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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 뉴 밀레니엄 18년의 기억

3김정치 시대 이후의 민주주의

거꾸로 돈 정치시계

  • |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광주과학기술원(GIST) 석좌교수 hyugim@naver.com

3김정치 시대 이후의 민주주의

  • ● ‘3김정치’ 분수령 2002년 대선
    ● 盧, 권위주의 청산해 ‘脫3김’ 박차
    ● 李, 시민자유 후퇴·양극화 초래
    ● 朴, 한국 정치 ‘3김’ 전으로 되돌려
    ● 文, 시민·국가·시장 협치 모델 만들어야
2002년 12월 20일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당선자가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16대 대통령 당선증 전달식 및 민주당 선대위 전체회에 참석, 당선증을 받았다. [동아DB]

2002년 12월 20일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당선자가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16대 대통령 당선증 전달식 및 민주당 선대위 전체회에 참석, 당선증을 받았다. [동아DB]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결과로 부활한 한국 민주주의를 이끈 지도자는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었다. ‘3김정치 시대’는 밀레니엄까지 지속됐다. 3김은 민주화 투쟁기뿐 아니라 민주화 이후 재개된 정치 경쟁의 주역들로 자리매김했다. 양김(김영삼, 김대중)은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돼 민주적 선거 경쟁을 제도화했다. 이들은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범죄와 부패를 청산해 ‘전환기적 정의’를 세웠다. 또 신생 민주주의를 전복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군부를 제거했다. 

덕분에 한국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독재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공고화된 민주주의로 발전했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완전한 공고화에 이르지 못했다. 군부독재 시기 3김은 측근과 가신을 중심으로 당과 파벌을 운영하는 가산주의(家産主義) 리더십을 펼쳤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잔존해 민주주의의 질적 성장을 방해했다. 3김 시대 말기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역시 민주주의와 불화했다.


가산주의 극복 계기 된 정당 개혁

2002년 16대 대선은 3김이 퇴장한 가운데 치러졌다. 선거의 의미는 막중했다. 3김정치의 나쁜 유산인 분열적 지역주의, 사당적 정당, 제왕적 대통령, 정치부패, 만연한 정치냉소주의를 없앨 수 있을지 여부가 걸려 있었다. 민주주의 질적 고양의 전기를 마련할 것인지, 아니면 ‘3김 없는 3김정치’를 지속해 공고화를 늦출 것인지 택하는 선거였던 셈이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치러진 2001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참패했다. 여당은 정권 재창출의 기회를 되살리기 위해 전에 없던 정당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국민경선제는 대통령 후보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획기적 개혁 조치였다. 국민경선제는 한국 정당이 엘리트 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이 됐다. 대선후보 선출 과정을 정당 엘리트가 밀실에서 결정하는 하향식에서 당원·국민이 참여하는 상향식으로 바꿔 공천권을 국민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효과는 대단히 컸다. 국민경선제 덕에 여당 내 주류파가 선호하던 이인제가 아닌 노무현이 집권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노무현은 3김 이후의 새 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당내 기반이 약했던 노무현은 낡은 정치 청산과 새 정치를 갈구하는 유권자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지지를 기반 삼아 기득권 대변 이미지를 가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이겼다. 노무현의 ‘탈(脫)3김 한국 민주주의’와 이회창의 ‘3김 없는 3김정치’의 대결은 그렇게 결론 났다. 

노무현의 대선 승리로 탈3김정치 시대가 본격 개막했다. 앞서 김영삼 정부는 ‘탈군부’를 상징하는 ‘문민정부’를, 김대중 정부는 50년 만에 이뤄진 평화적 정권교체를 염두에 둔 ‘국민의 정부’를 정권 명칭으로 썼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에 ‘참여정부’라는 명찰을 붙였다.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참여해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한껏 드리워진 작명이다.


3김 나쁜 유산 청산했지만 정권 내줘

참여정부 탄생의 역사적 의의는 남다르다. 첫째, 최초의 전후 세대 출신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은 그 자신이 정치 세대교체를 상징했다. 둘째, 월드컵세대·참여세대로 불린 젊은 층의 지지로 승리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 당선은 지역균열 퇴조와 세대균열 부상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셋째, 정당 보스와 정당 내 기득권 세력의 지지 없이 국민의 지지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참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넷째, 한국에서 탈근대적인 신(新)유목적 민주주의가 활성화됐음을 증명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와 같은 유목적 선거 지지 그룹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노무현을 당선시키기 위한 운동에 나섰다. 한국에서 신유목적 민주주의의 출현은 신유목 사회의 바탕 위에서 이뤄졌는데, 이는 IT(정보기술)산업, 초고속 정보 인프라, 전자정부의 기반 덕에 가능했다. 

노무현 시대는 여러 유산을 남겼다. 첫째, 민주화 이후에도 잔존해온 권위주의 정치가 청산됐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 3김정치의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제왕적 대통령 제도와 문화를 없앴다. 검찰, 국정원, 경찰, 국세청 등 4대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음으로써 권력기관의 정치적 사인화를 방지하고 중립을 지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둘째, 건국 후 처음으로 중앙집권국가의 분권화를 시도했다. 노무현 정부는 분권국가를 통해 중앙으로부터 지방을 해방해야 주민자치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봤다. 노무현 정부는 정부 부처를 행정복합도시로 옮기고, 공기업과 국공연구원을 지방으로 이전함으로써 고려 묘청의 서경 천도 시도 이래 최대의 분권화 개혁에 나섰다. 이를 통해 지역 간 불균형 해소와 화해·공존을 이루려 했다. 

셋째, 노무현 정부는 권위주의 과거 청산에 의욕적으로 나섰다. 특히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자 과거 청산을 핵심 개혁 입법으로 추진했다. 넷째,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하에서 구축된 지식정보화 인프라를 바탕으로 디지털 정치 실현, 전자정부 구축, 경제의 디지털화 등 신유목적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노 대통령은 신유목적 민주주의 실현에 필요한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를 온·오프라인상에서 공히 보장했다. 프리덤하우스는 2005년에 한국의 정치적 자유 등급을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상향조정했다. 1993년 이후 12년 만의 일이다. 온라인 자유(Freedom on the Net) 부문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운 나라’로 분류됐다. 

한국 정치의 역사적 시간에서 볼 때, 노무현은 근대적인 3김정치의 나쁜 유산을 청산하고 탈근대적인 신유목적 민주주의의 시간을 연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와 여당은 기득권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명박과 보수 야당에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사회에 분노 치밀고 중산층 몰락해

2007년 12월 20일. 이명박 제17대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강서구 염창동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서 제17대 대통령 당선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동아DB]

2007년 12월 20일. 이명박 제17대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강서구 염창동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서 제17대 대통령 당선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동아DB]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사상 최다표차로 당선됐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 집권기 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나빠졌다. 

첫째, 정당정치가 후퇴했다. 정당 개혁의 상징이던 국민경선제는 잔재만 남았다. 정당과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정치를 주도하지 못했다. 대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찰, 경찰, 사법부가 법률가적 잣대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politics by other means)’가 강화됐다. 

둘째, 정치적 자유가 후퇴했다. 미국 수정헌법 1조와 비슷한 권리장전이 장착된 헌법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시민적 자유 특히 언론자유가 심각하게 뒷걸음질 쳤다. 프리덤하우스는 이 시기 한국을 ‘언론이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나라(partly free)’로 강등하면서 정치적 자유가 침해되고 있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셋째, 국가권력이 법의 테두리 안에 제한됐다. 개인의 인권과 시민의 자율성, 자유,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가주의적인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확산했다. 사법기관에 의존해 정부의 법 집행을 정당화했고,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의 행위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만연했다. 

넷째, 신자유주의 강화로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초가 약화됐다.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시장에 의한 정치’를 강화해 자유화, 탈규제화, 승자독식 사회, 자본편향적인 사회적 자원 배분, 비즈니스-프렌들리 정부, 국가의 축소, 탈정치화를 불러왔다. 그 결과 경제 양극화가 심화됐고, 이에 덩달아 사회 양극화까지 불거져 중산층 기반 민주주의가 힘을 잃었다. 대신 부자의 민주주의와 빈자의 민주주의로 분열된 정치 양극화가 나타났다. 

다섯째, 양극화 심화에 분노하는 ‘앵거 사회’가 출현했다. 사회 양극화는 ‘20%대 80%’의 사회를 넘어 ‘1%대 99%의 사회’를 낳았다. 이는 ‘코리안 앵거(Korean anger)’를 분출해 민주주의의 양극화를 초래했다. 

‘1% 프렌들리 정부’에 분노한 국민은 투표함에서 반란을 표출했다. 보수 집권 세력은 개발독재국가를 건설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를 집권당 후보로 내세웠다.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향수’가 남은 TK 지역민심과 포퓰리스트적인 노인 무상 복지, 서민 지원정책으로 표를 모아 근소한 표 차이로 201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어리석은 군주가 실정 일삼으니

2012년 12월 20일.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교부받은 당선증을 대학생 대표들과 함께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동아DB]

2012년 12월 20일.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교부받은 당선증을 대학생 대표들과 함께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동아DB]

박근혜 시대는 ‘혼용무도(昏庸無道·어리석은 군주의 실정으로 나라 상황이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어지럽다)’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법치가 아닌 인치를 했고,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유화했다. 사적 관계로 엮인 비선 실세의 부정, 부패, 비리를 엄호하고 국가 재난 사태에 책임 있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헌법을 위반했다. 

분노한 국민은 2016년 4·13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만들어줌으로써 박근혜 정부의 권력 남용을 견제할 세력을 의회에 구축해줬다. 같은 해 가을, 수백만 시민이 거리에서 박 대통령에게 위임한 공적 신뢰(public trust)를 철회하고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소추하기에 이르렀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시간’에는 근대와 전근대라는 비동시성의 시간이 공존했다. 그녀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 ‘선거의 여왕, 박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훌륭한 근대적인 민주적 캠페이너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그녀의 정치시간은 1970년대 유신 시대로 퇴행했고, 전근대의 시간으로 퇴영했다. 

첫째,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에서 오만과 고집불통, 안하무인의 ‘유신공주’로 회귀했다. 참모와 소통하는 방식마저 일방통행식 불통이었고, 국민과의 소통도 부재했다. 둘째,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시간을 1970년대 박정희의 가산주의 독재 시간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아버지의 명예와 신원을 회복하고,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기념하기 위해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일원화했다. 박정희 동상과 기념공원을 건립해 시대착오적인 유훈통치를 꾀하려고도 했다. 

셋째, 21세기가 탈근대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전근대적인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 양상마저 엿보였다. 박 대통령의 불통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와 연좌농성을 할 때 박사모,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이 등장해 시위를 방해하고 심지어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넷째, 박근혜 대통령의 ‘궁정’에서 전근대적 주술사회(magical society)가 출현해 주술 측근들이 국정을 농단했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폭로되자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고통 받고 있는 젊은 세대, 실업자, 주부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로 번졌다. 광장의 시민들은 ‘거리의 의회’를 열어 박 대통령을 탄핵하고 심각하게 후퇴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했다. 연인원 1700만 명의 촛불시민은 여의도 의사당 내의 대표들에게 박 대통령을 탄핵소추하게 했고, 적법한 절차를 밟아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하게 했다. 이어 민주적 절차에 따라 문재인 후보를 촛불 정신을 구현할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한국판 명예혁명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대통령 탄핵과 촛불혁명은 2016년 6월 영국의 ‘브렉시트’, 11월 미국의 ‘트럼피즘’과 더불어 포스트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일어난 대표적인 반(反)신자유주의 반란이었다. 한국의 촛불혁명은 광장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가 결합한 혼합 민주주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촛불시민들은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킴으로써 한국 정치를 공급자 중심 정치에서 수요자 중심 정치로 탈바꿈시켰다.


극단주의 배격·분권 위한 개헌해야

2017년 5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가 인사하고 있다. [동아DB]

2017년 5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가 인사하고 있다. [동아DB]

당선 후 문 대통령은 국정농단으로 쌓인 적폐를 청산하는 데 나서면서 촛불 민심의 요구에 응답했다. 덕분에 높은 지지도가 뒤따라왔다. 적폐청산은 국민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적폐청산이 없으면 새 정부하에서도 세대·계층·지역·이념 등 각 영역에서 특권 세력과 다수 국민 간 불화와 반목이 심화돼 통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대의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를 결합할 수 있는 헤테라키(heterarchy·혼합) 민주주의를 고안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촛불시민의 오프라인 토론장이 약화된 대신 온라인에서 토론장 참가가 늘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시민들은 빅데이터 덕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갖게 됐다. 또 이를 발판 삼아 동료 시민, 대표, 정부와 이견을 조정하고 집단행동도 할 수 있다. 빅데이터 기반 민주주의하에서 시민들은 정책 공급자이자 수요자인 프로슈머(prosumer)다. 이는 시민·국가·시장이 공동통치(共治), 협치(協治)하는 헤테라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헤테라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첫째, 협력적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강화해야 한다. 둘째, 이념적 관용의 경계가 확장돼야 한다. 이를 위해 극단주의를 배격·추방하는 제도를 디자인해야 한다. 셋째, 갈등 해결보다 억압에 방점이 찍힌 승자독식 다수지배 민주주의를 개혁해 권력분점, 연립정부, 소수파의 비토권 등 ‘공동다수(concurrent majority)’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넷째, 지방분권을 강화해 지방정부에 최대한의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공존과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개혁을 제도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분권형 개헌을 해야 한다. 새 헌법 개정안에는 엄격한 삼권분립, 양원제, 부통령제, 지방분권, 사법부 선출제와 같은 개혁 조치가 포함돼야 한다.


3김정치 시대 이후의 민주주의
임혁백
● 1952년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과 석·박사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정책대학원 원장, 세계정치학회(IPSA) 집행위원
● 現 고려대 명예교수, 광주과학기술원(GIST) 석좌교수
● 저서: ‘비동시성의 동시성’(201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 ‘신유목적 민주주의’(2010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The Possibility of Peace in the Korean Peninsula’


신동아 2018년 11월 호

|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광주과학기술원(GIST) 석좌교수 hyug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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