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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도 대한민국 國父 1948년 8·15는 건국일”

인터뷰 - ‘이승만과 김구’ 연구 권위자 손세일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김구도 대한민국 國父 1948년 8·15는 건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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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시정부 덕에 대한민국 정통성 가져
  • ● ‘복국(復國) 후 건국(建國)’이 임시정부 목표
  • ● 이승만의 친일파 기용은 重用 아닌 活用
“김구도 대한민국 國父 1948년 8·15는 건국일”

박해윤 기자

손세일(80) 전 의원이 출간한 ‘이승만과 김구’는 거질(巨帙)이다. 200자 원고지 2만3000장 분량, 전 7권, 권당 800쪽에 달한다. 14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의 두 거인 이승만과 김구에 천착했다. “필생의 작업”(손세일)이다.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노재봉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건국사 연구의 금자탑”(김종심 전 동아일보 논설실장)이라는 찬사가 나왔다.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과 백범(白凡) 김구(1876~1949)는 우리 근·현대사의 두 기둥.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논박이 일면서 이들 두 거인도 논쟁 대상이 됐다. 이승만과 김구를 해석하는 것은 두 사람이 산 시대를 읽는 것이다.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다.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격하다. 입으로 다투는 이들은 택일(擇一)을 강요한다.

대한민국의 두 國父

‘이승만과 김구’가 쓰인 서울 마포구 집필실은 근·현대사 보고(寶庫)다. 2만3000장을 써내면서 읽은 자료가 가득하다. 그는 눈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텍스트를 읽고, 뇌로 체계를 세우고 씨줄과 날줄을 엮은 뒤, 손으로 역사를 써냈다.

▼ 이승만을 강조해서 현대사를 읽는 이들은 김구를 깎아내리는 반면 백범을 강조하는 이들은 우남을 폄하한다. 이런 견해차는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손 전 의원은 이 질문에 말로 답하지 않고 글로 대신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정치 지도자다. 그런 뜻으로 한 나라에 국부(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이승만과 김구’ 1권 서설(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의 첫마디가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는 것이다. 책이 출간된 후 이승만 지지자들이 국부는 한 사람인데, 왜 김구를 거론하느냐고 항의했다. 이승만, 김구 지지자가 알력을 가질 요인이 있기는 하다. 백범의 불행한 서거가 그중 하나다. 두 진영이 사실이 아닌 것을 동원해 한 사람을 비판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두 세력을 화해시키는 게 내 임무다.”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KBS 이사장) 등은 “백범을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남북합작정부를 도모했다는 게 이유다.

“백범이 어떻게 대한민국 건국과 무관한가. 김구가 없었더라도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백범이 있었기에 임시정부가 유지됐다. 임시정부 덕분에 대한민국에 적법성(legitimacy)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돼 있다. 북한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백범은 마지막 주석이다.

臨政 법통 강조한 이승만

“백범이 임시정부를 지켜내지 않았다면 정통성과 관련해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이 연립 형태로 있다가 1920년대 중반부터 좌익들은 임시정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임시정부는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세월을 견뎌냈다. 백범의 지도력 덕분이다. 독립전쟁, 게릴라전이 어려운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의열투쟁(義烈鬪爭)을 벌였다. 이봉창, 윤봉길의 목숨을 건 의거도 백범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역사학계가 대립한다. 보수학자 다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본다. 임시정부는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을 뿐 근대국가를 세운 것은 1948년이라는 것이다. 진보학자 다수는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봐야 독립운동을 계승한 나라가 된다고 여긴다. 이승만은 분단정부를 ‘수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건국 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에서 건국 단계를 설정해놓았다. 강령에 따르면 광복군이 국경을 넘어 본국에 들어가는 것이 복국(復國)이다. 복국기를 거친 다음 일반선거를 실시해 의회를 구성한 후 헌법을 만들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건국이라고 했다. 당시 ‘건국 작업’ ‘건국 과업’ 등의 표현을 썼다. 요컨대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건국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의 강령대로라면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이라는 건가.

“그렇다. 이승만이 애매하게 한 잘못이 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하면서 연호도 임시정부의 것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헌국회가 이승만의 이 같은 주장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승만이 법통이라고 여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세운) 한성임시정부다.”

1919년 9월 설립된 상하이임시정부는 한성임시정부, 노령임시정부 등을 통합한 것이다. 명목상 한성임시정부를 승계했다. 제헌국회 때 우남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법통을 주장한 것이다. 정부 수립 선포식 때도 현수막에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라고 썼다.

“건국의 법통과 관련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간 데는 이승만의 주장이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표현됐는데,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가 법통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앞서 밝혔듯 김구의 임시정부는 정부 수립을 하는 단계를 건국이라고 했다. 정부 수립이 곧 건국인 것이다. 다만 건국이라는 낱말이 법률 용어가 아닌 것일 뿐이다.”

논란 끝에 추진이 결정된 국정 역사교과서는 진보학계의 반발을 고려해 ‘1948년 건국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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