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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한국의 부장들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김건희 객원기자 | kkh4792@hanmail.net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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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의 부장은 성공한 중산층이자 우리 사회의 중추다. 노동생산성이 가장 높은 일꾼이자, 정치 지형을 결정하는 ‘캐스팅보터’이다. 그런 부장들이 요즘 우울하다. 책임질 일은 많고 권한은 없으니 ‘부장 노릇 못 해먹겠다’는 말이 나온다. 정년 60세 시대가 도래한다지만 회사는 퇴출을 예고한다.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1973년생인 L그룹 K부장은 스스로 ‘저주받은 세대’라고 말한다. 그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유독 추웠던 1998년 2월 대학을 졸업해 ‘IMF 학번’으로 불린다. 그가 태어난 해 출생한 96만여 명은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유례없는 취업난을 겪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1999년 1월 대기업에 입사한 뒤 사내에서 회자될 만큼 제법 굵직한 성과도 냈다. 입사 당시 대리였던 선배들이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그는 올해 부장(팀장)을 달았다.

주변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대기업 부장에 올랐으니 좋겠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손사래를 친다. 일찍 부장을 단 만큼 퇴직 시기도 그만큼 앞당겨질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퇴직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가족이 불안해할까 입에서만 맴돈다. 이래저래 벙어리 냉가슴 앓는 듯하다.

“요즘은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말이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다. 요즘 부장들 사이에선 ‘빨리 내보내려고 빨리 승진시킨다’는 말이 떠돈다. 승진 축하 인사 들을 때마다 사회생활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느낌이다.”

“팀장 안 맡고 버텨라”


부장은 부서를 책임지는 우두머리다. 다른 직급과 비교하면 조직에서 연령대가 가장 넓은 직급이기도 하다. 승진이 이른 사람은 40대 초반, 늦은 경우는 40대 후반. 기업마다 인사 적체 현상이 심한 탓에 대리 진급 때 한 번, 과장 승진 때 또 한 번 연거푸 물을 먹으면 50줄에 늦깎이 부장이 되기도 한다. 부장들은 한국 사회를 척추처럼 지지한다. 직장에선 탄탄한 경력을 바탕으로 높은 노동생산성을 내고, 가정에선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과 부모 봉양을 책임진다.

그러나 한국의 부장들은 우울하다. 10월 한달 간 기자가 만나거나 전화 인터뷰한 기업체 부장 22명 중 상당수가 ‘부장 승진은 하되 팀장을 달지 않고 오래 버티다 퇴직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듯,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가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평균연령은 49세(남성 52세, 여성 47세)다. 남성 직원이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사업 부진·조업 중단·휴폐업’(34.1%)이 가장 많고, ‘권고사직·명예퇴직·정리해고’가 16.9%로 뒤를 이었다.

결국 ‘고참 부장’의 나이가 ‘직장생활 데드라인’이다. 회사 문 밖으로 나서면 칼바람이 분다. 2013년 재취업한 장년층 중 절반(45.6%)이 임시직 아니면 일용직 일자리를 얻었다. 급여는 월평균 184만 원으로 20년 이상 장기근속자 평균임금 593만 원의 31% 수준이다(통계청).

최근 H사에서 희망퇴직한 C부장은 “40대 후반, 50대 직장인들은 외환위기 때 직장을 떠난 동료들이 사업 실패 등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트라우마’가 있어 어지간하면 회사에서 정년을 맞고 싶어 한다. 퇴직자들은 끝까지 버티다가 그런 험한 꼴 보고 쫓겨나는 게 싫어 짐을 꾸리는 것뿐”이라고 했다.

앞에서 예로 든 K부장의 회사 직급체계는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팀장(부장)-담당(부장 혹은 상무)’이고, 팀장부터는 책임자로 분류된다. 회사는 부장에게 팀장, 담당과 같은 보직을 맡겨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그는 “회사는 연차가 높고 연봉을 많이 받는 부장이나 50세 전후의 직원들을 빨리 내보내기 위해 책임을 지우기도 한다. 결국 승진 인사를 활용해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니 팀장을 맡은 게 그리 반가운 얘기는 아니다”고 했다. 그가 이번 승진을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괴롭혀서라도 내보낸다”


S사에 다니는 L부장(47)은 최근 휴대전화 부문 실적 부진이 이어지자 은근히 퇴직 압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었지만, 요즘은 ‘인력 재배치’라는 명목으로 5년차 이상 고참급 부장들과 임원들의 ‘조용한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찍혀서 퇴사한다고 ‘찍퇴’다. 버티다가 보직해임을 당한 부장도 있고, 일부 임원들은 버티다가 연말까지 ‘유급 안식년’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회사 퇴직 인사 모임을 기웃거리는 임직원이 많아졌다. 내년부터 정년이 60세로 연장된다고 하지만 그건 남의 나라 얘긴 것 같다.”

기업들은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주로 부장, 이사급을 타깃으로 삼는다. 올해 초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대기업은 성과급제도를 도입하면서 사원을 5등급으로 구분한 뒤 하위 2등급에 해당하는 직원들의 임금을 사실상 삭감했다. 중·장년층이 대거 이 그룹에 포함됐다. 이후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면서 “낮은 임금을 감수하는 것보다 위로금 받고 회사를 떠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실상은 권고사직이다.

이런 권고사직은 금융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지난해 7월 89만4000명이던 금융·보험업 취업자 수가 올해 10월 현재 81만7000명으로 줄었다. 15개월 만에 7만7000명이 직장을 떠났다. 금융업계의 한 부장은 ‘현장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희망퇴직 권고를 받고 버티다가 현재는 무급 휴직 중이다. 1년 4개월 쉬었는데, 12월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회사는 회유와 설득에도 직원이 퇴사를 거부하면 지방으로 발령 내는데, 막상 지방에 내려가면 출입구 쪽에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한다. 컴퓨터와 전화기도 주지 않고 업무에서도 배제하는데, 더 답답한 일은 지방의 직원들도 ‘왕따’를 시킨다는 거다. 법적 해고 사유가 엄격하다보니, 버티는 직원은 ‘괴롭혀서라도 내보낸다’는 치사한 전략인데, 현재 2명의 선배가 지방에서 ‘버티고’ 있다. 12월 복귀하면 나도 연고가 없는 지방으로 발령 날 것 같아 암울하다.”

부장들은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2013년 4월 국회를 통과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빛 좋은 개살구’라고 말한다. 개정안은 정년 60세 연장, 임금피크제 도입 등을 담고 있다. 내년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시행하고, 2017년부터는 300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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