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호

美 경제제재 연타 맞다 진주만 카운터펀치

2차대전은 ‘경제전쟁’ / 일본편

  •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입력2015-10-21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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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5일 일본, 미국, 캐나다,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맺는 데 큰 틀의 합의를 이뤘다. 역내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전 세계 GDP의 40%에 해당하는 31조 달러나 된다. 유럽연합(EU), 아세안(ASEAN),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유무역권이 탄생하리라는 전망이다.

    ‘TPP 지도’를 보면 공교롭게도 70~80년 전 일본이 공들이던 세계무역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는 극심한 보호무역 시대였다는 점이다. 일본은 미국, 유럽 등 제국주의 열강이 채택한 불평등한 보호무역의 희생양이 자국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도 그런 왜곡된 경제질서 아래 자위권 차원에서 발동한 불가피한 선택지였다고 주장한다.

    종전 70년을 맞은 올해 일본은 총리 담화에서부터 의례적인 반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저변에 깔린 광범위한 ‘피해자’ 정서 때문인지 반성의 진정성은 약해 보인다.

    日 섬유재벌의 공세

    일본이 2차대전을 ‘경제전쟁’이라고 일컫는 배경에는 근대화의 첫 단계인 메이지유신(1868년)부터 시작돼 1차대전 이후 급성장한 자국의 경제규모 확대와 관계가 깊다. 메이지유신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일본은 주도적 산업혁명을 통해 실질 국가총생산(GNP)은 6배, 실질 광공업생산은 30배, 실질 농업생산은 3배 커졌다.



    특히 중공업 분야의 기틀은 자국의 피해가 없던 1차대전 시기에 집중적으로 다져졌다. 대전 후인 1920년경엔 미국, 영국에 근소하게 뒤진 세계 3위의 조선(造船) 강국으로 변모했을 정도였다. 대전 기간에만 40만t의 선박을 미주와 유럽 지역에 수출했다.

    일본은 1930년대부터 중국대륙에 본격 진출하면서 미국을 자극했다. 이에 따라 요즘으로 치면 북한이나 몇 년 전 이라크와 쿠바에 가해진 징벌적 경제제재가 일본에 행해졌고, 궁지에 몰린 일본이 일종의 자위권 차원에서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며 2차대전을 일으켰다는 것이 일본 측 논리다. 미국과의 누적된 갈등구조가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인데, 사실 그전에 이미 영국과 대립하면서 당시 국제질서 체제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영국과 일본의 뿌리 깊은 무역마찰은 20세기 초반의 면화제품 생산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세계경제 및 무역거래의 발전이 식민지 인도에 생산기지를 둔 영국의 면화제품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무역에서 섬유제품의 비중이 20%에 육박했고, 그 섬유제품 시장의 50% 이상을 영국이 점유했다.

    일본은 뒤늦게 섬유산업에 뛰어들었지만, 산업혁명이 영국에 비해 100년가량 뒤처졌기에 설비가 노후화한 영국에 비해 기계들이 훨씬 신형이고 우수했다. 지금의 중국처럼 인건비도 영국에 비해 저렴했다. 증기기관 방적기에 더해 전등 시설을 대대적으로 도입, 24시간 내내 조업이 가능한 오사카방적(大阪紡績, 1882년 창업) 같은 대형 회사들이 속속 등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섬유재벌들이 중국 칭다오, 상하이 등지에도 대형 방적공장을 세우고 저가 의류를 아시아 시장에 집중 공급하자 영국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20세기판 아베노믹스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은 몇 년 전 리먼 사태와 비슷하게, 미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높던 당시의 일본 경제를 위축시켰다. 일본은 1929~1931년 수출 규모가 반감됐다. 그래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빠르게 회복해 1932년에는 예전 수준을 소폭 뛰어넘는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결정적 동인이 된 것은 지금의 아베노믹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 주도하의 인위적 엔저를 통한 수출 장려책 덕분이었다.

    일본 경제전문가 다케다 도모히로 씨의 최근 저서 ‘머니 전쟁’에 따르면 구화폐 기준으로 1929년 100엔당 49달러이던 것이 1933년엔 24달러 전후로까지 떨어진다. 뛰어난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면제품, 잡화는 물론 당시 이동수단으로 크게 인기를 끌던 자전거까지 수출전선에 나서며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936년부터는 세계적으로 100만 대 이상을 수출했으며, 당시 영국산에 비해 절반 가격이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계 분야 수출품 순위는 1위 자전거(16.2%), 2위 선박(14.8%), 3위 철도차량(11.5%), 4위 자동차 및 부품(11.4%)이었다고 한다.

    무역 상대국은 대부분 영국 식민지이던 인도, 호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다. 일본의 면화 수출량만 봐도 1928년에는 영국의 37% 수준이었으나 1932년에 92%로 급성장한 뒤 1933년부터는 급기야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부상(浮上)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1932년에 영연방 국가들을 소집해 캐나다 오타와에서 경제회의를 열고 연방 내 국가들 간의 ‘특혜관세’ 제정을 합의했다. 요컨대 영국과 그 식민지 국가의 무역 관세율을 크게 낮추고, 연방에 속하지 않는 신흥공업국 일본, 독일 등을 견제하려는 심산이었다.

    특히 인도 면화에 대한 영국 정부의 압력은 더욱 거셌다. 1930년만 해도 영국과 기타 국가에 대해 각각 15%, 20% 정도로 차등해 관세를 부과했는데 1933년부터는 각각 25%, 75%로 폭을 크게 벌렸다.

    인구는 많지만 천연자원이나 석유 등이 턱없이 부족해 애초부터 해외수출을 통한 무역의존도가 높던 일본 처지에서는 대항하기 힘든 조치임에 틀림없었다. 일본은 1890년만 해도 GN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9%였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는 34.3%로, 오늘날 무역구조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우리 생명선은 만주”

    불평등한 무역구조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원료를 자급할 수 있고 관세장벽 없이 무역거래를 할 수 있는 식민지, 혹은 주도권을 확실히 쥔 시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우리의 생명선(生命線)은 만주”라는 선전문구 아래 만주사변(1931)을 일으키며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 진출을 꾀했다. 국제연맹은 1933년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견제하며 44개국 중 42개국의 찬성으로 대일 경제제재에 찬성했고, 이에 일본은 연맹 탈퇴라는 강수를 두며 당시 국제질서에서 한 걸음 이탈하게 된다. 이 시기 영국과 함께 일본에 대한 견제의 끈을 조인 나라는 중국과 만주에서 이권 행사를 노리던 미국이다.

    일본은 이미 러일전쟁(1905) 승전의 대가로 기존에 러시아가 쥐고 있던 중국 남만주지역 철도 부설권 등의 권익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그보다 앞서 청일전쟁(1894~1895) 패배로 지도력이 어수선해진 청나라의 약점을 잡아 요동반도와 만주지역 전체에 대한 조차권(租借權) 및 철도부설권 등을 접수한 바 있다.

    특히 하얼빈부터 뤼순(旅順) 지방에 걸친 남만주철도 부설권은 단순히 건설 시공에 대한 권리가 아니고, 주변 지역의 광물 채굴권이나 실질적 도시 행정권 같은 개념과 닿아 있어 초미의 관심사였다. 실제로 일본은 철도 부설 과정에서 철광산을 발견, 인근에 대형 제철소를 짓기도 했다.

    중국대륙에서 러시아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발을 빼면서 일본의 주도권이 커지자 영국, 프랑스, 독일은 물론 그때까지 아시아 지역 영향력 행사에 큰 관심이 없던 미국도 본격적인 경쟁에 참가한다. 1915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미국은 1차대전 종반부인 1917년에는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도움을 줬다.

    미국의 의도대로 전승국이 되어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중국은 독일에 내준 산둥반도 조차권을 반환받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산둥반도를 탐내던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견제구였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 군정이 일종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운 배경으로는 미국이 영국과 연합해 일본이 부설한 남만주철도에 평행하는 또 다른 경쟁 철도를 세울 계획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영국이 차관을 뒤에서 제공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중국인 자본’이라는 점을 내걸고 요금도 싸게 책정해 일본과의 시장경쟁에서 이기려는 속셈이었다.

    ‘침략자 일본’의 민낯

    영일동맹(1902)이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에서 보듯 20세기 초만 해도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과 우호적 동맹관계였다. 그러다 1차대전 후 일본이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내면서부터 외교관계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1차대전 중 청이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일본은 먼저 1915년 ‘대화(對華) 21개조’를 만들어 중국에 요구했다.

    뤼순, 다롄(大連) 지방의 조차권을 1999년까지 연기하고 만주에 있는 일본인 상공업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 등은 예상 가능했으나 ‘너무 나간’ 항목들이 문제였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이 필요할 경우 먼저 일본과 상의할 것’ ‘정치·경제·군사 분야에 일본인 고문을 둘 것’ ‘중국의 경찰조직에 상당수의 일본인을 고용할 것’ 등의 조항은 때마침 일본에 대해 견제심리가 발동하던 미국과 영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孫文)이나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蔣介石) 등 중국 지도층 역시 그전까지는 “일본에서 배우자”며 친일 행보에 열심이었으나, ‘대화 21개조’ 파동을 겪으며 노선을 바꾸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민낯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2차대전 당사국 미국의 반목을 사게 된 결정적 계기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를 세계 무대에서 주창하면서부터다. 1937년 난징(南京), 1938년 국민당 주요 거점이던 우한(武漢)과 광둥(廣東)지역을 차례로 공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이때부터 ‘만주국’뿐 아니라 중국 대륙 전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심이 돼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 ‘동아신질서’ 선언의 요지다. 이것이 그동안 자제하던 미국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1939년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파기했고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국민당의 장제스 세력을 측면 지원하며 일본에 맞서나갔다.

    미국의 대반격

    1929년 대공황 이후 전개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움직임도 영국의 식민지 경제권 특혜관세 규정, 즉 블록경제와 함께 일본에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미국은 1930년 자국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이른바 ‘스무트 홀리법안(Smoot-Hawley Tariff Bill)’을 통과시켰는데, 이에 따라 약 2만 개 농산물과 공산품을 중심으로 평균 관세율을 40% 이상 올렸다. 무역으로 성장을 일궈나가던 일본 처지에서는 대미수출이 급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 일본 전체 수출물량의 40%가 미국으로 집중되던 시기였다.

    일본에서는 그 무렵 군부가 재벌과 짜고 의도적으로 전쟁 여론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 시기 일반 국민들도 빈부격차와 생활고 때문에 ‘차라리 전쟁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2차대전 후 미국 주도의 연합국사령부(GHQ)에 의해 해체되기 전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4대 재벌이던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가 전국 회사 불입자본의 무려 49.7%를 점할 정도였다.

    당시 대졸자의 신입사원 초임이 50엔 전후이던 시절에 미쓰비시합자회사 사장은 그보다 1만 배 이상 많은 430만 엔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전 국민의 반수에 해당하는 1차산업 종사자도 절반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작농 신세여서 부(富)의 배분 문제로 인해 일본 내부적으로 사회여론이 극도로 악화됐다.

    일본에서는 2차대전 발발, 즉 일본의 진주만 공격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미국의 석유금수 조치와 미국 내 일본 자산의 동결조치 2가지를 거론한다. 일본은 전체 석유 수입량의 70%를 의존하는 미국이 석유 공급을 끊겠다고 나서자 대체 유전이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해 공급기지로 만들려 했다.

    부당한 침략행위에 대한 서방 연합의 비난과 긴장이 고조되자 ‘어차피 한번은 날 전쟁’이라는 생각에 기습적으로 선공(先攻)을 취했다는 것이 일본 우익진영들이 내세우는 논리다.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는 대부분 프랑스 식민지로, 일본에 대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항쟁을 지원해주는 일종의 보급기지 기능도 수행했으므로 일본이 침략에 대한 내부적 명분을 찾기도 쉬웠다.

    지금도 ‘셰일가스 혁명’으로 에너지 자원 패권의 향방이 중동에서 미국으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1차대전 후에도 미국은 석탄에서 석유의 시대로 이어지는 ‘에너지 혁명’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8세기 초반만 해도 전 세계 석탄 소비의 85%를 점하며 많은 석탄 광산을 보유한 영국의 힘이 약해진 것도 때마침 동력자원의 헤게모니가 석유로 넘어간 것과 관련이 깊다.

    발생 열량이 석유의 60%에 그칠뿐더러 안전사고 노출 위험부담 때문에 선진국들의 자원시장은 급속히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갔다. 중동 개발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석유자원 공급은 거의 미국의 독무대였다.

    ‘日美開戰’ 어전회의

    미국은 1859년 펜실베이니아 타이타스빌 유전에서 석유가 발견된 직후부터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등극했다. 2차대전 종전 때에도 세계 석유 수출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미국은 특히 유전 개발뿐 아니라 석유를 등유, 경유, 중유, 가솔린 등 여러 가지 제품에 맞춰 활용할 수 있는 최고도의 정제기술까지 보유했다. 가령 옥탄가가 높은 항공연료는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여간해서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이 1941년 7월 인도차이나 반도 습격을 감행하자 미국은 신속히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조치를 취했다. 무역대금 결제가 안 되고 돈이 돌지 않으면서 일본이 받았을 심각한 타격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전후 전범(戰犯) 단죄를 위해 열린 도쿄재판에서 쇼와(昭和)천황 측근으로 내무대신을 지낸 기도 고이치가 “역사상 경제봉쇄가 그처럼 대규모로, 또한 그렇게 의도적으로 면밀하게 실행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은 뉴욕에 국책은행 격이던 ‘요코하마정금은행(橫兵正金銀行)’ 지점을 두고 남미 및 동남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달러화 무역 거래를 총괄했다. 이 은행은 현재 일본 제1의 메가뱅크로 불리는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의 전신이다. 미국 당국의 자산동결정책으로 인해 돈의 움직임이 강제로 끊긴 것은 곧 일본의 국제무역 거래도 중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2000년대 초중반 북한이 조지 W 부시 정권에 ‘악의 축’ 국가로 지정되며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있던 예금자산이 동결된 것과 비슷한 조치로 볼 수 있다.

    1941년 10월 24일 자산동결조치의 후속으로 요코하마정금은행의 폐쇄가 통보됐고, 이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1일 도쿄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일미개전(日美開戰)’ 논의가 공식화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분 아래 한 달 뒤인 12월 7일 결국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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