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호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뤼순에서 만난 청년 안중근과 21세기 한·중·일

  • 뤼순=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11-19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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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올해로 의거 106주년을 맞았다. 중국은 안중근을 상징으로 삼아 대일항쟁기의 환난지교를 강조하며 한국을 미일동맹과 떼어놓으려 한다. 미국은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환영하면서 일본의 군사력으로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 일본은 유사시 자위대의 북한 출병도 언급했다. 안중근은 삶을 마감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의 판단을 기필코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①9월 18일 중국 랴오둥(遼東)성 뤼순(旅順)의 203고지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쇠처럼 무거웠다. 이곳은 러일전쟁 격전지다. 뤼순항이 내려다보이는 랴오둥반도의 끝.

    러시아와 일본은 1904~05년 한반도, 만주 지배권을 놓고 총칼을 겨눴다.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이 뤼순항에 주둔한 러시아 함대를 타격했다. 203고지를 공격하면서 손실이 컸으나 1905년 1월 공략에 성공했다. 석 달 후(1905년 4월) 러시아 발틱 함대가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연합함대에 격파되면서 일본이 승리한다.

    1905년 7월 러일전쟁 종전을 앞두고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한반도 지배를 보장받는다. 그러고는 대한제국을 강압해 외교권 박탈 및 통감부 설치가 골자인 을사늑약을 강제한다(1905년 11월). 이듬해 3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병탄(倂呑)에 나선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일은 1910년 8월 2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8월 14일 종전 70년 담화에서 111년 전 발발해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른 러시아와의 전쟁을 이렇게 규정했다.

    “일러전쟁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에게 용기를 줬다.”



    “양국 인민 목숨 바쳐 도왔다”

    ②뤼순은 중국에 치욕의 땅이다. 중국은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랴오둥반도와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개입해(삼국 간섭) 랴오둥반도를 청(淸)에 반환하라고 일본에 요구했고, 일본이 굴복해 일제 통치는 7개월 만에 끝난다.

    1898년 3월 독일군이 자오저우만(膠州灣)에 상륙했으며, 프랑스와 영국도 군대를 파견해 조차지(租借地)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후 랴오둥반도를 조차했다(1898년). 동아시아의 전통 격인 중국 중심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가 종지부를 찍고, 중국의 영토는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러시아는 1898년부터 러일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랴오둥반도를 지배했으며,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뤼순 일대를 관동주(關東州)라고 이름 짓고 관동도독부와 관동군을 창설했다. 일제는 1945년까지 관동주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7월 4일 서울대 특강에서 한중 간 우호관계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상반기 일본 군국주의자는 중국과 한국에 대한 야만적 침략전쟁을 강행해 한반도를 병탄하고 중국 국토의 절반을 강점해 양국이 모두 큰 고난을 겪었다. 대일(對日) 전쟁이 가장 치열할 때 양국 인민은 목숨을 바쳐 서로를 도와줬다.”



    ③안중근(1879~1910)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쓴 자전(自傳)에 이렇게 기록했다.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횡행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 만일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은 아니라, 잠깐 주춤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때가 바로 1909년 9월 13일(양력 10월 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안중근이 쏜 총탄이 겨냥한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토 히로부미다. 하얼빈역에서 거사에 성공한 후 체포돼 뤼순으로 끌려온 안중근은 ‘일본관동법원’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다 아는 일이다.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로,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뤼순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이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써 판결하는 것이 옳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다 끝을 보지 못하고 서거했다. 일제는 ‘동양 평화론’ 저술을 완성할 때까지 사형 집행을 미루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뼈는 바스라지고 두개골만 남은 백골과 뤼순감옥의 암방(暗房). 송홍근 기자



    “조선인은 일본인이던 터라…”

    북위 38도 49분, 동경 121도 15분 일대에 일제에 항거한 이들의 시신이 묻혀 있다. 뤼순 감옥에서 죽은 이들을 매장한 곳이다. 나뭇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1m 원통에 시신을 넣어 감옥 주변 야산에 묻었다. 안중근의 시신도 이 일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유골과 관은 복제한 게 아니라 실물입니다.”

    뤼순 감옥에서 유적에 대해 설명하던 중국인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말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겨우 들어갈 만한 부피의 원통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속을 드러냈다. 원통 속에서 산화하지 않고 형태를 보존한 백골은 누렇게 변했다. 뼈는 바스라지고 두개골만 남은, 오래전 죽은 이의 형상은 무참했다.

    뤼순 감옥은 러시아와 일본의 건축 방식이 뒤섞여 있다. 저항하는 중국인을 수감할 목적으로 1902년 러시아가 처음 짓고, 1907년 일본이 증축했다. 흰색 벽돌 건물은 러시아, 붉은 벽돌 건물은 일본이 지었다. 현재 명칭은 ‘旅順日俄監獄’. ‘日(일)’은 일본을, ‘俄(아)’는 러시아를 뜻한다.

    뤼순 감옥의 면적은 2만6000㎡, 감방 수는 275개다.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가 체포당해 수감됐고, 갖은 고문으로 죽어나갔다. 감옥 내부 시설을 설명하던 중국인이 일제강점기 수감자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도표 앞에서 ‘미안하다’로 해석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중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나라별로 수감자 수를 구분한 것인데, 조선인은 따로 통계를 내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은 일본인이던 터라….”

    뤼순 감옥은 7개국 2000명 넘는 사람을 동시에 수용했다. 사형집행실, 고문실, 강제노동 시설은 참혹했다. 지름 4㎝의 원뿔형 구멍만 뚫린 암방(暗房)에 갇힌 이는 어떻게 버텼을까. 원뿔형 구멍으로 들여다본 2.4㎡ 넓이의 감방에는 요강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감옥 규칙을 중대하게 위반한 자’ ‘반항, 투쟁을 하는 자’가 창(窓)도 빛도 없는 암방에 갇혔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송홍근 기자

    “志士가 교살된 곳”

    일제는 수감자를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하면서도 식사를 하루 한 끼만 제공했다. 수감 태도에 따라 식사량을 7개 등급으로 나눴는데, 중하위 등급 수감자의 하루 식사량은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이었다.

    뤼순 감옥은 중국의 항일 유적지 구실을 하고 있다. 일본에 항거하다 수감된 이들의 사연이 오롯이 남아 있다.

    위쇼우안은 1941년 뤼순 감옥에서 처형됐다. 결심공판 때 판사와 위의 문답이다. “너는 왜 17차례나 방화를 했나.” “너희가 우리 중국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너는 이미 붙잡혔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붙잡혔으니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붙잡히지 않았다면 계속 너희 일본 침략자들에게 방화했을 것이다.”

    1942년 처형된 지쇼유시안은 “너희는 왜 방화를 했는가”라는 판사의 물음에 “너희들은 왜 중국을 침략했는가”라고 되묻고는 “너희는 일본이 문명·법치국가라고 하지만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야만국가의 행위”라고 질책했다.

    뤼순 감옥에서 죽은 이의 수는 파악되지 않는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게 공식 설명이다. 1942년부터 일제가 항복할 때까지만 700명이 사형당했다. 일제가 항복한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에도 사형이 집행됐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류상근, 최흥식 등이 이곳에서 사형당했고, 신채호(1880~1936), 이회영(1867~1932) 등이 옥사했다. 안중근의 사형은 1910년 3월 26일 집행됐다.

    “이곳이 안중근 지사(志士)가 교살된 곳입니다.”

    중국인 해설자의 설명을 듣던 동행한 한국인이 말했다.

    “이곳에서 교수형을 당하셨군요.”

    그러자 해설자는 손으로 ‘아니다’라고 표시하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일본이 교살(목 졸라 죽임)했습니다. 안중근 지사는 범죄인이 아닙니다. (교수형이 아니라) 교살을 당한 겁니다.”

    患難之交 강조하는 속내

    뤼순 감옥은 ‘안중근 기념관’이나 다름없다. 안 의사의 발자취가 ‘특별하게’ 모셔져 있다. 중국인 항일지사보다 안중근이 더 강조돼 있다. 해설자는 “중국인과 한국인은 동지(同志)면서 같은 편”이라고 말했다. 감옥에 따로 마련한 ‘안중근 지사 전시관’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의 글이 적혀 있다.

    “청일전쟁 후 중국·한국 양국 국민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은 금세기 초 안중근 지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시작됐다.”

    뤼순 감옥에는 ‘위국헌신군인본분’(安重根義士遺墨-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을 비롯한 안중근의 유묵(遺墨, 살아 있을 때 남긴 글이나 그림)만 따로 모아놓은 공간도 있다.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안중근이 쓴 유언과 어머니 전상서도 기록돼 있다.

    뤼순 감옥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일본관동지방법원’의 사정도 비슷하다. 안중근이 재판받은 법정을 재현해놓았으며 거의 모든 전시물에 한자와 한글이 병기돼 있다. 옛 법원의 유적 관리는 한국계 중국인이 맡고 있다.

    1945년 8월 소련 붉은군대가 진주하면서 뤼순 감옥은 해방됐다. 랴오둥반도는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점령됐다가 1951년 중국에 반환됐다. 소련군은 1955년 철수했다.

    뤼순 감옥이 중국의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88년. 흉상이 설치되는 등 안중근이 ‘강조’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일본관동지방법원은 병원 건물로 쓰이다 2002년 유적으로 단장됐다. 일본관동지방법원 유적이 안중근에게 방점을 찍은 것도 최근이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중국이 역사를 이용해 한국을 미일동맹에서 떼어놓으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두고도 “양국 국민의 대일항쟁 역사의 공동재산”이라면서 환난지교(患難之交)를 강조한다.

    “안중근은 영웅이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뤼순은 현재 다롄(大連)시에 속한 구(區)다. 1950년 뤼순과 다롄이 뤼다(旅大)로 통합됐다가 1981년 다롄으로 개칭했다. 다롄은 1984년 13개 연해개방도시에 포함됐다. 1992년 이후 매년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8600달러로 베이징, 상하이보다 높다. 다롄의 GRDP(지역내총생산)는 1300억 달러로 북한 전체 GDP(300억 달러 추산)의 4배다.

    다롄의 도시 풍광은 다국적이다. 러시아와 일본의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다. 새로 초고층 아파트를 지을 때도 러시아 양식을 가미한다. “오랫동안 일본의 영향을 받은 터라 중국의 다른 도시보다 자동차 경적을 비롯한 소음이 적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도 회자된다. 최근에는 보자르 양식(19세기 파리에서 유행한 신고전주의 건축)의 고급 주택 건축 붐이 일었다.

    다롄에서도 부유하기로 소문난 지역에 위치한 다롄 박물관은 한국의 독립기념관을 닮았다. 거의 모든 전시물이 항일전쟁과 관련한 것이다. ‘다롄 항일방화단’을 조각한 작품 앞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학생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한 시민이 박물관에 전시된 지도를 가리키면서 딸에게 항일전쟁을 설명한다. 그에게 안중근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항일전쟁 때의 조선인 영웅이다.”

    다롄은 중국 ‘해양 굴기(堀起)’의 전초기지다. 중국은 1998년 사들인 옛 소련 퇴역 항모를 다롄에서 개조한 랴오닝함을 2012년 9월 실전배치했다. 첫 독자 건조 항공모함(길이 270m, 폭 35m 규모)도 다롄에서 제작되고 있다. 마오쩌둥의 생일인 12월 26일 진수하는 게 목표다. 이 항모에 ‘베이징’ 혹은 ‘마오쩌둥’이라는 이름을 붙이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과 중국의 국부(國父)에서 따온 ‘조지 워싱턴’과 ‘마오쩌둥’ 항모가 동중국해 패권을 두고 다툼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서해라고 부르는 바다, 황해는 동중국해의 일부다. 중국인은 황해와 발해도 구분해 말한다.

    해양 굴기의 단기 목표는 동중국해 및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강화, 중기 목표는 태평양에서의 영향력 확대다. 시진핑 주석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요구한 신형 대국관계에는 태평양에서의 패권을 나눠 갖자는 뜻이 담겼다.



    中華 질서의 복원

    중국에 주재하는 외교부 당국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러일전쟁 전후로 ‘다롄을 지배하는 자가 랴오둥반도를 지배하고, 랴오둥반도를 지배하는 자가 동아시아를 지배한다’는 말이 회자됐다. 다롄이 북쪽으로는 선양과 하얼빈으로 이어지는 만주의 관문이자 서쪽으로는 베이징과 톈진, 남쪽으로는 칭다오와 웨이하이, 동남쪽으로는 인천과 남포, 동북쪽으로는 단둥과 신의주 등 팔방(八方)을 모두 감시할 수 있는 ‘아르고스의 눈’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한반도 병탄도 일본군이 1904년 12월 러시아군이 장악한 뤼순의 203고지를 점령한 것에서 비롯했다.”

    아르고스(Argos)는 그리스 신화 속,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이다. 마틴 자크는 저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위안화가 무역 결제의 수단이 되고, 중국어가 영어 대신 공용어의 위치를 점하는, 중국이 경제 패권을 차지한 이후의 동아시아를 상상해보라”고 한다. 중국은 한국을 어떻게 다룰까.

    9월 3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항일전승 70주년 기념 열병식의 각국 정상 자리 배치에서 중화(中華)-소중화(小中華)-주변국으로 이뤄진 조공 체제를 떠올린 이들도 있다. 일본이 뤼순의 203고지를 점령한 이후의 110년은 한국이 이례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기다. 전문가들은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에 ‘중화 질서 복원’의 야망이 담겼다고 본다.

    한국 굴지 조선사에서 최고경영자로 일한 인사는 “중국 최고지도부를 수차례 만났는데, 안동도호부 이야기를 하면서 평양 일대의 유적을 중국인들이 남긴 유산으로 여겨 당황했다”고 전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후 당(唐)이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기관이다.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는 2007년 미국 의회에서 “중국 지도부가 북한의 절반가량을 중국 땅으로 생각한다. 동북공정과 백두산 주변의 대군(大軍)이 그와 무관치 않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큰누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중국 인사들의 호감은 대단했다. ‘파오다제(朴大姐, 박근혜 큰누님)’라는 애칭도 등장했다. 2013년 5월 중국에서 발매된 박 대통령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絶望鍛鍊了我)’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중국 인사들은 박 대통령의 인생을 “비극을 이겨낸 도전과 애국심의 삶”으로 규정하면서 “열병식에 참석한 데 감동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 인사들의 하나같은 반응이 의례적 수사(修辭)로 느껴지진 않았다. 박 대통령에 대한 일본의 반응과 대조적이다. 일본 우익 언론은 박 대통령을 조롱하는 듯한 기사도 서슴없이 싣는다.

    미국은 미일동맹을 핵심축으로 ‘힘의 재균형(rebalance)’에 나서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마뜩잖게 여긴다. 미국 보수주의의 판테온으로 불리는 에드윈 퓰러 헤리티지재단 설립자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유와 비(非)자유 사이에는 중립이 존재할 수 없다”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중립을 취하는 것은 중국과 조공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인사로 꼽힌다. 한국 보수진영 일각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이 친미자주에서 친중사대로 갈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다.

    백악관은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에게 용기를 줬다”는 내용이 담긴 아베 담화를 환영했다.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이 더 큰 지역적, 세계적 안보 활동을 맡은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에 한국 진출 문제와 관련해 정부는 “한국의 동의 없이 한반도에 상륙 못한다”고 강조했으나 전시작전 통제권을 가진 미국이 한국에 자위대의 상륙을 용인하라고 요청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장량(張良) 중국청년정치학원 객좌교수는 “중국 지도부가 정서적으로 한국을 옛 속국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익 엘리트들은 옛 식민지이던 한반도, 관동주, 타이완을 언젠가는 일본의 영향권 아래로 되돌려놓아야 할 곳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 일제의 식민지는 한반도와 관동주, 타이완, 화태(樺太, 사할린)다. 만주는 괴뢰정부(만주국)를 세워 지배했다.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안중근이 사형을 선고받은 옛 일본 식민지 관동주 뤼순의 일본관동지방법원. 송홍근 기자

    쉽지 않은 줄타기

    “나는 소망한다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다롄 박물관에서 중국인 아버지가 딸에게 일제의 중국 침략 역사를 설명한다. 송홍근 기자

    ‘기존 대국’ 미국과 ‘상승 대국’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견해는 크게 다섯 갈래로 나뉜다. ①미국 편승 ②중국 편승 ③자강(自强) 노선 ④현상 유지 ⑤동아시아 공동체가 그것이다.

    ①은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한미동맹+미일동맹을 활용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반도의 핀란드화(냉전 시기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를 빗댄 표현. 소련은 핀란드 내정에도 간섭했다)를 막을 수 있다는 것. 소설가 겸 평론가 복거일 씨의 견해(“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지배하려 하게 마련이다. 중국은 북한을 돕는 적국이다. 일본의 역할이 없었다면 김일성 왕조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가 대표적이다.

    드러내놓고 ②를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②는 명(明), 청(淸) 교체기의 우를 범하는 것을 우려한다.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살던 조선은 중국의 세력 전이에 대처하지 못해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중국에 ‘통일 한반도는 중립’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면서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③은 독자 노선을 통해 자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서울대 명예교수)은 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린 대원제국(몽골)과도 싸운 나라다. 동아시아 고슴도치가 돼야 한다”고 ③의 견해를 섞는다. ③을 지지하는 이들 중 강경론자는 한국의 핵무장을 주장한다.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다”는 평가를 듣는 북한이 ③의 노선을 걷는 측면이 있다.

    이웃 해치는 獨夫

    ④는 안미경중(安美經中), 친미연중(親美聯中)을 유지하는 것이다. “미국, 중국과 잘 지내면 되는 일” “미국, 중국의 구애는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윤병세 외교부 장관)이라는 견해가 ④와 유사하다. “돈은 중국에서 벌면서 손바닥은 미국과 맞춘다”는 비판이 베이징에서 나온다.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장량 중국청년정치학원 객좌교수)이다.

    ⑤는 평화와 신뢰의 새로운 지역질서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윤영관 서울대 교수(전 외교부 장관)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통일 한반도가 번영한 평화 지향 국가면서 통상 물류의 중심이 돼야 한다. 이웃 나라가 통일 한반도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보고, 동아시아에 갈등이 사라지고 안정이 정착되게 해야 한다.”

    ①~⑤에는 북한 변수가 엇갈려 들어간다. 북한을 두고도 압박을 통한 체제 붕괴만이 핵 문제 해결과 통일로 가는 답이라는 견해와 북한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자는 의견 등이 부딪친다.

    안중근이 교살된 뤼순 감옥 사형집행장의 공기는 차가웠다. 의사(義士)는 죽음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안중근은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이라는 소제목을 적어놓고 ‘동양 평화론’의 서문을 완성한 후 1장인 ‘전감’을 쓰다 죽었다. 그가 제출하려 한 ‘동양 평화에 대한 의견’은 알 수 없으나 ‘전감’에서 역사를 되새기면서 군국주의의 무모함을 경계하고 약육강식의 국제관계를 규탄한 것에 미뤄볼 때 ‘평화와 협력, 의리와 신뢰의 동양’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105년 전 안중근이 마지막으로 쓴 문장은 이러하다.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의 판단을 기필코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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