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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 마지막회

상처 입은 짐승의 절규 숨죽인 세상을 할퀴다

들국화 ‘그것만이 내 세상’

  • 글·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동아일보, CJ문화재단

상처 입은 짐승의 절규 숨죽인 세상을 할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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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시절, 신촌과 이태원의 술집에서 ‘행진’을 들으며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리고 행진, 행진하자” 맹세하던 약속을 다들 기억하고 있을까.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고 우리의 중년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상처 입은 짐승의 절규 숨죽인 세상을 할퀴다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아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이 눈물에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순한 감정이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은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인 것이다.

(…)

나는 사시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사랑하듯이, 꽃도 가을꽃을 좋아한다. 꽃치고 정답고 아름답지 아니한 꽃이 어디 있으리요마는, 나는 꽃 중에서는 가을꽃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들국화를 한층 더 사랑한다. 가을에 피는 꽃들은 어딘가 처량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을꽃치고 청초하지 않은 꽃이 어디 있는가? 코스모스가 그러하고, 들국화가 그러하다. 들국화는 특별히 신기한 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에 외로이 피어 있는 기품이 그윽하고, 봄, 여름 다 지나 가을에 피는 기개가 그윽하고, 모든 잡초와 어울려 살면서도 자기의 개성을 끝끝내 지켜나가는 그 지조가 또한 귀여운 것이다.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꽃도 가을꽃을 사랑하고, 가을꽃 중에서도 들국화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정비석의 들국화, 록밴드 들국화

상처 입은 짐승의 절규 숨죽인 세상을 할퀴다

들국화 1집 앨범(1985).

중년 독자를 위해 조금 긴 문장이지만 인용했다. 기성세대가 ‘아!’ 하고 무릎을 탁 칠 문장이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언젠가 국어책에서 읽었고 대학입시를 위해 밑줄까지 그어가며 공부하던, 정비석 선생의 수필 ‘들국화’다. 산골 출신인 내가 지천에 깔린 꽃 중 하나인 들국화가 주는 깊고 그윽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에세이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들국화를 내 마음의 꽃으로 정해버렸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그냥 들국화라 부르던 꽃들이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산국, 감국, 각시취 등 저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철이 들고 알았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도통 구별할 수 없고 그저 소박한 들국화로 족하다.

그런 들국화가 내 마음의 꽃에서 내 인생의 유일한 꽃으로 자리 굳힌 것은 전설의 밴드 ‘들국화’가 한몫했다. 들국화가 이 땅에 던진 메시지는 엄청나다. 그들의 노래는 트로트나 발라드에 익숙해 있던 한국인에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선 밴드 이름부터 그렇다. 들국화는 꽃 이름이니 당연히 여성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연약한 꽃 이름을 들고 나온 밴드는 놀랍게도 산짐승처럼 거세고 사자 갈기처럼 머리를 한껏 기른 우악스러운 수컷들의 집합이었다. 낯설기도 하거니와 밴드 구성원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이름의 들국화가 1985년 처음 음반을 발표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전문가들은 이에 더해 “들국화를 기점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이들의 등장은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보통사람들은 밴드 이름과 그들의 음색, 좌충우돌 통제되지 않는 성격,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전율한다. 가녀린 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 밴드는 일약 그 시절의 새로운 ‘아이돌’로 떠올랐다.

상처 입은 짐승의 절규 숨죽인 세상을 할퀴다

2013년 4월 서울 서교동의 한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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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동아일보, CJ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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