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호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살인의 추억’과 화성 어섬비행장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입력2015-11-20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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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간 10명의 여성이 살해당한 이 기막힌 미제 살인사건을 토대로 봉준호는 역설적으로 빼어난 걸작을 만들어냈다. 그가 그리려 한 건 사실 살인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을 뛰어넘는 시대의 혼란상이 그의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연쇄살인을 추억하기 위해 특정 장소를 일부러 가기란,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다. 포토그래퍼 김성룡과 짧은 시간 논쟁을 벌인 것은 그 때문이다.

    “아니 뭐,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맥베스’의 살인 장면이 아무리 뛰어났다 한들 그걸 연상시키려고 그의 아내가 찰스 맨슨에게 살해당한 뉴욕 아파트 주변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자 김성룡이 말했다.

    “누가 그 장소 그대로를 가자고 합니까. 그냥 화성엘 가자고요, 화성! 화성에 갈 만한 곳이 있어요! 살인을 추억할 만한 곳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무작정 화성으로 향했다.



    “이 새끼, 무조건 잡아야 해”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으로 악명 높은 곳. 2003년 봉준호가 만든 ‘살인의 추억’ 속 형사 서태윤(김상경)은 범인을 쫓다 몸과 마음이 풀처럼 되고 만다. 풀. 들판의 풀이 아니고 종이를 붙이는 끈적끈적하고 흐물흐물한 풀. 그는 경찰대학을 나온 엘리트이자 과학수사를 믿는 인물이다. 반면 화성 토박이 박두만(송강호) 형사는 범인은 본능과 직관으로 때려잡는 편이 맞다고 생각한다.

    둘이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건 성장의 DNA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던 두 사람은 어느 날, 그날도 범인의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철수했는데, 강력반 책상에 얼굴을 마주 대고 엎드려 대화를 나눈다. 봉준호의 카메라는 그런 두 사람을 책상 위에서 부감(俯瞰) 숏으로 잡는다.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에 대해 절박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영화 속 형사 둘에게 자기 동일화를 강하게 형성시킨다.

    죽기에 딱 좋은 날씨


    서태윤이 말한다. “과학수사고 뭐고 이 새끼를 무조건 잡아야 해. 무조건.” 그러자 박두만이 감탄하듯, 자조하듯 그러면서 오히려 걱정하듯 답한다. “너 참 많이 변했다.” 그리고 둘은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단서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화성으로 가는 길, 정확하게는 포토그래퍼에게 이끌려 어섬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착잡했다. 아무리 농담처럼 우리는 남자고, 게다가 빨간 옷을 안 입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달리는 차 밖으로 가뜩이나 흐린 날은 한바탕 비를 쏟아낼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인이 벌어진 날은 꼭 비가 오고 있었다지…. 영화를 생각하며 스마트폰 뮤직앱으로 유재하의 노래를 튼 것은 다소 오버였다. ‘우울한 편지’가 차 안에 흘렀다.

    생뚱맞은 대사가 포토그래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영화 ‘신세계’에서 패밀리 2인자 이중구(박성웅)가 죽기 전에 한 말이다.

    “거, 죽기에 딱 좋은 날씨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이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차 안에서 입을 다물었다. 날씨처럼, 세상처럼, 그리고 화성 연쇄살인범의 마음처럼, 그를 끈질기게 쫓던 형사들의 마음처럼 우리의 마음도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어섬비행장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에 있다. 여기에 도착하면 이곳을 왜 오자고 했는지, 여기가 왜 ‘살인의 추억’ 현장 같은 느낌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일단 평일에는 인적이 아예 없다. 괴기스러운 숲과 황량한 벌판, 누군가 숨어 있을 성싶은 갈대밭이 이어진다. 아마도 역설적으로 세상 끝에 숨고 싶은 연인이라면 어두워지기 전 둘만의 공간을 위해 이곳을 찾겠구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없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사람이다. “원래는 경비행장 활주로로 쓰던 곳이에요. 요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화보 촬영하는 데 쓰곤 해요. 일몰이 죽이거든요.” 김성룡이 셔터를 누르면서 띄엄띄엄 말을 이어간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은 죽어라 연쇄살인범을 쫓지만 결국 잡지 못한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어섬비행장은 여기가 왜 ‘살인의 추억’ 현장 같은 느낌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한다.

    “날 보러 와요”


    어섬은 ‘漁島’를 뜻한다. 고기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버려진 곳이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1994년 시화지구 간척사업 과정에서 섬이 육지로 변해버렸다. 물고기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마치 폐선처럼, 이곳에서 한때 창공을 비행하기를 꿈꾸며 희희낙락하던 비행기의 흔적들만 남아 있다. 그리고 정적. 고즈넉하고, 한편으로는 불길한 고독 같은 것이 평야 전편을 휘감는다.

    기이하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서울에서 기껏해야 두 시간이 안 걸리는 곳에서 바람을 마주하며 갑작스러운 명상(冥想)을 요구받을 수 있으리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왜 화성은 저렇게 됐을까. 화성시장은 얼마나 고민일까. 사람들이 화성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미제(未濟) 연쇄살인사건이 됐으니까.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실은 얼마나 애를 쓰고 있을까.

    영화 ‘살인의 추억’ 원전이 된 연극 ‘날 보러 와요’의 배우 권해효가 늘 하는 얘기가 있다. 그건 ‘살인의 추억’을 만든 봉준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객석에 살인자가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정말 끔찍한 공포였다.” 그래서 연극의 제목이 ‘날 보러 와요’였던 셈이다.

    그건 마치 살인자가 몰래 연극을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러 다니다가 착각해서 내뱉은 말과도 같은 것이다. 연극 보러 오세요, 라고 하던 그가 잘못해서 날 보러 오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생각만 하면 목덜미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화성 연쇄살인의 범인은 한 명일까, 두 명일까, 여러 명일까. 샌프란시스코의 조디액 킬러도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1969년의 일이니까 무려 46년 전이다. 화성 연쇄살인은 1986년에 시작됐으니 30년에 가깝다.

    여기서 화성 살인사건을 복기할 생각은 없다. 그건 사실 추억도 뭣도 아니니까. 어쩌면 깔끔하게 범인을 잡고, 처벌하고, 기억 속에서 지웠어야 되는 사건이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무려 10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그중엔 할머니도 있고 여중생도 있다. 정확한 살인 장소는 화성군 태안읍 반경 2km 이내였다. 넓은 구역이 아니다. 그런데 범인은 감쪽같이 여성들을 끌고 가서 살해하고 유기했다. 시신마다 심각하고도 엽기적인 훼손이 자행됐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은 채 공소시효 10년이 지나 사건 자체가 소멸된 상태다.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봉준호는 영화에서 살인범을 쫓는 척하면서 사실은 우리 사회 혼란상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속수무책이었다


    이 기막힌 미제 살인사건을 토대로 봉준호는 역설적으로 빼어난 걸작을 만들어냈다. 봉준호가 그리려 한 것은 사실 살인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을 뛰어넘는 시대의 혼란상이 그의 영화 속에는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는 종종, 아마도 그것은 박두만 형사 역을 맡은 송강호의 캐릭터 때문인데, 코믹한 지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이 극심하게 혼돈에 처하면 실소(失笑)가 나온다. 우습기까지 하다. 실제로 웃기는 일이 중간중간 끼어든다. ‘살인의 추억’은 그것을 여지없이 그려낸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논두렁을 지나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또 다른 시신이 발견되는 장면이다. 봉준호는 이 장면을 기막힌 롱 테이크 한 컷으로 찍는다.

    박두만은 동분서주, 도무지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우왕좌왕하기에 바쁘다. 논과 논 사이 신작로에 난 군화 발자국 같은 것에 나뭇가지를 꺾어 동그랗게 선을 그어놓은 채, 신참으로 보이는 경찰에게 더듬더듬 말한다. 이거, 이거 범인 발자국일지도 몰라. 건드리지 마. 그대로 보존해. 그러면 박두만의 등 뒤로 논두렁을 내려가던 경찰들이 차례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반장(변희봉)도 미끄러진다. 그 바쁜 와중에 박두만은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원 XX. 논두렁에 꿀물을 발랐나….”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송강호가 있는 곳으로 턴하는데 기껏 동그라미를 그려둔 범인 발자국에 차가 한 대 지나가며 바닥을 뭉갠다. 박두만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그 코믹의 도가니는 이때의 경찰 수사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혼돈의 시대였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아무것도 제자리에 있지를 못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만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형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랬던 셈이다.

    혼란의 기록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은 그렇게 죽어라 연쇄살인범을 쫓지만 결국 잡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끝내 잡지 못한 것은 1980년대의 시대악이다. 새로 부임한 형사반장(송재호)은 서태윤 형사의 확신을 믿고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하기로 한다. 그는 전화통을 붙잡고 어딘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전경 2개 중대만 지원해달라고. 그러면 범인을 체포할 수 있다고. 전화기를 내던지듯 끊고 나서 반장은 서태윤과 박두만에게 체념한 듯 말한다. “아, 모두 시위 현장에 투입됐다카이, 이거 뭐 어쩌겠노.”

    생각해보면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늘 시대를 얘기해왔다. 어떤 때는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척, 어떤 때는 한강 속 괴물의 존재를 쫓는 척, 또 어떤 때는 ‘엄마’를 등장시켜 살인 용의자로 몰린 아들을 대신해 진짜 살인범을 쫓는 척하며 사실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혼란상을 기록해왔다.

    그의 영화는 그래서 늘 정치적이지만, 그걸 꿰뚫어 보는 사람만 알게끔 만드는 영민한 재주를 선보여왔다. 빙글빙글 웃음을 숨긴 채 봉준호는 지금껏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존재들을 조롱하고 비판해온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상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몰랐다.

    영화 ‘괴물’을 복기해보면 그 같은 의미를 오프닝 장면부터 알 수 있다. 영화의 시작은 4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한강으로 투신하는 장면이다. 온통 우중충한 잿빛 하늘이 앙각(仰角)으로 넓게 펼쳐지고 남자가 뛰어드는 찰나가 후면 풀숏(full shot)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한강의 괴물이 됐을까. 괴물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이상변종의 생물체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 사회가 괴물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봉준호는 갈파한다.

    영화 ‘마더’에서는 엄마(김혜자)와 아들(원빈)이 ‘살짝’ 근친 관계처럼 비친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원빈은 마마보이처럼 보이는데, 다 큰 어른이 된 그는 여전히 엄마와 한 이불 속에서 잔다. 봉준호는 둘의 관계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걸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바깥 사람들, 아무도 믿지 마”


    살인을 추억하다 시대를 조롱하다

    봉준호 감독.

    어쨌든 적어도 그걸 나는 알고 있다는 듯, 원빈의 동네 선배 역인 진구는 김혜자 혼자 있는 집에서 웃통을 벗고 돌아다닌다. ‘나도 이래도 되는 거 아냐’ 하는 식이다. 실제로 둘의 관계도 심상치 않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식이다. 그렇게 한 공간에서 두 ‘남녀’는 오랫동안 같이 있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둠이 스며든 거실에서 진구는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연 채 김혜자에게 말한다. “이 동네는 참 이상해. 정말 이상해. 그러니까 말야 엄마. 바깥 사람들, 아무도 믿지 마.”

    별것 아닌 장면 같지만 ‘마더’는 이 부분에서 공포영화처럼 보인다. ‘살인의 추억’처럼 소름이 쫙 끼친다. 진구가 창문으로 보고 있는 동네,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리는 동네는 어쩌면 지금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저곳에서는 지금 살인이 벌어지고 있고 아무도 그 살인자가 누군지 모른다. 아니, 잘 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모르는 척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자식조차. 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가. ‘마더’가, ‘괴물’이, ‘살인의 추억’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봉준호의 닉네임은 ‘봉테일’이다. 그만큼 디테일이 뛰어나다는 애기다. 그의 영화에는 무의미한 컷이 하나도 없다. 한 컷, 한 컷이 정교한 계산 아래 준비된다. 그는 늘 구체적인 얘기를 한다. 철학, 종교, 정치, 경제의 수사학 따위는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에서 사람들은 결국 추상의 담론, 그 결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게 맞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관계가 있고 나서야 정치가 생기고 종교가 만들어졌다. 철학도 그다음이다. 그 때문에 세상의 문제는 사람들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론에서는 백날 해봐야 거기가 거기다. 해법이 없다. 봉준호의 영화가 다가서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서 명료함을 발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설국열차’는 일관성의 영화 철학을 지닌 봉준호 영화의 결정판과도 같은 작품일 수 있다. ‘설국열차’는 장 마르크 로셰트와 뱅자맹 르그랑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인상적이다 못해 충격적이고 논쟁적이며 극렬하게 이념적이다.

    세상은 멸망하고 오로지 기차 하나가 달리는데, 칸마다 계급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제인 칸은 바로 꼬리칸이다. 이곳에서는 다들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뒤섞여서 살아간다. 섹스도 용변도 자유롭지 않다. 숨도 못 쉴 만큼 콱콱 막혀 있다. 모두들 동물적 이기심만 팽배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쨌든 문제는 꼬리칸 사람들은 계속해서 탈주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커티스(크리스 에번스)다. 커티스는 사람(=민중)들을 이끌고 한 칸 한 칸 앞으로 전진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맨 앞칸, 곧 황금칸의 권력자가 배치해둔 무장군인들과 충돌을 피할 수가 없다. 혁명은 종종 피를 부른다. 세상의 변화는 어쩔 수 없이 폭력적으로 진행된다. 커티스의 얼굴과 몸으로 온통 피가 튄다. 물탱크가 있는 칸을 사이에 두고 권력의 살인부대와 맞닥뜨린 커티스 일행은 말 그대로 혈육전을 벌인다.

    세계를 실은 열차


    영화에서 열차는 곧 세상이다. 지금 세계의 축소판이다. 극단적인 계급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상한 공존의 논리가 통용된다. 황금칸의 권력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에 따르면 커티스가 이루려는 혁명도 사실은 모두 조종되고 조율된 것이다.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실제로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엔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교차한다. 처음에는 상품을 생산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실물경제가 팽창한다. 그러나 곧 과열경쟁이 이윤을 떨어뜨려 불황이 찾아온다. 그러면 돈을 쥔 손들이 투기하기 위해 몰려들어 금융팽창이 이뤄진다. 그러나 그것도 흐름이 다하면 경쟁관계에 있는 자본이 국가를 동원해 전쟁을 한다. 승리한 국가를 중심으로 새 판이 짜이고 다시 실물팽창이 이뤄진다. 실물팽창, 금융팽창, 전쟁의 순환이 계속된다.

    커티스는 마지막 순간 권력자인 윌포드와 자신의 멘토 길리엄이 사실은 이란성 쌍둥이라는 것, 두 사람이 설국열차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협잡 아닌 협잡을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이쯤 되면 더 이상 혁명은 없다. 사람들은, 커티스든 윌포드든 모두 세상의 연옥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어섬비행장에서 봉준호의 살인극, 그 연옥의 끝을 상상하기는 실로 우울한 일이다. 누가 봉준호를 이렇게까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물들게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던가. 어섬비행장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없다. 주변에도 그렇다. 여기는 정말 캠핑 할 요량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바리바리 싸오지 않는다면 쫄쫄 굶을 수 있다. 그건 야생을 즐기는 여행족 얘기다. 아베크 커플이라면 자동차 드라이빙 코스 정도로 즐기는 것이 좋다.

    다만 여기가 화성 주변이라는 것, ‘살인의 추억’ ‘따위’는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걸출한 영화작가 봉준호 ‘따위’ 역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지금의 잿빛 세상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라면 화성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의 존재를 못 드러내게 하는 이 세상 자체를.

    하여, 봉준호 감독에 대해서도 실로 고마운 마음을 가져도 된다. 그는 늘 뛰어난 영화를 만들어주니까. 이 세상을 걱정하되, 영화로 같이 있어주니까. 봉준호 같은 영화감독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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