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호

“미국 대신 피 흘리겠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자임

1930년대 빼닮은 아베의 일본

  • 장량(張良) | 중국청년정치학원 객좌교수 · 정치학 박사

    입력2015-11-19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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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자위대 북한 출병 관련 日 견해 지지
    • 자기애에 빠져 韓 혐오, 中 배격
    • 정상회담 때 한국 아픈 곳 건드리기도
    • 메이지(明治) 시대로 되돌리려는 아베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후유증이 신흥제국 일본으로 옮겨갔다. 위기에 처한 일본은 1931년 만주 침략, 1933년 국제연맹 탈퇴 등 팽창을 통해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던 1936년 2월 26일 새벽, 도쿄에 주둔한 일본 육군 1사단 소속 위관급 장교들이 “간신배를 척살하고, 천황(일왕) 중심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존황토간(尊皇討奸)’을 기치로 14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총리 관저, 국회의사당, 참모본부 등을 습격했다.

    반란은 곧 진압됐다. 반란 이튿날 계엄령이 선포됐고, 그다음 날인 2월 28일 쇼와 일왕은 반란군의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천황’의 명령으로 거사 명분을 잃은 반란군 장교 일부는 자결하고 일부는 투항해 사건은 종결됐으나, 극우국수주의로 방향을 튼 일본은 이후 폭주를 거듭했다. 1937년 7월 중국을 침공하고, 1941년 12월 진주만을 기습했으며,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항복했다.

    자기집착, 국수주의

    조세영 동서대 일본연구센터장 등 일본 전문가들은 현재의 일본이 ‘1930년대 일본’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 정부의 정책과 현 아베 신조 정권의 정책엔 공통점이 매우 많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하고, 공세적 통화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을 추구하며, 동남아 진출을 강화하고, 매스컴 장악을 기도했다. 또한 무기 수출에 적극적이며, 추신쿠라(忠臣藏) 등 무사도(武士道)를 찬양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자기애(narcissism)와 자기집착의 시절이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때와 유사하게 일본을 찬미하는 서적이 잇달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있다. 자기애, 국수주의(jingoism)에 빠져 이웃 나라 한국을 혐오하고 중국을 배격한다.

    ‘부자는 남과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일본식 표현이 있다. 부자는 싸울수록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은 한국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중국과는 동중국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로 맞서고 있다. 일본은 부자의 심리 상태를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초대국으로 부상(浮上)한 중국과도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 일본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청년 세대가 좀 더 공격적이다.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전자·정보통신(ICT) 기술을 총동원하는 현대전이 될 것이며, 일본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일전을 감수하겠다는 혼네(本音, 속마음)를 드러낸다.

    패전 이전 영토 70만㎢

    11월 2일, 3년 6개월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한 논의를 가속화하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끝났다. 일본은 남중국해 문제를 거론하는 등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국의 아픈 곳도 건드렸다.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동맹국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는 정도로 할 일을 다 했다는 태도를 보였다.

    중국은 2008년 12월 일본이 점유한 센카쿠 열도에 해양조사선을 잇달아 파견했다. 아소 다로 당시 총리의 지시를 받은 일본 해양경비대는 경비정을 파견해 중국 해양조사선을 강제 퇴거시켰다. 이 사건을 전후해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최강자로 부상한 중국의 자신감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다.

    필자는 그해 7월 스위스 제네바의 한 식당에서 주제네바 일본대표부 정무참사관과 오찬을 함께 했는데, 그는 일본 조야 모두 중국의 부상이 동아시아의 불안정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일본 정치인, 외교관, 군인이 1978년 말 개혁·개방 이후 연평균 9.8%의 고도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 3위의 군사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기존 질서의 도전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100여 년간 계속된 전국시대를 끝낸 일본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과 중국대륙 침공을 시도했다. 17세기 말에는 명나라의 유장(遺將) 정성공군(鄭成功軍)을 지원해 장강(長江) 하류의 난징까지 진출했다. 1854년 페리 흑선에 의한 개항 이후 일본은 중국을 압도하는 실적을 쌓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타이완과 펑후(澎湖) 열도를 획득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불과 10년 후인 1905년에는 뤼순(旅順)과 선양(瀋陽)을 포함한 남만주 일대와 동해에서 러시아를 격파해 조선과 남사할린을 장악했으며 관동주(關東州, 지금의 다롄 일대)를 식민지로 확보했다.

    일본은 1910년대 초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됐다. 일본의 급속한 팽창에 놀란 미국은 일본 침공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을 이용해 북만주와 내몽골, 산둥성, 푸젠성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러시아혁명기인 1918년에는 동시베리아에도 출병했다.

    일본은 1945년까지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당시 일본은 독일, 미국, 소련, 영국과 함께 세계 5대 강국의 일원이었다. 일본 열도와 한반도, 타이완, 관동주, 남사할린,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을 포함한 영토는 70만㎢ 이상에 달했다. 2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1950년 6·25전쟁으로 부흥했다. 1970년대 말에는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등장했다.

    동아시아 동북부에 위치한 도서국가 일본은 인구 1억2500만 명, 국내총생산(GDP) 4조8000억 달러, 면적 38만㎢, 동서 약 3000㎞, 남북 약 5000㎞의 영토 범위를 가진 강국이다. 일본의 영토 범위는 남아시아의 아대륙(亞大陸) 국가 인도에 필적한다. 일본이 △동아시아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과 △도서국가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향후 일본의 진로를 결정하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초대국 중국에 대항해 일본이 선택 가능한 외교안보 정책은 어떤 것일까.

    A급 전범이 ‘국가 초석’

    “미국 대신 피 흘리겠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자임

    11월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중국해 문제를 거론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우선 미국과의 동맹 강화다. 아베 신조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총리 역임)와 산케이신문을 포함한 강경 민족주의 세력은 미일동맹을 20세기 초 영일동맹 이상의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베를 포함한 일본 지도부는 일본을 메이지(明治) 시대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아베는 지난해 4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을 ‘국가의 초석’으로 부르는 등 전후 질서를 부정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는 2차대전 A급 전범 용의자로,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다. 아베 신조와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이름 중 ‘신(晋)’은 메이지 시대 조슈(야마구치) 하기시(萩市) 출신 무장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의 ‘신(晋)’에서 따왔다. 아베는 종종 다카스키 신사쿠의 묘지를 참배할 정도로 그에게 깊은 애정을 보인다. 지난해 7월에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동상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아베는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요시다 쇼인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품고 있다. 아베는 2013년 8월 요시다 쇼인 신사(神社)를 방문했는데, 최근 방영된 NHK 대하사극 ‘하나모유 : 꽃, 타오르다’의 무대가 야마구치현 하기시 일대다. 아베의 우익 국수주의 성향은 이러한 가족·역사적 배경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 지도자들은 중국의 부상이 본격화한 1990년대 말부터 국가의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그들은 급격히 증강된 중국의 영향력이 한반도, 타이완을 거쳐 종국에는 일본까지 밀려들 것으로 본다. 과거 통일된 중국이 대외 팽창적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본 지도부는 13세기 2차례에 걸친 여몽(麗蒙) 연합군의 규슈 침공과 1950년대 초 공산 세력에 의한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 등 대륙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을 침공하려 한 역사적 사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따라서 급부상한 중국을 제어하려면 최강대국 미국과의 동맹 강화가 필요 불가결하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오자와 이치로 생활당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간 나오토 전 총리, 아사히신문 등 온건 민족주의 세력은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가되 한국, 중국 등 인근국과도 관계를 개선해야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유지, 나아가 일본의 발전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아시아로의 접근’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온건 민족주의 세력은 과다한 미국 의존이 특히 중국의 반발을 야기해 일본의 국익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우파의 ‘전략적 독립’論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한 2009년 이후 약 3년간 일본은 대(對)중국 접근을 추구해 미국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2009년 12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이 인솔한 140명의 대표단이 일본 중국 관계의 미래와 관련한 건곤일척의 대화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할 무렵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머리칼이 단기간에 새하얗게 변했다는 말이 워싱턴 외교가에 떠돌았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정권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2012년 9월 센카쿠 열도 국유화 조치를 취하면서 중일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한편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 지사,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다모가미 도시오 전 공군참모총장을 포함한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전략적 독립’의 흐름을 대표한다. 이들은 70년간 지속돼온 미국의 군사위성국이라는 굴종적 지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위군(自衛軍)을 보유해야 하며, 한반도 침탈은 일본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태평양전쟁은 미국과 영국이 강요한 전쟁이었다고 여긴다. 전략적 독립론은 일본의 국력이 중국에 비해 현저히 열세이며, 그 격차가 확대되는 추세를 볼 때 비현실적이다.

    ‘아시아 접근론’을 취한 민주당 정권은 2011년 3월 도호쿠(東北) 대지진과 이어진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사고 수습 실패 등으로 민심을 잃고 강경 민족주의 세력에 권력을 넘겨줬다. 권좌에 복귀한 아베 총리 등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예상대로 미국에 접근했다. 이들은 일본 단독으로는 초대국 중국에 맞설 수 없으며, 패권국 미국이 최소 20~30년은 더 현재의 위상을 유지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대미 동맹을 강화해야 일본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중국도 일본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다.

    일본의 국가 진로와 관련된 위의 3가지 흐름은 칼로 베듯 명확하게 나뉜 것은 아니다. 특정 엘리트의 생각 또한 국내 정치 환경과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다만 일본 정치인, 외교관, 군인들은 폭과 속도의 차이는 있으나 평화헌법 개정 등 전후체제를 바꿔 자위군을 보유하고, 일본의 위상을 강화하며, 중국에 대한 억지력을 높여 동아시아에서 지도적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는 견해를 같이한다. 최근에는 중국의 고도성장이 지속될 경우 어쩔 수 없이 중국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되, 중국의 성장이 정체될 경우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고 중국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약 140년 전에도 일본은 국가의 진로를 놓고 기로에 섰다. 사쓰마(가고시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 중심의 대륙 진출 우선파와 이와쿠라 도모미 중심의 내정 개혁 우선파는 권력과 국가의 진로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세이난 전쟁(1877)이 그것이다. 농민 출신 징병군을 동원한 내정 개혁파가 사무라이를 동원한 대륙 진출 우선파를 제압했다. 이후 일본은 ‘내정 개혁 후 해외 진출’이라는 점진책을 추진했다.

    러일전쟁(1904~05) 이후에도 국가 진로를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조슈(야마구치) 중심의 육군은 영국, 미국과 손잡고 만주 등 대륙으로의 진출을 주장한 반면, 사쓰마 중심의 해군은 러시아와 손잡고 해양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맞섰다. 아베 등 일본 지도부는 미국, 영국 같은 1급 해양국가들과 동맹했을 때는 국가 번영과 해외 진출이 가능했지만, 이들과 등졌을 때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을 지난 100여 년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들은 2차대전 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미국, 영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했다가 원자탄 세례라는 참사를 맞은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경제력 증강, 군사력 강화로 인해 중국 중심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가 수립될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일본 지도자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20세기 초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손을 빌려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어부지리로 중국에서 이권을 챙기려 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 저지를 자임하고 나섰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된 지금의 일본과 매우 유사하다. 외부 세력에 일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라는 점도 닮았다. 아베의 일본은 중국의 동진을 저지하는 전선에서 미국 대신 피를 흘려주겠다고 나섰다. 일본은 중국 포위 전략의 선봉을 자처하며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라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편승해 군사력 증강에 나섰다.

    나라는 힘으로 지키는 것

    아베는 지난 9월 안보법 처리를 강행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봉인(封印)을 해제했다.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더라도 제3국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대외 무력행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세계 3위 경제력과 국방비 기준 세계 4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아베의 지휘 아래 집권 자민당 정책 브레인, 외교관, 군사 전문가들이 모두 합심해 중국과 맞설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일본 지도부는 일본의 장래가 △미일동맹의 유지 및 강화 △한반도의 안정 유지 △인도, 베트남, 호주 등과의 관계 강화에 달렸다고 본다. 특히 일본열도의 목구멍을 겨누는 비수(匕首) 한반도와 복부를 겨누는 단도(短刀) 타이완의 상황을 예의주시한다.

    서울 국립묘지 현충탑에는 ‘스스로를 지키려 하지 않는 자, 그 누가 도우려 하겠는가?’라는 이탈리아 현실주의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글귀가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일본이 총력 대응에 나섰으며, 북한이 핵무장한 지금은 제비와 참새의 집이 있는 초가가 불타오르고 기둥으로는 구렁이가 기어오르는 연작처당(燕雀處堂)의 상황이다.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 하기보다 미국만 바라보거나 ‘일격도 가할 수 없는’ 군대를 갖고는 이러한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5년 조선 지원을 요청한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호러스 앨런에게 “당신은 왜 패할 나라를 지지하려 하는가. 스스로를 위해 단 일격도 가할 수 없는 나라를 위해 미국이 헛되이 개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권리를 교환했다. 그해 8월에는 영국이 제2차 영일 동맹조약을 체결해 일본 지원에 나섰다. 그로부터 석 달 후(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앨런 공사의 후임 에드윈 모건은 7일 뒤 하야시 곤스케 일본 공사에게 축하인사를 남기고 조선을 떠났다. 조선의 운명을 안타까워한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미국은 작별인사도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가장 먼저 조선을 버렸다”고 했다.

    지난 8월 말 비무장지대(DMZ) 지뢰 사건 후 북한 잠수함의 절반 이상이 모항(母港)에서 사라지고, 후방의 화력이 휴전선 부근으로 전진 배치됐을 때 우리에겐 북한에 일격을 가할 카드가 없었다. 스텔스 폭격기와 핵항모 등 미국의 무력 자산을 빌려 북한의 공세를 눌렀다. 최후의 순간, 나라는 입(외교)이 아니라 힘(군사력)으로 지키는 것이다. 국가 위기 상황에 자기 계획을 갖고 전쟁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 우방국의 도움을 바란다면,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 단 한 번도 반격하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자국민의 피를 흘려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통일외교를 추진하려면 먼저 통일할 수 있는 능력부터 갖춰야 한다.

    자위대의 북한 출병

    북한이 남침하거나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아마도 일본 내 7개 지점(Camps)에 주둔 중인 미군 병력이 한반도에 투입될 것이다. 또한 자위대가 병참 지원에 나설 것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47척의 군함 중 37척에 일본인이 탑승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은 소해(掃海, 기뢰 제거) 작전에도 투입됐다. 그때처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에서 작전하는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의 요구로 자위대가 투입될 수 있다.

    우리가 이를 제어할 방법은 없다. 전시작전권이 없는 우리의 한계다. 따라서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해양세력, 대륙세력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땅이기에 일방이 군대를 동원해 현상 변경을 추구할 경우 타방도 군대를 파견하게 돼 있다.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져 압도적 해·공군력을 갖춘 자위대가 자국 안보 불안을 이유로 12해리(약 22㎞)에 불과한 우리 영해 밖에서 진을 칠 경우 우리 땅에 진입한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이 한반도 유사시 3만여 명에 달하는 자국민 구출을 위해 자위대를 투입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 영토 진입 전에 당연히 우리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 없이 들어온다면 침략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백한 국제 규정은 없다. 일본이 인도적 상황을 근거로 우리 정부의 요구를 수용하려 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 군과 자위대가 충돌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우리 국방부는 4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안보토의(DTT)에서 미군 등의 북한 진입 문제와 관련해 국제법을 따르겠다고 합의해줬다.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일본은 유사시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도 북한 지역에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11월 초 서울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회의(SCM) 미국 수석대표인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은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과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카터 장관에게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느낌이 난다.

    우리 헌법은 한국의 영토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라고 규정하지만, 국제법은 유엔 회원국인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한다. 한미일 안보토의, 한일 국방장관 회담 때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주장하고 이와 관련한 기록을 남겼어야 했다. 휴전선이 남북 간 육상분계선이듯 북방한계선(NLL)은 서해 해상분계선으로 NLL 이북의 바다 역시 당연히 우리 영해에 속한다는 사실도 확실히 강조해야 한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10월 14일 국회에서 “부득이한 경우 우리 정부가 동의하면 일본군이 입국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1894년 동학 봉기에 겁먹은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을 빌미로 일본군이 개입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빚어진 청일전쟁이 러일전쟁의 불씨가 됐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일제 식민 지배, 한반도 분단, 6·25전쟁으로 이어진 사실도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미국은 시퀘스트(연방정부 예산 자동삭감)에 따라 2017년까지 태평양사령부 소속 3800명을 포함한 육군 4만 명을 감축하고, 2019년 추가로 3만 명을 줄일 예정이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은 역사를 통해 증명했듯 전쟁을 감수하고라도 패권경쟁국(peer competitor)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중국의 동진 저지 작전 선봉에 섰다.

    미일동맹의 목적이 아시아의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다면 중국의 전략은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초고속 경제성장의 거품이 가라앉은 중국은 이웃 일본이 아니라 독일 등 유럽 국가의 손을 잡고 산업구조 개혁에 나섰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10월 말 주로 산업협력 논의를 위해 2005년 11월 취임 이후 8번째 방중(訪中)에 나섰다. 배기가스 조작과 관련한 폴크스바겐 사태가 독일의 이러한 행보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키히토 일왕의 사망과 승계 과정은 2차대전 패전국가 일본의 종언을 고하는 일대 사건이 될 것이다.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이 모두 한반도를 자국의 핵심 이익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발버둥치는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용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지금 우리의 핵심이익(core interests)이 무엇이고, 이것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가.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

    중국 세력 침투 막는 방파제


    “미국 대신 피 흘리겠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자임

    9월 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동방경제포럼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 섬에서 미국 배우 스티븐 시걸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2015년 11월 현재까지 지속되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러시아의 전략 중심은 유럽에 위치한다. 러시아는 중국, 일본, 미국만큼 한반도의 상황 전개를 긴박하게 느끼지 않는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민감성 정도는 ①중국과 일본 ②미국 ③러시아 순인 것으로 판단된다. 러시아에 북한은 살집 많은 계륵(鷄肋)이며, 중국과 미국, 일본, 한국에 대한 하나의 카드다.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 통일과 같은 ‘결정적 사안’에 대해서는 정책을 바꿀 여지가 거의 없다. 중국과 일본의 전략 중심인 베이징(발해만)-상하이(장강 델타)-광저우(주강 델타) 축과 도쿄-오사카-후쿠오카 축은 한반도의 상황 변화에 매우 민감한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한반도의 상황 변화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해 우리의 최대 약점이라 할 에너지 및 식량 문제, 첨단기술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해 러시아와 함께 연해주, 사할린을 비롯한 동시베리아 지역을 개발해야 한다. 이는 △한국은 원료 공급지를 확보하고 △북한은 외화를 획득하고 △러시아는 중국 세력의 부식(扶植)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3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극동지역에서 북한과의 협력 증진은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는 러시아의 최첨단 기술 도입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해 북한→연해주→동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서부 러시아→유럽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협력 벨트를 구축, 유라시아를 우리의 배후지역(Hinterland)으로 만들어야 한다. 러시아는 북한과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핵무기와 우주항공기술, 미사일을 비롯한 세계 최첨단 군사 기술을 보유했고, 1억4500만 명의 인구와 세계적 규모의 천연자원을 가졌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도 러시아는 매우 중요한 나라 중 하나다. 러시아는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과 관련해 한국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 군사훈련을 문제 삼았고,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국 배치에 반대했다. 이렇듯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기에는 힘이 부치지만 마음만 먹으면 방해는 할 수 있는 나라다. 북한은 러시아에 줄 것이 거의 없고, 역량이 달리는 러시아보다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레버리지 효과를 높이려면 우선 대(對)러시아 무역을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늘리고 연해주, 아무르주, 사할린 등 극동 지역에 대한 투자를 증대해야 한다. 이는 중국의 점진적 침투에 대한 방파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북한을 국제 에너지 체제로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시베리아산 석유와 천연가스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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