 ‘개방에 견뎌낼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개발 모델’ 이외의 다른 모델도 예측했다. 그것은 남북통일이다. 이때의 통일은 김정은 정권 주도의 통일, 즉 적화통일에 가깝다. 

“비현실적으로 들리겠지만, 현 북한 정권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방법은 군사적·정치적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주도로 남북통일을 하는 것이죠. 이렇게 통일을 하거나 아니면 제가 제시한 개혁 모델을 따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어요. 문제는 많은 인간적인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미군이 한국을 떠난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통일된 이후에도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미군의 주둔으로 이 지역의 심한 군비 경쟁과 불안정성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북한이 자신 주도하에 무리한 통일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현 체제가 근본적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한 그럴 위험성은 있어요. 북한에서 지도자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죠. 아주 카리스마적입니다. 정치·사회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공동체가 위기를 맞은 짧은 기간에 필요하다’고 말하죠. ‘평시엔 정규적이고 정상적인 리더십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해요. 그런데 북한은 70년 넘게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김정은도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정권을 운영하고 있고요. 향후 이런 리더십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통일과 같은) 역사적 사건밖엔 없어요. 베트남식·중국식 개혁·개방에 이런 신격화한 리더십이 필요하겠어요? 결국 ‘위대한 지도자가 민족적 과업인 남조선과의 통일을 이룩하고…’라는 식밖에 없죠.” 

김정은이 핵 리스트 제출로 비핵화를 시작한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방향인가요? 

“그런 것으로 시작할 수 있죠. 미국에 핵무기 리스트를 주는 것은 북한으로선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핵무기가 아니라면 세계가 북한을 무시할 텐데…. 미국 대통령도 핵무기를 갖고 있으니까 만나준 것이고요.” 

북한은 세계 뉴스의 중심에 있지만, 라 교수의 말대로, 핵무기 없는 북한은 그저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일 뿐이어서 국제사회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핵무기 없는 북한은 한국의 국익엔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북한 내 혁명적 변화 필요”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고 다 넘겨주면 북한 내부에서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저는 북한 내에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정은 위원장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북한이 만약 ‘우리는 진짜 사회주의를 한다. 빈부격차를 없애겠다. 지구를 살리는 친환경적인 경제개발을 하겠다. 작은 나라지만 세계에 모범을 보이겠다’고 하면 이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북한은 ‘비핵화, 대북 경제제재 해제, 외부자금 수혈,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개발 모델 추진, 대외개방’ 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라 교수의 제언인 셈이다.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비핵화를 하겠다고 하는데요. 

“트럼프 대통령과 소위 ‘캐미’가 잘 맞는 모양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하려면 서둘러야 할 겁니다.” 

김정은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본인에게 더 낫다고 보나요? 

“요구하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요구한다고 미군이 나갈 것도 아니고. 다만 평화협정을 맺으면 원칙적으로 미군이 있을 필요는 없어요. 진정으로 남북이 평화통일을 추구하겠다면, 통일 이전에 남북한 사람들이 마음을 터놓아야 하고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어야 해요. 평화 공존 없이 어떻게 평화통일이 가능하겠어요? 위대한 지도자 둘이 만나 악수만 하면 평화통일이 될까요?” 

우리나라 일각에선 김정은 정권 붕괴에 의한 흡수통일을 원합니다만. 

“우리에게 흡수통일을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나요? 김정은 정권이 붕괴하지도 않겠지만 만약 붕괴한다면 우리에게 축복이라기보다 엄청난 위기일 것입니다. 지난 정권 때 그런(흡수 통일) 발언을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한 일이 있어요. 북한은 한국의 조그만 행정단위까지 책임자를 두고 있어요. 한국을 통치할 때에 대비해서요. 반면 한국은 북한의 붕괴를 이야기하지만 붕괴된 북한을 관리할 능력도 준비도 없어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북한은 핵 보유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해왔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죠. 이런 북한이 비핵화하겠다고 나온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대북제재라고 봐요. 비핵화와 대북제재 폐기는 서로 맞물려 있지 않겠어요?” 

핵을 완전히 폐기할 때까진 제재를 해제해줘선 안 된다고 보나요? 

“그건 양측의 협상 결과로 결정될 것입니다.”


‘미친 부자 아시아인들’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혹은, 절반쯤 폐기하면 절반쯤 해제?
 
“그런 식으로 가겠죠. 핵 폐기를 바라는 사람의 생각과 제재 해제를 바라는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다를 테니까요. 역사의 큰 물줄기는 훌륭한 지도자 몇 명의 결정으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수백만, 수천만의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죠. 권력을 잡은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마우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총을 들고 사람들을 강제로 잠깐 동안 어떻게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권력은 수백만, 수천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 나와요. 북한은 왜 70년 가까이 못 만난 혈육을 만나게 해주면서 그렇게 엄정한 조건을 달고 통제된 환경에서 간신히 만나게 할까요? 북한은 왜 그렇게밖에 못 할까요? 왜 편지 한 장 주고받을 수 없게 할까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우리 측 일행을 만났을 때 한국 드라마와 나훈아 가수를 즐겨 보고 듣는다고 이야기해 우리를 곤혹스럽게 했어요. 우리 중에 그 드라마들을 본 사람이 없었어요. 솔직히 저는 나훈아 노래도 드라마도 별로 듣고 본 적이 없어요. 자기들은 다 보고 듣고 하면서 왜 북한 주민들은 못 봐야 합니까. 핵 문제와 이런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북한 정권이 말하는 자기들 방식의 모델은 무엇인가요? 

“북한 지도부가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모델과 같은) 근본적인 체제보장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금처럼 국민을 외부로부터 차단한 상태에서 경제적인 성장만 추구할 겁니다. 개성공단을 여러 개 만들어 국가가 그 수입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이럴 경우 북한 주민들은 외국을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고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죠. 

‘미친 부자 아시아인들(Crazy Rich Asians)’라는 코미디 영화에도 나오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잘살게 된 아시아인들이 해외로 여행을 다니는 점’이죠. 일본인들이 1960~70년대에, 한국인들이 그 뒤에, 대만인들과 중국인들이 그 뒤에 대거 해외로 나갑니다. 반면, 북한은 자국 노동자들을 해외에 보내 현지보다 싼 임금을 받게 한 뒤 이 임금의 대부분을 가져가죠. 국가가 이런 일을 계속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라 교수와의 대담은 비록 비핵화라는 단일 주제로 진행됐지만, 그의 인문사회과학적 박학다식함과 김대중 전 대통령 최측근 대북참모로서의 통찰이 더해져 풍성해졌다. 

김정은 정권이 북한 주민을 계속 외부와 차단하는 것이 오히려 정권의 안전 보장에 좋지 않다고 보나요. 

“좋을 리 없죠. 그렇지만 북한은 자국민을 고립시키는 데 능하고, 정치 행사에 ‘태양절’ 같은 좋은 이름을 붙여 종교의식처럼 보이게 하는 데 능하죠. ‘총화’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에게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식으로 집단적인 사상 통제를 하고요. ‘전체주의체제’로 가장 성공한 나라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가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런 체제의 유일한 출구를 통일로 생각한다면 정말 곤란하죠. 한국 사람들이 북한 체제 속에서 살려고 하겠어요? 그런데도 북한이 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되면 좋을 일이 없죠. 현실적으론 남북한이 서로 다른 발전 모델을 추구하면서 공존할 수밖에 없죠. 북한은 새로운 혁명적인 실험을 해야 합니다.”


“그 시작이 창대했다”

지구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가 과연 그런 새로운 혁명적인 실험을 할까요? 

“사람의 정신은 실험을 하기에 위대하죠. 개미나 벌은 사람처럼 공동생활을 영위하지만 변화나 혁명이 없는 완전한 질서를 추종할 뿐이죠. 개미와 벌의 세계에선 혼란도 없고 정권교체도 없어요. 반면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공동생활 방법을 실험해요. 19세기만 해도 ‘민주주의’는 불온한 말이었고 실현될 수 없는 말이었어요. 1800년대 프랑스 학자 토크빌이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가 정말로 있어?’ 하는 호기심 때문에 미국에 건너갔고 그래서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유명한 책을 썼죠. 이런 실험을 못 하면 인류가 발전할 수 없어요. 북한이 핵과 폐쇄적 체제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실험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김정은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에 집착하지 말라? 

“그렇죠.” 

라 교수는 “북한은 시작이 좋았다. 성경 말과 반대로, 그 시작이 창대했다.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한 서구의 여러 지식인이 북한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북한은 어떤 학자의 말대로 ‘옆으로 누운 깔대기’처럼 점점 더 퇴보했다. 지금은 ‘자폐증이 있는 나라’처럼 돼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라 교수는 “‘전부 미국 탓이다’ ‘주한미군 나가라’ 이런 식으론 해결이 안 된다. 더 근본적 변화, 더 근본적 체제 안전을 지향하는 게 좋다”고 했다.


신동아 2018년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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