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호

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5-09-23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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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너는 감옥을 없애는 것이 무엇인지 알잖아? 그건 바로 깊고 진한 정이야. 친구와 형제로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지고의 힘, 마술적인 힘으로 감옥의 문을 열지.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 정이 되살아나는 곳에서는 삶도 되살아나지. 게다가 감옥이란 편견과 오해, 치명적인 무지와 의심 그리고 교만이라고 할 수도 있어.

    -‘고흐의 편지’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그림 중에 ‘성경이 있는 정물’(1885)이란 작품이 있다. 아버지를 향한 고흐의 복잡한 애증이 묻어난 그림이다. 육중한 무게감으로 화면 전체를 장악하는 성경은 고흐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한다. 아들이 어떤 항변을 해도 늘 고리타분한 원칙만을 들먹이는 아버지. 아들이 자신이 기대하던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고 ‘정상적인 성인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들을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는 폭언을 멈추지 않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심,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존경심 같은 것이 이 거대한 성경의 이미지에 묻어난다.

    하지만 그림에서 관객의 눈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무겁고 침울하며 글씨까지 뭉개져 있는 성경책이 아니라, 칙칙한 성경의 색깔에 비해 더욱 환하게 빛나는 에밀 졸라의 소설이다. 성경은 ‘거대하고 육중하지만 이제는 의미를 잃어가는 세계’를, 에밀 졸라의 소설은 ‘작고 소박하지만 이제 막 비상의 날갯짓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해방된 영혼을 상징하는 듯하다. 내게는 이 그림이 고흐의 첫 번째 ‘독립선언’으로 다가온다.

    성경이 있는 정물



    아버지의 죽음 직후 그린 이 그림에서 고흐는 어떤 ‘해방감’을 말하는 듯하다. 고흐는 에밀 졸라의 소설을 사랑했다. 에밀 졸라는 고흐로 하여금 민중의 고통에 눈뜨게 한 작가였다. 고흐의 눈에는 에밀 졸라의 소설이야말로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임과 동시에 ‘자신이 개척해야 할 세계’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아버지로부터 결코 이해받을 수도 존중받을 수도 없었던 아들이, 이제 아버지의 원칙주의라는 거대한 먹구름 없이도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 그림에 서려 있다. 하지만 그 앞에는 더 큰 시련이 닥쳐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는 강력했지만, 그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캔버스, 물감, 무엇보다도 모델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동생 테오는 이런 형의 마음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형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흐는 늘 경제난에 허덕였다.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에 불타오르던 그는 더 많은 캔버스, 더 많은 물감, 더 많은 모델을 원했기에. 그는 때로는 유리걸식하고, 값싼 빵으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제대로 된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는 재료비와 모델료만은 포기할 수없었다.

    무엇보다도 고흐는 ‘사람의 온기’를 원했다. 사람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집, 그저 건축물로서의 집이 아닌 ‘가정’의 온기를 원하던 고흐는 아이가 둘이나 딸린 창부 시엥과 몇 년간 함께 살기도 했지만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

    도중에 가방에 있던 그림이나 스케치 한두 점을 주고 빵 조각을 얻어먹었지만, 10프랑이 다 떨어지고 나서 마지막 사흘 밤을 길바닥에서 자야 했지. 한 번은 버려진 수레에서 잤는데, 이튿날 아침에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썼지. 또 한 번은 장작더미에서 잤는데 그다음은 조금 나은 편이었어. 마침 건초 더미 속에서 거의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편안히 잘 수 있었지. 이슬비 때문에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아무튼, 이토록 비참했지만 힘이 다시 솟는 것을 느꼈고 이런 말이 나오더라. 상심이 깊고 늘 한구석에 그늘이 져 있지만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어! 연필을 잡고 다시 그림을 그릴 거야.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모든 것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어.

    -‘고흐의 편지’ 중에서

    고흐는 테오에게 늘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면서도 동생의 후원보다는 동생이 함께 ‘화가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예술적 감식안이 뛰어나고 자존심이 강한 테오가 돈에 걸신들린 사람들의 싸구려 취향과 속물적인 생활방식을 감당해내기 어렵다고 보았다. 하지만 테오는 이미 화상들의 세계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자신마저 예술가가 되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 같다.

    테오는 고흐가 19세기 예술의 수도였던 파리로 오기를 바랐다. ‘비례가 맞지 않는다’ ‘색상이 너무 칙칙하다’ ‘미완성 작품이다’라는 식의 혹평을 받던 고흐의 그림이 파리로 오면 바뀔 수 있을 거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흐는 꼭 예술의 중심 파리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평범한 농부의 얼굴에서 구원의 씨앗을 발견한 화가 밀레를 존경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땀 흘리는 얼굴, 몸을 움직여야만 살아낼 수 있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세상의 고단한 진실을, 고흐는 그려내고 싶었다. 고흐는 한적한 시골 광부들의 고장인 보리나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낼 줄 알았다.

    “내 목적이야 잘 그리는 법을, 연필과 목탄, 그리고 붓을 다루는 수법을 배우는 것이지. 일단 그것을 익히고 나면 어디서나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보리나주는 오래된 베네치아, 아라비아, 브르타뉴, 노르망디, 피카르디, 브리만큼이나 그림 같으니까.”

    고흐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그림을 마음 놓고 그릴 수 있는 작은 화실과 모델료를 지급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 그리고 자신처럼 힘든 환경에서 창작하는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고를 해결하고, 좋은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는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토록 단순하고 마치 스스로 꽃이라는 듯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실제로 종교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일본 미술을 공부할 수 없을지 몰라. 더 즐겁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말이야. 인습에 찌든 이 세상에서 우리는 배우고 일해야 함에도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거야.

    -‘고흐의 편지’ 중에서

    고흐는 고갱과 함께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실험해보려 했지만,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국을 맞는다. 그가 꿈꾼 공동체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 고통과 희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감의 공동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전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두 사람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고흐는 두 사람이 함께하기만 한다면 자신이 꿈꾸는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향한 첫 삽을 뜰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꿈은 너무 일찍 깨져버렸다. 고갱은 떠나버렸고, 혼자 남았다. 고흐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스스로 제 귀를 자른 끔찍한 사고는 ‘바깥세상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주 소박한 친절, 따뜻한 격려, 정이 담긴 대화였다. 하지만 그에게 들려온 것은 끝없는 혹평과 경제적 압박, 그리고 ‘당신은 정상이 아니다’라는 판결뿐이었다.

    내적 아름다움을 그린 초상화

    고갱이 떠난 후 신경 발작은 심해졌고, 고흐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때로는 평론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설렘을 느껴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불안과 고독이 치유되지 않았다. 그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고흐의 꿈은 ‘별이 빛나는 밤에’의 그 영롱한 별빛처럼 시들지 않았다. 고흐는 개인의 창조성을, 예술가의 순수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의 무한한 열정을 믿었다. 그리고 그 꿈은 안타깝게도 그가 죽은 뒤에 실현됐다.

    풍경화에 주력하던 많은 화가와 달리, 고흐는 초상화에 깊은 애착을 느꼈다. 당시로서는 한물간 장르이던 초상화를 그는 새로운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채로운 노력을 했다. 그는 인물을 아름답게 그리거나 사실 그대로 그리는 초상화가 아니라 인물의 영혼 깊숙이 숨어 있는 내적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초상화를 그려냈다.

    그는 ‘무한’을 향해 다가가는 인물화를 꿈꿨다. 그린 사람의 영혼과 그려지는 사람의 영혼이 소통하는 지점, 그려진 대상과 그림을 보는 주체가 서로 아무런 말 없이도 ‘무한’을 향한 느낌에 도달하는 지점을 향해 고흐는 나아갔다.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은 마치 사랑할 때처럼 일순간 우리를 무한으로 인도하지.” 바로 그것이었다.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무한으로 데려가는 깨달음의 경지. 그 불가능한 경계를 향해 고흐는 끝없는 고행의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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